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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석가, 여러 공통적인 가르침이 있다"
정성민 박사(기독교학술원 해외연구원), 기독교학술원 해외 학자 초청 강연
 
김철영   기사입력  2022/09/24 [07:57]

 

정성민 박사(기독교학술원 해외연구원)가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 주최 '해외 학자 초청 강연회'에서 예수와 석가의 대화, 복음주의 종교학의 길의 길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 기독교학술원 해외학자 정성민 박사 초청강좌     ©뉴스파워

 

 

지난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 온누리교회 믿음홀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정 박사는 예수와 석가의 가르침의 유사성을 설명하면서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의 창구로 삼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정 박사는 먼저 기독교와 석가의 사상은 서로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관이라며 석가의 사상은 무신론, 무아론, 인본주의 그리고 사후세계의 부정 등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체계라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기독교는 유신론, 유아론, 신본주의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 등을 지닌 초월적인 세계관이라며 이런 면에서 이 둘은 각기 대조적인 입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기한 것은 서로 정반대 성향의 두 종교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눈에 보이는 갈등 관계를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 간의 이질감과 배타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기독교와 불교의 입장 차이를 극복하고 과연 서로 간에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으며, 예수와 석가와의 대화가 가능한 가에 대해 강연을 이어갔다.

 

정 박사는 예수와 석가의 가르침의 유사성으로 마음속의 욕망이 고통의 원인이다. 예수와 석가의 가르침의 유사성 도덕적이고 거룩한 삶은 인간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 삶이다. 예수와 석가가 지향하는 삶은 무욕과 무소유이다. 예수와 석가모니는 계급이나 차별이 없는 이상적인 세상을 추구했다. 예수와 석가모니는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가르쳤고 또한 몸소 실천했다.” 등을 제시했다.

▲ 기독교학술원 해외학자 초청강좌에서 정성민 박사가 발표를 하고 있다.     ©뉴스파워

 

 

정 박사는 예수와 석가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마음속의 욕망 혹은 죄를 제거하여 개인적으로 평안한 삶을 누리며, 사회적으로는 서로가 착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서 도덕적으로 청정한 세상이 되길 원했다.”고 말했다.

또한 단지 예수와 석가의 차이는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차이라며 즉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와 어떻게 욕망을 제거하여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의 방법론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정 박사는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세상의 모습은 거의 일치한다.”바로 이 부분이 예수와 석가를 따르는 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며 서로 간의 대화의 창구라 여겨진다.”고 밝혔다.

논찬을 한 호서대 전부총장 이상직 박사는 먼저 왜 제목이 <기독교와 불교의 대화>가 아닌 <예수와 석가의 대화>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는 해외학자 초청 강연회를 개최했다.이상직 전 호서대 부총장이 논평을 하고 있다.     ©뉴스파워

 

 

이 박사는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종교들은 창시자의 본래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일탈의 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종교개혁운동은 원천으로<ad fontes> 돌아가자는 운동이라며 그러나 18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역사적 예수의 탐구> 운동은 본래의 예수님의 말씀을 편집해서 취사선택하고 정통교회가 믿는 신앙의 그리스도를 제거하려는 시도라는 의혹을 받아 왔다. 본래의 예수님을 찾자는 운동이 도덕주의자 혹은 사회 개혁가 예수님을 발견한 운동으로 변질 되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마찬가지로 만일 현대 불자들이 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석가의 가르침만을 중시할 때 이미 대세가 된 21세기 불자들은 매우 당황하지 않을까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특히 이미 한국의 다수가 된 대승불교에서 숭배의 대상이 된 보살들과 부처들, 그리고 정토불교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정 박사에게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에 대하여 좀 더 분명한 정의를 내려 주시면 좋겠다.”불교적 입장에서는 고통의 원인 혹은 뿌리는 인간 내면에 잠재한 갈애이고, 그 갈애의 원인은 무지이다. 반면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인간의 죄가 그 원인이다는 정 박사의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앞에서 죄와 마음의 욕망을 동일시하는 논지를 펼치는 것에 대해서는 제 생각은 죄가 들어오고 마음의 욕망이 나타난 것이고, 그 결과로 고통이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죄가 마음의 욕망보다 더 근원적이어서, 죄에 대한 숙고가 먼저 있어야 마음의 욕망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밝혔다.

특히 죄의 종류는 다양해서 자아의 마음의 욕망으로 짓는 죄도 있으나, 관계에서 비롯된 사회구조적인 죄도 있다. 또한 고통에는 의를 위한 고난도 있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같이 벗어나야만 하는 고통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 장려해야할 고통이 있다.”순교와 의를 위해 받는 박해와 같은 거룩한 고통은 피하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는 지난 22일 오후 3시 서울 서초구 양재 온누리교회 믿음홀에서 해외학자 초청 강연회를 개최했다.     ©뉴스파워

 

이 박사는 석가가 무아와 무상성에 대한 명상을 통해 열반에 이르는 해탈의 길을 제시하고 장려하였으나 후대에 가서 도솔천에 대한 갈망으로 불교가 흘러간 것은 죄가 가득한 세상의 상식적 인간이라면 마음의 욕망 혹은 자아를 버리는 수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 박사는 기독교가 석가에게서 배워야 하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와 관련해서 여기서 과학적이라는 말이 상식적, 경험적이라는 의미로 쓴 것인가?”라고 질문했다.

 

이어 기독교는 신비주의적 종교다.... 이런 면에서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기독교신앙은 석가가 주장하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와 조화를 이룰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라는 정 박사의 주장을 초자연적인 신비경험에 일방적으로 경도되지 말고 상식적이고 사회문화적인 가치관을 균형있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 박사는 하지만 예수님과 성경이 오히려 석가모니나 불교보다 더 상식적이고 일상적인가치를 중시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라는 예수

의 말씀은 가장 대표적인 교훈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또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는 사무엘의 교훈은 그 후 이사야(1:11), 호세아(6:6), 아모스(5:22), 미가(6:6-7) 선지자들을 거쳐 예수님에 이르렀다.“며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했다.

이 박사는 예수님께서는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12:33)라고 대답한 서기관을 칭찬하셨다.”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님 자신과 동일시한 말씀(25)은 일상의 삶, 그 중에서 약하고 천대 받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봉사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초인 또는 주체적 인간과 관련된 질문도 던졌다.

이 박사는 정 박사에 따르면 석가는 신과 초월에 기대는 대신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길을 걸으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책임지는 주체적 인간을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다른 동물들에 비하여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유아기가 가장 긴 인간이 책임적 존재로 더욱 잘 살아 갈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사는 존재가 사랑을 더욱 많이 할 수 있고, 주체적으로 더욱 잘 결단할 수 있는 것이라는 최근의 연구결과들이 많다.”며 칼 로저스 등을 언급했다. 또한 유아독존이 꼭 책임적 존재가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마지막으로 종교간의 대화에는 상대방을 이해하고 일정한 분야에서 협력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증언(witness)도 대화 안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이에 대한 정 박사의 견해를 물었다.

 

이 박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여 불교도의 개종을 기대하는 것도 대화의 한 목적일 수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또한 석가의 가르침을 통하여 더 풍요로운 기독교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박사는 결론적으로 정 박사는 복음주의 기독교 학자로서 진솔하게 불교연구의 모범을보이셨으며 불교와의 협력과 대화를 통하여 기독교의 자기 개혁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훌륭한 강의를 해 주셨다.”는 말로 논찬을 마쳤다.

 

다음은 강연 전문.

 

 예수와 석가의 대화복음주의 종교학의 길

 

I. 석가모니는 누구인가?

 

초기불교는 고타마 싯다르타가 열반의 깨달음을 얻은 후부터 시작하여, 그가 죽은 후에 제자들이 그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성립된 불교를 말한다. 이를 원시불교 내지는 근본불교라고 한다. 고타마의 사후 100년이 지나면서 제자들 사이의 석가의 가르침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생겨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이 되었고, 그 후로 다시 여러 갈래로 분열이 일어나 200~300년 동안 부파불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원시불교, 근본불교 내지는 초기불교는 부파불교 이전의 100년 동안의 불교를 말한다. 원시불교에서 초점이 되는 것은 고타마 싯다르타의 근본 사상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신약성경에 나타난 예수의 가르침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석가모니는 누구인가?

 

1) 석가모니는 순수한 인간이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평생 순수한 인간의 길을 가고자 했다. 석가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그의 깨달음은 인간적인 것이고 일상적인 삶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즉 석가는 그 자신이 한 사람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다른 종교 창시자들과 전혀 다른 그의 모습 중 하나다. 일반 종교들의 창시자들은 자신이 신이거나 신에게 계시를 받았다거나 아니면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화신이라고 주장한데 반해, 석가는 자신은 인간이며 어떤 초월적인 계시나 영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자면, 부처는 신의 아들이 아니며, 신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나 인간의 죄를 위해 희생당한 구속자도 아니다. 더 나아가 부처가 창조자이거나 사후심판의 최후의 심판자는 더더욱 아니다. 부처는 단지 순수한 사람일 뿐인 것이다.

 

2) 석가모니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철학자이다.

 

빈센트 판디타(Vincent Pandita)불교는 과학적 사고와 방법을 가지고 사색하는 과학적인 종교라고도 주장한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도 석가는 믿음보다는 이성적인 확신을 중시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불교가 초자연적인 계시가 아니라 인간에게서 나온 지극히 이성적인 가르침이며, 이것이 초기 불교의 성격을 규정짓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첫째로 석가의 깨달음은 연기론을 바탕으로 하는데, 이 연기론은 자연과학적 관찰을 근거로 생성된 이론이다. 연기(緣起)의 사전적 의미는 모든 현상이 생기고 소멸하는 이치라는 뜻이다. 즉 모든 사물은 원인과 원인이 일어나게 되는 조건이 상호작용하여 그 어떠한 결과가 생긴다는 뜻이다. 가장 간단하게 말하면 연기법은 개체가 생겨나고 사라지는 과정에 대한 원리를 말한다. 우리의 삶의 생성과 지속 그리고 소멸의 과정에서 그 모든 사건이 원인과 결과로 서로 연관되어 있고 상호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결국은우주의 만물도 한 몸인 관계이다. 서로가 의존해야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연기의 세계인 것이다.”그런데 우주 전체가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를 존재 상의성의 법칙이라고 한다.

만물은 서로 의존하고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원인과 조건이 변할 때 존재 역시 변하는 것이며,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세상에 고정불변하는 존재나 사물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그래서 태어남이 있는 것이고 사멸하는 것이 생기게 된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우주 만물이란 서로 의존하고 상호작용하는 것인데, 원인이나 조건이 변하면 이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 변하게 되고 이 상황에 따라 만물은 생겨나거나 사라진다. 결과적으로연기법은어떠한 존재라도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연기법은존재의 법칙을 설명하는 불교의 존재론으로서 우주를 운영하는 자연법칙을 말한다. 이러한 연기론은 석가가 무신론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철학적 근거가 된다.

둘째로, 무아론은 연기론의 최종 결과이다. 무아(無我)란 자아가 없다는 말로 힌두교에서 말하는 아트만, 즉 영혼이 없다는 주장이다. '인간의 심신을 총체적으로 통괄하는 내적인 본질이나 주재자와 같은 존재가 없다'는 말이다. 인간의 영혼 곧 아트만이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면, 인간의 존재는 무엇인가? 석가에 따르면, 인간의 존재는 영혼이란 불멸의 본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여러 환경과 요소들이 인연에 따라 모여서 자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세의 삶이 지나고 나면 여러 요소들은 서로 흩어져서 '나이면서 내가 아닌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석가는 사람이 죽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넘어가는 교량의 역할을 하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던 것이다. “모든 법은 무아이다또는 모든 법은 실체가 없다라는 그의 주장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이러한 석가의 무아론은 결국 석가가 사후세계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힌두교가 주장하는 실체적 윤회설을 그가 믿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이런 면에서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두 교리들, 즉 무아론과 윤회설이 서로 모순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는 윤회설이 석가가 개인적으로 깨달은 진리가 아니라 고대 인도의 민간신앙으로부터 전해진 하나의 토속신앙이기 때문이다. 만일 석가가 환생한다면, 힌두교의 실체적 윤회설을 아예 거부하고 단지 무아론만을 불교의 근본 교리로 인정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왜냐하면 인도 카스트제도의 바탕이 되는 윤회론을 거부한다고 한들 더 이상 브라만들로부터의 압력을 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3) 석가는 무신론적 철학자이다.

 

월폴라 라훌라에 따르면, “누군가가 부처에게 신은 어떻게 생겨났습니까?’라고 물었다면, 부처는 서슴없이 신은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을것이라고 했다. 도날드 로페즈(Donald Ropez)는 불교가 지닌 무신론적 성향을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정리하고 있다. “불교의 교리적인 관점에 본다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와 세상을 창조한 영원한 창조의 신은 없다는 말이다.” 하버드 대학교의 심리학과 창설자이자 교수였던 월리암 제임스(William James)는 불교를 무신론적 사상체계로 정의한다. 데이비드 벤틀리-테일러(David Bently-Taylor)에 따르면, 석가는 그의 생전에 단 한 번도 객관적이며 인격적인 의미로서 신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석가 자신이 의도적으로 신성에 관한 그 모든 주장을 회피하였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에 신이란 존재는 애당초부터 불교 사상체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저명한 가톨릭 신학자인 레이몬드 파니카(Raimundo Panikkar)에 의하면, 불교도가 스스로를 무신론자라고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불교도는 그 어떠한 종류의 신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석가는 신의 이름을 제거하는 것이 종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불교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종교인 것이다.

홍콩대학교 불교연구소장, 카루나다사는 석가의 연기론과 무아론을 통해 볼 때, 인격적인 신의 존재는 없으며, 그 이후의 불교 학파에서도 창조의 신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하였다. 사실 신의 존재를 믿는 유신론적 종교들의 입장에서는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불교를 하나의 종교로서 받아들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숭배의 대상이 없는 종교란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신과 교감하지 않고도 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 수 있는 법을 깨달을 수 있다는 불교의 주장이 매우 낯설 뿐만 아니라 당혹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의지할 곳은 자기뿐이니, 그 밖의 어디에 의지할 데 있으랴. 자기가 잘 조어될 때 아주 희귀한 의지처가 생기리.이러한 석가의 진취적인 입장은 어쩌면 신 없는 종교를 지향하는 듯하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석가가 추구하는 종교는 인간 스스로가 마음의 절대적인 평안을 찾아내는 자력적 구원의 종교라 할 수 있다.

  

4) 석가모니는 종교개혁자이다.

 

석가는 신비적인 체험과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던 그 당시 힌두교의 가르침들을 부정하였다. 그 대신, 인간의 생로병사의 고통을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이치로 받아들이라고 가르쳤다.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 그로 인한 인생무상을 받아들이라는 석가의 입장은 유신론, 유아론을 주장하고, 사후세계에 대한 집착으로 제사를 중시하는 기존의 브라만교의 입장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생각을 깨뜨리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것으로 종교를 개혁한 것이요, 이 종교 개혁을 통해 불교가 태동한 것이다. 이에 대해 마틴 포워드(Martin Forward)는 불교가 하나의 급진적인 종교 개혁이라 단언하였다. 그리고 불교가 기존의 힌두교 신앙 속에서 자라났지만, 힌두교 신앙과 반응하면서 결국에는 힌두교 신앙의 문제를 뒤집어 엎어버리는 종교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면이 석가를 종교개혁자라 일컫게 하였으며, 그가 개혁하려고 한 종교의 부정적인 모습은 어떠한지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힌두교는 미신적인 기복신앙이다. 힌두교는 신들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한다고 믿고 이 신들에게 운명을 맡기는 종교이다. 석가는 모든 것을 신에게 의존하는 타력 종교를 개혁하려 했다. 리스 데이비스(Rhys Davids)에 따르면, “석가는 브라만교의 동물 희생제나 마술적인 제의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동물이나 식물을 포함한 만물 안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고 그것을 숭배하는 미신적인 신앙도 거부했다.”

둘째, 힌두교는 다신교 신앙이다. 힌두교는 초월적인 신을 포함하여 3억이 넘는 자연 신을 믿으며, 그 신들에게 복을 빌며 인간의 운명을 전적으로 맡겼다. 천문학적 숫자의 신들을 섬기기 위해서 헛되게 소모하는 노력도 문제려니와 석가가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삼은 것은 인간의 삶이 신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궁극적인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신을 숭배하거나 신에게 희생 제사를 드리는 신 중심적 신앙을 거부하고 인간 중심적인 삶을 천명했던 것이다.

나는 나를 주인으로 하니 나 외에 따로 주인은 없네. 그러므로 마땅히 나를 다루어야 하나니 말을 다루는 장수처럼 (법구경, 380)

진실로 자신만이 자신의 보호자인 것이다. 다른 누가 보호자가 될 수 있겠는가? (법구경, 160)


결국 신에게 인간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지혜와 정신적 능력으로 인해 스스로 모든 고통과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힌두교는 유아(唯我)론을 주장하고 있다. 힌두교는 인간 영혼이 존재하며 영원하고 불변한다고 믿었다. 석가는 이런 힌두교의 유아론을 부정하고 무아론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은 유한해서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지는 것이고, 영원불변한 영혼이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그는 영혼을 단지 두뇌활동이나 중추 신경계의 작용이나 활동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석가의 무아론은 불교만의 유일무이한 교리로서 다른 유신론적 종교들과 불교를 구별해주는 아주 독특한 교리이다.

넷째, 힌두교의 숙명론적 윤회설이다. 힌두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동물로 다시 태어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현생의 업보가 다음 생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전생의 업을 타고났기 때문에 현생의 삶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숙명론을 말한다. 이러한 숙명론적인 윤회설은 현세의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정당화시키거나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지 않고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석가는 힌두교의 업보에 토대를 둔 수동적이고 숙명론적인 윤회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자유의지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개척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의 운명은 인간 스스로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을 통해 업보를 강조하는 힌두교의 숙명론적인 윤회설을 완전히 부정하였다.

다섯째, 힌두교의 신분제도는 카스트다. 인도는 흔히 카스트제도로 불리는 4개의 세습적 계급 구조로 이루어진 사회였다. 그 최상층은 브라만(승려), 다음은 크샤트리아(귀족, 무사), 다음은 바이샤(농민, 상인, 연예인), 최하층은 수드라(수공업자, 하인, 청소부)이며, 이 계급에 따라 결혼, 직업, 식사 등 일상생활에 엄중한 규제가 있다. 특히 브라만은 우주의 힘을 지니고 태어난다고 자처하면서 굉장한 특권을 누렸다. 의례를 집전하며 왕이나 귀족이 바치는 값 비싼 희생 제물로 부유하고 방자한 삶을 사는 이가 많았다. 석가는 카스트제도가 잘못되었다고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하면 세상의 굴레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새로운 가르침을 전파했다. 이렇듯 불교는 인도의 계급제도와 힌두교의 다신교적 신앙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한 데서 발생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석가는 힌두교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개혁하려고 한 종교개혁자였다. 그는 미신적이고 기복적인 신앙을 비판하는 데 머문 것이 아니라 타력 종교의 타락과 한계를 극복하고 인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자력 종교의 길을 열었다. 그가 일으킨 불교는 힌두교 신앙 속에서 태동하고 자라나 그것과 반응하면서 결국에는 그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종교운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5) 석가모니는 도덕적이고 거룩한 생활을 가르치고 몸소 실천한 불교의 창시자이다.

석가는 신의 존재우주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 최우선 순위 관심사는 인간의 고통의 문제 해결을 위한 실제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카루나다사(Y. Karunadasa)에 따르면, 석가는 이 땅에서 경험하는 그 모든 번뇌(정신적인 고통)가 바로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욕망을 버리고 거룩하게 살라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탐욕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면 두통이나 정신적인 고통은 저절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즉 인간 내면의 악의 뿌리를 내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초기 경전에 따르면, 석가는 그 모든 세상적인 고통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숫타니파타>의 셀라 경은 석가를 자신의 심장에 박힌 번뇌의 화살을 뽑아버린 위대한 영웅 그리고 악마의 정복자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우리 내면의 악한 경향, 즉 죄악성을 제거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불교에서 얼마나 중요한 우선순위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대들이여, 눈을 갖춘 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경청하라.

화살을 뽑아버린 위대한 영웅은 사자처럼 숲 속에서 포효한다. (Stn. 562)

당신은 깨달은 분이고, 스승이고, 악마의 정복자이며, 성자이십니다.

당신은 모든 악한 경향을 끊고 몸소 건너시고, 사람들을 건네주십니다. (Stn. 571)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은 숲속의 사자와 같고, 성자이며 사람들을 건네주는 사람이 된다. 이는 석가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석가의 가르침을 따라서 번뇌, 즉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된다는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다.

 

II. 석가는 무엇을 깨달았는가?

 

석가의 깨달음은 사성제로 요약되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사성제는 무엇인가? 사성제는 열반에 이르는 네 가지 진리, 혹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의미한다. 즉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가 그것이다. 인간이 경험하는 정신적인 고통(번뇌)의 원인을 규명하고, 그러한 번뇌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그 해결책(열반, 해탈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1. 괴로움이란 무엇인가? - 고제(苦諦)

 

불교에서 말하는 인생의 모든 괴로움을 고제라 한다. 고제는 인간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통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된다. 그 첫째가 앞서 말한 생로병사의 고통이고, 둘째가 만물이 영원히 지속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변화의 고통이다. 셋째가 형성의 고통이다. 불교에서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형성의 고통은 이러한 자유의지로 인하여 발생하는 그 모든 정신적인 고통으로서 인간을 동물과 구별 지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특성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인하여 정신적인 고통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거꾸로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결국 인간의 마음이라 말할 수 있다.

석가는 인간의 삶을 괴로움으로 진단했다. 인간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 유한한 존재이고, 인생은 무상한 것이다. 그런 무상한 세상과 삶에 대한 집착이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고 괴롭게 한다. 따라서 석가와 불교는 인생은 괴로움 그 자체이고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2.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집제(集諦)

 

석가는 괴로움의 원인을 집제라 설명하였다. 집제란 괴로움의 원인이 끝없는 갈애(渴愛)에 있다는 뜻이다. 목이 말라 끊임없이 물을 찾듯이 몹시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집착이 사람을 고통 속에 몰아넣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괴로움을 가져오는 모든 원인은 인간 외부에 있지 않고 감각을 통해 느껴지는 내부, 즉 마음에 있다. 이런 면에서 석가가 제거하려는 고통은 인간의 마음이나 생각을 통해서 경험하는 정신적인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직접적인 원인: 탐욕

 

석가는 고통의 원인이 대부분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갈애(渴愛)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았다. 석가는 괴로움을 만들어 내는 원인과 해결책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세상의 다섯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대상과 그 여섯 번째인 정신의 대상,

이것들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면, 곧 괴로움에서 벗어납니다. (Stn. 171)

 

석가는 인간이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다섯 가지의 감각기관과 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하였다. 오감을 통하여 들어온 자극이 탐욕을 낳고 탐욕에 휩싸이면 인간은 괴로움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괴로움을 피하기 위한 첫 번째 방법은 탐욕을 제거해야 한다고 했다.

 

2) 근원적인 원인: 무지

 

인간은 무지로 인하여 무명(無明)의 상태에 있다는 것인데, 무지로 인해 무엇인가 소유하고 싶은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애착을 갖게 되고, 애착은 집착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집착으로 인해 우리 마음은 혼란스러워지고 괴로워하게 된다. 결국 우리의 자아나 세상의 물질은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에 무지할 때 우리는 물질적 형상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감각적인 쾌락의 대상들에 대한 접촉을 주저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인과 관계적으로 살피자면, 자아는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과 그로 인한 인생무상을 깨닫지 못한 것이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무지로 인해 물질적 대상들에 대한 감각적 기관들의 접촉이 아무런 분별없이 늘어나고, 이러한 접촉으로 인해 느낌이 생기고, 이러한 느낌은 애착과 집착으로 이어져서 감각적 쾌락의 대상에 대한 소유하고 싶고 즐기고 싶은 욕망, 즉 탐욕의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만일 무지하지 않다면,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의 대상들에 대한 접촉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괴로움의 소멸이란 무엇인가? - 멸제(滅諦)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다. 우리가 번뇌, 즉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고통의 원인인 욕망을 제거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의 원인을 제거한 상태는 어떠한 것일까? 석가는 이것을 멸제라 하였다. 멸제라 함은 사성제의 세 번째의 것으로 괴로움이 소멸한 상태에 관한 가르침이다.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하면 열반의 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석가가 도달하고자 했던 최고의 경지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열반은 무엇을 의미할까?

 

1) 탐욕의 종식

괴로움의 소멸, 즉 열반은 탐욕을 완전히 소멸시켜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비구들아,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가 있다.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하고 버리고 벗어나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불교는 괴로움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해탈 또는 열반이라고 한다. 열반, 곧 니르바나는 불길이 꺼진 것을 의미하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모든 욕망의 불길이 사라진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괴로움의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원인이 탐욕이라면, 이런 탐욕의 종식과 소멸의 경지가 바로 열반이다.

사람들은 열반을 극락이나 내세를 경험하거나 도달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열반은 초월적인 이상세계에 도달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는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에, 그 모든 고통의 원인이었던 수행자 내면의 욕망의 불이 꺼졌다는 것을 말한다. 니르바나, 곧 불교가 말하는 열반은 결코 현상세계와 다른 것이 아니다. 쉽게 말해 열반은 우리가 이승을 살아가면서 도달할 수 있는 실제적인 경험이라는 것이다. 결국 석가가 말하는 열반은 사후세계에서나 경험할 수 있는 신비한 체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열반은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고통의 해법인 무아론을 깨달을 때에 그 모든 정신적인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학자들도 탐욕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이 자유로워진 상태를 열반이라고 말한다. 카루나다사(Y. Karunadasa)에 따르면, 열반을 성취한 모든 아라한(阿羅漢, Arhat)의 공통점은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다. 이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혐오감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망상(오해)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토마스 (Edward Thomas)에 따르면, 아라한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제거한 사람이다. 즉 무지를 벗어나 지혜를 얻음으로 감각적 쾌락의 그 모든 족쇄를 부숴버린 사람이다. 완전한 지식, 곧 지혜를 통해 삶의 모든 정신적인 고통에서 해방된 자인 것이다.

  

2) 마음의 절대적 평안

 

인간의 삶이 근심과 불안, 번뇌와 괴로움의 연속이라면, 열반은 그런 현실을 벗어나 마음의 절대적 평안을 누리는 경지를 가리킨다. 이를 해탈이라고도 하는 것은 세상의 속박과 그로 인한 괴로움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석가가 말하는 평안은 무엇인가 세상적인 필요나 욕구가 채워졌을 때의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적인 필요나 욕구를 비웠을 때 경험하게 되는 마음의 평온함을 말한다. 이는 욕망이나 갈애를 비우거나 내려놓음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정신적인 자유로움, 곧 해탈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보디(Bhikkhu Bodhi)에 따르면, 열반은 우리 안의 갈망이 제거되었을 때에 찾아오는 완벽한 평안의 상태이다. 열반은 인간 내면의 탐욕, 혐오감 그리고 망상의 불꽃이 소멸할 때 경험할 수 있는 무조건적 평안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3) 생전에 경험할 수 있는 니르바나 (유여의 열반)

 

거의 모든 종교는 내세지향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석가는 종교들의 이러한 내세지향적 경향을 거부하는 듯 보인다. 석가가 말하는 열반은 사후세계에서나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후에 거하게 될 장소나 영역도 아니다. 열반은 현세에서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 가운데 하나다. 석가는 열반은 이생에서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치기에 지극히 현세 지향적이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에 따르면, 열반은 어떠한 장소나 존재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열반이라 함은 장소나 존재가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생전에 열반의 경지에 오른 사람을 아라한이라고 부른다.그러나 문제는 현재의 생에서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모든 것이 완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열반에 이른 아라한은 욕망과 집착을 극복하고 정신적인 괴로움에서 벗어났지만, 아직도 육체적인 괴로움은 그대로 남아있다. 인생의 네 가지 괴로움, 즉 생, , , 사는 모두 육체와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육체는 그것을 결코 피할 수 없다.

 

4) 사후에 경험하는 니르바나 (무여의 일반)

 

생전에 열반을 이룬 다음 죽는다면, 죽음 이후의 세계는 어떤 것일까? 석가는 죽음 이후에 다시 태어나지도 않고 고통도 없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다. 거기에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고, 해도 달도 없다. 나는 바로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멈추는 것도 없고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기반도 없고 유전도 없고 대상도 없는 이것이야말로 괴로움의 종식이라 부른다.

여기서 석가는 이러한 세계가 있다고 말하면서 죽음 이후 맞이하는 무()의 세계를 소개하고 있다. 석가는 이 무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는데, 거기는 해와 달, 움직임, 생사, 운행하는 주체와 상황 등 모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 무의 세계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는존재하지 않는 세계로서 괴로움의 종식이 있는 가장 이상적인 세상이라고 한다. ‘괴로움의 종식이 있는 무의 세계를 무여의 열반이라고 부른다. 이곳은 살아서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이 죽어서 가는 곳으로 육체와 분리된 상태이며, 다시 태어나지 않는 곳이다. 죽음은 완전한 열반의 시작점이다. 무여의 열반은 아라한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다가오기 때문이다.

 

연기론적으로 본다면, 석가가 말하는 무의 세계는 죽은 사람 모두가 도착하는 종착역인 것이다. 그러니까 무의 세계는 우리 모두가 죽음 이후에 경험하게 될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상징적 표현인 것이다. 쉽게 말해 사후에 그 어떠한 세상도 존재하지 않기에 그 어떠한 고통도 당하지 않는다. 죽음과 함께 죽음이나 태어남, 고통이나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세계는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무의 세계는 윤회는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5) 열반은 보편적 현상이다

 

열반은 누구나 가능하다고 한다. 만일 석가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누구나 열반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열반은 영적이고 초월적인 영역이라기보다는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영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우주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그 이치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쓸데없는 걱정은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석가가 말하는 자연의 이치는 바로 무아론이고, 그로 인한 무상성이다. 만일 우리가 무아론을 깨닫고 인생의 무상성을 인정하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욕망, 감각적 쾌락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 사후세계에서도 계속해서 존속하고자 하는 욕망이 사라지게 되고 그로 인해 오히려 내려놓음의 평안이 임한다는 것이다.

 

 

4. 어떻게 열반에 이를 수 있는가? - 도제(道諦)

 

도제는 길을 알다는 의미가 있다. 이 길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에 이르는 길이다.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은 외부적인 힘이나 요인이 아니라 사람 몸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소멸하는 것도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 즉 마음에 있다고 한다. 열반의 길이 인간의 내면에 있다면, 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내면을 다스려 열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해 크게 탐욕의 제거와 깨달음이란 두 측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1) 탐욕과 집착의 제거

 

인생의 괴로움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 탐욕과 집착이고, 그 근원적인 원인이 무지라면, 열반에 이르는 길은 탐욕과 집착을 제거하는 것과 무지를 깨트려버리고 진리에 대해 깨닫는 것이다. 석가 역시 갈애가 부수어진 것이 열반이다.”라고 하여 탐욕을 소멸하는 것이 열반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수행자가 욕망과 탐욕을 벗어나기 위한 첫째 방법으로는 감각기관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특히 눈과 귀 그리고 입으로 들어오는 자극을 멀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다음으로는 감정을 잘 관리해서 비탄과 집착과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였다. 셋째로는 소유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음식이나 옷을 쌓아 두어서는 안 되며, 소유가 없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된다고 하였다. 넷째는 번잡한 곳이나 화려한 곳을 피하여 자신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고, 다섯째는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성적인 유혹을 멀리해야 한다고 하였다.

 

감각기관을 통제하여 욕심과 탐욕을 제거하면 결국 무소유의 경지에도 이르게 된다. 그러면 현실에 만족하여 하루하루를 아무런 집착 없이 살아갈 수 있고, 결국에는 열반에 이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감각기관을 제어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실현하니,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Stn. 267)

 

마음의 거처를 제거하여 어떠한 소유도 갖지 않으며, 이 세상이나 저세상에서나 집착이 없으니..... (Stn. 470)

 

과거에 있었던 것을 말려버리고, 미래에는 그대에게 아무것도 없게 하십시오. 현재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적멸을 이룰 것입니다. (Stn. 1099)

 

감각기관을 제어하고 진리를 바라보고, 소유에 대한 생각도 버리고, 또한 과거나 현재나 혹은 미래에 대한 집착을 버린다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이르는데, 이것이 열반의 경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을 위한 첫 번째 방법은 감각기관을 제어하므로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2) 깨달음

 

석가는 인생의 괴로움의 직접적인 원인이 탐욕과 집착이라고 진단하고, 탐욕과 집착이 소멸되면, 마음의 평안, 곧 열반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쳤다. 그렇다면 탐욕과 집착을 어떻게 제거하고 소멸할 수 있는가? 그것은 괴로움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소하는 것이다. 괴로움이 생기는 근원적인 원인이 무지라면, 열반에 이르는 길은 무지를 깨뜨려버리는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만물은 변한다는 것, 자아(영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사후세계는 없다는 것, 모든 소유물은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는 것, 따라서 인생은 무상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인생이 무상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괴로움이 사라지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인생무상을 깨달으면 윤회를 만들던 힘이 사라지고, 윤회에 대한 환상도 사라진다고 월폴라 라훌라는 말한다. 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윤회란 정신질환과 같은 것으로서 환자에게 보이는 환영과 같은 것이어서 인생무상을 깨달으면, 환영이 사라지는 것처럼 윤회도 사라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윤회나 인간의 업과 같은 것은 깨달음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윤회의 허구성은 무아론과 그로 인한 인생 무상성을 깨달을 때에 그 실체가 곧바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윤회의 허구성을 깨닫기만 하면 윤회의 쇠사슬에서 즉각적으로 해방된다는 것이다. 즉 탈윤회를 경험하는 것이다.

 

5. 팔정도란 무엇인가?

 

석가는 열반에 이르는 과정으로 사성제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리고 그 네 번째 가르침인 도제는 열반에 이르는 길을 지칭한 것이었다. 이 도제에서 석가는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여덟 가지 바른길, 즉 팔정도를 가르치고 있다.

 

비구들아, 그러면 무엇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진리인가? 그것은 바로 8정도

이니, 즉 바르게 알기, 바르게 사유하기, 바르게 말하기, 바르게 행하기, 바르게 생활하기, 바르게 노력하기, 바르게 알아차리기, 바르게 집중하기이다. <디가 니카야 22, 大念處經>

 

팔정도는 사성제의 네 번째 가르침에 속한다. 그렇다면 사성제와 팔정도의 관계는 무엇일까? 보디(Bhikkhu Bodhi)에 따르면, 석가의 가르침은 두 가지의 원리에 의해서 요약이 된다고 한다. 하나는 사성제이고, 다른 하나는 팔정도이다. 사성제는 불교의 교리로서 그것은 석가의 가르침의 내용이다. 팔정도는 이러한 교리를 직접 실천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성제는 열반에 이르기 위한 이론이며 지식이라면, 팔정도는 그 원리를 실천하는 것이기에 이 둘은 서로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연합체이다. 이런 면에서 사성제와 팔정도는 서로를 관통하며 서로를 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석가가 말하는 팔정도는 다음과 같다.

1) 올바른 견해, 2) 올바른 사유, 3) 올바른 언어, 4) 올바른 행위, 5) 올바른 생활, 6) 올바른 정진, 7) 올바른 새김, 8) 올바른 집중

불교에서 이 여덟 가지의 수행은 세 가지 배움을 닦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 여덟 가지의 각 요소들을 배움의 세 가지로 묶으면 다음과 같다.

1) 지혜의 묶음: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2) 계율의 묶음: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3) 명상의 묶음: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

올바른 견해는 사성제를 관통하는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사성제는 석가가 깨달은 진리의 구체적인 내용이고, 이러한 석가의 깨달음이 자체가 올바른 견해라 할 수 있다. 또한 올바른 견해가 팔정도의 시작이요 끝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석가가 깨달은 진리를 우리가 이성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동의하고 따르는 것이 팔정도의 근본이요 결말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석가의 관점, 즉 그의 세계관을 우리가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 바로 고통에서 자유롭게 되는 유일한 해탈의 길이라 한다면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의 단계를 밟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궁극은 해탈에 관한 올바른 견해를 갖는 것이다. 좀 더 급진적으로 말하자면, 만일 당신이 석가가 깨달은 올바른 견해, 즉 그의 세계관 (연기론, 무아론, 인생무상)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면 당신은 굳이 팔정도의 그 모든 수행의 단계들을 거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올바른 사유,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그리고 올바른 집중 등의 최종목표가 바로 올바른 견해이기 때문에 만일 당신이 올바른 견해를 깨달을 수 있다면 굳이 그 어려운 수행의 모든 덕목을 실천할 필요가 없다는 급진적인 해석이다. 옥스포드 대학교 불교연구소 설립자이며 연구소장인 리차드 곰부리치(Richard Gombrich)도 이러한 급진적인 해석에 동의한다. 석가가 주장하는 열반은 관법(위파사나)이라 불리는 관찰수행을 통해 이성적인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석가가 생각하는 열반은 정신이나 의식의 변화이지 결코 신비적인 체험이 아니다. 석가가 생각하는 의식의 변화는 사물이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객관적인 정신이나 시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해탈이나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석가가 깨달은 세계관을 우리가 지적으로 동의하고 그다음에 그대로 실천하라는 것이다. 사성제와 팔정도의 핵심이 올바른 견해이고, 올바른 견해는 곧 석가가 깨달은 지혜이다. 명지, 곧 지혜는 자연의 이치를 바로 아는 것으로 연기법, 무아론, 인생무상 등이다. 이런 자연과학적 지식을 깊이 깨닫고 공감하게 되면 그 모든 욕망을 내려놓게 된다는 것이다. 허깨비와 같은 세상의 속성을 깨닫고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와 집착을 버리게 되고, 결국 이 세상에서 겪는 그 모든 정신적인 고통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석가는 의사가 환자를 다루듯이 괴로움의 문제를 취급했다. 의사는 환자의 상태를 진찰하여 그가 어떤 질병에 걸렸는지를 진단하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검사하여 치료하고 치유 상태를 확인하며 그 치료법을 설명한다. 석가 역시 괴로움이 무엇인지를 밝히고(고제), 그 원인을 규명하며(집제), 그것이 소멸한 열반의 상태(멸제)를 설명한 후, 소멸에 이르는 길(도제)을 제시했다. 결과적으로 석가는 기복적인 인도의 전통 민간신앙이면서 동시에 불합리한 힌두교의 질서와 계급을 정당화시키는 윤회설과 홀로 맞서 싸우며 사상적인 전쟁을 벌인 종교개혁자이자 철학자다. 동시에 그는 한낱 속임수이거나 환상에 불과한 윤회라는 늪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는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하는 정신과 의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III.예수와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무엇이 비슷한가?

 

기독교와 석가의 사상은 서로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관이다. 석가의 사상은 무신론, 무아론, 인본주의 그리고 사후세계의 부정 등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체계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유신론, 유아론, 신본주의 그리고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 등을 지닌 초월적인 세계관이다.

이런 면에서 이 둘은 각기 대조적인 입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신기한 것은 서로 정반대 성향의 두 종교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갈등 관계를 보이지는 않지만, 서로 간의 이질감과 배타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제는 이러한 기독교와 불교의 입장 차이를 극복하고 과연 서로 간에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으며, 예수와 석가와의 대화가 가능한 가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1) 마음속의 욕망이 고통의 원인이다.

고통은 인간 삶에 대한 불만족스러운 상태를 경험하는 것으로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통을 피할 수 없다. 고통의 문제를 잘 알기 위해서는 먼저 고통을 만들어내는 마음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고통은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것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와 석가는 고통의 원인이 인간의 내면 속에 있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특히 예수는 외적인 모습이나 행동들보다도 마음이나 생각을 강조하셨다. 즉 마음의 의지나 동기의 순수성이 행동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15:17-20)

예수는 모든 더럽고 악한 것들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셨다. 입으로 들어 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지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시면서 인간의 마음이란 악하고 더러운 것이라 하셨다.

영국의 리버풀 호프 대학교 (Liverpool Hope University)의 종교학과 교수였던 엘리자베스 해리스(Elizabeth Harris)는 마음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에 석가가 전적으로 동의할 것이라 하였다. 왜냐하면 석가 역시 마음에 관한 가르침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사람이 청결한가 청결하지 않는가의 문제는 외적인 행위나 그 어떠한 종교적인 의식에 달린 것이 아니라 마음의 선한 의도에 달렸다고 가르쳤다. 이같이 예수와 석가는 마음의 문제를 다룬다는 면에서 전적으로 일치한다. 더 나아가 인간 내면의 탐욕 혹은 갈망이 그 모든 정신적인 고통의 원인이라는 데에도 서로 동의할 것이다. 석가는 탐욕은 감각적인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서 괴로움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원인이라 하였다. 성경도 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리라. (1:14-15)

성경은 사람의 죄는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마음에 욕심이 생기고 이것을 멈추지 못하면 죄가 된다. 죄가 커지면 결국에 죽음에 이른다고 한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곧 죄와 연결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욕망으로 가득 찬 자아 중심적인 사고가 죄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기독교와 불교 모두 마음을 비우고 욕망을 제거하는 것과 마음의 의도나 동기가 순수해야 하는 것 그리고 생각과 행위가 일치해야 하는 것에 대해 같은 내용으로 가르친다는 것이다. 해리스(Elizabeth Harris)는 기독교와 불교는 인간의 현주소, 즉 실존에 관하여 공통적인 면을 보인다고 하였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며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이 인생을 구원하는 첩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할 때 고통이 따른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자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예수와 석가의 공통적인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공통적인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차이가 있다. 석가의 가르침에는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할 진정한 나, 곧 자아(영혼)는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원한 자아가 존재한다고 믿으면서 그 자아를 삶의 중심에 놓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것이다. 석가는 이를 망상(Delusion)이라고 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예수는 영원한 자아(영혼)는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단지 그 자아의 중심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리스(Elizabeth Harris)는 자아에 대한 기독교와 불교의 입장은 너무나 다른 것이라 하였다. 자아에 대한 이상과 목표 그리고 양식이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불교적 입장에서는 고통의 원인 혹은 뿌리는 인간 내면에 잠재한 갈애이고, 그 갈애의 원인은 무지이다. 반면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인간의 죄가 그 원인이다. 그 해결방안으로 석가는 무아의 깨우침을 통해 해탈할 것을 말하고, 예수는 각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죄를 구속할 구세주로서 예수 자신을 믿으라고 말한다.

기요시 츠치아(Kiyoshi Tsuchiya)에 따르면, 기독교와 불교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자아 중심성을 한목소리로 말하지만 자아 중심성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와 불교의 처방이나 해결 방법은 전혀 다르다고 한다.

자아 중심성에 대한 기독교적 처방은 자아로부터 죄의 짐을 제거해주는 것인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사람들의 죄를 속죄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자아 중심성에 대한 불교적 처방은 사람들이 움켜쥘 만한 영원한 자아는 실제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결국 죄(업보)라고 하는 실체나 윤회의 실체 그리고 그 근거(영혼)가 없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는 구세주로 인식되는 것이고, 석가는 해탈의 길을 가르치는 선각자로 인식되는 것이다.

 

2) 마음속의 평안은 이 땅에서 성취될 수 있다.

기독교에서나 불교에서나 마음의 평안은 매우 중요하다. 마음에서 죄나 고통이 시작되는 것이고, 마음을 바르게 잡으면 이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석가는 마음을 바르게 함으로써 평안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에게 있어 마음의 평안이 곧 열반인 것이다.

석가는 마음의 평안을 이루면 휩쓸리지도 않고 매이지도 않으며 근심과 걱정이 없어진다고 하였다. 이는 현실적인 걱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예수도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평안을 약속하였다.

공통적으로 예수와 석가는 마음의 절대적인 평안, 즉 평정심은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그 성취하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 석가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로 감각적인 욕망을 뛰어넘어야 평정심을 얻을 수 있지만, 예수가 말하는 평안은 인간 스스로 만들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로 얻어지는 것이다. 예수와 석가 모두 평안을 이야기하였지만, 예수는 초자연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신비한 평안을 말한 것이고, 석가는 인간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에 의해 얻어지는 평정심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세계관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삶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석가에게 있어, 삶과 죽음은 자연의 이치이고, 서로 떼어낼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삶에 따르는 죽음의 과정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인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을 자연의 이치로서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 이는 연기론과 무아론을 깨우친 결과이다. 바로 정해진 자연의 이치로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초연한 마음이 해탈의 경험이다. 이런 석가의 입장은 자연주의적이고 범신론적 세계관을 보여준다.

반면 기독교는 삶을 죽음으로부터 구별하여 따로 떼어놓는다. 죽음은 자연의 이치가 아니라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신의 징벌의 결과이다. 바로 여기에 삶과 죽음 그리고 선과 악의 이원론적 세계관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를 통해 신의 사랑을 받아들인 자들은 영원한 생명을 약속 받는다. 이는 유신론적 초월주의 세계관이다. 곧 신과 인간의 개인적인 관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15:1-16)

석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오해하면서 집착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란 실체는 잠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유한한 것이므로 라는 존재에 집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를 부정할 때 평정심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예수 역시 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이유가 가 유한하고 사라질 존재여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영이 나를 사로잡기 때문에 부정적인 자아가 사라지고 평안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로마서 8:1-6)

 

3) 도덕적이고 거룩한 삶은 인간이 지향해야 할 이상적 삶이다.

석가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제거하는 삶, 거짓말하지 않고 남의 물건을 탐내지 않는 도덕적인 삶, 그리고 특별히 성욕을 제어하는 삶을 가르쳤다. 이를 올바른 행위와 올바른 생활이라 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거룩하고 청정하게 살아서 괴로움을 제거하라 하였다. 예수도 청결한 삶을 가르쳤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인간도 거룩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고 말하면서 성욕을 철저히 다스릴 것을 요구하였다. 더 나아가 이렇게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된다고 하였다.

이처럼 예수와 석가 모두 도덕적인 삶을 통해 거룩하게 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은 완전히 다르다. 예수의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것을 행할 때에 거룩한 삶은 이뤄진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하시면서 자신 스스로 병자, 가난한 자 그리고 창녀와 세리의 친구가 되었다. 가톨릭 신학자, 파니카(Raimundo Panikkar)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신을 사랑할 수 없다. 신은 나를 이웃과 접촉하게 해주는 내 자아의 초월자이기 때문이라고말했다. 기독교인들은 신을 의식하며 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선한 행실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5:16)

반면 석가가 이야기하는 도덕적인 삶은 신을 의식하는 삶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거룩한 삶은 순전히 인간 자신의 필요에 의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정신적인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다면 무소유의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무가치하며 사라질 존재임을 깨닫고, 자신의 내면 안에 있는 욕망을 제거하여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라는 정체성이 없는 것이니 내 소유도 없는 것이고, 이에 따른 무소유의 삶은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예수와 석가의 공통점은 이웃을 향한 도덕적이고 선한 삶을 살며, 자신에 대해서는 깨끗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고, 석가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자아 중심성을 벗어나고자 거룩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4) 예수와 석가가 지향하는 삶은 무욕과 무소유이다.

물질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을 버리고 내면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은 예수와 석가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이고, 이들 사이에 이견은 없다고 본다. 그런데 물질에서 벗어나는 양상은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물질에 대하여 이들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물질에서 벗어나는 양상을 서로 대비하면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예수는 물질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권한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태복음 6:19-21)

예수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물질 모으는 일을 하지 말라고 권했다. 먼저 현실적인 면에서 설명하기를, 물질을 쌓아 두면 좀과 동록과 도둑의 해를 입게 되어 결코 영원히 보관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다음으로 정신적인 면에서 설명하기를,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말하면서 물질을 쌓아 두면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고 경고했다.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을 빼앗기는 것과 같다. 그에게는 죄와 죽음이 따를 뿐이다. 성경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서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디모데전서 6:9-10)

부자가 되려는 사람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하게 되며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된다. 돈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믿음에서 떠나 근심과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마태복음 6:24, 누가복음 16:13)

석가도 물질을 정신적인 고통을 불러오는 원인으로 지목한다. 물질이 감각적 쾌락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감각적 쾌락은 다양하고 달콤하고 즐거우니, 여러 가지 모양으로 마음을 혼란시킨다. (Stn. 50)

농토나 대지나 황금, 황소나 말, 노비나 하인, 부녀나 친척, 그 밖에 사람이 탐내는 다양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대상이 있습니다. (Stn. 769)

석가는 물질은 욕망의 대상인데, 이것에는 감각적 쾌락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감각적 쾌락은 다양하고 달콤하여 인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마음의 혼란은 집착을 가져오고 집착은 고통을 가져온다. 그래서 고통을 피하려면 물질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집을 떠났다면, 사랑스럽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대상들을 버리고,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사람이 되라. (Stn. 337)

자식과 아내, 아버지와 어머니, 재산과 곡식도, 친지들도 모든 욕망의 경계까지도 다 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가라. (Stn. 60)

세상은 모두가 무사한 것이라서, 부처님은 내 것이라고 소유할 것이 없다 하시니라. (법구경, 255)

석가는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라고 말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뿐만이 아니라 부모와 아내 그리고 자식에 이르는 모든 가족도 버리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석가는 그래서 무소유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예수 역시 가족이나 물질에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819-20)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물질적인 것 때문에 염려와 걱정을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지금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조차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같이 예수와 석가 모두 물질에 마음을 두지 말며, 가족조차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두 사람 모두 무욕과 무소유의 삶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물질에서 벗어나는 양상은 다르다. 석가가 무소유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물질에 대한 집착을 없애므로 집착으로 인한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함이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무소유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무소유라 말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은 무욕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 무소유의 삶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적인 필요를 다 채워 주시기 때문이다.(마태복음 6:25-34)

기독교인은 욕심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무소유로 사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무욕으로 살면서도 만족하고, 또한 믿음으로 채워 주실 것을 믿고 우리가 가진 것을 서로 사랑으로 나누라고도 하셨다. (마태복음 5:40-42) 이는 사도들을 통해 그대로 실천되었다. (2:44-46) 예수의 제자들은 그의 가르침대로 무욕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무욕의 삶이 불편하고 힘든 것이 아니라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가변적이기에 믿을 수 없는 세상적인 것들을 의지하므로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면서 자족하는 삶을 살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디모데전서 6:6-8)

석가도 재물은 탐욕의 대상이고, 그로 인해 번뇌, 즉 정신적인 고통이 따라오기 때문에 재물욕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쳤다.

배를 가득 채우지 말고 음식을 절제하고, 욕심을 적게 하고 탐욕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Stn. 707) 음식이나 음료나 먹을 만한 것이나 또는 옷을 얻더라도 쌓아 두어서는 안 되며, 그것들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해서도 안 됩니다. (Stn. 924)

의식주는 인간의 삶에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이것이 없으면 육체를 지탱할 수 없다. 그런데 예수와 석가는 입을 모아서 이것에 대해 염려하거나 충족시키기 위해 애쓰지 말라고 한다. 예수는 욕심을 버리고 무욕과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고 가르쳤다. 반면에, 석가는 스스로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탐욕에서 벗어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라고 하였다. 여기서 석가는 신에 의해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기를 바라는 기독교 신앙을 하나의 헛된 믿음이요, 없애야 할 집착으로 생각할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예수와 석가는 물욕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나 벗어나야 하는 이유는 전혀 다르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가르침이 우리로 하여금 현대사회의 고질병인 탐욕과 물질 만능주의의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를 원한다는 면에서 일치한다.

 

5) 예수와 석가모니는 계급이나 차별이 없는 이상적인 세상을 추구했다.

인도는 현재도 카스트제도가 유지되고 있다. 이 뿌리 깊은 제도는 석가 생존 당시에는 더없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경전에도 명백하게 올라 있는 항목이다. 인도의 신분이나 계급제도는 윤회 사상에 근거하여 제사장 브라만이 만들어 놓은 사회질서이다. 현세에 누리고 있는 모든 특혜는 전생에 쌓아놓은 선업으로 인한 것이므로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석가는 윤회 사상에 회의적이었고, 그것에 근거한 업() 사상을 통해 만들어진 불평등한 계급제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석가는 타고날 때부터 천함과 귀함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행위로 정해지는 것이라 했다. 그는 있지도 않은 사후세계를 근거한 업 사상으로 인해 전생과 현생 그리고 내세의 삶이 정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석가는 진정한 브라만이란 특혜를 누리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중심적 사고를 버리고 물질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세상의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므로 브라만은 출생으로 정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법구경, 388, 404) 석가는 신분제 안에서 최상위를 차지한 브라만이 아니라 인격을 완성하고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자를 브라만이라 일컬은 것이다. 신분제를 부정한 석가는 만인은 평등하다고 믿었고, 신분이나 계급의 차별은 잘못된 것으로 인식했다.

예수도 마찬가지로 신분제나 인종차별을 부정했다. 예수는 이방인과 피가 섞인 혼혈인들, 즉 사마리아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예수는 우물로 물을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그것도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여인에게 말이다. (요한복음 4:7-23) 그리고 로마를 위해 세금을 징수하는 민족의 반역자 세리들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누가복음 19:1-10) 심지어 매춘부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마태복음 21:31-32) 그야말로 예수는 병든 자, 가난한 자를 포함한 사회적 약자들과 사마리아 여인, 세리 그리고 매춘부와 같은 사회적 소외층들을 포용했던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그 모든 자들을 친구로 인정하고 교제했었다. (요한복음 15:14-15)

예수는 당시에 천대받고 비난받던 사람들조차도 포용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을 자랑하며 영광을 누리려고 하는 제사장이나 바리세인들의 위선을 정말 혹독하게 비판했다. (마태복음 12:34, 참조: 3:7, 23:33)

서기관과 바리세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마태복음 23:2-7, 11)

예수 당시에 바리세인들과 제사장들은 사회의 지도층으로 특혜를 누리며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하대하며 신분 사회를 조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예수는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 지칭하며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진정으로 큰 자는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라고 하였다.

이러한 예수의 포용성은 석가에게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석가는 왕과 왕족들뿐만 아니라 사회적 소외층들, 즉 매춘부와 대장장이들과도 교제하면서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탈의 길을 가르쳤다. 결과적으로 예수와 석가는 사람의 지위나 계급과는 상관이 없이 인류애를 가지고 사람을 아끼고 사랑한 성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사람들이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서로가 사랑하며 인격적으로 존중하길 원했던 것이다.

 

6) 예수와 석가모니는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가르쳤고 또한 몸소 실천했다.

석가는 일생을 비폭력적 삶으로 일관했다. 석가가 속한 부족은 자신을 홀대한 것에 앙심을 품은 바사익 왕의 유리태자에게 학살을 당했다. 그런데 석가는 나는 수미산을 이고 있는 것 같다고 괴로움을 토로하면서도 비폭력으로 대응하였다.

예수 역시 비폭력적 삶으로 일관했다.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칼과 뭉치로 자신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무리들에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잡혀갔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저항하며 말고라는 종의 귀를 베었을 때조차도 베드로를 말리면서 칼을 사용하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말했다. (요한복음 18:7-11, 마태복음 26:47-56)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는 비폭력 무저항주의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이상으로 본 바와 같이 예수와 석가는 여러 가지 면에서 공통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마음속의 욕망 혹은 죄를 제거하여 개인적으로 평안한 삶을 누리며, 사회적으로는 서로가 착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서 도덕적으로 청정한 세상이 되길 원했다. 이는 서로를 위해 거짓말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둑질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다시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말이다.

단지 예수와 석가의 차이는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차이다. 즉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유와 어떻게 욕망을 제거하여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가의 방법론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세상의 모습은 거의 일치한다. 바로 이 부분이 예수와 석가를 따르는 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내용이며 서로 간의 대화의 창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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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9/24 [07:57]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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