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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1.05.12 [07:49]
3.1운동 이필주 목사 활동상
한교총, 3.1운동 102주년 기념예배에서 후손에 감사패 전달
 
뉴스파워
▲ 이필주 목사     © 뉴스파워



이필주는 1869119일 한성부(현 서울특별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집안은 이미 퇴락했으며 생활 또한 매우 빈곤했다.

1890년 봄, 이필주는 친구의 권유로 조선 군대에 사병으로 입대했으며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농민군 진압에 동원되어 전라도 전주, 완산 전투에 참가했다. 골육이 서로 싸우는 광경을 목격하고 내심 괴로워했지만, 군대 말고는 먹고 살 길이 없엇기에 최선을 다해 전투에 임했고, 군규(軍規)를 잘 지키고 기예운동에도 남달리 노력하여 시험 때마다 승급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말단 사병에서 하사관 급의 참교로 승진했다.

18972월 고종이 아관파천을 마치고 경운궁으로 환궁한 뒤 이필주는 시위대에 가담해 부교(副校)로 승진하면서 하급지휘관이 되었다. 이로서 이필주는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기반을 마련했고 29세 되던 해 김해 김씨 인숙(仁淑) 여사와 결혼하여, 이후 5년여 동안은 군대 생활에 만족하며 자식 남매를 낳아 단란한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그러나 1902, 전염병이 창궐하던 중 두 자녀가 병사했다. 이필주는 이 일로 한없는 회의와 좌절을 맛보았다. 그는 기독교 귀의를 통해 새로운 삶을 모색하기로 하고 이때부터 상동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 1년 동안은 별다른 감화를 받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람을 사랑한다니 옳은 도()라고 여고 다니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필주는 상동교회의 담임자인 전덕기 전도사와 만났다. 전덕기를 통해 신앙의 힘을 기르던 그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기도와 세례문답 공부에 힘을 쏟았다. 이윽고 19034월 부활 주일, 그는 W.B. 스크랜튼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1903년 가을 군대를 그만두었다.

이필주는 이때부터 겨울 상동교회에서 교회당 청소일을 맡으면서 스크랜턴과 전덕기로부터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사경회(査經會)에 빠짐없이 출석하며 신앙생활에 열의를 다했다. 19041, 그는 속장의 성직을 받았으며, 1904년 봄부터 공옥학교의 체육교사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또한 1904년 여름엔 권사의 직분을 받았고 학교에서 체육을 가르치는 한편 목사와 같이 심방도 다니며 전도생활에 충실했다.

이 무렵, 상동교회는 초등교육기관인 공옥학교에 이어 중등교육기관을 세우게 되는데 19041015일 상동청년학원이 개교되었고 교장에는 이승만, 부교장에는 박승규가 임명되었다. 상동청년학원에는 기라성같은 교사들이 포진했다. 우선 성경을 필수 과목으로 정해 전덕기가 직접 가르쳤고, 주시경은 국어를 담당하며 한글보급운동을 전개했다. 또 장도빈과 최남선 등이 국사를 맡았으며, 남궁억과 현순이 영어와 영문법을, 조성환이 한문을 가르쳤다. 그리고 신체 및 정신 단련을 목표로 하는 체육은 이필주가 가르쳤다. 군인 시절 강건한 체력을 연마했던 그는 체육 시간에 도수 체조 및 구기운동을 가르치는 한 편 군사 훈련도 겸했다.

▲ 한교총 주최 3.1운동 102주년 기념예배에서 윌리엄 린튼, 이필주 목사, 신석구 목사 후손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 뉴스파워



190511월 을사조약이 선포되자, 상동교회는 을사조약 무효를 주장하며 구국기도회를 열어 구국운동에 앞장섰다. 이때 구국지사들이 앞다퉈 상동교회로 몰려들었고, 전덕기를 중심으로 김구, 이동녕, 조성환, 이준 등은 상소 운동을 구체적으로 전개했다. 그러나 상소운동으로는 기울어진 정국을 바로잡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들은 각기 교육에 힘을 쏟아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했다. 이 시기 이필주는 전도에 힘을 쏟아 19074월 전도사의 직분을 받고 청파동의 기도방을 설립해 저녁마다 전도하여 교회 설립에 주춧돌 역할을 수행했다.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 7조약이 체결되어 군대가 강제 해산당하는 등 국운이 갈수록 쇠진해지고 있던 1907년 여름, 상동청년학원은 체육에 한층 더 힘을 쏟았다. 군인 출신인 김창환과 이필주의 지도하에, 학생들은 체조 시간에 목총을 메고 군가를 부르며 북소리에 맞추어 행진하는 등 독립군 양성 교육을 받았다. 1910, 상동청년학원은 60여 칸의 3층 서양식 교사를 건축하여 대표적인 민족교육기관이 되었다. 또한 이필주는 전덕기 목사의 소개로 YMCA의 체육교사직도 맡았다.

한편, 그는 신민회에 가담해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11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와해되자, 그는 일제의 체포망을 피하고 본격적으로 목회자의 길을 가기 위해 협성신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3년 새로 개척한 왕십리교회의 전도사 자격으로 파견되었다. 당시 왕십리는 서울에서 기독교의 교세가 가장 약한 구역이었지만, 이필주는 목회 활동을 열심히 해 신도를 대거 늘리는 성과를 거뒀다. 1915년엔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1918년에는 정동교회의 담임자로 파송받았다.

그러던 1919121일 고종이 붕어했다. 이후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한반도 전역에 확산되자 민중들의 반일 감정이 치솟았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인사들은 지금이 바로 독립선언을 할 호기라고 판단하고 31일에 독립선언식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각자 민족대표를 선발하기로 했다. 226일과 27, 기독교계 인사들이 이필주의 집에 모여 기독교계 민족대표에 추대할 인물을 선정했다. 이때 이필주는 기독교 감리회 대표로서 민족대표 33인에 참가했다. 그가 감리회 대표로 추대된 것은 감리회 교회의 대표격인 정동교회의 담임 목사라는 점과 전덕기 이후 사실상 감리회를 대표하는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점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228일 손병희 집에서 마지막 모임을 갖은 민족대표들은 31일 오후 2시 탑동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키로 했던 계획을 변경하여 같은 시각 태화관에서 거행키로 한다. 독립선언 식장을 갑자기 음식점으로 바꾼 것은 탑동공원에는 젊은 학생들이 모이게 되어 있어 혹시 불상사가 생겨 행여 큰 일을 그르칠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거사일인 31일 오후 2시 태화관에는 길선주, 김병조, 정춘수, 유여대 등 4인을 제외한 29인의 대표자가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가 선언식이 끝난 직후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필주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뒤 신문을 받으면서 자신의 뜻을 당당하게 밝혔다.

이필주는 19201030일 결심공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1114일 공덕동 경성감옥에서 만기 출옥했다. 이후 한 교회에 머물지 않고 주로 전도회, 부흥회 등을 통해 활발한 강연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강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기독교 신앙의 전파 외에도 민족의식 고취에도 힘을 쏟았다.

193465세의 나이로 중부 연회에서 은퇴한 이필주는 수원의 남양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1942421일 사망했다. 향년 73. 1946년에 민족대표로 감옥살이를 함께한 오화영이 참석한 가운데 남양교회 마당에 이필주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고, 1969년에 민족대표 33인 중 유일하게 생존한 이갑성이 참여한 가운데 기념비가 다시 세워졌다. 또한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이필주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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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3/01 [10:11]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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