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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0.19 [15:34]
탐욕에 지고 만 자, 게하시
열왕기하 4:8∼37; 5:20∼27
 
김윤희

미가서에 보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죄상을 열거하면서 그들의 불의를 공격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占)치면서”(미 3:11)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시대의 악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데, 특히 정치 지도자나 종교 지도자들 모두 공통적으로 재물의 덫에 걸려 있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본문에서 소개될 인물은 바로 이러한 물질의 덫에 걸려 패망한 자, 게하시이다. 그의 모습을 통해 황금만능시대를 살고 있는 크리스천들이 다시 한번 물질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게하시는 누구인가?

게하시는 선지자 엘리사의 사환으로 열왕기하 4장 12절에 처음 등장한다. 열왕기상 20장 14절부터 15절에 보면 사환은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젊은 청년”이란 뜻으로 사용되어 엘리사 옆에서 섬겼던 제자로 해석된다. 게하시는 엘리사의 사역 속에서 간간히 등장하는데 특히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는 기적”(왕하 4:8∼37)과 “문둥병자 나아만의 치유”(왕하 5:20∼27)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두 사건을 중심으로 게하시에 대하여 살펴보자.

엘리사가 사역했던 시기는 영적으로 어두운 시기였다. 이스라엘 아합 왕이 바알 숭배를 국교화하다시피 한 분위기 속에서(비록 그가 죽었고 그의 아들인 여호람이 대를 잇고 있었다 할지라도) 영적 분위기는 호전되지 않았다. 여호람은 비록 그 부모만큼은 악하지는 않았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왕하 3:1∼2)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영적인 암흑 속에서도 큰 자들이 여호와를 섬기고(수넴 여인의 경우) 여호와를 믿게 되었다(나아만의 경우)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점에서도 두 사건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또한 두 사건은 ‘보답과 거절’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수넴 여인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엘리사를 섬겼고(4:9), 그렇기 때문에 엘리사가 거기에 대해 보답하려는 제안을 했을 때에(4:13) 그것을 정중히 거절한다. 수넴 여인이 대답한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나이다”(4:13)라는 표현은 자신은 현재의 위치에서 만족하며 이미 보호를 잘 받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엘리사와 수넴 여인 사이에서 본의 아니게 중재 역할을 하는 인물이 게하시이다.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고민하자 게하시가 그 해결사로 나선 것이다. 게하시는 이 여인이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어서 자식을 얻을 가능성이 희박함’을 귀띔해 준다. 여기에서는 게하시의 중재가 긍정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의 관찰력과 통찰력이 뛰어남을 볼 수 있다.

나아만 사건의 경우에도 ‘보답과 거절’이라는 주제가 나와 있다.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자신의 문둥병을 치료해 준 엘리사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 예물을 드리려고 했을 때에(5:15) 이번에는, 역으로 엘리사가 정중히 거절한다(5:16). 그리고 엘리사와 나아만 사이에, 이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중재를 하는 자가 게하시이다. 게하시의 중재는 여기에서는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점에서 두 사건이 많은 연결성을 가지고 있다.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리는 기적’의 사건 속에서의 게하시(왕하 4:8∼37)

수넴 여인은 게하시의 아이디어 덕분에 아이를 얻게 된다. 그런데 이 아이가 병이 들어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여인이 선지자 엘리사에게 구원을 요청하기 위해 급히 달려간다(왕하 4:24). 엘리사가 멀리서 수넴 여인의 오는 것을 보고 사환 게하시에게 달려가서 그녀를 맞아 물어보도록 지시한다. 여기서 여인은 평안하다고 짧게 답한다(4:26). 그리고는 산에 올라가서 엘리사에게 나아간다.

왜 여인은 게하시에게 평안하다고 답했을까? 일단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엘리사에게 가서 사정을 알리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안중에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게하시에게 ?평안하지 않다?고 말해 봤자 설명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것 외에 그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게하시는 완전히 무시당한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의 대답은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한 측면이 있다. 게하시에게 예의 있는 의례적인 인사를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또한 그녀가 진정으로 믿는 믿음의 측면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어느 쪽의 해석이든 게하시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입장인 듯하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라고 되어있다(4:27). 이것은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표현으로 그녀의 소원함이 얼마나 절박한 지를 보여 주는 겸손한 애청의 태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하시에게는 이것이 무례하게 보였는지 가까이 와서 그녀를 물리치려고 한다. 이제까지의 수넴 여인과 엘리사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그것을 막으려는 게하시의 행동에는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조금 전에 무시당한 은근한 반감의 표현이라면 너무 무리한 해석인가? 그런 게하시를 엘리사가 막으며 그녀의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건의 긴급성과 중요함을 파악한 엘리사가 게하시를 먼저 수넴 여인의 집으로 보낸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4:29)고 지시한다. 그 당시 문화권에서 인사도 하지 말고 인사도 받지 말라는 것은 지극히 무례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만큼 지체할 수 없는 시급한 사안임을 감안한 것일 수도 있고, 선지자의 사명에 어떠한 사소한 산만함도 배제한 것이라 볼 수도 있고, 또한 선지자로부터 받은 능력을 발산시킬 위험을 막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수넴 여인은 엘리사 외에는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듯하다. 그녀는 엘리사에게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4:30)라고 말하며 함께 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사표시를 단호히 한다. 이에 대하여 게하시를 먼저 보낸 엘리사는 여인을 쫓아 나선다.

그런데 말씀에서는 그들보다 먼저 간 게하시가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는 모양도 없는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으며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4:31)라고 보고한다. 지팡이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분분하다. 지팡이는 과거에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나타내는 상징으로(예: 출 4:1∼4) 엘리사는 게하시와 함께 지팡이라도 먼저 보내서 아이의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고 자신의 도착을 준비시키는 역할로 생각한 것 같다.

게하시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유대전통의 해석에 따르면 게하시가 엘리사의 능력을 의심했기 때문에 지팡이가 기적을 일으키는 매체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본다. 또 다른 해석에서도 게하시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영적인 능력보다는 단지 지팡이만 갖다 놓는 의무만을 수행하고 쉽게 무엇인가 일어나기를 기대했기 때문에 아무런 영적인 결과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게하시의 실패는 엘리사가 아이를 살리는 기적의 성공과 대조를 이루며 엘리사가 하나님의 거룩한 참 선지자임을 입증하는 데에 기여한다. 
 
‘문둥병자 나아만의 치유’ 사건 속에서의 게하시(왕하 5:20∼27)

선지자 엘리사의 기적은 국경을 뛰어넘어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의 문둥병 치유로 이어진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마음의 표시로 물질적인 보답을 제시했으나 거절당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길을 떠나간다. 20절부터는 나아만과 연결된 또 다른 스토리가 시작되는데 여기에서 중심인물이 바로 게하시이다.

본문은 게하시를 새롭게 처음부터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5:20). 문둥병 치유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을 목격한 게하시의 관심은 어느덧 나아만이 그대로 본국으로 가지고 가는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5:5)에 맞추어져 있었다. 이것은 약 340킬로그램의 은과 90킬로그램의 금에 해당되는 양으로 상당한 액수를 의미한다.

게하시의 ‘이 아람 사람’이라는 표현 속에는 나아만을 이방인으로 얕보는 듯한 뉘앙스가 깔려 있다. 그의 이러한 배타성은 엘리사의, 이방인도 고쳐 주는 포용성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게하시가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는 내용이 엘리사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한 내용(5:16)과 상반됨으로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게하시의 “내가 저를 쫓아가서”라는 표현에서는 기필코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받아내야겠다는 단호한 결심이 나타난다. 선지자의 제자로서 게하시는 엉뚱한 일에 사명을 두고 행동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게하시와 나아만의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대조를 이룬다. 쫓아오는 게하시를 보고 나아만은 수레에 내려서 그를 맞이한다. ‘내린다’는 표현은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떨어진다’라는 뜻으로 마치 떨어지듯이 수레에서 급히 내리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나아만이 얼마나 겸손하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나아만은 더 이상 도도하고 교만한 이방인이 아닌 겸손하고, 은혜에 보답할 줄도 알며 감사할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된 것이다. 수레에서 떨어진 자(내려서)는 나아만이지만 진정으로 떨어진 자(죄로 타락한 모습을 보이는)는 게하시였던 것이다.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를 알아보고 그를 맞이한 나아만은 “평안이냐”고 묻는다. 나아만의 이런 순수한 질문에 게하시의 답은 간단하지만 속임수의 냄새로 가득 차 있다. 또한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은 게하시가 수넴 여인에게 물었던 질문이기도 하다. 수넴 여인은 게하시에게 의례적인 대답만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녀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엘리사를 만나는 것! 나아만의 질문에 게하시도 “평안이라”고 답한다. 그의 목적도 다른 곳에 있었다. 그것은 엘리사를 피해서 나아만을 만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게하시의 마음속의 평안은 이미 깨어진 상태였다.

게하시는 엘리사가 시켜서 온 것처럼 둘러대며 적당히 이야기를 꾸며 나아만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요청한다(5:22). 원래 나아만이 가지고 온 액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값어치이다. 그러나 게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선지자인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가르쳐 준 원칙을 임의로 무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문둥병을 치료한 분은 하나님이시며 엘리사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원리였다. 또한 엘리사 자신이 이방의 우상 숭배자들의 사제들과 구분됨을 보여 주기 위한 목적도 숨어 있었다. 그런데 게하시는 물질적인 이득을 위해 문둥병 치유를 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한 사역자로서의 원리를 게하시는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있었다.

나아만은 요청한 액수보다 두 배를 가져가도록 호의를 베풀며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워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도록 명한다. 여기에서 ‘둘’이라는 숫자가 반복되어 강조된 것은 나아만이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엘리사에게 요청한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5:17). 그는 여호와만을 예배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흙을 자신의 나라로 가지고 가고 있었고 게하시는 여호와의 명예와 그의 선지자의 명예에 먹칠을 하며 요란스럽게 속임수를 써서 물질을 가지고 가는 모습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나아만의 신실함과 친절이 게하시의 불충함과 탐욕을 더욱 추하게 보이도록 두 사람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나아만이 게하시에게 물질을 받으라고 억제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나아만이 엘리사에게도 똑같이 한 것이다. 엘리사의 경우는 같은 단어가 “강권하되”(5:16)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니까 엘리사나 게하시나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다. 차이점은 전자는 물질을 거부했고 후자는 그것을 원했다는 점이다.

언덕에 이르러 게하시가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취하여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시 한번 ‘둘’이라는 숫자가 강조되며 게하시의 범죄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24절에 다섯 개의 동사가 게하시의 완전범죄를 위한 행동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언덕에) 이르러, (물건을) 취하여, (집에) 감추고, (사환들을) 보내어, (그들을) 가게 한 후.” 이제는 엘리사만 속이면 게하시의 계획은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이다.

게하시가 들어가서 엘리사 앞에 서니 엘리사가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고 묻는다. 게하시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이런 식의 질문은 주로 죄 지은 자를 힐문할 때 많이 쓰였다(예: 창 3:9; 4:9). 게하시는 태연하게 “종이 아무 데도 가지 아니 하였나이다”라고 답한다(5:25). 게하시는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찾아 왔을 때에 엘리사가 그 여인의 문제를 잘 몰랐던 것을 기억하고(4:27) 안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우가 달랐다. 엘리사는 정확히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음을 밝힌다. 그의 심령(마음)이 감각(感覺)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심령이 범죄현장에 있었음을 알리고 있다. 엘리사는 게하시의 미래의 계획까지도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5:26). 여기에 언급된 목록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이야기할 때도 쓰였고(신 6:11; 수 24:13) 인간의 욕심을 묘사할 때에도 쓰였다(삼상 8:14~17). 하나님이 주실 때만이 진정한 복이 됨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게하시의 꿈은 이렇게 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게하시는 죄의 대가로 나아만의 문둥병을 자신과 자신의 자손에게 영원토록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 효력은 즉시 발휘되었다: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 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본문은 나아만의 문둥병으로 시작하여 게하시의 문둥병으로 마치고 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접하자마자 변화되었고 그분만을 섬기고자 하는 헌신을 나타내었다. 게하시는 참 선지자의 제자로 영적으로 우위에 있었고 여호와의 기적을 여러 번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특권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결국은 탐욕에 지고 말았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탐욕을 주의하라. 열왕기하 5장, 게하시와 연결된 사건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단어는 “취하겠다”는 동사이다: 5장 20절에 처음 이 단어가 쓰였는데 게하시는 이 과정에서 두 가지의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다. 바로 엘리사의 관대함을 잘못된 처사로 규정지은 것과 그의 스승을 거스려 엘리사가 “취하지 않기로 한 것”(5:16)을 본인은 취하기로 맹세한 점이다.

또한 이 단어가 쓰인 곳은 나아만이 관대하게 선물을 주며 받으라고 하는 부분이다(5:23). 게하시는 여기에서도 세 가지의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다. 자기 스승인 엘리사의 권위를 빙자하여 물질을 도용하며 거짓말로 꾸며 나아만을 속이고, 엘리사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물질을 취하므로 동시에 하나님의 권위까지도 추락시킨 것이다. 또한 나아만의 경건된 친절과 호의를 십분 이용했다는 점이다.

또한 게하시가 나아만의 사환에게서 물건을 “취했다”는 구절이다(5:24). 여기에서도 게하시는 두 가지의 잘못을 저지르는데, 예물을 감춤으로 계속적으로 게하시는 속이는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물건을 착복함으로 훔치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의 사환은 도둑으로 전락하고 만다.

마지막으로 이 단어가 쓰인 곳은 엘리사가 게하시를 추궁하며 그가 은을 “받으며” “옷을 받는 것”을 보았다는 장면이다(5:26). 여기에서도 게하시의 죄로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바로 자신의 스승이고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를 철저히 속인 것과 엘리사가 사역하던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상을 생각해 보았을 때에 하나님의 사람의 제자인 게하시의 이러한 행동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엘리사의 질책에서 잘 나타난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받을 때냐”. 그렇게 살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게하시는 철저히 영적으로 무감각한 자였다. 이것도 영적으로 거듭난 나아만과 대조를 이루는 부분이다. 게하시의 이기적인 탐욕은 이렇듯 무서운 죄의 축적의 효과를 가져왔다. 죄는 이렇게 계속 장성하는 효과가 있다. 

둘째, 교회 지도자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성경적 물질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신약 성경에 보면 특히 교회 지도자들을 세울 때에 그들의 자격을 명시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목록 중의 하나가 바로 돈에 대한 개념이다. 감독을 세울 때에 그는 “돈을 사랑치 아니하는 자”(딤전 3:3; 비교: 딛 1:7; 벧전 5:2)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집사들도 “더러운 이(利)를 탐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계하고 있다(딤전 3:8).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딤전 6:5; 비교 딛 1:11)에 대하여 경고한다. 물론 문맥상 다른 교훈(이단)을 하는 자들의 소행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의미는 누구나 다 새겨들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사역을 물질의 이득을 얻기 위하여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사도 바울이 제시하는 것이 “자족하는 마음”(딤전 6:6)이다. 이런 말씀들을 살펴보면 교회 지도자들이 물질에서 자유롭기가 힘들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예외라고 간주하지 말고 각자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지도자가 되며 특별히 올바른 성경적 물질관을 가진,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늘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복음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엘리사가 나아만의 물질을 거부한 이유는(왕하 5:16) 본인의 사역이 물질적인 이득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기 위함이다. 당시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물질을 바라보고 사역을 했다. 게하시도 그러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물질로 보상될 수 없는 거져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확실히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라는 말씀은 이러한 원리를 잘 가르쳐 주고 있다. 구원이라는 선물은 너무나 값지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을 보상함으로 얻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값진 선물을 나아만은 엘리사를 통하여 받았다. 우리도 이러한 멋진 선물을 나누어 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물을 많이 나누어 주는 삶을 살도록 더욱 헌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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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9/22 [14:40]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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