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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곤 설교] 각자의 제단에 정성되이 촛불을 켜자
다시 듣고 싶은 김준곤 목사 메시지
 
김준곤   기사입력  2022/08/18 [08:11]

시편 42:5, 104:34

▲ 김준곤 목사     ©뉴스파워



기독교의 수와 양이 오늘날처럼 커졌고 활동과 보급이 오늘처럼 번성한 외모를 가진 때는 없었습니다. 도시에선 두 발도 못 가서 십자가 불은 건물과 책과 사람을 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문화인들은 한 번은 기독교의 문을 거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화려한 외모에 비하면 속은 어딘지 메마르고 영감이 없으며, 생명력이 싱싱하게 차고 넘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고명한 크리스천이 영적 생활에서 패배와 무력(無力)을 의식하며 실감(實感)을 앓고 생명의 잔해(殘骸)위에 신앙의 신화화(神話化)를 걱정하고 섰습니다. 앙상한 이론, 물샐틈 없는 신조(信條)나 번질한 의식들로 버티고 섰는가 하면 흥분과 자기도취의 광신파는 어쩐지 이질적이고 억지스럽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이상이 있고 치명적인 결함, 잃어버린 것, 아니 불연속선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기가 없습니다. 각자의 제단이 황폐해졌습니다. 허물어진 제단을 정성껏 다시 쌓아야 하겠습니다. 이 신앙의 뿌리가 시들어 버린 곳에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입니다.


죄 많은 여인이 값진 기름을 가지고 와서 주님께 바르고 눈물로 발을 적시며 머리카락으로 씻어 그 발에 입을 맞추는 것을 보고 가룟 유다는 그 기름을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인의 고마운 마음의 제사를 가상하시었습니다. 현금성과 실용성이 가치 판단의 척도였고, ‘빈민’과 ‘구제’와 ‘박애’가 구호였던 사회주의와 휴머니스트의 사도들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고 사량함이 본분인 영적 생명임을 망각하고 반 조각 병신 윤리를 깃발처럼 표방하고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의 관계가 나와 이웃과의 관계에 앞서며 전자가 후자를 규정하고 후자는 전자의 높이와 깊이에 표존적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육체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신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신령한 차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고로 뜻 깊은 가르침이나, 신비로운 깨달음이나, 아름다운 감정, 맑은 양심이 인간 요소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귀는 신령한 사랑의 산 친교가 인간 생명의 근원 규정인 차원에 있습니다. 여기서 기독교와 비기독교의 근본 구별이 생깁니다. 평면이 아무리 합해져도 입체가 못되며 시간의 연장이 영원이 못 되며 양(量)이 합해져도 질(質)로 비약을 못하듯이 정신 인간의 극한을 다해도 신령한 생명, 그리스도인의 성령에 의한 생활을 생산하지 못합니다.


모든 인간성의 내재적 아름다움과 자랑됨이 성장하여 소리치며 영혼과 내세를 추방하고 현세와 육체만이 현실이며 명상과 기도와 예배와 제사가 중세 수도원의 유물로 퇴색한 곳에 자신 만만한 분투와 고뇌의 활동주의가 표출합니다.

바쁘게 많이 일하는 사업장과 세계 안에서 세상을 위하여 현실적 크리스천이 활동하는 동안 모든 크리스천들의 마음의 성소는 황폐되어 갔습니다. 바쁘게 쫓기는 현대인의 생활에 시간은 금인데 하루에 30분이나 1시간은 너무도 무리한 출혈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사적으로 짜내는 일하고 공부해야 할 귀중한 시간, 혹은 오락과 취미와 교양을 위한 시간에 비하여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성경과 예배를 위한 제사 시간은 너무도 인색한 배당이며 그 취급에 있어서 있으나마나한 액세서리입니다.

어째서 이 시간을 위하여 침식과 공부와 일을 희생시킬 용의가 없어야 한단 말입니까. 목숨을 건 신앙이 우리의 생활 비중에서 이런 대우를 받으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생활은 기도로 특징지을 수 있었습니다. 새벽 오히려 미명 예수께서 일어나 한적한 곳에 가서 거기서 기도하셨습니다. 사도들은 기도에 전심(全心)하였습니다(막 1:35). 위대한 크리스천의 승리의 비결이 여기에 있었습니다(행 1 : 14).

일정한 장소, 고요한 시간, 내 생활의 가장 값진 부분을 잘라 드립시다. 몸과 마음 다 모아서 한 자루 촛불처럼 주님과 나만의 시간과 장소에 제물이 됩시다. 나는 기도로 말하고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하는 주고받음에 익어 가는 대화 속에 생명의 친교가 있습니다. 말씀(성경) 없는 기도는 공상이나 독백으로 흐르고 맙니다.


생활의 산실…심울(心鬱)이 풀리고 죄를 고하여 용서와 씻음을 받으며 속속들이 나의 사정을 아뢰며 크고 작은 일에 섭리와 뜻을 찾아 감사하며, 내 힘과 세상을 다 합해도 어찌 할 수가 없어 죽을 수도 살 수도 없는 올가미에서 풀려나는 아늑한 장소,나의 재주와 애씀을 비웃던 악마가 떨고 달아나는 시간, 모든 승리로움과 풍성함과 빛으로의 생활이 창조되는 산실, 연약한 인간이기에 고달픔의 하소연도 좋습니다.

목숨이 다한 후에라도 더욱 빌고만 싶은 절실한 염원일 수도 있습니다. 옷자락 붙잡고 밤새 매달리는 몸부림, 말 한마디 못하고 밤새 “주여”하는 흐느낌, 일광욕 같은 은혜의 목욕, 하나님에의 명상, 기도의 제목으로 너무 큰 것도 너무 적은 것도 없으며, 사소한 것이라도 깊은 뜻이 부여됩니다.

주님의 내방을 받을 때 결코 밤은 그대로 밤일 수 없고 소경은 감긴 채로 있을 수 없으며 죽은 자는 무덤에 머무를 수 없으니, 주님을 만난 가슴이 어찌 슬픔과 어두움과 연약함을 그대로 지닐 수 있겠습니까. 보다 새롭고 나은 생명력의 보급, 곧 끊임없는 성장이 없는 곳에 침체와 몰락이 옵니다.


끝으로 나는 친구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습니다. 시간의 길이가 반드시 질(質)을 뜻하는 바는 아닐지 모르나 병아리가 깨이고 태아가 성장하며 열매가 익는 데 시간의 길이를 소요하신 주님의 신령한 생명의 성장을 위하여, 기도와 성경과 예배를 위하여 최소한 하루에 30분을 손을 자르고 눈을 뽑는 용단을 내서 돈벌이나 공부 시간 혹은 침식을 위한 시간에서 쪼개어 드리자는 것입니다. 번영을 위하여 보다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소요 시간인 것입니다. 허물어진 제단 지성소에 다시 기도의 향불을 피우고 헌신의 촛불을 밝힙시다.


*이 글은 김준곤 목사가 <CCC편지> 1964년 3월 2일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예수칼럼>으로 국내외의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유성 김준곤 목사의 진정한 영적 힘은 바로 그의 설교에 있다. 이미 엑스플로 '74, '80 세계복음화대성회 등을 주도하면서 민족 앞에 불을 토한 그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84년의 인생을 살면서 그의 삶의 유일한 소망은 민족복음화, 영혼 구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십자가 사랑을 설교한 사람이다. 어떻게 해서 진정한 주님과 만남을 통해 변화되고 확신 있는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민족복음화의 환상이 잉태되었는지를 설교를 통해 알 수 있다. 그의 설교는 목회자와 평신도, 젊은 지성인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감동과 영감을 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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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8/18 [08:11]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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