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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영 교수 “이웃종교와 적극적으로 대화해야”
감리회 총회 이단대책위원회에서 이단성 조사 받고 "혐의 없음" 받은 손원영 교수 인터뷰
 
심자득   기사입력  2022/08/20 [08:42]

 

[심자득 기자, 황기수 기자]

 

지난 11일 감리회 총회 이단대책위원회(위원장 김정석 감독/이하 이대위)에서 이단성을 조사받은 손원영 목사를 17일 평화의교회(박경양 목사/서울남연회 구로지방회)에서 만나 당시 이단대책위원회에서 조사받은 내용을 중심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위원들이 어떤 질의를 했고 손 교수는 어떻게 답변했는지 당사자의 입장을 다시 한번 듣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대위의 11일 모임에서 손원영 교수가 집중적으로 받은 질문은 열린선원에서 스님들에게 전한 설교 예수보살과 육바라밀에 대한 것이었는데 우선 설교제목부터 지적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보살로 표현한 것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또 설교 내용에서 손 교수가 여섯 가지로 나눠 예수님은 六波羅蜜을 실천한 보살이라고 한 것을 두고 일부 위원들은 십자가 대속을 부인한 것이므로 이단성이 충분하다고 지적했습니다. 동시에 다섯 번 정독했으나 이단성을 느끼지 못했고 불교 신자들에게 예수를 전하는 좋은 설교라며 손 교수를 향해 휼륭한 감리교회 목사라고 느꼈다는 평가를 내린 위원도 있었습니다. 또한 타종교인들에게 예수를 전하기 위해 사용한 신학자의 언어를 섣불리 이단이라고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된다는 신중론을 펼친 위원들도 있었습니다.

▲ 감리회 총회 이단대책위원회에서 이단성 조사 받고 "혐의 없음" 받은 손원영 교수     © 당당뉴스 캡처

 

UCLA의 역사학자인 옥성득 교수는 개인적으로 매년 그 해의 가장 좋은 설교를 1편씩 선정하는데 그가 손원영 교수의 예수보살 육바라밀설교를 ‘2018년 최고의 설교에 선정했다는 점을 참고해 본다면, 같은 설교를 두고 평가가 이렇게 극과 극으로 갈리기도 힘들어 보입니다. 독자들의 판단을 위해 하단에 손원영 교수의 설교문 전문을 게시했습니다.

 

지난 11일 이대위는 손교수를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고 보살’, ‘육바라밀등의 표현이나 예수님은 六波羅蜜을 실천한 보살과 같은 표현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되지 않도록 다짐받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동시에 일사부재리 원칙을 적용해 같은 내용으로 더 이상 심사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번 인터뷰 자리에 손원영교수불법파면시민대책위원회상임대표 박경양 목사가 동석해서 보충설명을 하거나 대책위원회 입장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인터뷰는 11일 이대위 모임에서 집중적으로 거론됐던 문제에 국한해 진행했습니다. 그에 따라 기사의 정리도 그와 같은 순서로 했음을 밝힙니다.

 

열린선원에서 전한 설교에 대하여

 

기자 - 지난 811() 이단대책위원회 회의에서 집중적으로 거론했던 문제를 중심으로 질문 드리겠습니다. 그것이 상호의 이해를 위해 도움이 될 듯 합니다. 2018129일 열린선원에서 전한 설교 제목을 예수보살과 육바라밀로 정했습니다. 내용을 읽기 전에 제목에서 일부 기독교인들에게는 낯설고 도전적인 표현으로 받아들여질 듯합니다. 물론 당시 회중들이 불교 신자들 위주였다는 상황은 이해합니다만, 어떤 의도와 목적에서 제목을 그렇게 정하셨는지요?

 

손원영 - 우선, 열린선원에 가게 된 배경에 대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2018128, 성탄절을 앞두고 있을 때 열린선원 법현 스님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평소 일면식 없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인즉, “평소 종교화합에 관심이 많다 곧 성탄절이 다가오는데 절에서 예수님 오신 날 축하 법회를 하려고 한다. 우리가 예수를 모르니 그날 와서 아기 예수에 대해 말씀해 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절에서 설교한 적이 없어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안수받을 때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아골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라고 불렀던 찬송가를 생각하면서 거절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신에 그곳이 법당이든 군대든 그 어느 곳이든 설교를 요청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야 한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로서 설교를 거절할 명분이 없다고 여겨 예수를 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초대를 수락했습니다. 마침 그날이 주일이었던지라 저와 함께 주일에 예배드리는 가나안 교인’ 10여 명이 선원 모임에 함께 참여했습니다.

 

스님들에게 어떻게 예수를 전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스님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방식으로 예수님을 전하기 위한 최고의 언어를 찾다가 보살개념을 도입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은 최고의 궁극적 존재이거든요. 그리고 스님들에게는 수행이 최고의 가치인 만큼 예수님을 모범으로 삼아 수행하면, 그것이 성탄절을 맞는 의미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취지였죠.

 

기자 - 11일 회의에 참석했던 한 위원은 당시 시종일관 참석하여 기사를 썼던 기자에게 기사제목에 대한 항의와 함께 장문의 글을 보내 왔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내용의 주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우리의 구세주이신 나사렛 예수님은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위해 보내심을 받아 온전히 대속사역을 감당하신 것이지 六波羅蜜을 실천한 보살이라 할 수 없다는 말에도 손원영 교수는 동의하고, 내가 지적한 예수님은 六波羅蜜을 실천한 보살이란 표현은 잘못 되었다는 말도 시인하고 수정하여 다시는 그와 같은 표현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 교수님의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해 줄 수 있을까요?

 

손원영 - 심사에서 한 위원이 예수님이 육바라밀을 실천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닌데 왜 자꾸 육바라밀을 실천하기 위해 왔다고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육바라밀의 실천을 통해 구원받게 하시려고 온 것은 당연히 아니라고 답변드렸는데, 그 목사님께서는 저의 답변을 잘 이해하지 못하신 듯합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육바라밀을 실천하러 오신 것은 아니니까요. 제가 그렇게 표현한 것은 불자들에게 예수님의 활동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렇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특히 제가 바라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수행을 강조하는 불교인들에게 수행자의 최고 모범이 다름 아닌 예수님이라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교리적 선언에서도 예수님에 대하여 고백하기를, “우리의 스승이 되시고 모범이 되시는분으로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수행을 강조하는 불교인들에게 당신들이 생각하는 최고의 수행 모범이 바로 예수님이시니, 예수님을 수행의 모범으로 삼자라고 권한 것입니다. ‘왜 그가 최고의 모범이냐면 당신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육바라밀을 역사적 인물 중에 그 어떤 사람도 온전히 이룬 분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벽하게 이루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라고 육바라밀을 하나씩 들어 설명하면서 설교한 것입니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는 제가 예수를 모범으로 삼으라는 것이 어쩌면 불쾌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기자 결국 예수님을 자랑하고 소개한 것이네요.

 

손원영 그렇죠. 심사위원이 그것만 오해를 푸시면 전혀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육바라밀을 실천하기 위해 오신 건 당연히 아니니까요. 하지만, 저는 불교인들 입장을 고려해 그렇게 설명한 것인데, 위원 중에 그것을 잘 이해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아 답답합니다. 김정석 감독님도 심사에서 표현하셨듯이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잖습니까?? 하지만 그들은 수행의 종교이니, 이 둘 사이의 만남은 엄밀하게 말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건 하나님의 은총에 맡겨두고, 우리가 최선을 다해 대화하려다가 소통이 잘 안 되어 이처럼 제가 오해를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 사과를 한 것입니다. 앞으로 더 신중하게 접근하겠다고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는 말과 예수님은 수행자다라는 말은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다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날 제가 확실하게 고백했듯이 저 역시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 표현은 신앙고백의 핵심이에요. 반면에, ‘예수는 수행자다라는 표현은 일종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구제와 치유사역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역활동을 불교인들의 용어를 빌려 육바라밀을 실천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덧붙여 말씀드린다면, 유교인들에게 예수를 전할 때는 유교적 표현으로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과거 윤성범 교수님이 말씀하셨고 또 김선도 감독님도 설교에서 사용하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효자 기독론이 좋은 예입니다. 윤 교수님은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했다는 점에서 예수야말로 효자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선교를 위해서는 그 대상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학에서는 종종 보유론이나 혹은 보불론을 이야기합니다. 유교든 불교든 아니면 어떤 철학이 되었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의 눈으로 볼 때, 그들에게는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빠져있잖아요? 복음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그것을 완성하자는 취지입니다. 그것이 보유론이고 보불론입니다. 유교학자 탁사 최병헌 목사님이 복음을 통해 유교를 완성하신 것처럼, 저도 그런 맥락에서 보불론을 설파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으로 세상의 종교나 철학을 완성해 간다.’는 의미로 서로 대화의 중요성을 말한 것입니다.

 

무속인 김금화 씨의 죽음에 대한 표현 

 

 

기자 - 기독교가 배타주의인 것을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몇몇 위원들이 주장한 대로 작두를 타는 국내 무속인 1인자에게 소천이니 소명이니 하는 말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금화 씨의 죽음에 대해 쓴 교수님의 글이 적절치 않다고 반박하며 거기에 대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의향이 없냐고 물었던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어서 김금화 씨도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도 이어졌습니다.

11일 심사에서 어느 위원이 성철 스님도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느냐?”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교수님이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답했고, 그러자 신학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라도 목회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구원받지 못했다고 답해야 하는 거 아니냐?” 라는 위원들의 질타가 이어졌습니다. 당시 교수님이 설명하긴 했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다시 한번 교수님의 입장을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손원영 - 김금화씨와 개인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단순히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 표현이었습니다. 죽음을 맞이한 분에 대해 같은 종교인으로서 정중히 예를 표한 것입니다. 그리고 심사위원들에게 한 인간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분이 예수 안 믿었으니 지옥 갔다느니 아니면 천국에 갔다느니 등등으로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질문은 저에게 다소 어색하게 들립니다. 차원이 좀 다르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사람이면 누구든지 소명을 받아 이 땅에 태어나고, 또 그것을 이루면 돌아가는 것이 이치가 아닙니까라고 말하면서, 심지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몰랐던 악한 왕 느브갓네살 왕도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지 않았느냐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감독님이 목회자 입장에서 구원받지 못했다고 답해야 하지 않느냐고 야단치셨는데, 그 취지는 저도 공감이 갑니다.

어쨌튼, 그런 질문에 대해 저는 좀 유치하지만 이렇게 되묻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은 구원받았습니까?’라구요. 사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로마서 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믿은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이 아닌 하나님이었고, 또 예수님이 없던 시절의 사람들은 양심에 의해 구원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구원 문제는 내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이라는 취지였습니다. 김금화 씨가 비록 무당이지만 그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어떤 실낱같은 작은 믿음을 가졌다면, 그리고 그가 양심에 따라 살았다면, 하나님이 그것에 걸맞게 알아서 어떻게 하셨을 것이란 말이죠. 우리가 그를 단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 침범으로서 좀 경계해야 하지 않느냐는 취지였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WCC의 핵심적인 신학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입니다. 그 의미는 선교의 주체는 선교사 개인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교사나 교회에 의해 소개되고 증언되기 이전에 태초부터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역사 속에서 증언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 의미는 무슨 뜻일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어디에나 계신 그 하나님의 모든 활동은 우리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활동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 활동을 인간의 인식 한계 속에 가둬선 안 됩니다. 대상이 무엇이 되든 하나님은 그 속에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역사하고 계시다고 우리가 믿는 것 아닙니까. 성 어거스틴의 고백론에 보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 천지 밖으로 나오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속에 계셨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면서도 만물 속에 신비하게 내재해 계시는 분이시죠.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구원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심사에서도 그런 표현을 썼는데, ‘하나님은 선교사의 등에 업혀 우리나라에 수입된 분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제 말이 아니라 우리나라 초창기 선교사들의 말입니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 조선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와서 보니 이미 조선 땅에 그리고 조선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믿고 있더라는 고백입니다. 물론 성서의 표현대로는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 한국 사람들이 모두 초월자, 궁극적 하나님 이해를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살려는 진선미를 추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헐버트 선교사는 오히려 단군신화를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초창기 선교사들이 우리 한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존중하면서 선교 활동을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Missio Dei 신학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역사인 거죠. 그런 점에서 우리의 생각에 하나님을 가두고, 신비한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려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위원들의 질문에 답했던 것입니다.

 

 

타종교와의 대화

  

 

기자 - 오직 예수를 통한 구원만을 강조하는 기독교 진리에서 타종교간의 대화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해당 종교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는 바탕에서 상호 존중의 자세가 필요한데 그런 면에서 확실히 기독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전도인의 자세가 참으로 필요한 시대입니다. 어쩔 수 없이 전하는 자의 몫이라고 해야 할까요?

 

손원영 -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교리에 대한 생각도 다르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초대교회의 사도신경을 현대에서 그대로 사용할 때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다양한 신앙고백들이 새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어, 우리 감리교회도 사도신경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교리적 선언도 고백하고, 또 그것도 새 시대에 맞게 새롭게 수정하지 않았습니까? 특히, 구원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도 시대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에서의 대표적인 구원사건은 출애굽이잖습니까? 즉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켜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의 핵심적인 구원의 의미는 해방입니다. 그런데 이대위의 목사님들을 포함해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오직 죽어서 내세에 가는 것으로만, 천국에 가느냐 못가느냐의 문제로 생각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원초적으로 따지면 예수 믿어 구원받았다는 것은 죄사함’(십자가의 은혜로 용서받음)의 의미가 깊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정작 예수님이 선포하신 구원의 핵심 메시지는 내세 천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중세의 이원론적인 구원관에 갇혀서 구원을 이해하며, “김금화씨가 죽어서 구원받았느냐 못받았느냐?”라고 묻습니다. 그것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 구원의 개념을 이원론적인 내세관으로 좁혀서 말하는 것이 제게는 불편하였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보다 큰 관심을 둘 뿐입니다.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떤 신학자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인 양과 염소로 나누는 것을 들어 내세의 구원 의미를 더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점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은, 통상 기독교 교리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예수 믿으면 천국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가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 25장은 작은 소자에게 물 한 모금 주고 또 감옥에 갇혀 있는 자를 위해 찾아갔느냐와 같은 실천에 초점을 두고 양과 염소로 나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리와의 엄청난 모순입니다. 성경이 맞습니까? 교리가 맞습니까? 사실, 성경 안에 구원이 여러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예컨대, 요한복음에 보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고 썩지 않으면 죽는다고 했는데, 그건 이웃에게 유익한 존재가 됐을 때 풍성한 삶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상징인 거죠. 그런 면에서 교리를 시대에 맞는 표현으로 끊임없이 설명하고, 또 더 성경에 근거하여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이원론적인 내세 구원의 의미만으로 구원을 축소시켜서는 안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말에는 선행도 중요한 의미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미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믿음과 행함은 결코 둘이 아닙니다. 마치 손바닥의 양면과 같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으면 선행을 하고, 또 선행은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책에 보면, ‘양파 한뿌리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자세히 설명할 시간은 없지만, 그 이야기의 핵심은 악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베푼 양파 한뿌리조차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핑계로 삼아 그 악한 자를 구원하시려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말하자면,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듯이, 작은 소자에게 물 한 모금 주는 실천만 했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구실로 삼아 그를 구원하시려 한다는 말씀입니다.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을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기자 - 심사에서 자신은 종교다원주의자가 아니고 평화주의자라고 했습니다.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요?

 

손원영 저는 종교다원주의자가 아니라 종교평화주의자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제가 보기에 종교다원주의는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많은 사상입니다. 주로 서구의 신학자들이 연구실에서 만들어낸 것이죠. 즉 종교다원주의는 일반적으로 추상적인 종교이론을 안락한 연구실에서 비교 검토하여, 세상의 모든 종교가 마치 궁극적으로 다 똑같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 똑같나요? 오히려 종교는 철저히 모두 다 다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종교는 낯선 타자로서, 같음(sameness)이 아니라 다름(difference)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저는 평화학자들이 강조하듯이, 그런 타자의 다름을 전제로 인류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위험부담을 무릎쓰고 그들을 환대(hospitality)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기독교 영성과 선교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누가복음 24장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처럼 말이죠. 그들이 낯선 타자인 나그네를 환대했을 때, 결국 그들의 영안이 열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결국 종교평화주의자는 연구실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낯선 타자를 환대하고 또 그들과 허심탄회하게 대화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제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에큐메니칼 운동의 핵심 기구인 WCC는 종교다원주의를 따르지 않습니다. 다만 다종교 상황에서 어떻게 기독교를 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핵심 과제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WCC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들이 그렇게 WCC가 종교다원주의라고 폄훼하고 공격합니다. 그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잘못된 일입니다. 특히 오늘 저는 WCC의 중요한 사역 중 하나인 종교 간 대화가 한국교회에 절실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WCC의 사역은 국제선교협의회(IMC)를 중심으로 한 종교 간의 대화,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에서 교회들의 예배와 예전의 통일, 그리고 생활과 봉사(Life and Work)의 사회정의 등 세 가지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종교 간의 대화 문제를 소홀히 했습니다. 그것이 WCC의 핵심인데 말이죠. 이웃 종교는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알 필요가 있고, 또 이웃으로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싸우니까요. 배울 건 배우고 거부할 건 거부하면서 함께 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 감리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핵심적인 교단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우리 감리교회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빨리 그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의 신학 사상은 WCC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리 감리교회는 신학과 목회를 위해 교리와 장정에서 신학지침 다섯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회는 성서, 전통, 경험, 이성이 네 가지를 말하지만, 우리 한국 감리교회는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해서, 다섯 번째로 전통문화를 존중할 것을 포함시켰습니다. 여기서 전통문화란 폴 틸리히의 종교이해를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곧 전통종교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것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것을 말하면 이단이라고 정죄하려고 하는 형국입니다.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장정을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통합하여 하나의 한국감리교회로 독립하면서 내걸었던 세 가지 모토는 우리 교회가 이웃 종교를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세 가지 모토는 진정한 기독교회진정한 감리교회진정한 한국교회라는 것인데, 그 중 진정한 한국교회라는 모토는 우리 교회가 한국의 전통문화와 잘 호흡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교회를 창조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방향으로 목회하면서 신학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기자 - 일각에서 이 사건을 두고 제2의 변선환 재판으로 비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손교수님의 행동이 타종교와의 대화와 공존을 주장했던 변선환과 오버랩 됐기 때문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동석한 박경양 목사가 먼저 했다-기자주)

 

박경양- ·홍 사건은 신학을 교단 정치로 길들이려 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이단재판을 통해서 감리회에서 부흥사를 중심으로 하는 감리회의 극우세력이 교권을 쟁취했습니다. 당시 이들은 변선환 교수에 대해서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 홍정수 교수에 대해서는 예수피 개피라고 말했다는 선정적인 언어로 신자를 선동했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보살과 육바라밀이라는 설교제목으로 손교수를 이단으로 규정하려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변·홍사건의 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변·홍 당시와는 환경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들을 알아야 합니다. ·홍 당시에는 그들의 공격에 반박할 수 있는 매체와 방법이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돈을 동원해 일간지 광고하고 전국으로 책자와 전단을 쁘리며 자신들의 주장을 홍보했습니다. 하지만, ·홍쪽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알릴 방법이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누구든지 SNS를 통해서 독자와 직접 소통할 수 있고, 또 언론의 환경도 다릅니다. 또 감리회에서 해결이 안 되면 사회법정에 호소해 분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변·홍 사건처럼 그들이 자신의 뜻을 쉽게 관철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이들은 예수보살이라는 용어를 문제 삼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이방선교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행위입니다. 바울도 이방인 선교를 위해 로마에서 이름 없는 신으로 하나님을 소개했습니다. 초기 조선을 찾은 선교사들도 한국인이 하늘에 천지를 좌우하는 신이 있고, 그 신이 인간의 생사화복을 좌우한다고 믿고 있음을 알고, 기독교가 전하는 신이 바로 한국인이 믿는 하늘의 신인 상제(上帝) 즉 하나님이라고 설명한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보살이라는 손 교수의 표현은 불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당신들이 믿는 보살은 모든 인류가 다 구원받을 때까지 모두가 다 고통에서 해방되어 부처가 될 때까지 나 스스로는 부처가 되는 길을 포기하며 중생의 해탈을 돕는 존재인데 예수를 불교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보살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엇이 문제라는 것입니까?

 

이번 손 교수 문제의 핵심은 이방선교에 관한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든 기독교 선교는 선교지의 문화와 풍습, 그리고 습관과 어우러지며 이루어졌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선교할지를 고민하다가 자신이 전하려는 신이 당신들이 믿고 있는 이름 없는 신이라고 말한 것, 또 조선 초기 선교사들이 기독교가 믿는 GOD를 우리 조상들이 믿던 상제 즉 하늘의 신인 하느님으로 표현한 것도 이방인 선교의 효율성을 고려한 것입니다. 손 교수의 주장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특히 감리회는 1930년에 기독교대한감리회를 설립하는 총회에서 우리는 고금을 통하여 전래한 바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서 예배에나 치리에나 규칙에 잘 이용하되 한국 문화와 풍속과 습관에 조화되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며 감리회는 한국적 교회임을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교리적 선언에서 우리의 입회조건은 신학적보다 도덕적이요, 신령적이라며 누구든지 그의 품격과 행위가 참된 경건과 부합되기만 하면 개인 신자의 충분한 신앙자유를 옳게 인정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손 교수에 대해 이단 운운하는 것은 감리회의 설립 정신은 물론 감리회의 신앙고백에 반하는 것이고, 선교의 중추인 이방선교를 반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손원영 - 변선환 교수를 옹호하거나 반대하거나를 떠나서 저는 어느 신학자가 변선환 교수의 종교재판이 한국감리교회 역사를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눴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큰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독교교육학자이고 또 선교에 관심이 많은 목사로서 그 당시처럼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종교다원주의에 대해 논쟁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에 이웃 종교인들에게, 그리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복음을 잘 전할까 하는 선교학적 관점, 그리고 한스 큉이란 신학자가 종교평화 없이 세계 평화 없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종교 간에 갈등이 많은 이 땅에 종교평화라는 접근과 대화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종교다원주의자가 아니라 종교평화주의자임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웨슬리가 시작한 감리교회의 모토는 다름 아닌 세계는 나의 교구다가 아닙니까? ‘세계에는 서로 다른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WCC도 강조하듯이, 21세기의 선교는 다른 종교와 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WCC의 기본 원칙이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 감리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핵심교단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감리교회는 이웃 종교와 대화를 소홀히 한 채 심지어 그것을 이단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것을 반성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바라기는 이번 저의 사건을 통해 우리 감리교회가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고 외치는 웨슬리 정신과 장정으로 돌아가 지난 일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이웃 종교와 대화하는 일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면 좋겠다는 희망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당시 이단대책위원회 모임에 참석했던 한 위원께서 지난 18일 감리회 홈페이지 게시판 <소식과 나눔>손원영목사의 언론 보도는 왜곡 되었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면서 언론에 손원영 교수가 자의적 해석으로 기자와 인터뷰를 통해 자기를 이단이 아니다 라고 인정을 해 주었다고 하므로 이를 언론이 왜곡 보도를 하게 된 것이다.”, “이를 시정하기 위해 기사를 쓴 기자들에게 메일을 보내 시정을 요청했으나 묵살 당하였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두 사실이 아님을 밝힙니다. 기자는 당시 손원영 교수와 어떠한 인터뷰도 한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손교수가 “(이대위가)자기를 이단이 아니라고 인정했다라는 말을 기자들에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울러 위원께서 본 기자에게 메일로 기사내용 시정을 요청한 사실도 없습니다. '소식과나눔'에 올렸던 바로 그 자신의 의견을 기자에게 카톡으로 주시며 오히려 '기사화 말아달라, 참고만 하라'고 하셨을 뿐임을 밝힙니다. -기자 주)

 

예수보살과 육바라밀

 


손원영 (마지종교대화가나안교회)

2018.12.09. 열린선원/마지종교대화가나안교회 성탄절 공동축하

 

1.

오늘 성탄절 축하행사를 열린선원에서 저희 종교대화가나안교회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게 되어 너무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할렐루야! 제 평생 처음으로 절에 와서 성탄절 축하행사를 갖게 되었는데, 얼마나 가슴이 설레는지 모르겠습니다. 초대해 주신 법현 스님과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스님한테 절에서 성탄절 행사를 갖는다는 이야기를 처음에 듣고 참 놀라웠습니다. 교회에서는 부처님 오신 날에 부처님 오신 것을 축하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역시 불교는 기독교보다 훨씬 더 아량이 많고 성숙한 종교가 아닌가 싶어 큰 부러움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법현 스님에게서 열린선원이 올해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행사를 갖는 것이 아니라, 이미 13 년 전부터 매년 이맘 때 크리스마스 파티를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또 한 번 크게 놀랐습니다. 역시 불교구나!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혹 이해를 돕기 위해 간략히 제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저는 이 부근에 있는 작은 대학의 신학 교수로 있다가 작년 초 해직된 손원영입니다. 지난 20161월 중순 경 경상북도 김천에 있는 개운사라는 절에 한 중년의 개신교 남자 신자가 밤늦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불상은 우상이라면서 모두 훼손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비구니스님인 주지스님에게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고 말하면서 위협적인 행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은 스님은 오랫동안 정신치료를 받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언론을 통해 접하고 한 기독교 신자로서 너무나 부끄럽고 또 불자들에게 너무나 죄송스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개운사 스님과 또 불자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으로 제 페이스북에 포스팅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면 진정성이 떨어지니까, 훼손된 불당을 회복하기 위한 모금을 친구들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제 인생을 이렇게 바꿔놓았습니다. 제 모금활동을 지켜본 저희 대학당국에서는 저를 종교재판에 회부하였고, 저는 여러 번 재판을 받은 뒤 결국 작년 20172월 파면처분이 내려졌습니다. 다행히 많은 분들이 저의 파면사건을 안타까워하며 응원해 줘서 민사소송 1심에서 승소하였습니다. 하지만 학교 측은 고등법원에 항소하여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재판에서 꼭 이겨서 저희 행동이 틀린 행동이 아니라 옳은 일이었다는 것이 법적으로 증명되고, 또 다시는 개신교인들에 의해 불교사찰이 훼손되는 일이 절대로 없기를 간절히 빌어마지 않습니다.

 

해직되고 나서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지니까 마음이 많이 허전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저는 그래도 목사로서 무엇을 할까 하다가 가나안교회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여기서 가나안은 안나가의 거꾸로 의미입니다. 요즈음 교회가 이런저런 일로 문제가 많으니까 교회에 안나가는 신자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일컬어 가나안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본래 가나안은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천국과 같은 낙토를 의미합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불국토입니다. 말하자면 이상향이죠. 그런데 그 가나안이 이제 안나가란 의미까지 갖게 되었으니 참으로 재미있는 일입니다. 암튼, 저는 가나안신자들에게 비록 교회에는 더 이상 안 나가지만 가끔이라도 만나서 하나님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계속 걸어 가자라는 취지로 가나안교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교회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뒤 어디에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것을 페이스북에 올렸더니, 재미있게도 경복궁 근처에 있는 마지라는 한 사찰음식점 주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자기 식당에서 하면 어떻겠느냐고 말이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교회는 가나안 신자들에게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미워하는데, 오히려 불교인이 저희를 환대하니 말이죠. 정말로 한국불교는 정말로 대단한 종교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래서 그 제안에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서 마지라는 이름을 붙여 마지가나안교회를 그곳에서 처음으로 20176월 셋째주일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그랬습니다. 제가 불교와 인연 때문에 학교에서 해직되고 가나안교회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곳에서는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이웃종교들을 이해하기 위한 공부하는 가나안교회를 하면 좋겠다구요. 그래서 매월 셋째주 일요일 오후에 마지종교대화가나안교회로 모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보람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은 그 인연으로 저희 마지종교대화가나안교회와 열린선원이 이렇게 함께 만나게 된 것입니다. 모쪼록 오늘 우리의 이런 작은 노력들이 모아져서 한국사회에 종교 갈등이 줄어들고, 또 종교가 사회에 누를 끼치지 않고, 더 나아가 이 땅이 더욱 아름다운 평화로운 나라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2.

스님께서 제게 크리스마스 설교를 해 달라고 해서 오늘 무슨 말씀을 전할까 고민이 많이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평소 제가 생각하던 것을 좀 나누기로 하고, 설교제목을 예수보살과 육바라밀이라고 잡아봤습니다. 여기 앉아계신 대부분이 불교신자이니 여러분들의 입장에서 예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목사는 본래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니 예수 이야기만 한다고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저도 선교를 해야 하니까요?(하하) 그리고 제가 불교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기에 혹 잘못이 있다면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알기로 대승불교의 핵심사상 중 하나는 보살사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승불교에서 보살은 모든 인류가 다 구원받을 때까지 모두가 다 고통에서 해방되어 부처가 될 때까지 나 스스로는 부처가 되는 길을 포기하며 중생의 해탈을 돕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대승불교의 보살입니다. 말하자면 보살은 위로는 보리를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의 정신을 가장 잘 실천한 자입니다. 한마디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존재입니다. 그가 보살입니다. 그렇다면 불자들에게 예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보살입니다. 예수 보살! 따라서 오늘 불자와 기독교자 함께 공동으로 예수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는 예수가 우리 모두에게 가장 훌륭한 보살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일상적인 말로 표현하면, 예수는 우리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참 인간의 궁극적인 모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자가 되었든 아니면 기독자가 되었던 예수 탄생을 기뻐하며 축하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예수가 보살인지 그 이유를 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인류 구원을 위해, 즉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육바라밀의 수행을 어떻게 철저하게 실천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자하듯이, 육바라밀은 보살도의 대표적인 수행법입니다. 물론 후에 육바라밀을 더욱 발전시켜 화엄경에서는 10, 10, 10, 10회향, 10, 등각, 묘각 등의 52위의 보살 수행계위를 말하지만, 어쨌튼 육바라밀이 그 핵심을 이룬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불자들은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여기 오신 기독교인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간단히 더 첨언한다면, 바라밀은 피안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을 끝내고 해탈의 세계 저 너머로 건너가는 것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바라밀은 과학적인 용어로 한다면, ‘임계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수행을 적당히 해서는 안 되고 임계점에 이르러야 되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넘어 하늘을 날기 위해서는 임계점을 넘어가야 합니다. 또 물이 수증기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것이 바라밀입니다. 그러니까 보시를 예로 든다면, 이웃을 돕는 것을 적당히 하면 안 되고 임계점을 넘어 끝까지 도와야 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시만 하면 안 되고 보시바라밀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께서는 정말로 위대한 육마라밀 수행을 철저히 완수하여 모든 보살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우선 육바라밀의 첫 번째 수행덕목은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입니다. 보통 보시에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금전적으로 돕는 재시’(財施), 오늘 설교하는 저나 혹은 학교의 교사들처럼 진리를 가르치는 법시’(法施), 그리고 요즈음 의사나 상담사 혹은 사회복지사들처럼 공포를 제거하고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무외시’(無畏施)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선에 대해 가르칠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자선 행위를 숨겨두어라. 그리하면 남 모르게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6:3-4) 그런데 여러분, 최고의 자선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것은 상대가 갚을 수 없도록 하는 선행입니다. 말하자면 남이 모르게 하거나 또 알더라도 너무나 커서 아예 갚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선행이 최고의 선행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선행 중에 최고의 선행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인류의 많은 분들에게 예수께서 자신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은 것이라는 것을 모르게 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모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독교인은 알지만, 여기계신 불자도 모르고 세상 사람들도 다 모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예수의 십자가는 설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해 예수께서 죽은 것임을 알았다 할지라도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되갚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인류의 죄를 모두 다 대신 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가장 위대한 보시바라밀이 되는 것입니다.

 

저도 요즈음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만, 누가 저 대신 재판을 받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큰 죄가 아닌 것에도 마음 졸이고 걱정하는데, 하물며 죽을 수 밖에 없는 저희의 죄를 누군가가 대신 짊어졌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도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 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15:13) 그렇습니다. 그렇게 예수는 우리를 친구삼아 주시고 또 그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 놓는 보시를 한 것입니다. 아니 보시바라밀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시를 하더라도 예수처럼 그렇게 합시다.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보시바라밀입니다.

 

둘째는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입니다. 지계바라밀은 계율을 지키고 항상 자기반성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께서는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는 실천의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는 모두 613개의 계율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계율을 크게 두 개로 요약해 주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10:27-28) 예수의 삶은 이 두 계명을 철저히 지키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지계바라밀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예수 자신도 십자가를 지기 두려웠지만, 그는 하늘 아버지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기로 순종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예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주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는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26:39)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계율에 철저했습니다. 특히 예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십자가를 통해 그런 삶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에게 못을 박는 사람들을 보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지금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나이다.”(23:34) 그리고 그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19:30) 말씀하시고 운명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모든 계율을 십자가에서 다 지켰다는 말씀입니다. 지계바라밀을 완성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에서 가장 위대한 보살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합시다.

 

셋째는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입니다. 인욕은 고난을 이겨 나가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뭐라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과 모욕을 다 참고 인내하였으니 말입니다. 특히 제 경험을 보니까, 십자가와 같은 육신의 고통 못지않게 힘든 고통은 가까운 친구들의 배신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을 견디는 것이 참 힘든 일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해직되고 재판을 받는데,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학교 측에서 제가 나쁜 놈이라는 증인으로 제 동료교수들과 제 제자들을 회유하여 내세웠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끼고 사랑했던 후배 교수들과 제자들이 저에게 칼을 든 형국이었습니다. 그것을 참으려니 얼마나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를 보십시오. 그는 자기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에게 팔려서 가장 끔직한 형벌인 십자가형에 넘겨졌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3년씩이나 따라 다녔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모두 예수가 체포되자 스승을 부인하며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원망을 돌렸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끝까지 인욕바라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뒤, 제자들을 먼저 찾아가서 그들을 위해 생선을 구워주고 아침밥을 손수 차려 주면서 옛 정을 나눴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보살행이 아니고 무엇이었겠습니까? 억울한 일이 닥칠 때 끝까지 인내하며 참읍시다. 그럴 때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길이 열립니다.

 

넷째는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입니다. 정진은 보살로서의 수행을 힘써 닦으며 꾸준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는 정말로 정진 바라밀의 모범이십니다. 당시 유대의 최고 종교지도자였던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고, 심지어 가족들조차 오해를 하는 상황에서도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일구는 일에 결코 쉬지를 않았습니다.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5)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그러면서 그는 쉬지 않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귀신들린 자들을 치료해 주고, 또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쉽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제가 학창 시절 공부할 때,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외워든 독일어 단어 세 가지가 있습니다. “langsam, stätig, und gründlich”입니다. 천천히, 꾸준히, 그리고 철저하게!” 말하자면 이 세 가지가 정진바라밀의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는 정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정진수행에 있어서 천천히, 꾸준히, 그러나 철저하게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정진바라밀의 모범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정진의 이 세 원칙만 잘 지킨다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훌륭한 보살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는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입니다. 선정은 마음을 안정시켜 올바른 지혜가 나타나게 하는 수단인 선정(禪定)을 닦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용어로 한다면 기도혹은 관상하는 것입니다. 보살이 되고자 한다면, 기도는 필수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자는 결코 보살이 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자기를 철저하게 비우는 과정이요, 그래서 그 빈 공간에 절대자를 모시는 과정입니다.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불교의 공성(空性)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누구보다 선정바라밀을 잘 실천하신 분입니다. 그는 시간 나는 대로 고요하게 기도하기를 좋아했고, 또 기도 중에 하나님과 하나 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4:20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자신이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내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을 때, 그것을 신학에서는 동일본질의 체험이라고 말합니다. 호모우시우스(homoousios)!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것을 기도를 통해 깨달은 모범이십니다. 그런 존재를 일컬어 정교회에서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 테오시스’(theosis/deification/神化)라고 표현했습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기독교인의 꿈입니다. 신처럼 우리의 존재가 성화되는 것! 예수께서는 또한 선정에 들기 위한 수련법으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주기도문 수행을 통해 선정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처럼 선정을 실천합시다. 아니 선정바라밀을 철저하게 수행합시다.

 

마지막으로 여섯째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입니다. 반야는 진실하고 올바른 지혜’, 즉 무분별지(無分別智)를 말합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이죠. 대승불교에서는 아마 최고의 깨달음으로 ’()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기독교에서는 최고의 깨달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뒤에, 공생애 기간 동안 그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하나님의 나라 비밀을 가르치기 위해 유대지도자들과는 논쟁도 마다하지 않았고, 또 지혜가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비유를 써 가면서 아주 쉽게 지혜바라밀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는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밀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한 번은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면서, “그 나라는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가 아니라 그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17:21)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 안에란 두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마음속에(inside)’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천국의 마음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사람들이 모여 친교하며 사랑을 나누는 그 사이에(among/between) 천국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오늘 아기 예수의 오심을 축하하는 이 자리가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3.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고통에서 해방되고 그래서 모두 열반의 세계에 이르도록 우리 모두 보살행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특히 육바라밀을 잘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육바라밀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힘듭니까? 그 때 필요한 것이 스승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살되신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육바라밀을 실천하실 때, 종종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과 또 십자가의 삶을 교훈삼아 우리도 육바라밀을 잘 실천하게 하면, 이 땅에 있는 모든 중생들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어느 날 홀연히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고 모두 열반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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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8/20 [08:42]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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