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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2.01.20 [23:08]
[김준곤 설교] 네가 이 모든 것보다 더 사랑하느냐?
성경 본문 요한복음 21:15∼18
 
김준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 ‘네가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세 번씩 문답을 거듭함으로써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는 최대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목사 중의 목사가 되었고, 지도자 중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교회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지금 세계 가톨릭의 본산지가 되어 있는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에는 마태복음 16장 18절의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예수님의 위탁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베드로의 계승권이 로마 가톨릭의 모든 성직자들에게 전승되어 온다고 합니다. 교회와 성직자의 권위의 근거를 베드로의 권위에 둔 것입니다.

▲ 1980년 8월 12일부터 15일까지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80세계복음화대성회에서 김준곤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10만 선교사 헌신서약을 이끌었다.     ©뉴스파워

 

 

이렇게 기독교 세계에서 그리스도 다음으로 높은 권위와 지도권을 자니고 있는 베드로는 어떻게 이렇게 큰 지도권과 권위를 예수님에게서 위탁받을 수 있었습니까? 무슨 근거에서, 무슨 자격으로, 어떤 조건을 통해서 그렇게 지도권을 가진 수 있었습니까? 이러한 권위는 어떻게 해서 부여받았습니까? 또 베드로를 중심으로 한 이 적은 무리가 어떻게 전 세계를 지배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습니까? 그 해답은 가장 간단한 문답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네가 이 모든 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물으신 말씀에 대해 예수님을 무엇보다도 사랑한다는 베드로의 고백이 베드로로 하여금 지도자가 되게 했고 영적 권위의 근거가 되게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묻고 베드로는 사랑의 고백을 한, 이 사랑의 문답을 통해서 이와 같은 권위가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운 사람이나 거룩하고 경건된 유덕한 사람들을 찾아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갔던 세계는 예수님을 미워했으며, 예수님이 찾아갔던 사람들은 죄인이었고 추악하고 세상의 기준으로 보아서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자기 마음에 맞는 사람들, 아름다운 사람들, 경건한 사람들 또 장미꽃과 백합꽃이 피어 있는 아름다운 장소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가장 추악하고 더럽고 보잘것없는 곳을 찾고 원수들을 찾아갔습니다. 이 사실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의롭고 착하고 자기 마음에 맞고 아름다운 사람들만 사귀기로 하고 그런 사람들만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로마 제국의 도처에 분산시켜 거기에 기독교 종자를 뿌리게 하였듯이 오늘날도 우리 기독교인들을 이 세상에 흩어지게 하고 도처에 퍼지게 해서 기독교인들의 표준으로 볼 때 보기 싫은 사람들, 흉악한 사람들 합할 수 없는 사람들, 죄악이 가득 찬 사람들,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사람들, 그리스도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 기독교를 냉소하는 사람들, 자기 자신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 원수인 사람들,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십니다. 암흑과 증오를 가지고 대적하는 세계에다 빛과 사랑을 가진 복음의 종자로서 우리를 심으시고 우리를 내던지시고 때로는 우리를 그 사람들 속에서 죽게도 하시고 수난도 당하게 하십니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여 인간에게 찾아오신 뜻을 우리에게 위탁하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뭉쳐서 친교를 갖는 것처럼 감회롭고 힘 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시편 133편 1절을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라고 하는 맡이 있습니다. 우리 CCC의 학생들이 연합해서 같이 살고 같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우리는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옥중에서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요 영적 아들인 디모데가 말년에 자기 곁에 찾아오기를 갈망했고, 또 디모데가 옥중에 찾아와서 헤어질 때는 두 사람이 눈물로 헤어졌던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몹시도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또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우들에게 편지하기를 ‘간절히 너희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주야로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편지에 보면 누구 집안의 누구누구라고 이름을 전부 기록하며 그들에게 문안하고 그들을 마음에 항상 생각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가 직접 글을 쓰기보다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말로 일러 주면서 친히 제자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사도들은 형제와 형제, 지체와 지체가 만나는 즐거움, 서로 마주보고 만나는 사귐의 즐거움을 즐겼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잡수시고 함께 자고, 함께 일하고, 함께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의 천사처럼, 영처럼, 하나님처럼 오신 것이 아니라 가난한 육체를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 속에, 가난한 마음속에, 추잡한 사람들 속에, 죄 많은 사람들 속에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서로 육체로 잠시 동안 만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편지를 나누거나 한 자리에 모여서 기도하고 찬송을 하거나 사랑하는 형제들이 모여서 같이 있거나 하는 시간들은 비록 그것이 말 없는 시간일지라도 비할 데 없이 소중한 것입니다. 인간의 체험 가운데서 이보다 더 감격스럽고 소중한 체험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형제와 더불어 살고 형제와 만나는 것을 즐거워하고 크리스천들이 모여서 모임을 하는 것이 필요하고 소중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세상을 위해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등불이 있는 이유는 등불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세계를 비추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했는데 소금이 있는 목적은 소금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물건들이 썩지 않게 하고 음식의 맛을 더 돋우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크리스천들은 세상을 위해 있고 세상 안에 있고 세상 안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추잡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보기 싫은 사람들과 같이 살아야 하고 원수에게로 가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들에게 친구로서 파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고통과 혼란이 많고 부조리가 많은 한국에 우리들을 태어나게 한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사명이 크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위임 받은 사명이 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예수 잘 믿는 스위스나, 혹은 미국 같은 나라에 파송하지 않으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잠깐 살았던 패사디나(Pasadena)라고 하는 곳은 미국에서도 가장 상류 계층에 속한 지성인들과 종교가들이 은퇴한 후에 와서 살고 있는, 30만이 도시를 이루고 있는 가장 기후도 좋고 풍치가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도덕적으로도 교양적으로도 문화 수준이 높고 가장 부유한 곳입니다. 이러한 예수 믿는 사람들, 교양이 높은 사람들, 아름다운 사람들만 사는 세계에 우리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다른 지역에 있는 다른 사람과 다른 의미가 있고, 다른 약속과 위탁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의 친절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면, 첫째로는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을 매개로 해서 친절을 가집니다. 우리는 서로가 그리스도를 매개로 해서만 그의 안에서 삽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맺을 때도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타인에게 통로가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직접 가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가 없을 때는 내 아내와 내 아들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나와 내 아내, 나와 내 아들 사이엔 엄숙한 한계선이 생기고 예수님을 통해서 내 아내에게 가야하고 내 아내도 예수님을 통해서 내게로 와야 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도 이제는 내 마음 대로할 수 있는 아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맡겨 주신 아들이며 예수님을 통해서 내 아들과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은행에 저금해 둔 돈을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나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졌었지만 이제부터는 나와 내 저금통 사이에, 내 재산과 나 사이에 예수님이 매개자로서 가운데에 존재하십니다. 친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전에는 아무렇게나 임의로 지낼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친구와 사귐을 가질 수가 없고 그 친구도 예수님을 통하지 앉고는 나에게로 올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전에는 허물없이 맘대로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거기에 엄격한 한계선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거리가 멀어졌다고 할 수도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거리가 훨씬 가까워졌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직접적인 모든 관계가 없어졌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직접적인 관계가 없어졌습니다. 나와 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는 모두 간접적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예수를 통해서 보는 세계입니다. 예수와 관계를 맺는 것으로 관계 지어진 세계입니다. 나와 내 조국 사이에 예수님을 집어넣고 내 조국과 관계를 맺습니다. 내가 어느 정당에 소속되어 있을 때에라도 나와 정당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나는 그런 권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위탁 받은 일이 없습니다. 주님을 통해서 내 정당과 내가 소속한 단체와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판단과 지식과 경험이 직접적으로 내 경험이고 내 지식이니까 그것이 나의 것이라고 남에게 강요하지도 않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경험이 옳다고 하면 그것이 내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내 경험의 척도를 가지고 예수를 재는 것이 아니라 내 경험을 예수님의 척도로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판단하는 것도, 내가 나를 책망하는 것도 내가 직권을 가지고 나를 책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옳다 하면 내가 자신을 긍정해 줍니다. 내가 밉고 내가 싫고 내가 저주스럽고 죽어 버리고 싶을지라도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기에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나를 높여야 하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질그릇에 보배를 담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므로 나는 소중한 것이다,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쳐 주신다, 이 보잘것없는 것을 위해 주님이 죽어서 까지라도 나를 살렸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근거가 거기에 있습니다. 내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 말씀과 약속이 나를 의롭다 함으로 나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이나 나를 책망하는 것이나 나를 비판하는 것이나 그 모든 것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성을 가지게 되고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이지 내가 나를 직접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우리의 시선의 초점은 자기를 반성하고 뒤나 앞을 보는 일에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데 있습니다. 미래를 보는 것도 뒤를 보는 것도 아닙니다. 내일을 반성하고 바라보는 것도 아닙니다. 위를 보고 걸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나 자신 속을 들여다보고 반성하고 명상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귀는 밖에서 들려오는 그리스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우리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우리의 방향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정합니다.

우리의 의가 어디 있느냐고 세상 사람들이 물으면, 이것은 새로이 부여 받은 의인데 주님이 두루마기를 만들어 입혀 주신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의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주님이 우리의 의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더 확실한 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구원받은 확증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우리 은 우리들 속에서 확증을 찾아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데서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 구원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밖에 구원받은 증거는 없습니다. 도덕의 법정에서 나를 보라고 앞장서서 나온 용기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적인 법정에서 내 영적 경험 이만하면 구원받은 확증이 확실하다고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증거로 해서 이렇게 말할 사람도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약속해 주셨기 때문에 이것이 확실한 나의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 구원의 약속과 이 말씀은 나 혼자 믿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게 전달되어 왔고, 또 이와 같은 확증과 신앙과 은총과 축복은 나 혼자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더불어 가지며, 나 혼자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더불어 지키고 보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 줄 크리스천들이 필요합니다. 크리스천이 확신을 잃었을 때는, 실망에 빠졌을 때는 그 구원에 동참할 형제의 간증과 확신이 필요합니다. 어떤 때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보다 어거스틴의 마음속에 있는 그리스도가 더 확실하고, 어떤 때는 형제 속에 있는 확신이 내 확신보다 더 소중한 확신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신앙 체험이 다른 형제 속에 들어 있을 때 그것을 내 것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가 어디를 가다가 보니까 다리가 없는 사람은 남의 다리를, 손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가지고 밭에서 일을 하더랍니다. 진실한 크리스천이란 이렇게 손이 없는 사람의 손이 되어 주고 다리가 없는 사람의 다리가 되어 주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의 신앙의 확신이내 신앙의 확신보다 더 소중하고 나의 신앙의 재산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남의 것이 아니라 나의 것입니다. 나의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신앙의 공동 소유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분여이며 참여입니다.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삼고, 내 것을 남의 것으로 삼게 해주어야 합니다. 내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책을 유산으로 가질 수는 있습니다. 지방 법원장으로 있는 우리 CCC의 이사 한 분이 사위는 꼭 법률 공부하는 사법관을 찾아야 하겠다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평생을 사법관으로 살아 왔는데 모아 놓은 책이라도 그대로 계승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책을 나누어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안에 있는 신앙을 그대로 다 나누어 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형제 속에 들어 있는 신앙과 확신이 내 것이 될 수 있고 내 것을 형제 속에 나누어 줄 수 있는 참여와 동참과 분여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다른 어떤 단체보다도 생명적이며 유기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사적인 것이면서 공동의 것이고 서로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소중한 신앙 고백이 나의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성 어거스틴과 성 프란시스의 신앙과 그 신앙의 확실성과 사랑과 충성이 얼마나 나의 것이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신앙 공동체 속에 들어왔을 때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나의 것으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나 한 사람이 신앙 고백을 합니다. 내 입으로, 내 의지로, 내 단독으로 하나님 앞에 신앙 고백을 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신앙 공동체 전체로서 우리는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한 사람이 죄를 고백하면 우리는 그 죄의 고백 속에 내 죄도 포함시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덕을 가지고 있을 때 그 덕을 나의 것으로 나누어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의 신앙에 있어서 본연의 거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예수를 매개체로 하지 않는 직접적인 관계는 분열을 가져옵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인의 모임과 자연인의 관계는 언제나 분열입니다. 성경에 말하기를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누구나 다 무신론자입니다. 이론적인 무신론자가 아니더라도 실천적인 무신론자입니다. 더듬어 찾는 것은 있습니다. 그리움은 있습니다. 하지만 무신론자입니다. 하나님을 소유하는 길은 그리스도 안에서밖에는 없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가는 길은 없습니다.

에고(ego)라고 하는 자아는 근본적으로 분열이요 벽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주장하고 분노하고 지배하고 억압하며, 자기를 중심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타인이 언제든지 적으로 나타납니다. 사르트르는 ‘실존에 있어서 자유의 적은 타인이다.’라고 했습니다. 타인은 자기 자유의 적입니다. 아름다운 에고를 지니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녀의 에고를 지니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국 사람의 에고도 있습니다. 한국 사람의 에고도 있습니다. 무식한, 철학적인, 종교적인, 각종 각양의 크고 작고 높고 낮은 에고가 있습니다. 그러나 에고의 본질은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욕구적이며 자기주장을 합니다. 그러기에 언제나 분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없이 인간과 인간의 평화는 없습니다. 기회가 없기 때문에 분열이 생기지 않을 뿐이지 어느 때든지 이해관계가 오면 반드시 다툼과 증오가 옵니다. 셋째로는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른 사람과 서로 짐을 나누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이 영적 공동체 안에서는 형제들의 짐을 서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사랑에 빚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옆에 있는 형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무슨 빚이냐 하면, 사랑에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갚아야 할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받아야 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꾸어준 것은 없고 빌린 것뿐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교도들에게는 부담이 전혀 없습니다. 자기의 것은 자기가 하면 됩니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안 시키면 됩니다.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도 내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이교도들은 내가 하기 싫은 남에게 시키지 않으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아무리 갚아도 갚지 못할 사랑의 부채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형제를 조건 없이 용납하며 삽니다.

 

주님 우리의 질고를 담당하고 죽음을 대신했습니다. 같이 울고 같이 기뻐하는 장소는 크리스천의 집단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라는 장소입니다. 크리스천의 모임은 형제의 질고와 죄를 같이 나누어지고 같이 울고 같이 즐거워하는 그런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모임이 아닌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기가 만든 영상을 다른 사람에게 주장하고 요구하고 그것이 마음대로 관통이 안 될 때에는 충돌과 대립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의 모임에서는 포학하고 흉악하며 원수 되고 버려진 사람들을 관용과 겸허와 인내와 사랑으로써 용납하며 삽니다. 죄인이 살 곳은 크리스천의 세계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무한한 포용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좋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가 아니라 악하고 보기 싫은 원수 같은 사람들이 와서 깃들어 살 수 있는, 자유로움과 해방과 즐거움과 용납을 받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소외감을, 혹은 배타의식을 느끼게 한다든가 흑은 열등감, 억압감, 거부감을 느끼게 했다면 그 공동체야말로 실패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모인 사랑의 장소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단체는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민, 예수님이 오시면 사자와 어린 아이가 함께 놀고 어린 아이가 독사 굴에 손을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심판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은총과 용서를 나누어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고발자이기 보다는 용납하고 싸매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찔러서 쪼개만 놓는 사람이기 보다 그 질러 놓은 잣을 싸매는 위안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집단 속에서 벗어나 살 수는 없습니다. 집단은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국가, 가정, 학교, 교회 등 여러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세 사람이 모이는 것도 그룹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그룹이나 집단에서 분리되어서 혼자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집단과 그룹이 점점 더 복잡성을 띠고 복잡한 조직 형태를 가지게 되므로 우리들이 거기에 소속하고 적응하는 형태도 점점 더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이 집단 형태를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 공동체와 영적 공동체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영적 공동체란 하나님이 있는 공동체입니다. 자연적 공동체란 하나님이 없는 공동체입니다. 자연적 공동체는 인간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모여집니다. 인간의 에로스와 열정과 열망과 이상으로 모여집니다. 여기에는 언제나 충동적인 욕망이 작용합니다. 하지만 영적 공동체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공동체입니다. 이 영적 공동체 안에서는 예수님이 설정한 이상의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비록 인간의 표준으로 생각할 때 그리스도가 설정한 것보다도 더 강하고 아름답게 보이고 특별하게 높은 사회적인 차원에 속하는 것같이 보이더라도 그리스도가 설정한 것 이상의 것을 영적 공동체에서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불필요한 것을 기독교 영적 공동체 안에 들여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영적 공동체는 인간의 열망이나 이상의 실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 실현입니다. 자연인이 영적 공동체에게 특별한 환상, 자기류의 도취 체험, 각종 체험, 암시적․심리적 신비 체험, 심령술적인 것 등 비범한 능력을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강요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상을 자연인이 때로는 가장 진지하게 열심으로, 때로는 희생적 태도로 요구하기도 하고 때로는 강요하기도 하다가 관통이 안 되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실책하고 비난하고 고발하는 냉소적 인간으로 변해서 형제를 비난할 뿐만 아니라 그때부터는 하나님을 고발하고 자기는 자기 분열을 일으켜 자기를 미워하고 자포자기하고 자기가 싫어지고 나중에는 그 공동체를 원수처럼 보게 됩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그리스도가 설정한 것에 자기를 적응시키려 하지 않고 자기가 이질적인 것을 만들어 와서 그것을 그 공동체에다가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거부당할 때 적개심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영적 공동체 안에서는 요구나 지배를 하고 권위를 찾고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의 기회를 찾고 높은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에 앉고, 그 속에 모순과 약함과 제약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삼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영적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자기의 가정 안에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비난하고 그것을 남에게 공포하고 떠들고 다녀서는 안 됩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자기 가정을 사랑하고 가정의 고통과 아픔에 참여하는 사람은 자기의 가정 속에 있는 약점과 허물과 죄악 속에 자기 마음을 찢고 그 상처와 아픔을 느끼며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 들여서 오히려 자기 참여와 봉사와 기도와 사랑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공동체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설정해 주신 것에 우리 자신의 못된 자아를 적응시켜 나감으로써 우리가 변화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 현실과 인간적 현실은 분리되어 있습니다. 영적 현실은 성령만이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적 현실은 인간의 자연 능력과 마음이 지배합니다. 이 두 현실은 전혀 다릅니다. 성경에는 인간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고 악하며 모든 거짓되고 악한 것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경건하고 신실하게 보이는 것도 에로스이고 에고입니다. 인간 에로스는 봉사하기 보다는 무엇인가를 요구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적 현실은 인간의 성격, 인격의 영향력, 사람의 심리적 마력과 매력, 인간의 지배력, 또는 지성과 덕성의 탁월력 등을 통해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감격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지배력, 덕성, 영향력, 지성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이런 것을 통해서 강약 관계를 만들고 대차 관계, 상하 관계, 종교 관계를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구속과 부담과 분열을 일으켜 타인에게 은총을 주지 못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연인의 영향력이고 힘에서 생기는 부작용인 것입니다. 따라서 자연인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는 크고 강할수록 공포와 위협과 우상과 비인간화 모체가 되기 쉽습니다. 과거를 회상해 보더라도 인간의 역사 가운데 자연인들이 모여 강력한 집단을 만들면 반드시 비인간화가 되었고 비인격화가 되었으며 우상화로 개인에게 공포와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적응치 못하는 사람은 좌절을 갖게 되고 소외를 당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자연인의 단체가 성스러운 종교적 형태로 나타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현재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면 몸을 불사르는 데 내어 주고 자기의 모든 재산을 다 주고 모든 것을 통달하는 지식이 있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천사의 방언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이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의 사랑이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은 모두가 자기를 위한 것이므로 언제나 지배이고 소유이고 욕망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영적 사랑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6절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면과 평안이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생각은 언제나 사망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직 생각은 언제나 생명과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연구해 보면 이 두 종류의 인간을 분석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의 도덕적 선행, 덕성에 대해서 언제나 참회하는 입장에 있어야 성자적인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생활과 성인의 생활은 다른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생활은 참회자의 입장에 서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우리 CCC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아니지만 사회단체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 단체입니다. 우리CCC가 이상한 신비스런 종교적 체험을 이야기하고 천사 같은 경험을 중심으로 하게 된다면 이 CCC라고 하는 것은 몇 년이 못가서 무너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체험은 굉장히 중요하며 희망적이지만 체험을 중심으로 하고 그 기초 위에다가 영적 공동체의 운명을 건설하고 이끌고 나간다면 멀지 않아 난관에 봉착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체험이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것입니다.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입니다. 지극히 작고 평범한 것 가운데서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일생에 한두 번 밖에 없는 굉장히 황홀한 체험, 신비스런 체험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약속과 믿음을 중심으로 이 공동체를 키워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CCC는 세리 같은 사람이나 강도나 창녀나 사기꾼이나 그 누구라도 제외시키면 안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거절을 당하거나 소죄당할 때 우리 단체는 점점 배타적이고 축소되어 이상한 단체가 되어 버립니다. 주님의 약속과 그것에 대한 딛음으로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CCC는 믿음으로 사는 단체가 되어야지 신비스런 종교적 체험으로 살며 잎사귀만 키워 가는 단체가 되어서는 절대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선민의식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CCC 회원이다,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 교회 다니는 청년들은 별 것 아니고 다른 단체의 사람들도 역시 별 것 아니다. 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다. 특수 의식, 선민의식을 갖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같은 형제들이고 용서 받은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봉사자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가르치기보다 배우는 데 흥미가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9장 46절에 보면 제자들 중에 누가 더 크냐는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을 신약 성경에서 아무 기교 없이 간단히 기록했지만 그러나 이것은 복잡한 현대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주님께서 지적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강자가 있고 약자가 있습니다. 우리의 공동체 속에는 우자가 있고 열자가 있습니다. 또 수재가 있고 저능아가 있습니다. 경건된 사람이 있고 악질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의견의 차이가 많이 생깁니다. 신비적 체험이 있는 사람이 있고 아주 세속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각양각색의 주장과 각양각색의 성격이 나타나므로 이런 것들을 어떻게 공동체로서 잘 융화시키며 키워 나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대단히 큰 과제로 우리가 지니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존재하는 한 내내 이 과제를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이 공동체가 존재하는 한 지속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의 과제이고 세계의 과제이며 크리스천의 과제입니다. 이 차이를 도덕적 수준에서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고 심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런 것보다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장소를 우리가 봉사할 장소로 생각하고 사랑을 주는 장소로 생각해야지 우리의 의견과 우리의 지혜와 우리의 경험이 가장 으뜸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든지 우리의 의견은 수정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주장은 언제나 오류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완전무결하고 절대적인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의견을 내세울 때 이것이 제일이고 이것은 꼭 관철되어야 한다고 절대적 주장을 하는 것은 고집입니다. 고집을 피우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압니다. 우리의 의견은 언제든지 수정할 가능성이 있고 자신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긍휼을 입은 죄인이고 빛을 많이 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의 죄수라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봉사하고 가르치고 위로하고 상담하는 것보다도 말을 들어주는 사랑과 봉사가 중요한 때가 있습니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윤리 가운데 하나는 서로가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데 있습니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타인의 사정을 들어 주는 데 있습니다. 듣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어떤 때는 더 큰 봉사가 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들어 주는 귀를 찾고 있습니다. 들어 주어야 할 장소에서 자기가 혼자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말하던 것을 중지하고 들어 주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의 말이라도 우리는 들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큰일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자기의 주장을 할 때는 심히 적습니다. 어떤 문제를 내놓고 세미나를 할 때, 그 주제가 크면 클수록 절대적 유일무이의 주장이라고 내세울 만한 무모한 인간은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절대적 주장을 할 만큼 완전무결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학문은 상대적입니다. 언제나 수정이 필요합니다. 언제나 발전과 조언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듣는 귀를 두 개 가졌습니다. 입은 하나지만 귀는 두 개입니다. 듣는 일이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형제를 위해서 정말로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심리학자들도 이제는 들어 주는 봉사의 효과를 알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소속 의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단체에 소속되어 있어서 이것도 충실히 안하고 저것도 충실히 안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룹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세대의 사명 속에서 부름 받은 우리들은 우리의 시간과 노력을 어리에다 바쳐야 하는가를, 삶의 우선순위가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전도 운동도 더 잘될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더 강력하게 전파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침묵해야 할 장소에서 침묵할 줄 알아야 하고 말해야할 장소에서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할 장소에서 말하지 않는 것 또한 비겁한 것입니다. 나서지 않을 장소에서 나서는 것 또한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자기의 의무와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비밀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격의 가장 지성소는 불가침입니다. 우리의 동의 없이는 하나님은 우리를 강요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라면 서로 권면해야 합니다. 서로 책망할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에스겔서에는 ‘그 핏 값을 네 손에서 찾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 형제의 죽고 사는 책임이 네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가인은 못된 놈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자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르트르는 ‘타인은 타인이고 나는 나이고, 신은 신이고 나는 나이고, 신과 나는 두 개의 평행선이다. 영원히 둘이 합할 수 없는, 너는 너이고 나는 나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네 형제를 멸망케 하거나 죄를 짓는데도 그대로 보거나 네가 위로하지 않거나 돌보지 않았을 때 그 죽은 피 값을 네 손에서 찾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의 부채를 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를 지키고 구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서로가 가르침을 받고 가르치는 입장에 있습니다. 위로를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도움이 필요치 않을 만큼 강한 사람이 없습니다. 겸손하고 솔직하게 우리는 책망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또한 남에게 겸손하고 솔직하게 사랑으로 남을 책망하고 권면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아첨하는 사람은 언제나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좋은 말만 하지만 속으로는 경멸하고 중상하고 언제나 냉소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대로 직언을 해야 합니다. 사실대로 이야기해야 합니다. 형제를 위로하면서 같이 죄를 자백하는 입장이 되어야 합니다. 나도 너와 같은 죄인이라고 울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알에서 서로 말씀이 허락하는 한 약속에 근거해서 죄를 서로 자백하고 사랑하고 시정해 가는 그런 단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두 이상하게 가장해 가면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말입니다. 믿는 그대로 서로 다 벗겨 놓고 우리가 서로 기도하고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노출을 해서도 안 됩니다. 토하는 것을 적당히 토해야지 함부로 낱낱이 토하면 나중에는 그 토한 것이 구역질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백은 아주 경건되게 해야 하고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의 심리 요법으로 인격의 매음 행위처럼 자기를 함부로 노출시키면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순수한 영적 권위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권위가 필요한데 어떤 권위입니까? 정치적인 권위가 아닙니다. 공부를 남보다 잘해서 일등을 하는 교육학적 권위가 아닙니다. 돈을 많이 가지는 권위가 아닙니다. 힘세고 주먹 센 권위가 아닙니다. 순수한 영적 권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는 권위입니다. 남이 나에게 와서 말을 할 때나 내가 들어 주는 권위, 남을 사랑해 주고 봉사해 주는 권위, 짐을 져 주는 권위, 기도해 주는 권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권위, 사랑하는 권위, 봉사하는 권위입니다. 인간의 두드러진 욕망이라든가 재산과 같은 것을, 예언자적인 인물이라거나 제사장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또 감독자적인 권위를 가졌다거나 지도자적인 소질을 가졌다거나 영적 인격을 가졌다거나 매력을 가졌다거나 하는 인간 탐미를 이 자리에서 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위대한 인간성보다 못된 결점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성경의 특이한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윗도 잘못한 기록이 있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에게도 아주 추잡한 기록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아마 제자들 중에서 제일 많이 실수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수를 제일 많이 한 베드로가 제일 높은 권위를 차지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권위, 형제에게 봉사하는 권위, 말씀의 권위, 기도하는 권위,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순수한 권위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권위가 필요합니다. 어떤 권위가 필요하냐 하면,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지도권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권위를 가진 사람은 지도자가 아니고 봉사자입니다. 발을 씻어 주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앞서가서 호령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있는 곳에는 그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아니하고 아름다운 나무의 풍성한 열매만 보입니다.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게 숨어서 일을 합니다. 그는 자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를 내세웁니다. 그래서 말씀의 사람이고 기도의 사람이고 전도의 사람입니다. 사랑하고 순종하고 충성하는, 이러한 영적 권위를 가진 숨어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합니다.

우리 CCC는 나사렛 마을의 어부들처럼 단순합니다. 사회적이고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종교 단체가 아닙니다. 그 어떤 운동도 학회도 연맹도 조합도 아닙니다. 그냥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나사렛 형제단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단입니다. 가난하고 순수하고 아주 단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금 계획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실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실 것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가진 여인이 자기의 배 속에 아이가 잉태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이 무슨 잉태를 시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적인 과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세계사적인 과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역사의 종말적인 문제에 당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존적인 모든 고민과 아픔을 우리 속에 통과시키고 있습니다. 정치나 사회나 도덕이나 모든 과제를 우리는 다 짊어지고 이제 출발했습니다. 분명히 새 가죽 부대에 담은 새 포도주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누구보다도 민감하고 아프게 이 현실의 비극 의식에 투철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우리는 주목해서 보아야 하겠습니다. 위대하고 거룩한 사람들의, 엘리트의 모임이라는 생각보다도 우리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고 누룩처럼 번져 가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생각을 가져야합니다. 남이 살기 위해 자기가 죽고, 누군가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자기는 슬픔을 담당하고, 후대가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고난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너는 흥해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는 순교자의 각오를 가지고 우리는 이 십자군 순교자적 대열에 참여를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죽임당할 양과 같이, 도살당할 양과 같이 택함을 받은 운명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이런 운명을 택하지 아니하면, 우리가 자원해서 이 대열에 참가하지 아니하면 강자의 힘이 우리에게 덮쳐서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위기 앞에 놓여 있는 역사적 소명을 받은 단체이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1966년 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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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10/27 [20:24]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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