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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0.09.30 [14:02]
[오피니언]K-방역, 시민정신, 공동체주의
장동민 교수(백석대 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장동민

 

▲ 장동민 백석대 신학대학원 교수(교회사)     ©뉴스파워

1. “이태원 클라쓰”가 제시하는 새로운 기업 상(像)

2020년 초 JTBC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이클)는 적잖은 파장을 일으키며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장가’(長家)라는 요식업계 대기업의 ‘장회장’(유재명 粉)에 아버지를 잃은 ‘박새로이’(박서준 粉)가 처절한 노력 끝에 ‘장가’를 무너뜨리는 이야기다. 전형적 복수극,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다윗 스토리, 아버지를 극복하는 성장 드라마, 여기에 탄탄한 플롯, 개성 넘치는 캐릭터, 오글거리는 명대사 등이 덧붙여지면서 국민들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이클은 단지 재미만 준 것은 아니었다. ‘장가’와 ‘단밤’이라는 두 기업을 통하여 우리 사회 기업문화의 변화의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우선 두 기업은 모두 회사를 ‘가족’(家族)으로 여긴다는 점에 주목하자. ‘장가’의 ‘가’(家) 자가 이 기업이 가족을 모델로 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며, ‘단밤’의 박새로이도 기회만 있으면 자기 회사의 멤버들이 한 가족임을 강조한다. 두 기업 모두 회사와 구성원이 공동운명체이고, 가족에게 하는 것처럼 회사에 의리와 충성을 바쳐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영화 ‘대부’의 돈 꼴레오네 패밀리를 연상하면 되겠다. 기업이 가족과 동일시될 수 있을까? 당신이 노동조합 임원이라면, 기업이 가족의 은유를 사용하는 데는 아버지 같은 기업주에 대항하여 쟁의를 일으키지 말라는 잔꾀가 숨어 있다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영역주권설(sphere sovereignty)을 신봉하는 카이퍼주의자라면, 안 그래도 우리 사회가 ‘기업사회’가 되어버렸는데 이제는 가족들에게 바쳐야 할 사랑까지도 기업에 바쳐야 하겠느냐고 고개를 저을 것이다. 당신이 개인주의의 세례를 받는 젊은이라면, 회사는 일하고 임금 받는 곳일 뿐이니 업무 시간 외의 회식이나 상사와 함께 하는 휴일의 등산 같은 것을 강요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글쎄... 다 맞는 말 같기는 한데,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회사를 가정으로 생각하는 정서가 깔려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나만 해도 대학이라는 한 직장에서 20년이 넘게 봉직하고 있는데, 대학을 가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몸에 배었다. (참고로 나는 영역주권설이나 기업의 잔꾀에 대하여 잘 알고 있고, 충분히 개인주의자기도 한다.) 우리 대학을 부를 때는 항상 ‘우리 대학’이라고 부르고, 학생들을 대할 때는 아들딸 같고, 동료 교수들 중 몇은 형제보다 친밀하다. 우리 대학에 좋은 일이 생기면 내 일처럼 기쁘고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한숨 쉬며 기도한다. 직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또한 내 생의 의미 있는 일이 거의 모두 직장에서 일어나다 보니, 저절로 그런 감정을 가지게 되었나 보다.

물론 나도 안다. 직장은 가족이 아니다. 내가 학생들에 대하여 책임 질 수 있는 부분이 극히 제한적이고, 동료들과의 친밀성도 업무와 관련된 것이 거의 전부이고, 정년이 되면 미련 없이 떠나야 한다는 것을. 단지 회사가 ‘가족’이라는 은유로 묘사할 수 있을 정도로 나와 운명이 얽혀 있고, 상사나 동료들과 형제 같은 친밀감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마무리하자. 어쨌든 한국의 많은 직장인들은 서구 사람들보다 훨씬 직장을 가족과 같은 공동체로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 [이태원 클라쓰] 홍보 포스터  

 

2. 공동체의 두 유형

이클의 장가와 단밤은 모두 가족과 같은 공동체지만 완전히 다른 종류의 공동체다. 장가가 한 사람을 정점으로 일사분란하게 조직된 전체주의적 공동체라면, 단밤은 주체성을 가진 개인들이 모여서 이룬 민주적 공동체다. 장가의 오너인 장회장은 그 기업과 동일시된다. 장회장의 가장 큰 목표는 자기 식구들 밥 굶기지 않는 것인데, 이 목표를 위하여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타 기업을 짓밟는다. 그는 기업의 매출액과 직원 숫자를 늘림으로 자아를 확장한다. 그 회사의 직원들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지 않은 기계의 부속품에 불과하다. 만일 한 사람이 없어지면 다른 이로 대체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단밤의 기업문화는 완전히 반대다. 각 개인의 특징이 모두 존중되며, 그 개성이 모여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그들은 모두 결함이 있는 존재들이지만(전과자, 건달, 사이코패스, 트랜스젠더) 각자가 그 기업의 주인들로서 서로를 격려하며 공동체를 세워 간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대체로 두 가지 모델로 분류될 수 있다. 첫째는 장가(長家)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대기업 모델이다. 기업 오너가 정점에 있고, 그 아래 그의 지분과 경영권을 책임지는 미래전략실, 각 회사의 CEO, 중간관리자와 하급관리자들이 피라미드형으로 조직되어 있다. 회사의 정체성과 역사와 상징과 인사권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며, 다른 사람들은 거대한 조직의 일부로서 소속감과 정체성을 확인할 뿐이다. 이 모델은 변화가 적고 안정성이 있어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선호할 것이다. 또한 의외로 직원들도 선호할 수 있다. 연공서열에 따라 보수가 결정되는 구조이고, 무엇보다도 큰 권위의 그늘에 안주하는 것이 편한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두 번째 모델은 이클이 제시하는 새로운 기업 상(像)이다. 기업의 지배구조는 일인 통치가 아닌 거버넌스(협치)이고, 권한이 동등한 수평적 팀에 업무가 할당되어 있다. 각 팀은 독립적인 사업을 진행하고, 팀내에서도 각 개인은 동등한 자격을 가진 전문인이다. 그러면서도 이클의 단밤은 단순한 개인주의자들의 집합이 아니다. 이들은 가족과 같은 공동체 의식으로 뭉쳐 있다. 박새로이는 자신만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 각 개인을 주체로 존중해 주면서도 동시에 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받아주고 이끌어준다. 이런 형태의 기업문화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주체성을 가진 사람이 되려면 어려서부터 자기주도 학습에 길들여져야 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계발해야 하며, 매년 연봉협상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다수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두 번째를 원할 것이다. 이러한 기업문화의 변화는 세상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세상의 변화라 함은, 우선 기업 환경의 변화이고, 좀 더 넓게는 사람들의 인식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시각을 좀 더 넓혀보도록 하자.

3. K-방역에서 K-경제로: 공동체주의와 시민정신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코로나19 방역에 가장 성공한 나라다. 확진자나 사망자의 숫자가 적은 것 뿐 아니라, 의료시스템이 붕괴되지도 않고, 사재기와 같은 사회적 혼란도 없으며, 셧다운 대신 개방을 택함으로 경기침체를 최소화하였다. 이런 성공의 요인에 대하여서는 진단 키트의 개발과 같은 기술적인 면, 의료와 방역 체계, 사회적 여건 등 여러 방면에서의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 분석 중 하나가 개인주의 대(對) 집단주의의 관점과 방역 성공의 상관관계를 살피는 방식이다.

애초에 우리나라에 확진자 수가 적게 나오고 모든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는 것을 보면서, 프랑스의 석학 기 소르망(Guy Sorman)은 한 신문에서 한국인들이 유교식 집단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권위에 순응하였다고 분석하였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소르망이 한·중·일 삼국을 구분하지 않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에 빠져 있다고 느꼈다. 시진핑 일인 지배하에 있는 중국이나 오랜 세월 정권교체를 하지 않은 일본과 달리, 우리는 바로 얼마 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통령을 탄핵한 시민들인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서방 언론들이 한국의 민주주의에 주목하면서 한국인들의 자발성 때문에 방역에 성공하였다고 앞 다투어 칭찬하였다. 중국에서 코로나19가 잡혀가자 자칫 전체주의가 방역에 효율적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을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우월한 체제인 것을 설명하는 근거로서 한국을 서구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다.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가운데 어떤 체제가 방역에 더 유리할까? 개인주의가 방역에 불리하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한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으로 생각하니 자연히 방역이 어렵다. 내 가게를 내가 열겠다는데 이를 막기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집단주의가 효과적일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코로나19가 발생하게 된 시점으로 돌아가 보면, 중국의 정보 통제와 억압 때문에 전염병 확산이 시작되었다. 정부에 대한 비판이 거의 사라진 자민당 체제 하 일본의 경우, 정부는 자신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확진자 숫자를 줄일 수 있다. 가장 억압적인 체제인 북한은 코로나19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다가 방역의 기회를 놓쳤다.

여기서 잠간, 개인주의 대(對) 집단주의라는 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개인의 자유에 호소하면서 마스크를 쓰지 않으려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과, 그를 따르는 공화당 주지사들, 그리고 도시 봉쇄에 항의하며 다시 일하겠다고 시위하는 군중들, 슈퍼마켓을 다니며 사재기하고 약탈하는 시민들, 조지 플로이드의 추모 시위를 비난하는 백인들, 또한 해변에 모여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과거 독일 국가사회주의(Nazi)가 보여주었던 집단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하는 의심이 든다. 개인주의는 아주 쉽게 집단주의로 바뀐다. 집단주의 체제의 극단이라 할 수 있는 북한의 이념이,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근본으로 하는 ‘주체(主體)사상’인 것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의 주장처럼, 인간은 자유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인종주의나 애국주의와 같은 집단주의로 도피하는 존재인 듯싶다.

그러니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대립시키는 대신, 개인과 집단이 관계 맺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방식을 대립시키는 것이 좋겠다. 앞서 이클에서 장가(長家)와 단밤이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둘 다 가족공동체를 표방하면서도 서로 다른 방식의 개인-집단 관계 맺기였던 것을 상기해 보자. 장가 방식의 개인-집단 관계를 ‘집단주의’(Groupism) 혹은 ‘전체주의’(Totalitarianism)이라 부르고, 단밤 식의 개인-집단 관계 맺기를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라고 부르자. 공동체주의가 집단주의와 다른 점은 ‘개인’을 출발점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개인의 자유, 의지, 결단, 비밀스런 사적 영역, 사적 행복의 추구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다. 그러면서도 개인의 자유는 좋은 공동체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공동체를 위한 헌신에 인색하지 않다.

바로 여기서 민주적 시민정신이 탄생한다. 법과 규칙을 지키고,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하며, 타인을 돕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권리의 일부를 양보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갖는다. 탐욕적인 자아 확장과는 다르다. 장가로 대표되는 탐욕적 자아 확장은 다른 사람을 내 밑에 두고 그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그의 칭송을 받으려는 사악한 욕구다. 그러나 진정한 공동체주의는 내 자유와 더불어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타인과 더불어 사귀는 것 안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자유로운 주체적 개인이 공동체를 위하여 기꺼이 기여하는 시민이 되는 것이다. 공동체 정신을 공유한 사람들끼리는 쉽게 연대를 형성할 수 있다.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결사나 야합이 아닌, 공동선을 위한 열린 연대다. 이들은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하며 약자와 연대하기를 싫어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방역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런 공동체주의에 근거한 성숙한 시민의식이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 하나의 자발적인 작은 실천을 통하여 국가라는 공동체가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으며, 또한 국가 공동체의 진정한 목적은 나의 자유와 의지를 지켜주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공동체주의가 못 견뎌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집단이(그것이 국가든, 특정 지역이든, 특정 세력이든, 남성이든) 개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2016년 겨울의 촛불집회와 정권교체를 통하여 국가적 폭력을 평화적 연대로 극복한 경험이 있다. 지금은 오랜 세월 개인을 압박하던 우리나라의 주류세력들이 하나하나 해체되어가는 과정이며, 미투운동에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 공동체주의가 싫어하는 다른 하나는 공정성의 훼손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개인이 공동체를 위하여 참고 희생하지만, 그것이 도를 넘게 되면 결국 사회 시스템의 파괴로 연결되기 때문에, 이를 경계하는 것이다.

K-방역을 가능하게 하였던 공동체주의를 사회의 각 분야에 적용시키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다. 가장 먼저 적용해야 하는 분야는 경제다. 국가가 경제를 계획하는 전체주의인 사회주의의 길도 아니고, 개인에게 모든 것을 맡겨 두는 개인주의적 시장경제의 길도 아니며, 이 둘의 어중간한 결합도 아니다. 개인과 기업의 창의성을 극대화시키면서도 사회적 파탄을 막는 체제,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면서도 공정성이 강화되는 체제여야 한다. 공동체주의를 교육에 적용시키는 K-교육, 같은 원리를 북한과의 관계에 적용시키는 K-평화도 가능하리라.

4. 공동체주의의 실현가능성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은 것처럼 어쩌다 방역에 성공한 것 가지고 너무 멀리 나간 것 아니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겠다. 옳은 지적이다. 잊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라 불렸다. 그렇다면 지금은 헤븐이 되었나? 방역의 성공에 취해서인지 코로나의 기세에 눌려서인지 크게 부각되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서민층과 젊은 세대의 고통은 더 심화되었다. 민주당의 압도적 승리로 더 나은 미래가 올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지만, 그 기대가 착각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주의는 것은 깨어지기 쉬운 체제다. 언제든지 생존본능에 충실한 각자도생의 개인주의로 귀환하거나 혹은 집단에 자신을 맡기는 전체주의로 갈 위험이 있다. 정치가 공동의 목표를 위한 연대가 아닌 권력을 위한 정치공학적 투쟁의 장으로 전락하고, 기업은 새로운 미래사업에 투자하는 대신 부동산에 투자하고, 국민은 비전을 상실한 채 분노와 혐오와 소비주의로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게 된다는 말이다. 2020년 봄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기주의와 집단주의의 동거를 보면서 자괴감이 든다. 이게 민주주의의 끝인가? 이 사회가 우리가 그렇게도 동경해 마지않던 미국사회란 말인가? 그 대통령을 뽑아주고 지지해 주는 미국 복음주의가 대한민국 기독교의 미래가 되어야 하는가? 그런 복음주의를 형성한 미국 신학자의 책에서 혹은 미국 신학교들에 유학함으로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공동체주의라는 것이 너무 이상적인 이념 아닌가?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탐욕으로 가득 찬 미련한 존재가 아니던가? 그들에게 이런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부여되어 있는가? 역사적인 한 순간 주체적 개인의 자율적 헌신과 연대가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경험을 잠깐 누릴 수는 있겠지만, 그런 상태가 영속되지는 못한다. 예컨대 1980년 광주에서, 1987년 시청 앞에서, 1998년 금 모으기에서, 2016년 겨울 광화문에서, 2020년 봄 대구에서, 우리는 잠간 동안 공동체주의가 역사 속에서 체현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러나 곧 파국이 왔다. 광주의 끝은 신군부로, 직선제 개헌은 3당 합당으로, IMF는 각자도생으로, 새로운 정부의 출현은 부동산 폭등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과거의 한 때를 추억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할 뿐, 역사의 발전이 있기는 한 것일까? 그리고 K-방역의 성공 다음에는 어떤 파국이 기다리고 있을까!


5. 역량기반교육(Competency Based Education)

아, 교육이 있지! 지금의 국민은 공동체주의를 영속시키지 못한다 해도 미래 세대는 교육을 통하여 얼마든지 공동체주의에 적합한 사람으로 키워 질 수 있지 않겠는가? 공동체주의에 적합한 인간을 만들자. 과거 산업화 시대에는 애국심과 집단주의를 몸으로 익힌 일군들을 만드는 데 학교가 동원되었었다. 또한 정보화시대에는 정보 활용능력을 가진 학생들을 길러야 했다. 이제 우리 다음 세대는 각 개인이 고유의 자주성과 창의성을 가지면서도 협업하고 연대하고 소통하는 공동체정신을 체현한 젊은이여야 한다.

실제로 교육은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 언제부턴가 초중등학교와 대학에서 ‘역량기반교육’ 혹은 ‘역량중심교육’이라는 말이 회자되기 시작하였고, 이제 우리 교육의 중심으로 훅 들어왔다. 2009년 개정 교육과정에 ‘역량’ 개념이 등장하였고, 2015년에는 핵심역량을 기르는 것이 교육개혁의 방향으로 제시되었다. 대학교육에서도 ‘대학혁신지원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교육부 주도의 교육과정 개편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핵심이 바로 역량기반교육이다. 2015년에는 국가직무능력표준(NCS)이라는 것을 제도를 만들어 직업인의 역량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제시되었다. 교육에서 ‘역량’이 이렇게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사회의 변화와 깊은 관계가 있다. 과거의 교육이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제 지식은 네이버에서 찾으면 되고 기술은 로봇이 대체해 준다.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 지식과 기술을 엮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창의적이고 혁신적 아이디어다. 그리고 그것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협업을 통하여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흐름을 잘 아는 OECD에서는 ‘데세코 프로젝트’(Definition and Selection of Competencies, 1997-2003)를 통하여 미래 사회에 필요한 핵심역량을 정의하였다. 크게 분류하면 세 가지다. 첫째는 도구 활용 역량으로서, 언어, 상징, 텍스트, 지식과 정보, 새로운 기술을 이해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회적 상호작용 역량인데, 의사소통, 관계, 협동, 갈등 해결 등이고, 세 번째는 자율적 행동 역량으로서 한 개인이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이를 실행하는 능력이다. 대한민국 교육부에서도 우리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핵심역량을 정의하려는 노력을 하였고 그 결과 ‘대학생핵심역량진단’ (K-CESA, Korea Collegiate Essential Skills Assessment)이라는 새로운 역량진단 방식을 개발하였다. K-CESA도 역시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내용은 OECD가 제시한 데세코와 대동소이하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자. 첫 번째 역량은 과거부터 필요하였던 기본적인 읽기, 쓰기, 계산하기 등에 새롭게 등장한 컴퓨터 활용 능력과 같은 것들이 덧붙여진 것이니 크게 새로울 것은 없다. 전통적인 지식과 기술 습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인데, 창의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이 타인과 관계를 맺어 공동체를 형성하는 방식을 가르치는 것이다. 개인이 주체가 되어 자기 인생을 설계하고 관리해야 하며,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종합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러나 개인주의에서 머물러선 안 된다.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하여서는 대인관계, 의사소통 능력, 갈등 해결 능력이 중요하고 또한 글로벌 시대 타문화를 이해하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교육부가 주도하는 역량기반교육을 통하여 공동체주의를 익힌 미래 세대가 길러질 수 있을까? 이제 시작 단계라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내가 보기는 쉽진 않을 것이다. 우선 역량기반교육이 도입될 때 모든 사람들이 우려했던 것인데, ‘공정’이 최고의 가치가 된 우리 시대, 학생들의 역량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쉽지 않다. 예컨대 ‘소통’이라는 역량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본래는 교사가 학생들과 팀을 이루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학생들의 소통 역량을 키워주기도 하고 이를 평가하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평가할 때 교사의 주관이 들어가기 쉬우므로 공정하지 않다는 불평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 교사는 소통에 관한 선택식의 시험문제를 내고 이를 맞추는 사람에게 소통 역량 점수를 더 주는 방식으로 평가할 것이다. 실제로 학생들에게 함양되는 역량은 소통이 아니라 소통에 관한 지식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역량이 키워지기 어려운 환경인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각급 학교에서 역량기반 교육이 이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공동체주의가 실현되는 사회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꽤 오래 전부터 그런 교육을 실시해 온 서구사회의 경우, 극우파와 종교 근본주의와 신나치주의 세력이 줄어들지 않고 있다. 내가 이제 막 시작한 역량기반교육에 초를 치려는 것이 아니다. 방향은 옳게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하기 위하여 무언가 본질적인 것이 빠졌다. 뭐가 빠졌을까?

6. 시천주(侍天主): 한울님을 모심

그 빠진 부분을 찾기 위하여 역사를 잠시 돌아보자. 다소 거창한 질문이지만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한·중·일 삼국이 모두 동양의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는데, 왜 하필 한국만 공동체주의가 (일시적으로나마) 실현될 수 있었을까? 다른 나라들은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있는데, 어떻게 해서 한국에서만 주체로서의 개인과 동시에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 가능하였는가? 많은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처럼 나도 그 시작점을 3.1운동에서 찾는다. 3.1운동은 단순히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 아니었다. 3.1운동은 민중이 주체가 된 민권운동이었으며, 그 운동의 주체는 계몽된 민중이었다. 한국 민중은 지식인이나 정치가에 의하여 선동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지도자 가운데는 여성이나 낮은 신분의 사람도 있었다. 이후 3.1운동의 정신은 4.19와 5.18, 19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16년의 촛불혁명으로 계승되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이런 민권운동의 전통이 미미하였고 대부분 지배 세력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그렇다면 3.1운동이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3.1운동을 조직하고 움직였던 주체세력이 천도교(동학)와 기독교 등의 종교(宗敎)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초월적 존재와의 만남을 통한 인간 실존의 발견과 이를 통해 형성된 자의식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어쩌면 유일한 개인주의의 시발점이다. 동학(東學)의 핵심교리인 ‘시천주’(侍天主, 천주를 모심)를 생각해 보라. 천주(한울님)를 모시는 것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동학교도들은 모든 것의 근원인 한울님을 모시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자라는 자각을 가졌다. 자신만 존귀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천주를 모시고 있으니 그들도 모두 동일하게 존귀하다. 귀천과 반상, 노유와 남녀를 차별하면 안 되고, 하늘을 섬기듯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한울님이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 사명을 주셨으니 이에 맞추어 살아가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 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개인의 실존적 자각과 공동체 의식에 관하여서는 잠시 후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를 살피면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1907년 평양으로부터 시작된 대부흥은 역사학계 일각에서 비평하듯 “비(非)정치화”의 출발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의 발견이고 또한 민족의 발견이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인사들과 성도들은 모두 자신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졌다.

신적 존재와의 강력한 만남의 체험, 이를 통한 실존적 개인으로서의 자아 정립, 그리고 신적 소명으로서의 자발적 희생, 이것이 바로 공동체주의를 가능하게 해 주는 핵심적인 에너지다! 우리 민족은 탁월한 두 종교로 인하여 (‘동학’이 상당 부분 ‘서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을 사족으로 덧붙인다.) 공동체주의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후일 1980년대 민주화 시대 때도 종교의 역할은 계속되었다. 정의구현사제단이나 가톨릭 농민회와 같은 천주교 내에서의 운동, 진보적 기독교의 민중신학 등이 한국의 공동체주의를 가능하게 한 힘의 하나였다.

한국 기독교인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은 민주화시대와 그 이후 민족 공동체를 위하여 한 일이 전혀 없다는 비판이 있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옳은 주장이다. 그러나 시각을 좀 더 넓혀보면 보수적 신앙인이 공동체주의 형성을 위하여 아무 일도 안 하지는 않았다.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시위를 주도하다가 검거되는 예는 거의 없었으나,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개인적으로나마 공동체를 위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국가를 위하여 기도하고,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가까운 이웃을 도왔다. 젊은 신앙인과 신학생 가운데서는 현실에 대하여 대답을 주지 않는 교회에 실망하고 성경에서 답을 찾기 위하여 노력한 사람들도 많다.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개인과 공동체의 바람직한 관계는 개인주의나 집단주의가 아닌 공동체주의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서는 학교의 역량기반교육으로는 부족하고 반드시 종교적 각성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나의 생각이다. 헌법 제20조 2항 국교 금지의 조항에 묶여 공립학교에서의 교육에서 모든 종교적 가치들을 배제하는 세속적 교육에 대하여,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강조하고 싶다.

7. 성령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실존적 자각과 공동체에 대한 헌신의 조화에 대하여 세상의 어느 종교나 철학보다도 더 분명하고 아름답게 보여준다. 신앙의 최소 단위는 항상 개인이다. 죄를 짓는 것이 개인이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 것도 개별적이며, 회심도 각자의 마음에서 일어난다.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으로 태어났다 해서 저절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출생과 동시에 유아세례를 받고 교회의 멤버로서 성찬에 참여한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도 아니며, 4대 째 예수 믿는 가문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신앙을 보장 받을 수 없다. 개인의 회심이 우선이다. 동시에 회심을 경험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일부가 된다. 각 개인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공동체를 위하여 바치게 되며,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를 사용하여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기 마련이다.

사도행전은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이런 진리를 성경의 다른 책들에 비하여 좀 더 명확하게 밝혀주는 책이다. 집단주의에 빠져 있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를 분리시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동시에 회심한 이방인들을 이 새로운 공동체에 가입시켜야 하는, 그래서 진정한 의미의 ‘교회’를 형성해야 하는 시대적 소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우선 사도행전에서 개인의 회심이 강조되는 구절들을 찾아보자.

‘각각’ 혹은 ‘각 사람’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ἓκαστος가 가장 많이 사용되는 성경이 사도행전이다. 그 첫 사건은 오순절 성령 강림이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행2:3) 이 구절에서 “각 사람 위에 하나씩”에 주목하라. 원문의 의미가 잘 전달되도록 의역하자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 위에”이다. (on each and every one of them) 오순절에 성령께서 120명의 신도들에게 동시에 내려오셨는데, 큰 불이 그들 위에 한꺼번에 임한 것이 아니라, 불꽃이 혀처럼 갈라져 각 사람 위에 임하였다. 각각 다른 죄를 짓고, 다른 아픔을 가지고 있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각각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이다. 이 사실을 잘 아는 베드로는 그의 첫 설교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8)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자신을 개별적으로 불러내신 것을 아는 바울도 그의 제자들을 개인으로 대하였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행20:31)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하나의 교회, 한 그리스도의 몸에 가입되었다. 때로 소위 성령운동과 군중 심리, 좀 더 가혹하게 표현하면 집단적 광기(狂氣)가 혼동되기도 하는데, 이 둘은 철저히 구분되어야 한다. 진짜 성령 받은 사람은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정의를 추구한다. 자신과 같은 편에 서 있지 않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고 욕설을 해대는 사람은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한 영적 지도자의 기도나 안수를 통하여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그 지도자를 맹종하지 않고, 지도자 자신도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재물이나 받은 은사를 공동체를 위하여 기꺼이 나누고, 좀 더 넓은 사회를 위하여 자신을 드림으로써, 공동체주의를 실현하기 마련이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즉시 공동생활을 시작하였고, 같은 마음으로 모였고, 물건을 통용하였으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행2:44-47) 교회가 박해를 받자 모여서 “한 마음으로” 기도하였고(4:24; 12:12), 어려운 일을 당한 형제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모금하였으며(11:29), 중요한 문제를 놓고서는 함께 금식하였다.(13:2) 예루살렘 공회에서는 애초에 여러 당파가 여러 의견을 가지고 모였으나, 일단 합의가 되자 그 결정을 같은 마음으로(=‘만장일치로’ 개역개정) 수행하였다.(15:25) 이 모든 일을 행할 때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하였다. 강제나 집단 최면이 아니었다.

사도행전과 더불어 ἓκαστος가 많이 사용되는 성경은 고린도전서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고린도교회에서 바울, 베드로, 아볼로 등 지도자들을 추종함으로 인한 분열에 대하여 답을 주기 위한 성경이 고린도전서이기 때문이다. 바울에 따르면, 교회의 지도자들은 하나님께서 각각에게 서로 다른 일을 맡기신 종들일 뿐이니, 그들로부터 필요한 영적 유익을 얻으면 되는 것이지 그들을 추종할 필요까지는 없다(고전3:5,8,10). 뛰어난 지도자를 따르는 것을 넘어서서 그들에게 복속되어 그들에 기대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 하면 안 된다. 모든 믿는 자들은 각각 하나님의 판단과 칭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4:5) 성경은 시종일관 인간 지도자를 지나치게 추종하는 것을 우상숭배의 일종으로 규정한다. 사람들이 지도자에게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할 때 공동체는 분열되기 마련이다. 그 분열을 치유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성도 각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고린도전서의 두 번째 ἓκαστος 사용은 첫 번째와 반대의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가 집단주의의 경향을 경계하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는 공동체를 무시하려는 태도를 경계하려는 목적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내에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은사를 자랑하며 교회를 혼란으로 몰아넣는 경향에 대하여 책망한다.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공동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고전12:7, 사역) 각 개인과 교회 공동체는 마치 몸의 각 지체와 몸 자체의 관계와 같다. 몸의 각 지체가 분명 독립적이지만 동시에 몸의 일부로서 몸을 세워준다.(12:11,18; 14:26) 기독교는 다른 어느 종교나 사상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개인의 책임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동시에 개인은 공동체에 봉사할 때 의미 있는 삶을 산다는 것도 똑같이 강조한다. 요컨대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의 원리와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다.


8. 한국교회의 집단주의적 성향

이쯤해서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성경이 하나님 앞에서의 실존과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럼 현재 기독교는 뭔가? 우리 시대 대한민국 기독교가 개인의 자유나 결단을 고양시키고 있으며, 공동체를 위한 헌신의 동력을 제공하고 있는가? 어째서 과거 3.1운동에서는 교회가 공동체주의의 선봉에 섰었는데 지금은 아무 것도 못하고 폐만 끼치고 있는가?

코로나19는 숨겨져 있던 많은 것들을 드러내주었다. 특히 교회의 코로나 대응 모습을 보면서, 교회의 수준을 또렷하게 알게 되었다. 극단적 개인주의인 이기주의와 집단주의가 공존하는 우리 교회의 수준 말이다. 많은 교회와 목사들이 방역 당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면예배를 강행함으로 이기적 행태를 보였으며, 이런 교회들은 목사 한 사람을 중심으로 한 집단주의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사랑제일교회 성도나 그를 추종하여 전국에서 모인 성도들의 경우, 전광훈목사를 메시아처럼 맹목적으로 숭배하였다.

만일 대한민국 교회가 성경이 가르치는 공동체주의를 제대로 구현하는 공동체라면 이런 식의 행태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의 교회라면, 아니 3.1운동에 앞장섰던 한국의 초대교회라면 어떠하였을까? 각 교단의 총회는 비상체제로 돌입하여 교단에 속한 미자립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다 기울였을 것이다. 수백억의 기금을 마련하여 절반은 교회들의 월세보조와 영상예배를 위한 기술적 지원에 사용하고, 절반은 코로나로 힘들게 된 이웃을 위하여 사용하였을 것이다. 예배가 ‘생존’의 문제가 된 작은 교회들이 대면예배를 고수하다가 이웃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이나, 큰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회 지도자들이 자신의 교회 헌금 액수가 80%에 달한다고 자랑하듯 이야기하는 것이나, 또는 마치 자기는 한국교회 죄악에 아무런 책임이 없는 듯 훈수를 두는 신학자나, 내가 보기엔 하등의 차이가 없다.

사랑제일교회 뿐 아니라 다수의 대형교회의 행태를 보라. 지도자가 설교 단상에서 어떤 가짜 뉴스를 퍼뜨려도, 무슨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형을 살아도, 아무리 사회적 지탄을 받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똘똘 뭉친다. 교회 내 반대자가 있으면 그의 입을 막고 여의치 않으면 쫓아낸다. 자정(自淨)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지도자의 오만, 컬트 화(化)된 종교의식, 추종자들의 사회경제적 좌절과 이로 인한 심리적 불안, 교인을 통제하고 반대자들을 배제하기 쉬운 폐쇄적 구조 등이 효과적으로(?) 결합된 결과다. 집단주의가 너무 공고하여 이를 무너뜨리고 건정한 공동체주의로 전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를 바로 잡아 진정한 개인과 공동체 의식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다.

한국교회는 고장 난 엔진으로 착륙을 시도하는 비행기와 같다. 두 가지 랜딩 이 예상된다. 하나는 연착륙이다. 앞서 말한 사도행전에 나타난 순서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각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는 것이다. 자신을 발견한 성도는 공동체를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헌신하게 된다.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가 자신의 과오를 살피면서 사도행전의 방식을 따른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이 바람직하다. 아니면 깨달은 성도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목회자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고, 깨달음을 얻은 젊은 지도자가 등장하여 정화운동을 일으켜 교회와 교단을 새롭게 하여도 좋다.

두 번째는 경착륙이다. 첫 번째가 안 될 때 하나님께서 손을 대신다. 집단주의가 너무 단단하여 체제 내 운동으로 균열을 일으킬 수 없을 때, 마침내 외부의 충격으로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다. 남(南) 유다의 바벨론 유수가 대표적인 사건이다. 왕조-성전 복합체가 철저히 파괴된 후 포로지에서 개인의 재발견이 이루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세상이 완전히 흔들리는 충격을 받았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각각의 성도들이 통렬히 회개하고 새로운 마음을 얻게 되었으며 새 영을 받았다. 육신의 할례와 마음의 할례가 다름을 알게 되었고, 혈통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을 구분하게 되었다.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 헌신이 있었던 것도 포로지에서였다.

고장 난 비행기는 과연 연착륙에 성공할 수 있을까? 지도자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의 실존을 깨닫고 결단하고 공동체 의식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 경우 이미 시작된 K-방역의 성공을 발판으로 K-경제, K-교육, K-평화에 공헌할 수 있고, 교육계에서 이미 시작된 역량중심교육의 영적 동력을 제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연착륙은 어려워졌다. 완미(頑迷)한 이기주의와 맹목적 집단주의라는 두 날개로 나는 덩치 큰 A-380 동체가 랜딩 기어도 없이 막 활주로에 닿아 불꽃을 일으키며 기체가 동강나려 하고 있다. 나는 덜컹이는 비행기의 객석에 앉아 겁에 질린 눈으로 착륙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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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9/13 [08:59]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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