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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김준곤 목사의 첫 복음전파로 고향마을 봉리교회가 시작됐다"
신안군 지도읍 봉리교회 연혁문서에 “1950년 4월 15일에 김준곤 목사의 첫 복음전파로 시작되다”
 
김현성   기사입력  2022/09/29 [12:04]

전남 신안군 지도읍 봉리 원동마을에 설립된 봉리교회가 이 마을에서 출생한 한국CCC 설립자 김준곤 목사(1925.3.28.~2009.9.29.)에 의해 시작 1951415일에 시작됐다는 문서가 공개됐다.

▲ 신안군 지도읍 봉리교회     ©뉴스파워

  

그동안 김준곤 목사의 친척인 문준경 전도사가 마을을 순회하며 복음사역을 할 때 봉리마을은 김준곤 목사의 집에 2~3일씩 머물면서 어머니에게 복음을 전하고 동네사람들을 모아 복음을 전했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으나, 봉리교회가 김준곤 목사의 첫 복음전파로 시작됐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밝혀진 것이다.

 

CCC총재특보를 역임하며 김준곤 목사를 가까이에서 보좌했고, 김 목사의 역사 정리를 해 온 김철영 목사(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는 김준곤 목사 서거 13주기인 29일 문서를 공개했다.

 

지난 26일과 27일 전남 신안을 방문한 김 목사는 봉리교회 최용호 담임목사를 만나 펜글씨로 쓰여진 교회 연혁이 적힌 문서를 전달받았다고 밝혔다.

 

▲ 신안군 지도봉리교회 연혁. 김준곤 목사가 첫 복음전파를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뉴스파워

 

<봉리교회 연혁>이라는 이 문서에 따르면 “1951415일 김준곤 목사의 첫 복음전파로 시작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 목사는 한 달 후에 송리복 전도사를 봉리교회 초대 전도사로 청빙할 수 있도록 주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봉리교회 연혁 문서에는 “1951515일 송리복 전도사가 초대 교역자로 부임하여(김준곤 목사 안내로) 당시 남상길 집사댁에서 모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김 목사가 한 달만에 봉리교회 초대 전도사를 송 전도사로 청빙한 것은 6.25 전쟁의 상처와 아픔 때문으로 보인다.

▲ 김준곤 목사님이 장로회신학교 1회로 졸업하셨을 때 사진. 우측이 6.25 때 순교하신 인정진 사모님. 따님 은희.     ©뉴스파워

 

 

김준곤 목사는 19489월 장로회신학교 제1회로 졸업한 후 경기도 파주 금촌에 있는 한 교회에서 교역자로 목회를 하면서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해 주말에는 기차를 타고 성결교신학교에서 미국 선교사가 영어로 하는 신학강의를 영어 듣기를 훈련하기 위해 배우러 다녔다.

 

1950625가 발발하자 인정진 사모와 딸 은희(1946.10.29.-2021.7.23.)를 데리고 고향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석달 후인 103일 밤 좌익들에 의해 김 목사의 부친(김면주)이 죽임을 당했고, 주일학교 교사를 했다는 죄로 인정진 사모는 순교를 당했다. 좌익들에게 끌려다니면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당시 좌익들의 광란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과 군이 4번이나 상륙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런 상황에서 지도서장으로 발령을 받은 김곤근 서장은 해병대의 함포 사격의 지원을 받으며 경찰 11명과 해병대 1개 소대를 이끌고 상륙을 시도해 1017일 결국 성공했다. 그렇게 해서 무시무시하던 살육의 피비린내 나는 무법천지가 끝난 것입니다. 그때 경찰과 해병대가 지도에 상륙을 못했다면 김준곤 목사도 순교를 당했을 것이다.

▲ 1950년 10월 17일 신안군 지도서장으로 발령받아 경찰 11명과 해병대 1개 소대를 이끌고 지도에 상륙해 좌익들의 준동을 막아냈던 김곤근 서장     © 뉴스파워

  

김곤근 서장은 120명의 가담자들을 지도 지서로 잡아들였다. 그들을 계엄사령부로 올려보내면 모두 사형을 당할 수밖에 없는 중죄인들이었다. 김곤근 선생은 2004년 <CCC편지> 4월호에 인터뷰를 통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그런데 상륙 이틀 후 김준곤 목사님이 젖먹이를 데리고 지도서로 찾아와 그들을 양떼들이라고 부르면서 용서해 주자고 부탁을 해요. 김 목사님의 부탁으로 이들을 계엄사로 보내지 않고 놓아주었더니 유가족들이 지서로 찾아와서 잉크병을 집어 던지면서 '네도 빨갱이다' 라면서 거칠게 항의를 했어요.” 이 일로 김곤근 선생은 부임 4개월 만에 신안군 암태라는 섬의 지서장으로 좌천을 당했다.

 

가장 극한 고통 가운데 가장 위대한 용서를 호소한 김준곤 목사의 모습은 선한 목자의 표상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과 고통 속에서 네 살 된 어린 딸을 데리고 봉리교회 시작의 첫 복음의 씨앗을 뿌렸던 것이다.

 

봉리교회는 19524월 송희복 전도사가 사임을 하고, 19525월 감정리 소재 백련교회로 전 성도들이 임시 출석을 했다. 그리고 19549월 다시 봉리 원동 소재 박금례 집사 댁에서 모였다.

  

▲ 김준곤 목사 생가 입구 봉리교회에서 세워놓은 "오직 예수" 돌비     ©뉴스파워

 

19559월에는 서동 남집사 댁에서 모였으며, 1958324일 김재권 전도사가 부임해 196047일 원동에 16평의 초가 교회당을 건축했다. 19654월 김재관 전도사가 사임하고 196627일 박형구 전도사가 부임해 19705월까지 시무했다. 이어 19701015일 정재원 전도사가 부임해 197210월까지 시무했다.

 

19721113일 이영조 전도사가 부임했으며, 1972121일 성가대가 조직됐다. 교회가 그만큼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197311일 교회당 신축안이 통과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준곤 목사는 봉리교회 예배당 건축을 위해 밭을 기증하고 큰 액수의 건축헌금을 냈다.

 

▲ 김준곤 목사 목사 안수 1951. 91.13     ©뉴스파워

 

가족을 잃은 슬픔과 아픔 속에서 봉리교회 시작의 첫 복음의 씨앗을 뿌린 김준곤 목사는 1951913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전남 영광 법성교회와 광주서부교회(현 서현교회)를 거쳐 광주숭일중고등학교 교장과 교목을 역임했으며, 여수 애양원 한성신학교 교수로 한 학기 사역한 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풀러신학교에서 CCC 설립자 빌 브라잇 박사를 만나 대학생 사역을 제안 받고 귀국하여 1958년 해외 국가로는 첫 번째로 한국CCC를 창설했다.

 

김 목사는 대학생 사역을 전개하면서 민족 복음화운동을 전개했다. 1965222일 김종필, 박현숙, 김영삼, 정일형 의원 등 여야 기독 국회의원 20여 명과 함께 국회조찬기도회를 시작했다. 이어 국회조찬기도회 국회의원들과 함께 196638일에는 제1회 대통령 국가조찬기도회를 시작했다.

 

19688월에는 민족복음화운동의 제3의 집단으로 사랑방전략을 실천할 나사렛형제들을 창단했다. 1969년에는 군의 정신력 강화를 위한 전군신자화운동을 제안하고 2400 여 명의 영관급 장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 한국CCC 김준곤 목사가 군부대 장병을 대상으로 반공강연회를 하고 있다. 전군신자화운동의 일환이었다.     ©뉴스파워

 

 

1971110시에 기독교방송을 통하여 민족복음화운동을 선언했다. 19718월 대전충무체육관에서 민족복음화 요원 강습회, 1972731~84일까지 춘천성시화운동 전도대회, 1974812~17일까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엑스플로‘74대회를 개최하면서 한국 교회 부흥의 대로를 놓았다. 19808월에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80세계복음화대성회를 개최하여 10만 명 선교사 헌신을 이끌어냈다.

 

 

▲ 엑스플로 '74대회     ©뉴스파워

김준곤 목사는 특히 625의 상흔 속에 북한 동포들에게 통일 후에 북한의 4300여 동리에 대학생 전도자들이 들어가서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북한양촌운동을 주창했으며, 1990년 중반 북한 주민 3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수환 추기경, 송월주 전 조계종 총무원장 등과 함께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을 조직해 10년 동안 공동상임대표를 맡아 대북 인도적 지원활동에 앞장섰다.

 

▲ 1984년 6월 5일부터 11일까지 열린 '84세계기도대성회에서 김준곤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뉴스파워

 

20007CCC 대학생들을 도전해 10352마리의 북한젖염소보내기운동에 헌신 작정하도록 도전하고 황해북도 봉산군에 32만 평 규모의 CCC은정젖염소 목장을 완공했으며, 2002128일부터 23일까지 송월주 조계종 전 총무원장 , 강원룡 목사, 서영훈 흥사단 아카데미 이사장, 강문규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장,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서경석 목사, 이용선 사무총장(현 더불어민주당 서울양천을 국회의원) 등과 북한을 방문해 황해북도 봉산군 은정젖염소목장 둘러봤다.

▲ 2002년 1월 28일- 2월 3일까지 북한을 방문한 김준곤 목사(좌측 두번째)가 강문규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장과 함께 황해북도 봉산군 은정젖염소목     ©뉴스파워

 

 

또한 2002한일월드컵기독시민운동협의회 대표회장을 맡아 친절봉사 청결정직질서운동(KS-CHO)운동을 펼쳐 월드컵의 성공개최에 기여하는 등 평생을 대학생 선교를 기반으로 한 민족과 세계를 품고 사역을 했다. 2009929일 서거했다.

 

김철영 목사는 김준곤 목사님은 사과 속의 씨앗은 셀 수 있으나 씨앗 속의 사과는 셀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면 반드시 수많은 열매가 맺어진다는 말씀이라며 한국교회 교인수가 많이 감소했고, 전도가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 김준곤 목사 생가인 신안군 지도읍 봉리 원동마을 생가 뒷편에 있는 선영. 김 목사가 소천하기 1년 전 인정진 사모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뉴스파워

 

 

한편 한국대학생선교회(CCC, 대표 박성민 목사)와 세계성시화운동본부(대표회장 김상복 목사, 전용태 장로)는 지난 829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제1차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데 이어 오는 117일 오후 3시 신안군 증도면 문준경전도사순교기념관에서 김준곤 목사 선양 제2차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

김준곤 목사는 문준경 전도사로부터 가장 먼저 복음을 접했으며, 문 전도사의 사역을 보면서 교회가 지역사회의 목민센터가 되며, 지역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대신거지운동' 등의 아이디어를 한국교회에 접목시켰다. 그래서 문준경 전도사를 "내 신앙의 원초"라고 했다.

 

2차 학술심포지엄에는 주도홍 박사(총신대 초빙교수, 백석대 전 부총장)김준곤 목사의 통일운동에 대해 발제하고 논찬은 안인섭 교수(총신대 신대원)가 담당한다.

또한 “
문준경 전도사와 김준곤 목사의 영적 계승를 주제로 한 발제는 이은선 교수(안양대)가 발제하고 김호욱 교수(광신대)가 논찬을 한다.

신안군 관광문화와 김준곤 목사를 주제로 한 발제는 곽행구 박사(광주전남연구원)가 담당하며, 관광문화 전문가인 황종환 박사(지식공유상생네트워크 이사장)가 논찬을 담당한다.

 

▲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뉴스파워

  

학술심포지엄 개최에 맞춰 순교기념관에서 김준곤 목사 어록전시회를 개최할 준비하고 있다. 순교기념관을 찾는 순례객들에게 김준곤 목사의 주옥같은 말씀을 묵상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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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9/29 [12:04]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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