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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1.06.22 [09:36]
[이상규 교수 발제문] 3.1운동, 기독교, 한국교회
이 상 규 교수(고신대학교 신학과 명예교수)
 
이상규

 이 글은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최이우 목사)가 12일 경동교회에서 개최한 3월 월례조찬기도회 및 발표회에서 발표한 원고이다.(편집자 주)

▲ 이상규 교수     ©뉴스파워 자료사진

 

 

시작하면서

3.1운동은 소수의 엘리트 구릅의 주도적인 준비와 대중적 호응으로 일어난 만세 독립운동으로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신기원을 이룬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건과도 비교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3.1운동은 독립의식, 자유 민주 평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보여주었고, 사회의식의 변화, 여성의 재발견, 실력양성론의 대두로 교육에 대한 새로운 관심 등과 같은 변화를 가져왔고, 그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의 지속적인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3.1운동은 다섯 가지 정신, 곧 자유와 독립정신, 민주정신, 대동단결 연합정신, 평등정신, 비폭력 저항정신을 보여준 것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평양에 주재했던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John Moore, 1874-1963)조선인의 삼일운동 후 일 년 간의 사상적 진보는 50년의 진보와 같은 진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신앙의 자유를 갈망하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3.1운동은 민족적 해방 그 이상의 의미를 주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기독교회는 3.1절을 중시해 왔고, 매년 3월 첫 주에는 기념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3.1운동 100주년을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전개된 만세 운동과 상해임시정부 수립 등과 관련하여 여러 행사가 거행되었고, 또 여러 학술단체의 다양한 학술 모임도 개최된 바 있다. 결과적으로 삼일운동에 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 필자가 아는 한 40여 편 이상의 단행본과 200편 이상의 학술논문이 발표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여기서 3.1운동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다시 말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에게는 새로운 그 무엇을 제시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3.1운동에 관한 범람하는 연학의 물결을 뒤로하고, ‘100주년이라는 카이로스적인 기념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간의 3.1운동 논의에 대해 점검해 보고자 한다. 먼저 3.1운동에 대한 일반 학계의 논쟁점이 무엇이었던가를 소개하고, 기독교계에서의 3.1운동을 어떻게 인식해 왔던가에 대해 정리한 후 기독교회는 왜 3.1운동을 중시해왔던 가를 지적함으로서 3.1운동과 기독교의 관련성, 그리고 오늘 이 시대 기독교회가 나아갈 바를 성찰해 보고자 한다.

 

1. 3.1운동 연구에서의 쟁점

그런데 지금까지의 3.1운동사 이해에 있어서 몇 가지 상반된 의견이 있어왔는데, 이 점에 대해 다음의 몇 가지로 소개하고자 한다.

 

내인론과 외인론, 기회론

첫째, 삼일운동 발발에 영향을 준 요인이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인데, 내인론(內因論)과 외인론(外因論), 그리고 기회론(機會論)이 있다. 만세운동 준비단계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혹은 러시아 혁명과 같은 국제질서의 변화가 우리나라 삼일운동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외인론과 일제의 잔혹한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이 보다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내인론, 그리고 윌슨의 자결주의는 패전국 식민지에만 해당된다는 점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독립운동의 기회로 이용했다는 이른바 기회론의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3.1운동에서 지도부를 형성한 소수의 엘리트 구릅은 국제정세에 민감했고, 그것이 삼일운동의 시원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거사에 참여한 주도적인 세력은 농민들이었는데 이들이 국제 정세에 민감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윌슨의 자결주의가 민중동원의 실제적인 동력원이 되었을까하는 점이 주된 쟁점이었다. 내인론자들은 민족자결론과의 연계 자체가 거국적 3.1운동의 민족적 역량을 격하시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3.1운동을 민족사적 주체에서 이해하고 파악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해할 수 있으나, 국제적인 정세를 고려하지 않고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역사적 사건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연쇄적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시대정신이나 그 시대적 상황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 입장을 배타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상호보완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된다. 실제로 1910년대는 변화의 시기였다.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공화제국가인 중화민국이 출범했고, 1917년에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났다. 이듬해 11월에는 독일에서 독일제국이 붕괴되고 1920년 바이마르공화국이 출범했다.

특히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1918)과 함께 세계정세의 큰 변화가 예견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국제 정세가 조선인의 독립의지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민족자결주의는 만세운동의 점화과정에서 영향을 끼친 점은 부인 할 수 없다. 대부분의 민족지도자들은 민족자결주의를 알고 있었고, 손병희, 최린, 권동진 등 천도교계 인물들과 이승훈 신홍식, 함태영, 이갑성 등 기독교계 인사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이 3.1운동의 동기가 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민족자결주의만이 아니라 국권피탈 이후 일제의 폭정과 박해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상호연쇄하여 폭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외인론과 내인론은 상호작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역사 사건의 원인이나 전개과정은 어느 한 가지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3.1운동의 주체는 민족대표인가 민중인가?

둘째, 삼일운동을 이끌어가 주체인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이 만세운동의 주체인가 아니면 이 운동을 실제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간 다수의 민중 세력인가?만세운동의 외연에 있어서 주도적인 세력은 누구였는가 대한 이견이었다. 일반적으로 민족대표의 선두적 역할을 인정하되 만세운동의 실제적 중심 세력은 민중이었다고 주장한다.

민족대표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특히 1980년대 이후 민중사관의 대두로 민족대표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들은 만세운동은 민중운동임을 강조하여 33인의 역할을 폄하하거나 무시하는 입장이었다. 정연태 이지원 이윤상은 “3.1운동의 전개양상과 참가계층이란 글에서 이런 입장을 취했다. 이와같은 대립된 견해는 3.1운동의 전 과정을 단계적으로파악하지 않는데서 오는 오해라고 할 수 있다. 만세운동은 초기 조직화 단계와 거사 실행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데, 민족대표 33인 혹은 48인은 초기 조직화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고, 대중운동화 단계에서는 민중들이 만세운동의 전개와 확산에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3.1운동은 준비단계, 거사 실행단계로 구분될 수 있는데, 초기 조직화단계가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말하는 3.1운동이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대중들의 거사 실행단계가 없었다면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양자를 선택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균형 있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3.1운동인가, 31혁명인가

셋째, 3.1운동을 정의함에 있어서 그것이 운동인가 아니면 혁명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지금까지 ‘3.1운동’(三一運動, Samil Independent Movement)‘3·1만세운동’(三一萬歲運動), 혹은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만세운동의 규모와 영향력을 고려하여 ‘3.1혁명’(革命)으로 명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물론 1930년대 이전에도 혁명으로 칭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3.1만세사건을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거부로 일어난 반일 자주독립운동으로만 보지 않고, 군주제에 반대하며 민주공화제혹은 민주공화국건설을 의도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3.1만세사건의 혁명성을 강조한 것이다. 1948510일 총선 이후 헌법 제정 당시 헌법전문 초안에서도 ‘3.1혁명으로 표현된 바 있으나 심의과정에서 ‘3.1운동으로 정리되었다. 이후 만세사건은 ‘3.1운동이란 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현희(李炫熙, 1937- )2007년부터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경험케 한 사건으로서 ‘3.1혁명으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으나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20142, 3.1운동 95주년을 기념하여 ‘3.1혁명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학술회의를 개최하면서 이를 공론화한 바 있고, 기독교인인 윤경로 이만열 등은 ‘3.1혁명으로 지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경로는 중국의 신해혁명과 3.1혁명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느냐라고 반문하면서 “3.1혁명은 민()이 주도한 혁명이라고 정의했다. 지난 201938일 국회헌정기념관에서 개최된 한국헌법학회와 국회입법조사처 주최의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과 헌법의 과제학술대회에서 인하대학교 정상우 교수 또한 “3·1운동은 민족독립운동 차원을 넘어 주권재민의 실현과 민주공화국 건설을 지향하는 혁명의 성격을 지녔다면서 ‘3·1운동‘3·1혁명으로 명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체적으로 진보계열의 인사들이 운동이 아닌 혁명으로 칭하면서 오늘의 한국 현실에 대한 저항의 근거로 삼고 있다.

해방 직후 좌파 인사들에 의해 발간된 朝鮮解放史(3.1운동 편)에서는 3.1운동은 특히 노동자, 빈농, 농상공의 소 부르조아층이 추진한 인민 운동으로 정의하고, 천도교나 기독교의 기여는 부정했다. 북한은 삼일운동을 ‘3.1인민봉기라고 부르고 있고, “탁월한 수령의 지도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만세운동은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3.1운동을 폄하하여 228“3.1인민봉기는 청원과 외세의존에 물젖은 상층인물들의 잘못된 지도로 그 빛을 보지 못하고 쓰디쓴 실패의 교훈만 남겼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20189월 평양방문 당시 김정은과 ‘3.1절 남북한 공동행사를 개최키로 한 바 있으나 북한은 이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삼일운동 자체를 평가절하 한 것이다.

 

3.1운동의 주도세력은 천도교인가? 기독교인가?

넷째, 삼일운동의 중심세력은 천도교인가 아니면 기독교인가하는 점 또한 논란의 중심에 있다. 기독교계는 기독교회의 기여와 역할을 강조하지만, 천도교는 만세운동에 있어서의 천도교의 주도성을 강조한다. 일반 사학계는 민족종교로 간주될 수 있는 천도교의 주도에 동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종교 면에서 볼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인은 16, 천도교인 15, 불교 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보면 3종교가 연합한 운동임을 알 수 있으나 만세운동의 준비단계에서 시위 거사 단계에서 불교의 역할은 미미했으므로 사실상 천도교와 기독교가 중심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독립선언서 서명자 명단을 보면 손병희(孫秉熙) 길선주(吉善宙) 이필주(李弼柱) 백용성(白龍城) 순으로 되어 있다. 이는 종교면에서 천도교 장로교 감리교 불교 순으로 그 대표자를 명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만세운동의 중심 세력을 천도교 장로교 감리교 불교 순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불교의 관여와 영향력은 미미했음으로 사실상 삼일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였고 이 두 종교집단이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시위자 피검자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천도교측은 천도교의 주도성을 강조하고 기독교를 종속적 관계에서 해석한다. 반면에 기독교계는 기독교의 기여와 역할을 중시한다. 그래서 천도교가 선도(先導)하고 기독교가 주도(主導)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삼일운동은 거의 동시적으로 천도교계와 기독교가가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세계정서를 인식하고 만세운동을 처음 준비한 세력은 평안도의 이승훈 중심의 장로교계였다. 최린이 손명희를 찾아갔을 때 이미 기독교계가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때 최린이 천도교가 함께 동참하지 않으면 민족종교로 인식될 수 없다는 충고를 듣고 손병희가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시간적으로 기독교계가 천도교에 앞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도교가 준비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인식된 것은 손병희라는 인물과 천도교가 거사 자금을 부담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만세운동의 준비단계, 2.1 무오독립선언, 2.8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 등에서와 만세 거사 단계와 확산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기독교회였다. 기독교회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고, 그것이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지방에서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도 천도교인들이 아니라 기독교계 인사와 기독교 학교들이었다. 31일 만세시위가 서울 외에도 평양, 진남포, 정주,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 전국의 8개 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났는데 그곳은 바로 기독교회 중심이었다. 평안도는 전적으로 기독교계가 주도하였고, 경상도 지역의 경우 천도교의 기여나 참여는 미미했다. 실제로 삼일운동을 주도한 주도세력에 대한 통계를 보면 기독교 주도 지역이 천도교 지역보다 월등히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피검자는 체포자 등 통계에 나타난 종교적 배경에서도 기독교가 천도교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 피해자 가운데 기독교인이 17%를 차지하지만 기독교보다 적어도 5배 혹은 15배 많은 천도교인 피해자는 11%에 불과했다. 정리하면 3.1 운동에서 준비단계에서 기독교 세력이 절대적으로 우세했고, 거사 실행단계에서는 기독교와 천도교가 협력했으나 기독교세가 우세했고, 후속 단계에 해당하는 임시정부 수립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중심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3.1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지대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역할은 미미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사학계의 기독교계의 기여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없지 않다. 예컨대, 3.1문화재단이 펴낸 이 땅의 젊은이들을 위한 3.1운동 새로 읽기(서울: 예지, 2015)를 보면 3.1운동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할을 공정하게 기술하고 있지 않다. 기독교계의 역할이 분명함에도 종교계라고 기술함으로서 기독교라고 적시하지 않고 있다. 시위의 확산에 있어서 기독교가 도움을 주었다는 점을 간단하게 기술하지만, 그것을 천도교와 묶어 언급하면서 종교인들의 역할로 기술하고 있다(78쪽 등). 이북지방에서의 만세 시위와 관련하여 오산, 숭실, 신성, 양덕, 숭덕, 영실학교 등 지역 거점 기독교 학교를 열거한 후 종교계 학교로 기술함으로 기독교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다. 3.1운동 백주년 기념 한일공동연구로 출판된 3.1독립만세운동과 식민지배 체제(서울: 지식산업사, 2019)에서도 기독교의 역할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기술하지 않고 있다. 이런 경향은 한국역사연구회가 펴낸, 3.1운동 100, 1 메타역사(소울: 휴머니스트, 2019)에서도 동일하다. 박찬승의 대한민국의 첫 번 재 봄(서울: 다실 초당, 2019) 만세운동의 중비과정에서의 기독교의 관여를 언급하고 있으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중국 일본에서의 만세운동 주도자들의 기독교적 배경에 대해서는 침묵함으로서 기독교회의 역할에 대해 간과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사학계의 일반적 관행이 되고 있다. 종교계의 역할을 기술할 경우에도 천도교를 중시하고 있고 기독교의 역할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경향이 짙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는 3.1독립운동과 기독교라는 자료집, 곧 신문기사편, 기독교인 판결문, 영문선교사 자료편 등 3권을 출판한 바 있고, 기독교대한감리회는 ‘3.1운동과기독교관련 자료집을 출판했다(2017. 10). 이 자료집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기독교 관련 3.1운동 전수조사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인물편 3, 문화유산편 1권 등 모두 4(2,411페이지)의 자료집으로 엮었는데, 이 자료집에는 2천여 명의 3.1운동 관련 기독교인에 대한 자료가 게재되었다. 3.1운동 관련 기독교인 판결문(298A4 2,884), 선교사 문서(464), 기독신보, 독립신문, 신한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신문기사(5,947), 기독교 3.1운동 일지(685), 그리고 회고, 증언, 서간, 논문, 저서 등을 정리했다. NCCK 신학위원회는 3.1정신과 한반도 평화라는 책을 출판한 바 있으나 3.1운동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할을 역사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3.1운동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기 보다는 정치적 의미 규정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박명수 교수 등의 창의적인 연구가 수행되었지만,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3.1운동에 대한 기독교회의 관여와 기여에 대한 연구가 더욱 풍성해 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2. 기독교계의 3.1운동 이해

앞에서 일반 사학계의 3.1운동에 대한 그간의 연구에서의 논쟁점에 대해 소개했는데, 이제 한국교회 혹은 기독교계의 3.1운동 관련 문서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기독교 일각에서는 3.1운동을 민족주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이데올로기적 이념, 곧 저항 정신의 이념적 근거로 원용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3.1운동에 있어서 선교사들의 역할에 대해 공정하지 않게 평가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이런 점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민족주의적 해석

일제하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3.1운동 해석에 있어서 민족주의적이 경향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으로부터 자유하기란 사실상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역사의 3.1운동’(historic Samil independent movement) 탐색은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식민주의나 종족 민족주의로부터 자유한 사실 그대로(what actually happened, wie es eigentlich gewesen), 혹은 있었던 그대로(as it was)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3.1운동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있는 박은식, 韓國獨立運動之血史 上(上海: 維新社, 1920)에서도 민족주의적 접근은 불가피했다. 그는 3.1운동에 참가한 인원은 200만을 넘었고, 참집(參集) 횟수는 1,500여 회에 달했으며, 전국 218개 군 중에서 211개 군이 이에 가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기백은 이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반면에 일본측 자료에서는 770여회의 시위, 연 참가인원은 46-50만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축소된 통계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박은식의 통계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최근 연구와는 커다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2019220일 발표한 통계에서는 만세운동 기간 동안 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80~100만 명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 연구는 2016년 이래 3년간 전문가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연구한 결과물이라고 밝혔음으로 신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는데, 참가 인원에 있어서 박은식의 통계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통계보다 2배 이상 산정된 통계임을 알 수 있다.

민족주의는 역사 언어 문화 관습 혹은 전통을 공유하는 집단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종족주의로서 내적인 일치나 단결을 가져오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타민족에 대한 우월성 혹은 특이성을 강조하는 폐쇄적 성격을 지니기도 한다.

그런데, 3.1운동연구에서 기독교계의 해석에서도 민족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져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만열 교수라고 할 수 있다. 한국교회사 해석에서도 민족주의를 강조한 바 있는 그는 3.1운동에 대한 해석에서도 이런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기독교계에서 3.1운동에 대해 가장 많이 연구한 인물로서 1970년대 후반부터 3.1운동과 기독교 관련 논문을 다수 발표하였고, 3.1 운동에 대한 기독교계의 기여를 추적한 점은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전 인구의 1%에 해당하는 기독교회가 만세운도의 준비과정, 실행과정 거사 단계에서 25-30%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3.운동을 민족 운동 혹은 민족주의운동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은 신앙적 이유라기보다는 민족정신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3.1운동이 아무리 성서적이고 정당하고 기독교인들이 대거 주동세력으로 참여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교회운동이라기 보다는 민족운동이라는 점이다. ... 3.1운동이 국권회복을 통해 민중 민주를 실현하려고 했던 민족운동임을 분명히 할 때만이 이 운동에 참여한 기독교계 및 기독교인의 위상을 분명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또 그는 아무리 기독교인들이 많이 참여하고기독교 세력이 주도했다할지라도 이 운동은 교회 운동이 아닌 민족운동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일면 타당한 주장이기도하지만 기독교인들의 만세운동 참여를 민족적 동기에서 찾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그의 입장은 2003년 논문에서 더욱 심화된다. 그는 3.1운동의 시작 및 확산단계에서 기독교회의 주도적인 역할을 규명하면서도, 3.1운동의 기독교 신앙과의 연관성 보다는 정치적 의미를 중시하고 있다. 그는 2017223일 개최된 3.1운동 100주년 기념준비학술심포지움과 그 이후부터 ‘3.1운동이 아니라 ‘3.1혁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 정치적 해석: 반체제적 이념화

기독교계의 3.1운동 이해의 또 한 가지 특징은 정치적 해석, 곧 이념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3.1운동은 기독교회가 중심이 된 행사이자 신앙의 자유를 위한 투쟁이었음으로 해방이후 교회는 3.1운동과 그 정신을 계승하고자 했다. 해방 후 처음 맞는 1946년의 3.1절 기념식을 남한과 북한에서 각기 개최되었고, 남한에서는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이 별도의 행사를 개최했다. 북한에서는 교회가 중신이 되어 평양에서 3.1운동 기념식을 개최했는데, 소련군에 의해 급조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교회가 주심이 된 기념식을 방해하고 폭력을 행사했다. 이것이 북한에서 기독교와 공산정권과의 최초의 대결이었다. 비슷한 일이 의주에서도 발행했다.

남한에서의 경우, 1948년 건국이후부터 20여 년 간은 국가주도로 3.1운동을 기념해 왔고, 기독교계는 수동적으로 참여해 왔다. 그러다가 만세운동 50주년을 맞는 1969년 이후에는 한국기독교연합회(NCC, 지금의 한국기독교회협의회, NCCK)가 기념식을 주도하면서 이때부터 3.1운동을 기념하는 일은 정치적 성향을 띄게 된다. 그 동안 교계는 3.1운동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지 못했고 학문적으로 연구한 바도 없다. 단지 3.1운동을 기념하면서 정치적 성격, 곧 반체제적이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3.1운동을 당시이 반정부적인 활동의 이념적 근거로 이용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복음주의 교회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그러다가 1975년의 3.1절 기념식은, 정지강의 지적대로, 정치화 혹은 이념화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NCC뿐만이 아니라 진보적 기독교 단체들이 유신정권에 저항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반체제적인 행사로 치러졌다. 정지강은 3.1절 기념은 1975년부터 노골적으로 이념화 및 민중화의 길을 가가기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19763.1 기념식은 이런 경향이 심회되었다. 이 때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천주교와 진보측 기독교계 연합 기념식에서 문익환이 초안한 3.1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되었다. 이 일로 정치인들 외에도 교계의 문익환 안병무 서남동 등이 구속되는 정치적 사건으로 급격히 발전했다. 문제는 3.1운동 정신 보다는 3.1절 기념행사를 이용하는 3.1운동의 정치화 혹은 이념화가 심화되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3.1독립운동 정신은 진지하게 고려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이 실제적인 삼일운동 연구, 특히 한국교회의 3.1운동에의 관여나 역할 등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일을 진작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국가권력에 탄압에 맞서 신교(信敎)의 자유 혹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고투했던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진지하게 숙고되지 못한 일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3) 3.1운동에서의 선교사들의 역할

일반적으로 3.1운동 과정에서 선교사들의 역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표명되어 왔다. 3.1운동은 선교사와는 무관하게 일어났고, 그들은 제국주의적 입장을 보여주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다수의 학자들은 삼일운동은 윌슨의 자결주의와도 무관하고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지 않는 민중들에 의해 의도되고 기획된 민족의 주체적인 결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최근, 매쿤(George S. McCune)이나 모우리(E. M. Mowry) 등은 만세시위자들을 숨겨주거나 보호해 준 일은 언급하거나 선교사들에 의한 해외 여론 형성 등을 언급하기도 하지만 한국교계의 주류는 선교사들의 기여나 역할을 무시해 왔다는 점이다. 대체적으로 선교사들의 간접 참여를 제시하고 일본인들의 비인도적인 처사를 비판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을 정도이다.

3.1운동은 선교사들과 무관하게 일어났고 선교사들은 간접 참여했다는 점은 인정되지만, 사실상 독립정신과 만세운동의 정신적 토대를 제시했던 것은 선교사들과 선교사들이 활동이었다. 그러나 이런 점이 정당하게 강조되지 못했다.

우선 고려해야 할 점은 선교사들은 조선에 거주하는 외국인으로서 국내 정치 문제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신분이었다는 점이다. 미국북장로교(PCUSA) 선교부는 일본의 조선 지배를 사실상(de facto)의 현실로 수용하고 있었고, 정교분리 원칙이 1901년 이래로 적용되고 있었음으로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참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군내 정치문제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사실상의 기준(de facto standard)이었다. 이런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선교사가 만세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

비록 선교사들은 간접적으로참여했지만 선교사들은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선교사들의 선교 교육 의료 사업은 그 자체가 조선인들의 의식 계몽하였고, 독립운동의 근간이 되는 자유 민주 인권 자주의식 등 독립운동의 정신적 토대를 가르쳤다. 이것이 독립운동의 근간이 된 것이다.

초대 선교사 곽안련의 손자인 도날드 클락(Donald Clark)은 삼일운동에 대한 선교사들의 관여를, 가담자들에 대한 보호(sheltering), 부상자에 대한 치료(treating the wounded), 제암리학살사건에 대한 조사(investigating the Che'am-ni massacre), 영사관 및 본국 위정자들을 통한 항의(protests to Consuls and constituencies at home), 그리고 여론형성을 통한 항의(protests in the press) 5가지 유형으로 정리한 바 있는데, 이런 사후 조치 보다 더 중요한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1880년대 후반이후 조선에서의 선교활동 자체가 자유 민주 인권 독립 등과 같은 근대적 가치를 가르쳤고, 기독교학교에서의 언론(言說) 집회 출판의 자유 등 근대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은 3.1운동이 발발하고 확산될 수 있는 정신적 토대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근대 민주적 가치교육에 대한 잠재적 가능성 때문에 일제는 선교학교에 대해 주목하고, 감독하고, 교육 자체를 제한하고자 했던 것이다. ‘해서교육총회사건이나 1911년의 ‘105인 사건은 자유와 독립 정신을 가르치고 고양하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었다.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의 지역 거점은 평양의 숭실, 선천의 신성과 보성여학교, 서울의 세브란스, 부산의 일신여학교 등 선교학교였고, 선교학교가 만세운동의 전파와 시위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은 선교학교(기독교학교) 학생들이 자유 민주 인권 독립과 같은 근대적 가치를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일제는 만세운동의 배후에 선교사들이 있다고 인식했다. 선교사들은 아직 미개한 조선 사람들에게 서구의 자유 민권 민주주의 등과 같은 문화를 이식시키는 것으로 이해했다. 선교사들인 직접적으로 만세현장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이런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토대를 제시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3. 기독교는 왜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었을까?

일반 사학계의 인정여부와 상관없이 기독교회가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왔다는 사실은 교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21(음력 191911) 만주 지린(吉林)에서의 무오독립선언, 중국에서의 만세운동 준비를 위한 신한청년단의 조직, 국내의 서울과 평양에서의 독립운동을 위한 조직, 일본에서의 2.8 독립선언 등은 기독교인 중심이었고, 민족대표 33, 혹은 48인의 인적 구성에서도 기독교는 50%의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삼일운동의 거사 및 전국적 전개과정에서 기독교회와 지역 거점 선교학교는 만세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감당했다. 31일의 만세운동의 경우, 서울 이외의 8개 지역은 전부 기독교계 중심이었고, 평양과 의주 만세시위의 주동자는 김선두 강규찬 유여대 등 목사들이었다. 또 만세운동 초기의 1,200여회의 시위 중 주동세력이 뚜렷한 340회를 지역별로 정리하면 311개 지역이 되는데, 이중 기독교가 주도한 지역은 78개 지역이었으나 천도교가 주도한 지역은 66개 지역, 42개 지역은 기독교와 천도교가 공동으로 주도한 지역이었다. 이 점은 삼일운동의 전개 과정에서도 다수 지역에서 기독교회나 선교학교가 주도적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준다. 20만에 불과한 기독교는 신도 100만 이상의 천도교 보다 더 많은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기독교회나 선교학교가 없는 지역에서는 천도교와 협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회가 삼일운동의 준비 동원 거사 등 전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고, 기독교권의 참여가 없었다면 삼일운동은 사실상 전 민족적 운동으로 전개되지 못했을 것이다.

기독교계의 만세운동에 대한 관여 혹은 참여는 기독교회라는 교단적 합의나 결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인의 결단에 의한 참여였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사이에 경계를 지키면서도 그리스도인의 민족적 혹은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려는 의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은, 삼일운동에 대한 기독교권의 적극적 참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요인이 무엇일까? 혹자는 민족적 동기를 강조하고 그것이 주도적인 동인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다음의 3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폭압적인 식민통치에 대한 반발이었다. 1910년 이래 10여 년 간의 식민통치에 대한 경험적 현실이 시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킨 배경이 된다. 1876년 운양호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 조약을 채결한 이래 점진적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일본군의 조선 주둔권을 획득하고 청일전쟁(1894-5)으로 청나라 세력을, 러일전쟁(1894-5)으로 러시아 세력을 물리치고 190511월에는 을사조약을 채결하고 외교권을 강탈하고, 이듬해 2월 통감부를 설치하고, 행정권 사법권 경찰권을 강탈하고, 1907에는 조선 군대를 해산했다. 헤이그밀사사건의 책임을 묻는 형식으로 고종을 폐위하고 19108월 합방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을 강탈하여 1392년 창건된 조선왕조는 27대 순종을 끝으로 518년의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통감부는 총독부로 승격되고, 3대 통감 데라우찌가 초대 총독으로 취임하여 입법 사법 행정 및 군사에 대한 전권을 행사하며 무단정치를 감행했다. 집회 취체령 공포하여 모든 사회단체를 해산하고, 헌병과 경찰 제도를 일원화하여 조선주차헌병조례를 발표했다(1911. 9). 1911년 당시 헌병대 935개 처, 7749명의 헌병, 경찰관서 677, 경찰수 6,222명에 달했다.

191012월에는 범죄즉결례을 공표한 이래 4대 악법으로 불리는 경찰법처벌규칙’ ‘조선태형령’ ‘민사소송조정령을 바탕으로 폭압정치를 강화하였고, 토지조사사업(1910.3-1918.11)을 실시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경제구조를 식민지 수탈구조로 재편했다. 또 회사령(1910) 어업령(1911) 광업령(1915)을 공포하여 민족 자본 발전을 방해하고, 조선교육령 사립학교규칙(1911) 개정 사립학교 규칙(1915)을 제정하여 민족교육 혹은 종교교육을 봉쇄했다. 이와 같은 폭압적인 무단정치 10년이 조선민족의 생존에 위협했다. 자본가 농민 노동자 등 사회 구성원 각계각층이 식민통치의 피해를 입음으로 그들의 정치의식과 사회의식이 높아졌고, 지식인 종교인들이에 대한 반발이 거국적인 만세운동의 동기가 된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땅에 사는 시민으로서 시민적 각성에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둘째, 기독교계의 민족의식 혹은 민족운동 전통은 3.1운동에의 적극적인 참여의 동기였다. 한국교회는 1900년대 이후의 역사적 환경 때문에 민족의 현실과 함께하는 교회였고, 반일(反日) 충군애국적(忠君愛國的)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민족독립운동에 무심하지 않았다. 안악사건에 이어 105인 사건은 한국기독교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유죄판결을 받은 105인 중 91명이 기독교신자였는데 장로교인으로 민족대표였던 이승훈 양전백 이명룡은 105인 사건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이들이 다시 3.1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105인 사건으로 기소되었던 이들이 3.1운동에도 앞장섰다는 사실은 3.1운동은 105인 사건 연루자들의 민족운동의 연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민족운동의 전통이 만세운동에 대한 한국교회의 적극적인 참여의 배경이 된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기독교 국가의 식민지배 하에 있었던 사례와는 달리 한국은 비() 혹은 반() 기독교 국가인 일본의 식민 통치 하에 있었고, 한국에서의 기독교와 민족주의는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기독교적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를 형성하게 된다. 바로 이런 특수한 상황이 한국교회의 민족 혹은 독립운동에의 적극적 참여의 배경이 된 것이다.

셋째, 기독교 신앙과 신교(信敎) 자유에 대한 탄압이 저항이 보다 주효한 이유였고, 독립운동을 통해 신앙의 자유를 실현하고자 했다. 기독교는 일제 통치기간 중 가장 강력한 종교였고 한국사회와 국가, 그리고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당시 조선의 기독교회는 20만의 신도와 3백 개 이상의 학교, 3만이 넘는 학생, 1,900여개의 집회소, 외국인 선교사 270여명, 조선인 교직자 23백여 명을 거느린 무시할 수 없는 집단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많은 병원과 자선기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견고한 유대로 결합되어 있었고, 외국인 선교를 통해 세계 여론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처음부터 한국 기독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조선통치에 이용하든지 아니면 한국 기독교를 탄압하여 그 영향력을 약화시키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회유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일제는 한국기독교 탄압과 분열을 시도하여 각종 제재를 가했다. 종교활동을 규제하려는 포교규칙(布敎規則, 1915)은 첫 법적 규제였다. 이후 기독교교육을 통제하기 위해 사립하교 규칙을 재정하거나(1911), 개정하고(1915), 105인 사건을 통해 기독교를 탄압했다. 안창호가 기독교계 인사들 중심으로 조직한 신민회(新民會)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심리적 저항은 만세운동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독립운동을 통해 신앙의 자유, 신교의 자유를 누리며 자유와 공의 등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상의 세 가지 이유가 어우러진 상호 연관는 저항의 힘이었고 기독교계의 적극적 참여를 가져온 배경이 된다. 비록 기독교의 지도적 인물 가운데 일부가 후일 훼절하고 친일의 길을 간 경우가 없지 않으나, 이점을 이유로 삼일운동에 기여한 한국교회의 역할마저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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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3/12 [14:12]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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