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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빌 브라잇] 서울에서 외치는 소리
빌 브라잇-국제 CCC 창설자
 
뉴스파워   기사입력  2022/08/07 [07:41]

한국 CCC 62년의 역사는 고 김준곤 목사(1925.3.28-2009.9.29)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1958년 한국 CCC 설립하고 대학생 선교를 못자리판으로 민족 복음화와 세계 선교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김준곤 목사의 팔순을 기념해 지난 2005년에 제자, 지인, 국내외 동역자 110여 명으로부터 글을 받아 [나와 김준곤 목사 그리고 CCC]라는 기념문집을 만들었다. 기념문집에 원고를 주셨던 분들 중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떠났다. 역사적인 글들을 뉴스파워에 다시 올린다. (편집자 주)

▲ 김준곤 목사(와) 국제CCC 설립자 빌 브라잇 박사     ©뉴스파워



말씀을 선포하고자 하는 김준곤 목사의 결심은 한국전쟁 기간에 시작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을 점령했던 그때는 두려움과 공포, 고문과 살육이 온통 주민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그의 눈앞에서 그의 아버지와 부인이 차례로 잔인하게 살해당했고 몇 차례나 몽둥이에 두들겨 맞고 칼로 거의 목이 잘릴 뻔하기도 하고 마대 속에 싸여 벼랑 꼭대기에서 바다로 던져질 뻔하기도 하였는데 그때마다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가 주님과 새롭고도 보다 깊은 교제를 발견한 것이 바로 이러한 고난의 순간들 속에서였습니다. 이러한 호된 시련의 도가니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는 사람으로 빚어져 나왔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예수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알게 되기를 바라는 소원에 가득 찬 채 그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다가가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자기 동포에게 그리스도를 전하도록 하나님께서 어떻게 한 사람을 주목할만한 방식들로 사용하셨는지에 관한 정말 놀랄 만한 이야기가 여기 있습니다.

 

은자(隱者)의 나라

 

해 질 무렵 서울의 높은 언덕 위에서 바라볼 때면 한국에서 진행 중인 영적 부흥의 상징물들이 도시의 불빛들과 함께 밝게 빛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교회의 뾰족탑 혹은 높이 솟은 철탑들 위에 달린 작은 빨간 십자가들이 형형색색의 지붕들과 높이 치솟은 아파트들로 이루어진 도시 경관을 수놓고 있습니다.

 

일요일 아침이면 서울 내에 있는 교회들 주변에는 교통 혼잡이 일어나는데 이 교회 중 몇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교인 수를 갖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작은 이웃교회의 성가대가 부르는 찬양은 한적한 시장과 상가 곳곳으로 퍼져 나갑니다. 이곳을 처음 찾은 방문자라 할지라도 이 아시아 국가의 25퍼센트가 기독교를 자신의 신앙으로 고백한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멀리 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희생이 없었다면 부흥은 4,300만 국민이 사는 이 나라에 다가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1886년 한국인들은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를 이 은자의 나라로 싣고 온 배가 육지에 접안하고 있을 때 그 배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미국 선교사인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는 간신히 불타고 있는 배에서 탈출했지만, 육지에 도착하자마자 한 한국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를 죽였던 사람은 후에 그리스도께 자기 삶을 헌신했습니다.

 

1910년 시작된 일제 강점기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 동안 고난과 핍박의 호된 시련이 교회를 더욱 연단 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그들의 신도' 신앙을 국교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강제적으로 교회들을 문 닫게 했습니다. 일례로, 일본인들은 예배를 드리던 한국인들을 교회 안에 가둔 채 한 교회를 불태우기 도하였습니다.

 

이 호된 시련을 거치면서 영적 부흥의 도화선 역할을 한 교회 지도자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을 통한 영적 부흥은 한국의 기독교 인구가 1974290만 명에서 오늘날 1,000만 명 이상으로 성장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한국대학생선교회의 대표이자 창설자인 김준곤 목사는 그의 조국을 일으키기 위해 하나님께 강력한 방식으로 사용 받기 전에 그 자신의 개인적 아픔과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남침

 

2차 세계대전 후 한국은 공산주의자들이 북쪽을 지배하게 되면서 두 쪽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김준곤 목사는 당시 장로교 사역자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있었는데 1950년 북한군이 남한을 침략했고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나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김 목사와 그의 가족은 안전을 찾아 한반도 남서쪽 해안에서 조금 떨어진 지도’’ 라는 섬에 있는 부친의 집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공산당 빨치산들이 도망칠 길들을 끊어 놓자 그 섬에 사는 2만 명의 주민들은 긴장 가운데 대살육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김 목사는 회상합니다. “폭도들은 그 섬의 재산을 몰수하고 재판도 하지 않고 사람들과 가족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죽일 만큼의 열심히 그들 가운데서는 그들의 혁명 정신의 한 증거로 높이 인정받았습니다. 저와 제 가족이 바로 이러한 분위기 아래서 살아야만 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저녁 가정예배 시간에 김 목사의 부인은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녀는 그의 가족들 모두에게 그녀가 미리 준비해 놓았던 하얀 상복을 입으라고 요청했습니다.

 

같은 날 새벽 2시쯤 김 목사 가족들은 김 동무하고 부르는 거친 목소리에 잠에서 쨌습니다. 빨치산들은 김 목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그의 아버지를 붙잡아 갔습니다. 자고 있던 3살 된 딸 은희는 남겨놓은 채 김 목사 가족들은 다른 60명의 사람과 함께 산꼭대기로 끌려가 일렬로 세워진 후 한 명씩 차례대로 잔혹하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김 목사는 회상합니다.

 

나와 지척의 거리에서 아버지는 몇 차례 머리를 강타당하신 후 쓰러져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 아내는 눈물을 참으려고 노력하면서 나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천국에서 보자고 말했습니다. 바로 내 눈앞에서 그녀는 난폭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죽을 고비를 경험함

 

공산당 간부 한 사람이 곤봉으로 김 목사를 매질하고 그를 죽게 내버려 두고 떠났습니다. 그는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았지만, 그날 나중에 두어 차례 더 매질을 당했습니다. 김 목사는 거의 죽음이 임박했을 때 의식이 되돌아오다가 다시 가물가물해지곤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김 목사는 한 번 더 의식을 되찾았고 기적적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그는 집으로 뛰어가 그의 딸을 가슴에 안고 산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들은 3주 동안 해안동굴에서 숨어 지내면서 낮에 빈 들에서 캐온 고구마로 연명했습니다. 그 섬을 덮은 살인의 향연이 끝났을 때 2,000명이 살해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한 번은 한 북한 군인이 김 목사의 목을 칼로 베려고 할 때 한 공산주의자 부인이 그에게 그녀의 집에서 피를 흘리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또 다른 경우 마대 속에 넣어져 낭떠러지 꼭대기에서 바다로 던져지려는 순간 모든 의용군은 특정 지점으로 집결하라는 메시지가 왔습니다. 그를 맡고 있었던 두 사람은 그를 죽음의 가장자리에 내버려 두고 도망쳤습니다.

 

이 모든 핍박의 동안 나는 하나님과 화평한 상태에 있지 못했습니다.” 김 목사는 말합니다. “비록 내가 그 당시 그리스도인이기는 했지만 나는 인간 비극의 밑바닥에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나의 구주를 기억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내가 십자가 위에 계신 나의 주님을 바라볼 때 나는 그분과의 교제를 다시 새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용서

 

그의 고통이 초자연적인 평안과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두려움과 증오가 사라졌고 그의 가족을 죽였던 그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그날 인간 비극의 한가운데서 두려움이 죄임을 깨닫고 고백했고 그때 나는 하나님의 죄 씻음과 용서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김 목사는 다시 기력이 회복되었고 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자 그는 딸을 데리고 그 원수의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김 목사의 담대함에 놀라 그를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김 목사는 회상합니다. ‘‘그에게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관해 이야기하자 그는 자선의 죄에 대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함께 기도했습니다. 이 사람은 후에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한 신실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경험은 김 목사에게 그가 공산주의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음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후에 유엔군이 그 섬을 다시 탈환했을 때 김 목사는 그들에게 자선의 가족을 죽였던 그 공산당들의 생명을 살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자비의 행위는 후에 김 목사가 공산주의자들이 점령한 지역에 있는 한 교회를 목회할 힘을 제공하였는데 이 지역에서 그는 많은 수의 공산주의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였습니다.

 

1953년 남한에서 전쟁이 끝난 후 김 목사는 청년 집회에서 설교하면서 대학생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반응은 그리 고무적이지 못했습니다.

 

대학생선교회(CCC)

 

사역을 위해 자선이 더 준비되어야 할 필요를 인식하자 그는 곧바로 남 캘리포니아에 있는 풀러 신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CCC 간사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국제 CCC 단체의 설립자이자 총재인 빌 브라잇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습니다.

 

김 목사는 말합니다. “나는 CCC의 단순하고 기본적인 메시지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사용하실 수 있는 열쇠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거듭남, 성령, 기도 그리고 성경에 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빌 브라잇은 김 목사에게 그 단체의 간사로 동참해 줄 것과 한국에 돌아가 CCC의 첫 번째 해외 사역을 시작할 것을 설득하였습니다. 김 목사는 그의 민족을 향한 비전에 사로잡혀 1958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40명의 대학 교수들을 만났는데 그는 대학생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하였습니다. 1960년 김 목사는 200명의 크리스천 대학생들을 데리고 기도와 헌신과 금식의 날을 위해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 한국을 복음화 시켜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그 이후의 시간이 그 역사가 됩니다.

 

1950년대 말 이후 23만 명 이상의 대학생들이 한국 CCC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CCC에는 거의 1천 명에 가까운 전임 및 협동 간사들이 있는데 이들은 223개의 한국 대학 캠퍼스에서 19,800명의 학생과 함께 사역하고 있습니다. 한국 CCC의 특별한 사역인 나사렛형제들은 그들의 직장 속에서 사역하기를 원하는 일단의 대학 졸업생들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직업적 전문영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속해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김 목사님은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위해 대학 캠퍼스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를 복음화하는 것입니다. 캠퍼스 사역은 단지 그 궁극의 목표에 이바지하는 한 가지 수단에 불과합니다.”

 

세계 복음화 대성회

 

김 목사는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로 시작하기로 했지만, 그는 한국 교회사의 흐름을 형성한 두 차례의 거대한 전도 훈련 집회를 조직하였습니다. 323,419명이 엑스플로'74에 참석했는데 저녁 집회에는 5일 동안 매일 밤 100만 명에서 150만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습니다. 1980년 세계 복음화 대성회에는 약 천만 명이 참석하였습니다. 참석자들은 그 주 내내 복음을 전하러 밖으로 나갔는데, 130만 명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자기 삶 속에 받아들이겠다고 응답하였고 180만 명의 사람들은 자신이 성령 충만을 받았다고 표하였습니다.

 

김 목사의 지도력에 따라서 한국대학생선교회는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직장인, 군인, 교사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도록 훈련했으며 새신자들에게는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신앙의 기초를 가르쳤습니다. 한국에 있는 가장 큰 여덟 교회의 목사들이 그들 교회의 성장 원인을 한국대학생선교회에서 전수 한 전도 및 제자화 훈련의 공으로 돌립니다.

 

하나님은 김 목사님을 한국의 복음화를 돕기 위한 핵심 인물로 사용해 오셨습니다.”라고 1968년 이후 김 목사를 도왔던 나일스 베커는 말합니다. 그는 김준곤 목사의 사역이 없었더라면 한국의 기독교인 수가 인구의 25퍼센트에 미칠 수 없었을 것이며 게다가 1,800만 명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자신의 믿음을 전하고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는지 훈련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앙개념

 

김 목사의 영향력은 곳곳에 있는 한국 기독교인들의 삶과 사역 가운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번은 빌 브라잇이 대한항공을 타고 서울로 가고 있었습니다. 음식이 제공되었을 때 그는 고개를 숙여 기도하였습니다.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통로에 서 있던 한 승무원이 목사님이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라고 빌 브라잇은 대답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 주기 위해 4영리 소책자를 그 승무원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승무원은 흥분이 되어서 자선이 한국대학생선교회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당시 그는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교회학교 한 반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CCC10단계 성경 공부와 신앙개념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뛰어가서 자신이 비행기 위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교재들을 가지고 와서 빌 브라잇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는 자신의 영적 뿌리를 김 목사에게 두고 있는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학생, 기술자 그리고 심지어 다른 나라에 가 직장을 구해서 선교사로 살아가려고 하는 여성들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 위하여 실제로 자기 자선을 노예로 드리기로 서원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위대한 개척 선교사의 아들이자 이전에 한국에 장로교 선교사로 있었던 사무엘 모펫은 한국 교회의 극적 성장에 있어 김 목사의 주요한 역할을 인정합니다. 모펫은 지금 대학 캠퍼스에 복음이 잘 전파되어 있는 것은 전적으로 김 목사님의 수고 덕입니다. 젊은이들은 한국기독교에서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라며 그는 자선이 매우 많은 일들을 성취하고 대형 집회를 조직해 온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해 지나치게 말을 아낍니다. 그는 명백히 매우 많은 시간을 말씀 목상과 기도하는데 보냅니다.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의 영적 에너지를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조직력이 있거나 분주히 움직이는 타입은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그게 사실일지 모르나 김 목사의 설교 스타일은 결코 말을 아끼는 얌전한 스타일이 아닙니다. 많은 한국인은 그를 굉장한 개인적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으로 압니다. 그는 학생들의 마음을 녹이는 수려한 언어의 웅변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 브라잇은 ‘‘그는 정말로 내가 일생에 알았던 가장 비전에 사로잡힌 사람이자 매우 경건하고 헌신된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1990년 여름, 필리핀 마닐라를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덮기 위해 계획된 국제 전도 여행을 위해 3,000명의 한국인이 그 도시로 간 것도 다름 아닌 김 목사의 비전에 감동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참석자들은 102개 국가에서 왔지만, 그중에 한국에서 온 그룹이 가장 큰 그룹이었습니다. 가까운 미래에 김 목사는 만 명의 학생들을 일본에 보낼 계획입니다. 후에 그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선교하기 위하여 십만 명에 이르는 한국인들을 파송할 작정입니다.

 

지름길은 없다.

 

김 목사의 지도력의 독특한 점은 기도와 금식에 대한 그의 헌신입니다. 김 목사는 이야기합니다. “기도 외에 전도를 위한 지름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승리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김 목사는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여전히 금식하는데, 종종 심각한 어려움의 기간이나 사역을 위한 재정적 어려움에 부닥칠 때는 40일까지 금식합니다. 한국전쟁 이후 그는 재혼했고 그사이에 3명의 딸을 두었습니다. 그 딸 중 한 명을 1982년 위암으로 잃었습니다.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은 아직도 김 목사의 기도와 금식의 훈련을 성실하게 따르고 있습니다.

 

김 목사는 금식이 성경의 주된 교리는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그는 금식을 하나님 앞에서 하는 시위(데모)로 비유합니다. 많은 정치 시위를 보고 자란 한국 학생들은 이것을 잘 이해합니다. 많은 이들이 그의 모범을 따릅니다.

 

김 목사는 한국인들이 점점 부유해짐에 따라 학생들이 냉담해질 것에 대한 걱정을 표현해 왔습니다. 그러나 매달 있는 공습 훈련과 정찰 비행기에서 나오는 음속 폭음 그리고 그대로인 북한군의 전쟁 준비는 번영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그들의 조국이 또다시 호된 시련을 겪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지속해서 상기시켜 주는 도구가 됩니다. 북한의 남침 위협은 많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주중 철야 기도회와 금식기도 수련회에 참석하는 하나의 이유입니다.

 

김 목사는 그의 경험으로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그의 조국이 그가 꿈꾸는 통일된 기독교 국가가 될 기회를 얻게 될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도시들 내의 교회들의 급격한 성장과 철야 기도회 및 금식 수련회에 참석하는 한국인들의 영적 열정은 김 목사의 꿈이 점차 현실화하여가고 있음을 시사해 줍니다.

 

이 원고는 빌 브라잇이 쓴 “Dr. Joon Gon Kim : Heart and Soul”, More Then Conquerors(Chicago: Moody Press, 1992)의 일부를 게재한 것입니다.

 

빌 브라잇은 국제 CCC의 창설자이다. 세계 복음화의 비전에 사로잡힌 빌 브라잇은 전 생애를 통해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하였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세계 복음화가 이루어짐으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보기 원했으며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을 꿈꾸었다.

 

빌 브라잇은 1921년 오클라호마주 코웨타에서 태어나, 노스이스턴주립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을 전공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대학 재학 중에는 학생회 활동, 신문, 웅변, 토론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졸업 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사업가로도 활동하였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할리우드 장로 교회에 다니던 빌 브라잇은 헨리에타 미어즈 박사에게 제자 훈련을 받았고 1945년에 그의 삶을 그리스도께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는 프린스턴과 풀러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였다. 1951년 풀러 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에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로 삼으라.”(:28:19)라는 성경의 말씀을 사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세계를 복음화 하는 데 있어 가장 전략적인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하였고 미래의 지도자인 대학생과 청년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담당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을 얻은 빌 브라잇은 교수님이 지어준 C.C.C.(campus crusade for Christ)라는 이름으로 선교단체를 창설 하였다. 학기 중이었지만 사명의 시급함을 느껴 공부를 일단 중단하고 대학생들을 제자화 하는 사역에 바로 뛰어들게 되었다. 빌 브라잇은 소유는 물론이고 삶 전체를 그리스도께 양도한다는 계약서를 아내인 보넷 브라이트와 작성하고 UCLA에서 CCC 활동을 시작하였다.

 

빌 브라잇 박사는 세계 복음화를 자신이 죽기 전에 이루기를 열망하였다. “오늘의 학원 복음화는 내일의 세계 복음화!” , “우리 세대에 지상명령을 성취하자!” 이러한 구호를 외치며 제자화 사역에 열정을 바쳐 사역하였다. 복음의 빠른 확산을 위해 4영리를 만들어 암송하여 전하거나 책자로 제작해 쉽게 읽어주게 하였다.

 

CCC 사역은 활동을 뛰어넘어 운동이 되어갔다. 1951UCLA를 시작으로 1952년에는 3개 주 4개 대학에서 헌신된 동역자들(이 함께 했고 1956년에는 62명의 간사가 10개 주 23개 대학에서 사역하였다. CCC 운동은 미국을 넘어 세계로 확산하였다. 1958년 김준곤 목사에 의해 한국 CCC가 시작되었고, 1959년에는 파키스탄과 중동에서 CCC 사역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192개 나라에서 C.C.C. 운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빌 브라잇 박사는 CCC를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지상명령을 성취하는 데 힘썼다. 출판, 오디오, 비디오 등 모든 미디어 매체를 통해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 중 예수 영화는 2000년을 기준으로 45억 명이 관람하였고 수많은 사람이 예수 영화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1996년에 빌 브라잇은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 상을 수여 받았다. 빌 브라잇은 상금 전액을 세계 복음화와 영적 운동을 일으키는데 기부했다. 그는 전 생애를 지상명령 성취를 위해 바쳤으며 성령 안에 살아가고자 늘 호흡처럼 기도하였다. 빌 브라잇은 대학생선교회의 간사들과 함께 지금 세대에 지상명령 성취를 이룩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사역해 오다가 20037, 향년 82세로 하나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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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2/08/07 [07:41]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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