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피터 바이어 하우스 교수] 순교의 흔적을 지닌 그리스도인
피터 바이어 하우스-독일 튀빙겐대학교 명예교수
 
뉴스파워   기사입력  2022/08/22 [10:25]

한국 CCC 62년의 역사는 고 김준곤 목사(1925.3.28-2009.9.29)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1958년 한국 CCC 설립하고 대학생 선교를 못자리판으로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김준곤 목사의 팔순을 기념해 지난 2005년에 제자, 지인, 국내외 동역자 110여 명으로부터 글을 받아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라는 기념문집을 만들었다. 기념문집에 원고를 주셨던 분들 중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떠났다. 역사적인 글들을 뉴스파워에 다시 올린다. (편집자 주)

▲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     ©뉴스파워

 

저 같은 서양인에게는 한국 사람의 이름이 무척 기억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름마다 알아듣기가 힘들고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제가 잊지 않고 분명히 기억하는 이름은 김준곤 목사님의 이름입니다. 더불어 잊히지 않는 김 목사님의 인상은 홀쭉하면서도 강인해 보이는, 금식과 기도로 단련된 몸과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비한 교제가 엿보이는 표정입니다.

 

1970년대 초부터 한국을 열두 번쯤 방문하였는데, 김 목사님과도 여러 번 만났습니다. 그중에서도 정말 잊지 못할 것은 선교의 역시에 남을 세 번의 집회에서의 모습이었습니다. 엑스플로'74, '80세계 복음화 대성회와 '84 세계교회 기도성회에서였는데, 이 거대한 집회들은 모두 김 목사님께서 한국 CCC의 대표로서 또한 동아시아 CCC의 대표로서 준비를 맡으셨던 행사였습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이 세 번의 집회에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진행의 순서를 맡기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빌 브라잇 박사님의 초청으로, 나중에는 빌 브라잇 박사의 동역자이신 김 목사님의 초청으로였습니다. 아마도 두 분은 에큐메니컬 운동 속에서 전도와 선교 운동의 성경적 기본을 지키려고 애쓰는 저의 영적 전투에 대하여 알고 계셨고, 저의 선교학의 종말론적 강조점에 동의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김 목사님은 여의도광장의 두 번째 집회에서 저를 단상에 세우셨고, 거기서 제 설교의 끝에 마라나타! 주 예수 여 오시옵소서!'”라고 이백만이나 되는 성도님들이 함께 외쳤던 것은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김 목사님을 존경하는 것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분은 순교의 흔적을 지닌 진지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흔적은 한국전쟁 중에 적 그리스도적인 공산주의의 광기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받은 것입니다. 저는 김 목사님이 그 강렬한 경험에 대해서 말해 준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그분은 지상명령 성취를 위해 분열돼 있던 한국 교회를 연합시키는 데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 분입니다. 저는 김 목사님이 저와 한국군의 군종감을 CCC. 본부로 초대했던 때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 건물은 옛 러시아의 대사관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이었는데, 김 목사님께는 공산주의에 대한 복음의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사무실 벽에는 여러 도표가 걸려 있었는데, 20세기가 지나가기 전에 한국의 완전 복음화를 이루고자 하는 김 목사님의 비전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제게는 꿈 같은 일로 보였습니다만 군대의 복음화율 급성장과 개인 전도뿐만 아니라 전 마을과 각종 직능별 계층별 복음화 운동을 위하여 어떤 일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는 헌신적인 간사님들을 통하여 이 일을 이루고자 하는 김 목사님에게는 불가능이 아니었습니다.

 

김 목사님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급격한 교회 성장에 힘입어 무척 낙관적이었습니다. 한국 교회의 성장이 그 후로 다소 늦춰지긴 했습니다만 김 목사님의 탁월한 성취와 영감은 아시아 교회가 세계 선교 운동에 공헌하게 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그의 믿음과 기도의 능력에 대한 존경입니다. 기도는 성령님의 도구이며, 성령님은 그리스도인이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로 연합하는 때에 각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십니다. 김 목사님은 그의 사역의 모든 성취를, 그가 기도로 그리스도 자신의 하시는 일과 연합하고자 한 결과라고 말합니다.

 

김 목사님이 1980년 세계 복음화대회의 여의도 집회 단상에서 개회를 선언했을 때 그의 몸은 거의 해골처럼 말라 있었는데, 그것은 집회를 준비하면서 40일 밤낮을 금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기도로 영적인 노력의 진수를 삼는 교회로 세계에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김 목사님은 이 헌신의 가장 믿을 만한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피터 바이어 하우스(Peter Beyer haus)는 독일의 복음주의 목회자, 신학자, 선교학자이다. 선교신학자로서 그는 현대 독일 선교 신학의 기틀을 세웠다. 2018105일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이름을 따라서 바이어하우스학회가 창립되었다.

 

피터 바이어 하우스는 1929년에 독일 베를린 부근 호헨크래니히(Hohenkrnig)에서 지크프리트 바이어하우스(Siegfried Beyerhaus) 목사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피터 바이어 하우스 1974년과 1980년 백만 명이 넘게 참가한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EXPLO'74'80 세계복음화 운동에 참가한 것을 포함하여 복음주의의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피터 바이어 하우스는  1995년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 Deerfield, Illinois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피터 바이어하우스 교수는 지난 202011991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영원한 품속으로 안기셨다.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톡
기사입력: 2022/08/22 [10:25]   ⓒ newspower
 
김준곤 목사 관련기사목록
인기기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