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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방지일 목사] 청년 운동의 가장 큰 본을 보이신 어른
방지일 목사-영등포교회 원로, 재한 중화기독교유지재단 이사장
 
뉴스파워   기사입력  2022/09/10 [13:45]

한국CCC 62년의 역사는 고 김준곤 목사(1925.3.28-2009.9.29)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1958년 한국CCC 설립하고 대학생 선교를 못자리판으로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김준곤 목사의 팔순을 기념해 지난 2005년에 제자, 지인, 국내외 동역자 110여 명으로부터 글을 받아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라는 기념문집을 만들었다. 기념문집에 원고를 주셨던 분들 중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떠났다. 역사적인 글들을 뉴스파워에 다시 올린다. (편집자 주)

▲ 방지일 목사    ©뉴스파워 자료사진

 

김준곤 목사님을 처음 만난 이야기를 하려면 아무래도 당시의 저의 배경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저는 1937년에 중국 선교사로 보냄을 입어 21년 동안 중국에서 많은 정변을 당한 고로 본국과의 내왕도 별로 없었습니다. 더욱이 공산 정권하에서 음신(音信)조차 단절되어 9년을 살았던 기간은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57년 가을에 추방되어 본국에 돌아왔으니 내후년이면 50년입니다.

 

돌아온 해에 여러 집회에 초청받아 다니던 중, 전국 청년면려회 전국총회에 강사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맡은 시간을 맞추고 여관에 묵었는데 거기에서 임원 중진들이 의논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니 지방별로 임원 배분하는 문제 등을 놓고 너무 많은 시간을 쓰는 것 같아 유감스러웠습니다.

 

중국에 있을 때 젊은이들의 모임에도 많이 갔었는데 저들은 전적으로 어떻게 하면 젊은이들의 신앙을 고조시킬까 하는 문제들을 안고 기도하고 죄를 회개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여기는 이럴 수가 있나 하는 마음에 더 유심히 보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저는 영락교회 앞에 CCC. 간판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들어갔습니다. 그때 김준곤 목사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 저는 솔직한 마음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속죄 구령의 복음 역사가 우선일 터인데 다른 문제에 너무 많은 신경을 쓰더라는 말과 함께 목사님의 청년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하신 말씀은, “방 목사님, 3년만 기다려 주세요. 그때가 되면 우리 대학생선교회가 어떻게 진전되는지 보일 것입니다.”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참으로 대학생들에게 속죄 구령의 복음 역사가 분명히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 교회에 청년 복음 운동이 이렇게 귀하게 진전됨을 보고 감격하였습니다. 회개 운동이 그렇게 철저함을 보고 감사하였습니다. 경주에서 CCC 대회가 열렸던 때에 저도 이야기할 시간을 갖게 되어 저들의 실정을 친히 보면서 같이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순() 운동은 우리 장로교의 권찰 조직과 비슷하다고도 하겠거니와 순모임에 순장이 있고 그들의 기도와 죄를 크게 뉘우치는 기도 운동은 너무나 가상하였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의 MRA 운동과 같다고도 보았습니다.

 

제가 은퇴한 후 여러 나라를 드나들면서 보니 CCC 출신으로 목사가 된 분들이 하나같이 철저한 속죄 구령의 복음 신앙의 역군들임을 보며 그들이 CCC에서 신앙을 받았다 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몇 해 전에는 플로리다 CCC 본부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나이 많아 잘 걷지 못하자 한 분이 휠체어를 내주고 그것을 밀어주면서 그곳 CCC의 방대한 조직을 다 보여 주고 세계 200여 국가의 CCC 운동 현황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 곳에 갔더니 벽면 전체가 김준곤 목사님의 영상으로 색칠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안내하는 사람은 이분이 전 세계에 CCC 청년 운동의 가장 큰 본을 보이신 어른이라서 이렇게 본을 받자는 의도에서 한 일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200여 나라의 각 CCC는 모두 본부로부터 철저한 감시를 받는데 유독 한국 CCC만은 본부에서 관여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하게 되어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이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때로 김 목사님을 만나기도 하였고 신앙 운동의 요긴한 일을 제의할 때면 김 목사님이 교계의 원로들을 청하는 일이 있는데 34인의 모임을 할 때 저도 한몫 끼워 보기도 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의 장래, 교회 복음 사역의 활성화를 위한 제언을 위하여 조언을 구하는 모임을 몇 번이나 가졌습니다. 탁월하신 능력과 성격의 지성인으로 풍부한 경험도 쌓으심에도 불구하고 연만한 몇 분을 때로 찾는 것을 보면서 김 목사님은 무슨 일이든 늘 신중하게 하심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주일이었는데 김 목사님이 무슨 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요, 청년들은 교회학교 반사들이요, 찬양대원들인데 이렇게 주일에 회의를 소집하면 각 교회는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물으며 주일에는 소집하시지 않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쾌히 목회자의 의견을 받아들이시고 그렇게 하심을 보았습니다. 이로써 CCC 운동이 교회 중심의 사역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경 중심이요, 기도 중심인 믿을 만한 신앙 운동임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영등포 지역의 목회자인데 한번은 가톨릭과 연합하여 수난 주일을 지키기로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김 목사님을 강사로 초청한 적이 있었고, CCC에서 크로스웨이 성경 공부할 때는 저도 부름을 받아 가서 말씀을 전하며 성경 공부를 기도로 하심도 보고 또 이런 일들을 같이 감명 있게 해 보면서 동감한 일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CCC 운동은 민족이요 국가와 시상을 초월한 운동임을 실감한 일을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제가 중국에 있을 때 교인 중에 상자화리는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부인이 먼저 믿고 기도로 그 남편을 회개시킨 가정이었습니다. 그 가정에 귀한 이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공산당 치하에서 대학교수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CCC 운동원과 알게 되어 대륙을 탈출하여 싱가포르에 와서는 내가 있는 곳을 수소문하여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상 베드로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자기가 누구누구의 아들이라며 설명하여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제게는 너무나 벅찬 감격이었고 김 목사님의 주선으로 그를 한국까지 데리고 와서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공산 치하에서 신앙을 지킨 것만도 너무 귀한데 그를 어렵게 빼내 와서 싱가포르에서 신학을 하게 하였고 지금은 미국에서 신학을 하고 복음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신앙 운동이란 청년들이건 어떤 계층이건 죄를 인식하고 속죄 주를 믿게 하는 그 일인데 김 목사님께서는 한 평생 오직 구원의 역사에 젊은이들을 끌어들이는 일을 빈틈없이 하시는 것을 이렇게 오랫동안 보고 있습니다.

 

더욱이 김 목사님의 아버님께서 공산당에게 무참한 피해를 겪으셨다는 말을 다른 이로부터 들었습니다. 제가 언제인가 독일에 갔더니 어떤 자매(김 목사님 따님의 친구)가 자기 친구의 소식을 알려 달라고 해서 부탁받고 돌아와 전하였더니 그 따님을 그만 잃으셨다고 하시고 그 따님을 위하여 쓴 책을 제게 주셔서 눈물겹게 보았습니다. 이 책을 후에 독일에 가서 그 친구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김 목사님께서는 위로 친상을, 아래로 따님을 잃으며 생명의 아픔도 받으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더 강하게 연단 시키셨지만, 그 아픔은 당해본 이들만이 아는 일입니다. 이제 김 목사님과의 만남을 소개하는 것을 마무리하려 합니다.

 

우리 한국에서 세계적 대회도 몇 번이나 개최하여 속죄의 복음을 감당하시기도 하였고 우리 국위를 세계에 알리기도 하신 그 파란 많으신 목사님의 삶에 크나 큰 존경을 드리는 바입니다.

 

방지일 목사는 1911년 평북 선천에서 방효원 목사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3년 평양 숭실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1937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27세에 목사 안수받았다. 아버님의 대를 이어 총회 파송으로 중국 산동 선교사로 떠나 21년간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중국이 공산화 되어 엄청난 종교적 탄압을 가하자 모든 외국 선교사들이 철수했지만, 중국에 유일하게 혼자 남아 중국 교인들과 고락을 함께했다. 이 사실이 유엔에 알려지면서 결국 유엔의 중재로 홍콩으로 추방되어 1957년 한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1958~1979년까지 영등포교회 담임 목사로 목회하였고, 1958년부터 초교파적으로 함께한 월요 성경 공부를 50여 년간 이어왔다. 2004103세가 될 때까지 목사로 77년을 헌신하며, "닳아질지언정 녹슬지 않겠다."라는 평소의 본인 말씀처럼 국내는 물론 세계 각국을 찾아다니며 활발하게 복음을 전하였고 후배들의 본이 되었다.

 

방지일 목사는 향년 104세의 일기로, 20141010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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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9/10 [13:45]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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