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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0.09.25 [22:03]
[장동민 교수]'전광훈 소요사태’를 보는 한 전망
장동민 교수(백석대 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장동민

 

▲ 장동민 백석대 신학대학원 교수(교회사)     © 뉴스파워

 

1. 전광훈 소요사태

 

사랑제일교회 전광훈목사로 대표되는 기독교 극우세력은 20208.15 광복절 광화문 집회를 기하여 파국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짧게는 20192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전광훈목사와 손을 잡으면서부터, 길게는 2003뉴라이트의 진보정권에 반대하는 태극기 집회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광훈목사로 수렴된 강성 기독교 보수파의 몰락이다. 전광훈목사를 손절’(損切)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교회들도 대중들로부터 냉대를 받고 더불어 추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필자는 평소 대한민국의 경제적 양극화로 인하여 꿈을 잃은 청년들의 극우화 현상을 가장 염려하였는데, 극우파가 기독교에서 나왔다는 데 대하여 참담함을 금할 길이 없다.

나는 이 사태를 전광훈 소요사태라 이름 붙이고 싶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과 정부를 거부하고 사회를 크게 어지럽혔으나 결국 막장으로 치달아 추락하고 만 사건이다. ‘전광훈이라는 개인의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에게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가 이 사태의 대표자요 상징이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다. 전광훈 사태는 단지 그를 둘러싼 소수의 극우 기독교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기독교의 극우화는 기독교가 근대 대한민국에 정착되면서 형성되고 진화하는 과정에서 생긴 하나의 변종이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을 매도하려 함이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전광훈의 요소를 특정함으로 대한민국 기독교 전체를 반성적으로 보려 함이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6:1)는 성경 말씀을 따라서 말이다.

전광훈 소요사태를 분석하여 그 본질을 규정하는 데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방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전광훈과 추종자들의 신학(神學)은 무엇이며, 어떤 신학적 계보를 따라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한국 기독교와 정치는 역사적으로 어떤 역학관계를 가져왔으며, 대한민국 주류 목회자들의 한국 근대사를 보는 눈은 어떠한가? 보수적 기독교는 한국의 이데올로기 지형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우파 헤게모니 세력과 밀월관계를 맺고 좌파 권력과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전광훈을 보면서 트럼프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 미국의 근본주의와 한국의 극우 기독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그를 맹신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고를 가진 어떤 계층의 사람들인가?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생각을 전달하고,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하게 하는 그의 리더십과 커뮤니케이션의 특징은 무엇인가? 추종자를 결집시키는 힘의 근원과 그들의 심리적 특성을 규명할 수 있는가? 이 짧은 글이 이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다 다룰 수는 없다. 이 글에서 나는 역사신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이 사태를 해석할 하나의 전망을 제시하려는 것뿐이다

 

2. ‘홀리파워

 

TV 뉴스에 방영된 광복절 집회의 영상을 보다가 한 팻말에 눈길이 갔다. 초록색 바탕에 홀리파워라는 흰 글씨가 쓰여 있는 꽤 큰 나무 팻말이었다. ‘홀리파워가 어느 기독교 단체의 이름인지 아니면 단순한 구호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단어는 전광훈 소요사태를 풀어내는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다.

한국 기독교는 유난히 능력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 기독교를 능력종교’(power religion)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능력종교라는 표현은 찰스 콜슨 등이 편집한 책, 능력종교, 채이석 역 (서울: 엠마오, 1996)에서 빌려왔다.

능력이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치유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개인적 능력과 기독교가 사회에서 영향력을 가지게 되는 사회적 능력, 성령이 주시는 초자연적 능력과 세상에서의 성공과 같은 자연적 능력이 혼재되어 있는 포괄적 개념이다. 그 능력을 받아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교회를 부흥시키기도 하며, 선교의 열매를 맺고,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 수도 있다. 그 능력을 받는 비결은 성령을 받는 것이고, 성령을 받기 위하여서는 뜨겁게 기도해야 한다. 어느 교회, 어느 기도원에 가도 다음과 같은 성구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9:23)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1:8)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4:1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33:3)

 

나는 기도-성령-능력의 메시지가 성경에 있음을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이 메시지를 통한 한국교회의 부흥의 역사를 부정하려는 것도 아니다. 단 기도-성령-능력의 메시지가 기독교 복음의 하위 개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의 은총이고, 부활은 십자가로 인한 죄 용서와 칭의를 확인하는 것이다. 성령이 능력을 주시는 것은 맞지만, 그 능력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죄를 이기는 능력이다. 4:13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내적 능력으로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고 부자가 되어도 죄에 유혹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다. 병고치고 귀신 쫓아내는 능력은 이런 내적 능력의 표현이며, 사랑의 복음 전파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 제일의 목적은 능력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리기 위함이다. 성령의 임무는 당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14:26) 성령은 예수의 영이요 (예수를 대신할)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이기 때문에, 성령 충만한 사람 안에 예수님이 보인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예수님처럼 순결한 지혜가 가득하며 온유하고 겸손한 인격을 소유하기 위함이다. 성령께서 능력과 은사를 주시는데, 그 이유는 성도를 섬김으로 교회를 세우며, 세상에 봉사하라고 주시는 것이다. ‘홀리파워의 조합이 성경에 있는지 모르겠으나, 진정한 의미의 홀리파워파워보다 홀리에 강조점이 있다.

자칫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겸비하게 은혜를 구하지 않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면(이게 진짜 성령의 임함인지 아니면 무늬만 성령인지는 성령만이 아신다.), 이는 그 사람에게나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나 축복이 아닌 저주다. 스스로에 도취되어 자신이 메시아라고 착각하기 십상이다. 성령이 임하신 증거는 스스로 겸비하여 하나님만을 높이는 것이기에, 교만하여 허풍을 떠는 사람은 필시 거짓 영에 이끌리는 자이기 십상이다. 그는 결국 희비극적 종말을 맞고 여러 세대에 걸쳐 조롱거리로 남는다. 사사 시대, 가시덤불과 같이 하찮았던 기드온의 서자 아비멜렉이 온갖 크고 훌륭한 나무들을 자기 밑에 복종시키려 하다가, 결국 산불을 내어 자신과 추종자들을 파멸로 이끌었다.(9) 사마리아의 마술사 시몬은 스스로를 큰 자라고 높이며 크신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와 함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더 큰 능력을 얻기 위하여 성령을 돈 주고 사려 하다가 결국 베드로의 저주를 받았다(8:9-24).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자신의 명성이 드러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1:45), 추켜세워지는 것이 부담스럽기 마련이다(6:15; 10:26; 14:14,15).

 

3. 복음의 씨앗과 능력종교의 가라지가 함께 자라다

 

잠시 우리 근대사 속의 기독교를 돌아보며 능력의 복음이 어떻게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가 되었는지 생각해 보자. 한국 기독교는 초기부터 유난히 능력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는 우리의 역사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19세기 조선, 외척들의 세도정치와 대원군의 독재를 거치면서 민중의 삶은 도탄에 빠졌다. 조선은 서구 식민주의자들에 의한 불평등조약과 개항을 강제 당하였으며,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쳐 결국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때맞추어 입국하기 시작한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민중의 구세주로 등장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를 통하여 미국의 힘이 알려졌고, 1884년 갑신정변 때 근대 의학을 이미 경험한 터였다. 멀리 있다고만 여겨졌던 강대국 미국이 선교사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현현한 것이다. 조선의 지식인과 민중은 선교사와 그들이 전하는 기독교에 열광하였다. 조선은 기독교 복음과 더불어 서구의 과학을 받아들였고, 미국의 힘을 동경하게 되었다.

마침 중국 지식인들의 저서를 통하여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이 도입되었는데, 한 국가나 민족이 스스로 힘을 키우지 않으면 식민지로 살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당시 애국자들이 보기에는 기독교와 사회진화론의 주장이 크게 다르지 않았고, 둘이 같이 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조선도 하루 빨리 군사적, 경제적, 학문적 힘을 길러, 가난과 봉건주의를 벗어나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제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이 되기를 열망하였다. 이른바 기독교 민족주의의 탄생이다. 이 당시 대표적 모토는 안창호의 무실역행’(務實力行)이다. ‘무실은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버리고 서양의 과학과 삶의 관습을 받아들이자는 뜻이고, ‘역행은 이를 힘써 행함으로 힘을 길러 독립을 이루자는 의미다. 기독교 민족주의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반봉건·반외세의 민족적 과업을 수행하는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

해방 후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기독교인들은 대한민국 주류사회의 일원이 되었고, 그 힘은 극대화되었다. 신도의 숫자와 헌금 액수가 급등하였고, 민족 광장 여의도에서 초대형 집회들이 개최되었으며, 세계에서도 1,2위를 다투는 메가처치들이 세워져 막강한 재력과 영향력을 뽐내었다. 당시 한국 교회 성도들은 조금만 더 힘을 내면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준 미국과 같은 기독교 국가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밖으로는 북한·중공·소련의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안으로는 산업화를 이루어 가난을 물리치는 것이 시대의 정신이었다. 미국은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세계 최강이므로 그 그늘에서 우리도 이 과업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하였던 힘이, 이제는 국가를 지키고 산업화를 이루기 위하여 더욱 필요하게 되었다.

세속적 힘에 대한 갈망과 성령-능력-기도의 신학이 맞아떨어졌다. 세속적 힘을 원하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를 얻게 되었는지, 아니면 기독교가 스스로를 능력 종교로 변모시켰는지 알지 못한다. 때마침 미국에서 수입된 적극적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이 이 둘의 연결고리로 작용하였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산업화 시대의 소외된 민중들에게 삼박자 구원’(영혼 구원, 질병 치유, 물질적 번성)이 약속되었다. 맨땅에 헤딩하듯 교회를 개척한 목회자들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세속적 권력의지가 구분되지 않은 채 혼재되어 자라났다. 강남 개발에 편승하여 재력과 영향력을 얻게 된 기독교 지도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극대화하여 스스로를 팽창시켰다. “세계 최대,” “차세대 리더,” “성장의 비결등 기독교적 가치와는 전혀 동떨어진 구호들이 교회의 강단과 성도들의 영혼을 뒤덮었다. 교회의 성장을 통하여 기독교의 본질인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고, 그 정신이 대한민국을 변화시킨 긍정적 동력이 되었다는 점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능력종교라는 가라지가 진정한 기독교 복음에 웃자라 복음을 질식시켰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4. 능력종교의 종말

 

좋은 시절은 한 세대를 넘기면서 그 명을 다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오자 세상도 교회도 많이 바뀌었다. 우선 교회성장이 멈추었다. 전도가 되어 교회에 들어오는 신자가 많지 않고, ‘수평 이동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성도들이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아다녔다.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가 끝나면서, 특히 IMF를 지나면서, 성도들은 더 이상 큰돈을 헌금할 수 없게 되었다. 부동산 대박이 나지 않고서는 교회가 큰 자금을 만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전광훈목사의 제일사랑교회가 교회를 철거하는 대가로 수백억을 요구한 데는 이런 사정이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사회가 요구하는 양극화 해소, 한반도 평화, 환경 문제 등의 아젠다를 외면함으로 사회에서의 영향력도 상실하였다. 해방 후부터 80년대 즈음까지 우리 사회의 주요 과제가 반공·산업화·친미였는데, 이 시대가 끝났다. 80년대 말 공산권의 개혁개방 이후 북방외교가 본격화되고, 혈맹 미국과도 국익을 따지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20세기가 저물면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던 진보파가 정권을 잡았는데, 그 동안 민주화운동을 북한과 연결시켜 생각하던 보수적 기독교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몰라 했다. 당연히 10년 동안의 진보적(?) 정책 결정에서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였다.

90년대 이후 한국 기독교는 정치, 경제, 과학의 세 가지 방면에서 능력을 잃어버렸다. 능력을 중요하게 숭상하던 기독교가 능력을 상실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엘리자베스 로스의 암 환자의 수용 단계와 비슷한 경로를 거칠 것이다.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등 다섯 가지의 반응이 차례로 혹은 한꺼번에 나타난 것이 지난 30년이다.

먼저 기독교는 정치적 영역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해방 후 줄곧 기독교와 정권이 보조를 맞추면서 상생하여 왔다. 그러나 보수적 기독교는 70,80년대 시대정신이었던 민주화운동에 동참하지 않았고, 90년대 이후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지식인 세계에서는 기독교가 비난을 받았고, 일반인들은 개신교 대신 가톨릭을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진보정권은 개신교와 줄곧 갈등관계에 있었다.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 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 등 개혁입법을 두고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십자가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리고 때로는 성조기도 함께 하는, 태극기집회가 시작된 것도 이때쯤이었다. 당시 기독교계는 진보정권의 출현을 아예 통째로 부정(否定)하였다. 대통령선거가 있던 2007년 내내 보수적 기독교는 온 힘을 다하여 마지막 불꽃을 살랐고, 장로 대통령을 당선시켰다. 이렇게 겨우 빼앗아 온 정권을 다시 탄핵을 통하여 잃고 말았으니, 그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무력감에 시달리고 있는 성도들에게 전광훈은 다시 나라를 회복하게 해 줄 메시아로 보였다. 그는 권력을 취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민족을 내게 주소서.”와 같은 거창한 구호를 내걸었다. 이미 소수의 과격파가 되어버린 분노 가득한 태극기파는 정신 승리를 맛보고 있는 중이다.

둘째, 경제적인 방면을 생각해 보자.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한국교회는 심한 재정적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성도들의 숫자는 늘지 않고, 연금 생활하는 고령자들이 늘면서 헌금할 여력도 줄어들고, 헌금할만한 신앙심도 약해지고, 게다가 수평이동을 통하여 교회를 건축할 필요가 없는 대형교회로의 쏠림 현상이 가속화된다. 무리한 확장으로 인하여 빚을 이미 많이 지고 있으며, 베이비부머 목회자들이 한꺼번에 은퇴할 때 정산해 주어야 할 전별금폭탄도 기다리고 있다. 고령화된 성도들의 삶도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다. 국가의 수호자요 산업화의 역군이 그 과거의 영광을 부정당한 채, 가난하고 외로운 노후를 이어가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이 누구의 책임인가.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고, 누군가가 사태를 돌려 놓아야 한다. 지방의 작은 교회 목회자와 어려운 노년층 성도들이 태극기 집회의 주류를 이루게 된 데는 이런 좌절감이 숨어 있다.

셋째, 과학 분야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기독교는 반()지성으로 돌아섰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선교사와 한국 기독교인들이 세운 사립학교와 대학들은 근대 과학이 한국에 전파되는 기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해방 후에도 지식인과 학자들 가운데 상당한 비율이 기독교인이었다. 문화와 교육과 학문과 예술의 전 분야에서 교회가 세속사회를 주도하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1980년 어간을 전후하여 전 세계적으로 진화론에 기반을 둔 세속적 인본주의(secular humanism)가 과학의 주류를 차지하면서 기독교는 과학계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하였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기반으로 지구과학과 생물학을 정립하려는 창조과학은, 과학계 뿐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종교적 견해에 불과하다고 퇴출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개혁주의 신학의 기초 위에 수립된 기독교세계관 운동도 이런저런 이유로 좀처럼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였다.

보수적 기독교는 한편으로는 과학 자체를 무시하는 반()지성주의 전략을 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학력과 학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주류에서 밀려났다는 열패감(劣敗感)에서 나온 전형적 반응이다. 과학기술이 이루어놓은 문명의 이기(예컨대 유튜브)를 사용하면서도 다른 한 편 과학적 방역을 부정하는 모순적 행태를 보인다.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에 대한 열등감을 가진 목회자들은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 대화하고 비판하는 대신 과학세계 자체를 부정한다. 자신이 모든 지식을 가진 것처럼 설교하는데 그 내용이 어설프다. 목회자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보내는 성도들은, 과학적 진단검사나 ICT 기술을 응용한 추적이나 통계학적 수치 전망 같은 과학기술을 불신한다. 지성적 전문인이 많이 모인 교회도 반지성적이기는 마찬가지인데, 주로 감성에 호소함으로 기독교 복음과 사회의 전문 영역들이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5. 교회가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나는 위에서 능력전광훈 소요사태를 해석하는 키워드로 보고, 한국 기독교의 과거와 현재를 훑어보았다. ‘능력을 기독교 복음의 핵심으로 생각해 오던 보수적 기독교가, 정치, 경제, 과학의 분야에서 상실한 능력을 무리한 방식으로 되찾으려 한 것이 이 사태의 본질이라고 본 것이다. 극우적 기독교인들이 이런 방식을 사용하면 할수록 그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결국 소멸되고 말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대한민국 기독교 전체가 함께 비난을 받고 다음 세대에 복음 전하는 것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 물줄기를 되돌리는 것은 상당 기간 불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예측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그것도 여기저기서 솟아난 새로운 교회 운동의 작은 샘들이 모여서 시냇물을 이룰 때에야 가능할 것이다. 그 때를 준비하면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몇 가지를 생각해 본다.

첫째, 한국교회는 이번 기회에 성경이 말씀하는 진정한 성령의 능력이 무엇인지 정립해야 한다. 죄를 이기는 내적 능력, 고난 속에서도 주저앉지 않을 능력,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능력, 원수까지 사랑하고 덮어주는 능력 등이다. 능력을 많이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섬기기 위하여 은사를 사용하고, 갖지 못하였다 하여 주눅 들지 않고, 가지고 있던 것을 잃었다고 해서 좌절하지 않는 것이다. 기적적인 치유를 일으키고, 귀신을 쫓아내고, 방언과 예언을 말하는 초자연적 은사와 능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신()을 부정하는 현대인들에게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보일 수 있다면 전도에 결정적인 힘이 된다. 나는 지금도 성령은 이런 은사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신다고 믿는다. 또한 동시에 그 모든 능력들은 철저하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도 안다.

진정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나라를 세울 수 있다. 잃어버린 정치적 권력을 되찾기 위하여 극단적인 언사로 상대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의 무상함을 알고 현 정부와 대통령을 위하여 또한 심지어 나와 반대 주장을 하는 사람을 위하여 긍휼의 마음으로 기도함으로 대한민국을 재건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힘들어하는 노인층, 미래를 불안해하는 가장들, 꿈과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에게, 복음만이 살 길을 열어주는 힘이다. 단순히 학과 공부를 잘 해서 전문직에 진입하여 자신의 미래를 보장 받는 것이 능력이 아니다. 우리 시대를 위하여 성경을 새롭게 보는 법을 성령님으로부터 전수 받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안으로는 우리 사회의 타자(他者)와 대화하고 밖으로는 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길을 발견하고 이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거창해 졌는데, 사상은 글로벌하지만 실제의 삶은 소박한 것이어야 한다. 통찰력 있으면서도 정교한 담론에서 소박한 실천이 나온다. 일관성 없는 담론을 가진 사람이 자신을 부풀려 보이려 하는 법이다. 나의 경우,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 것, 나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한두 사람을 구원하는 것, 그리고 우리 자식들이 살아가야 할 지구를 덜 망가뜨리다가 슬며시 사라지는 것을 꿈꾸며 산다.

둘째, 극우파 기독교도 우리 역사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과 그 주장 자체를 분리해서 보는 것이다. 나는 오랜 세월 목회활동을 하였다. 처음 담임목회를 한 교회의 대다수 장로님과 권사님들은 이북에서 월남한 분들로서 지극히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계셨다. 다음 교회는 강남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데 보수적인 교인들이 다수였다. 그들과 깊이 대화하면서 그들의 신앙심과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영혼에 대한 열정과 그들의 병약함과 좌절과 인간적인 번뇌를 가까이서 목격하고 경험하였다.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스승과 동료들은 2020년 광화문에는 안 갔지만 2019년 개천절 집회에는 참여하였다. 더 말할 것 없이 바로 우리 아버지가 어린 나이에 공산군에게 아버지를 잃은 분이다. 너무 나이브하다고 비난해도 할 수 없지만, 가끔 태극기 집회에 나오는 분들이 너무 외로워서 그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을 한쪽으로 몰아 비난하는 것보다는, 들어주고, 이해해 주고, 보살펴 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가끔씩 함께 외식도 하고 손자들 재롱도 보여주다 보면, 유튜브를 덜 보지 않을까.

셋째, 나 자신을 살펴 능력종교의 요소들을 짚어내어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다. 앞서 나는 능력종교의 요소들이 어떻게 기독교 복음과 결합되어 우리 역사 속에서 작용하였는지를 길게 논하였다. 기독교 극우파들만 그런 문제를 가지고 있는가? 다수의 목회자들의 혈관에 능력종교의 DNA가 새겨져 있고, 나 자신도 거기 포함된다. 결국 능력이라는 것은 상처 받기 쉬운 연약한 인간들이 늘 추구하는 것이 아니던가. 극우적인 인사들을 비판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동시에 동일한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깊이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전광훈을 비롯한 극우파가 정치적 힘을 얻고자 하는 권력의지를 갖고 있다고 하여 그를 비판할 수 있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주로 의식이 있는 학자들인데, 학자들은 자신의 학문적 업적을 자랑하면서 힘 있는 사람들 앞에서 비굴해 지기 쉬운 존재임을 나는 안다. 그들 역시 종류는 다르지만 능력을 숭상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양비론(兩非論)에 빠져 이 사태의 책임을 물 타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타인을 권유하면서 자신에게 악한 요소가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진정한 성경적 비판이라고 나는 믿는다. 성경이 한 인물을 묘사할 때 할리우드 영화처럼 선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는다. 악인 속에서 나의 죄와 약함을 보고 선인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도록 해 준다.

많은 교회들이 교회가 진심으로 미안합니다배너를 거는 운동에 동참하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만일 그 미안함이 정광훈을 대신해서 미안해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를 따르는 일부 교회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 그 미안함은 위선에 불과하다. 나의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능력을 향한 갈망과 권력의지를 성령의 밝은 빛 아래로 끌어올려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병행할 때 비로소 진정한 사과가 될 것이다. 전광훈 소요사태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와 교회는 곧 또 다른 변종이 나타나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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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8/25 [08:52]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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