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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두상달 장로] 꿈은 이루어졌다
두상달 장로-칠성산업 대표이사, 가정문화원 이사장
 
두상달   기사입력  2022/10/02 [08:43]

한국CCC 62년의 역사는 고 김준곤 목사(1925.3.28-2009.9.29)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1958년 한국CCC 설립하고 대학생선교를 못자리판으로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김준곤 목사의 팔순을 기념해 지난 2005년에 제자, 지인, 국내외 동역자 110여 명으로부터 글을 받아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 라는 기념문집을 만들었다. 기념문집에 원고를 주셨던 분들 중 여러 분들이 이 세상을 떠났다. 역사적인 글들을 뉴스파워에 다시 올린다. (편집자 주)

▲ 두상달 장로는 기아대책을 가장 모범적인 NGO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뉴스파워

 

 주님과 첫사랑의 진한 감동

 

저는 일제 말기, 민족의 미래가 안 보이던 암흑기에 태어났습니다. 저는 4 · 19혁명과 5 · 16군사정변의 격랑을 겪으며 국민 소득 80달러의 나라, 그 전설의 고향 같은 시절에 대학을 다녔고 토속 신앙을 믿는 가정에서 자랐기에 신앙은 물론 없었습니다. 대학생활 중반에 명동 거리를 거닐다가 친구를 따라 간곳이 CCC였습니다.

 

1층에는 생맥주집이 있었고 2층에 CCC가 있었습니다. 주일 오후 3시, 좁은 공간에 꽉 들어찬 대학생들 틈에 저도 끼게 되었습니다. 저는 김 목사님의 메시지를 들으면서 무엇인가 신비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저는 무엇인기에 홀린 것 같이 신비감을 느꼈습니다. 그 메시지는 저를 몰입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속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며 고뇌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 메시지는 심오한 인생론이었으며 철학 강의 같기도 했고 아름다운 문학 강의 같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빨려 들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맨 뒷줄에 앉았던 저는 강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일어서야만 했습니다. 저녁이면 아르바이트로 아이들을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기를 한 번, 두 번 횟수를 거듭하다가 저는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 후 마음의 고향 같은 입석수양회에서의 감동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격동의 1960년대이자 내 인생의 초반 20대에 찾아 온예 수, 완악하여 전혀 믿지 않을 것 같은 제가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철인의 말이 공감이 갈 정도로 어려웠던 시절, 자취방에서 새벽 미명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줄도 모르면서 서투른 언어로 내 가슴 깊은 곳, 중심의 중심에서 터져 나오는 진실 된 기도를 드리며 눈물짓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는 그때가 주님과의 첫사랑의 감격이었습니다.

 

타성에 젖어 심령이 메마를 때 주님과 첫사랑의 진한 감동을 생각하면 지금도 목이 메이고 눈가를 적시곤 합니다. 주님과의 풋풋한 첫사랑의 감동입니다. 질그릇 같던 저를 변화시켜 구원의 감격과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평안 속에서 살게 하시고, 때때로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눈가를 적시게 하시는 주님! 오늘도 어지럽고 메마른 땅에서 생명의 잔잔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내 곤한 영혼을 소생케 하시는 내 생의 전부이신 오직 한 이름 예수 그리스도! 그 안에 희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행동이 있고, 삶과 젊음을 불태우며 사랑을 배우려는 정열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해서 김 목사님과 관계를 맺고 큰사랑을 받으며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2의 이스라엘 성민 코리아!

 

“지구상에 일찍이 완전한 기독교 국가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한 민족쯤은 단 한번만이라도 그들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그리스도께 바쳐지고 쓰여질 수 있다면….”제2의 이스라엘성민코리아!

 

그것은 김준곤 목사님의 꿈이요, 상이었습니다. 그것은 피 맺힌 절규요,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또 한우리 모두의 소망이고 바람이었습니다. 민족을 바라보며 이 일을 위하여 가장 많이 우시는 분, 그러기에 저도 목사님을 따라다니며 울고 웃으며 젊음과 삶을 불태웠습니다.

 

1970년 CCC는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민족 복음화의 기치를 올렸고 한국 최대의 기독교 집회인 엑스플로 ‘74와 수많은 대소형 집회를 통하여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의 불을 지폈습니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오늘의 민족복음화, 내일의 세계 복음화”

 

“농어촌 59,000개 자연부락복음화”

 

휴일이나 퇴근시간을 이용해 저는 이름 모를 농어촌 산골을 누비고 핵심 요원들을 찾아다니며 동원하였습니다. 민족의 입체적 구원을 위한 기도와 간절한 염원이 성령의 바람으로 누룩처럼 이 땅에 번져 갔습니다. 1971년 대전 충무체육관 한국 최초의 1만 명 집회에 이 은1972년 춘천 성시화 대회, 한 도시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꿈을 가지고 모델로 춘천성시화운동이 태동되기도 했습니다. 이어 수많은 민족복음화요원훈련이 이어졌고 4영리, LTC, LTI 등을 통해 전도의 불을 계속 지펴갔습니다. 또 수많은 크고 작은 집회들이 이어 졌습니다.

 

엑스플로'74낙수

 

1972년 달라스 카튼 볼에서 열렸던 엑스플로'72, 한국에서도 나사렛형제들을 포함하여 60여 명이 참가했습니다. 그것은 사상 최대의 기독교 집회로 8만 명이 모인 대형 집회였습니다. 그 규모에 우리는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 집회에서 목사님은 더욱 놀라운 계획을 발표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사고를 치셨습니다. 2년 후 한국에서 30만 명을 동시에 합숙시키는 집회를 하겠다고! 그것은 돈키호테적 발상이었습니다. 공상처럼 들렸고 꿈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30만 명을 분산, 동시에 합숙 훈련시켰고 밤에는 100만 이상 모이는 집회가 여의도광장에서 계속 되었습니다. 엑스플로'74는 이 땅에 전도 폭발, 성령의 폭발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전도 훈련이 번져갔고 전도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민족복음화의 기도가 교회마다 성도들의 입가에 유행처럼 번졌고, 한국은 세계 역사상 그 유례가 없는 영적 부흥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0만 선교사 파송의 꿈과 결단이 있었습니다.

 

숙소로 여의도에 일천여 개의 텐트촌을 만들었고 100여 개 초 · 중 · 고교를 빌렸습니다. 여의도 내는 물론 영등포, 마포, 용산까지의 학교를 모두 빌렸습니다. 식시라야 새우젓에 단무지 그리고 주먹밥 그 배식과 숙소 배정을 책임졌던 저는 진행본부장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동역자들과 그때 육탄으로 봉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회 첫날이 문제였는데 밀려오는 군중 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모두가 여의도에 가까운 장소를 달리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가장 괴롭히고 힘들게 하셨던 분들이 목사님들이고 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가 돌보는 양들을 데리고 왔으니 좀 더 편리한 곳에 그들을 머물게 하고 싶은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한번 배치된 질서를 무너뜨릴 수가 없었습니다.

 

대회 첫날 구름 떼처럼 밀려드는 군중들 속에서 인간의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상황 앞에 두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목 놓아 통곡했습니다. 그렇게 울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난리 속에 숙소 배정이 끝났으나 저녁 식사가 문제였습니다. 첫 날 저녁은 빵으로 준비했는데 콘티 빵이었습니다 .숙소별로 빵을 배분했는데 빵이 오지 않았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본부까지 달려온 각 캠퍼스의 총순장들이 “형님, 동원하라고 해서 동원해 왔는데…. 지치고 배고파 쓰러져 누워 있는데 볼 수가 없습니다.”라고 울먹이며 항의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각 학교별로 배당된 빵들을 운전수들이 빼돌려 팔아먹고 배달을 안 한 것이었습니다. 조금 양심적인 사람들은 반 또는 1/3을 배달했습니다. 밤 12시가 넘어 김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질서가 조금 잡혔소?”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잠자리에 들어 조용한데 날이 새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습니다.”

 

둘째 날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하여 사망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비가 많이 내려 천막촌이 완전히 물바다가 되어 난리를 치루기도 했습니다. 이런저런 숱한 사연 사연들 속에서도 대회는 진행되었습니다. 엑스플로'74의 뒷이야기만을 기록해도 한 권의 책이 되고 40여 년 이상을 김준곤 목사님을 따라다닌 뒷이야기들은 더욱 더 길고 긴 이야기로 나올 것입니다.

 

고백하기는 저의 생애에 주님과 CCC와 선교가 빠지면 제로입니다. 목사님으로부터 배운 신앙의 뿌리와 영성이 제 삶의 중요한 골격을 이루었고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제가 여러 선교단체를 순수한 미음으로 섬길 수 있는 원천이 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때 동역했던 믿음의 형제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청춘 티 없는 진솔한 마음으로 삶과 젊음을 바쳐 일하다가 죽어도 좋다는 열화와 같은 마음으로 집회 현장들을 누렸습니다. 제 인생 후반전은 변함없이 행동하는 신앙인,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한 부분을 담당하며 달려가려 합니다. 주여! 이 땅에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땅이 거룩한 도성이 되게 하옵소서.

 

두상달 장로는 1939년 전북 김제군 광활면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경제과를 졸업했으며, 십대선교회(YFC)·기아대책․중동선교회 이사장,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및 국가조찬기도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주)칠성산업 대표이사와 (주)에스디 대표이사로 있다. 또한 현 반포교회 원로장로, 가정문화원·인간개발연구원 이사장, 중동선교회 명예이사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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