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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0.08.05 [22:06]
[라영환 교수 발제문]언택트 시대, 새로운 기회
라영환 교수(총신대, 교육개발원장), 코로나19 이후 교회교육 방향 제시
 
라영환

  

▲ 예장합동(총회장 김종준 목사) 총회교육개발원, 총회교육부, 다음세대부흥운동본부가 주최하고 총신대학교(총장 이재서)가 주관한 "코로나1     ©뉴스파워

 

코로나가 가져올 구조적 변화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 변화된 세계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미래에 대한 논의는 현재에 대한 주도권 싸움이다. 앞으로 만들어질 세계를 누가 어떻게 그려가는가에 관한 것이다. 과거는 인식의 세계이지만 미래는 의지의 세계라는 말이 있다. 미래와 관련된 많은 주장이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미래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앨런 케이(Alan Kay)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 방향이 중요하다. 어디로 가는 배일지 모를 때는 절대로 노를 젓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우선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일이 있겠지라는 무책임한 사고는 항구로부터 더 멀리 떨어지게 된다. 길을 잃어버렸을 때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것은 방향성과 관련이 있다. 코로나 19로 인해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이 시기에 교회의 출발점을 돌아보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초대교회는 오늘날 우리가 처한 것보다 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살았다. 당시 사람들에게 복음은 그렇게 매력적이지 못했다. 그들은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려야 했다. 심지어는 목숨을 버려야 했다. 로마로부터 엄청난 박해를 받고 있었고, 소문도 좋지 못했다. 그런데 그 시기 아이러니하게도 교회는 엄청난 부흥을 경험하였다. 지금도 그렇다. 코로나가 종식되어도 온라인예배의 편의성에 익숙 해버린 성도들이 랜선 크리스천에 머물 것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예배가 쇼핑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걱정스러운 말도 나온다. 코로나 사태 때 경험했지만, 교회는 가십거리가 되기에 너무도 좋은 자료였다. 교회의 미래에 관한 전망은 대부분 암울하다. 하지만 코로나는 교회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교회는 공동체의 소속감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많은 교회가 예배와 교회의 모든 공적 모임의 비대면화로 공동체의 소속감을 강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앞으로는 소속감보다는 비전, 가치 혹은 정체성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초대교회는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갈 가치를 발견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것은 소속감 때문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것은 그것이 주는 위로나 안전감 때문이 아니라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도전, 모험심 때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던 것은 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두근거림, 두려움, 긴장과 같은 것을 복음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를 하나로 묶었던 것은 소속감이 아니라 정체성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었지만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다. “우리의 숫자가 날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삶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신앙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그 가치가 너무 귀해 우리를 인내하게 합니다.” 200년경에 북아프리카에 살던 한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고, 경기장에서 순교를 당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소속감이 아닌 정체성이 그들을 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들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그들은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았다. 사회문화적으로 영향력이 미미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켰다. 신자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며,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다른 삶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원숭이가 강풍에 나무에서 떨어지지 않고 미풍에 떨어진다고 한다. 교회 성장이 우리를 성장과 풍요에 안주해 버리게 했다. 성장이 아니라 성숙이다. 교회는 코로나 19가 몰고 온 위기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 위기를 교회의 본질을 찾는 기회로 만들어가야 한다.

 

2. 교회의 본질과 사명:코로나가 묻고 교회가 답하다

 

코로나 19로 인한 언택트의 일상화는 교회에서 예배를 비롯한 모든 교회의 공적 모임을 어렵게 만들었다. 현장예배가 재개되었지만 주일 참석교인 수는 코로나 이전과 비교하면 60퍼센트대에 이르고 있다. 교인들의 주일성수 인식과 소속감의 약화 그리고 다음 세대 교육의 어려움 등을 염려하고 있다. 향후 한국교회는 어떻게 변할까? 출석 교인의 감소, 교회학교 학생 수의 감소, 교회 모임의 축소와 같은 부정적인 상황에 대한 응답률이 높게 나왔다. 많은 사람이 염려하는 것같이 코로나는 일시적으로 한국교회에 충격을 줄 것이다. 그러나 긴 안목에서 보자면 코로나는 교회가 교회 되는데,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그 목적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예루살렘에서의 핍박이 복음이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초대교회를 향한 핍박이 오히려 교회를 성장시켰던 것처럼 지금 우리가 맞이하는 위기가 성장과 풍요에 안주해 버린 교회가 교회로서의 모습을 회복할 기회가 될 수 있다. 코로나 이후의 한국교회 어디로 가야 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교회가 무엇이냐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구약성경에서 교회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는 에다(עֵדָה)’카할(קהל)’이 있다. 구약성경에서 에다는 관용적으로 이스라엘 회중을 가리킨다. ‘에다는 주로 출애굽기로부터 민수기까지의 본문에 등장한다. 구약에서 교회를 지칭하는 또 다른 단어인 카할은 부르다에서 온 말로 모임’, ‘집회’, ‘회중을 의미한다. 두 용어 사이의 의미상의 차이는 크게 없지만 구태여 번역하지만 에다는 더 경험적이고 실제적인 모임을 가리켰고, ‘카할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아마도 구약성경의 기자들이 에다라는 용어보다 카할이라는 용어를 선호한 것은 이 단어가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 관계를 잘 나타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것을 카할로 모였다고 말한다(9:10).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부름을 받아 모인 백성이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되어야 했다(19:6). 그리고 신약시대에 와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 왕 같은 제사장인 교회로 대체 된다(벧전2:9).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6:16)’이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를 지칭하는 단어로는 시나고게와 에클레시아가 있다. 신약성경에서 시나고게(synagoge)’는 대체로 유대인들의 종교적 모임과 그들이 종교적인 모임을 위해서 모이는 장소나 건물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 교회를 지칭 하는 가장 중요하고 보편적인 용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이다. 에클레시아는 ‘~ 로부터를 의미하는 에크(ek)’부르다를 의미하는 칼레오(kaleo)’의 합성어이다. 원래 이 단어는 정치적이거나 공적인 일을 처리하기 위하여 각자의 처소로부터 부름을 받고 나온 자유 시민들의 모임 곧 민회를 의미하였다. 신약성경의 기자들은 카할을 나타내기 위해서 에클레시아를 사용했다. 헬라시대에 에클레시아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가졌다. 전령관에 의해 각자의 처소로부터 부름을 받고 나온 도시 국가의 자유 시민들의 모임 곧 민회를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 민회의 구성원은 자신을 소집한 국가나 지도자 그리고 더불어 사는 이웃 시민들에게 일정한 의무와 책임을 져야 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약에 쓰인 에클레시아를 다시 정의하자면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나온 하나님 나라 시민들의 모임이다. 그리고 교회는 자신을 교회로 불러주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이웃들에 대해서 일정한 의무와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러한 정의를 통해서 우리는 교회와 세상과의 본질적인 관계, 곧 양자 사이의 구별성과 연관성을 발견하게 되며, 나아가 역사 속에 하나님의 교회로 존재하는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된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나온 하나님 나라 시민들의 모임이다. 교회의 첫 번째 본질은 부름을 받아 나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신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나왔기 때문에 세상과 달라야 한다. 거룩한 교회라는 말은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동시에 교회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공동체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불러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17:8).”교회는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공동체이다. 전술한 것처럼 초대교회의 예배는 외부인에게 닫혀 있었다. 지금과 같은 체계적인 조직도 없었다. 오해와 박해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데도 초대교회는 다양한 형태로 로마 전역에 뻗어 나갔다. AD 100년에 25,000명 정도였던 크리스천이 AD 310년경에 이르면 20,000,000명에 육박하였다고 한다. 20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온 것은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성도들 때문이었다. 그들은 언약 공동체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였으며, 고백대로 살고 고백대로 죽었다.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히려 그것을 믿음의 증거로 여겼다(15:19). 소속감의 강조가 모이는 교회라고 한다면 정체성의 강조는 흩어지는 교회이다. 성도들이 복음의 담지자들이 되어 세상에 들어가 세상에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 그리고 2세기와 3세기의 박해는 성도들을 흩어질 수밖에 없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모임이 불가능한 그 시점에 흩어짐을 통해서 복음이 확장되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흩어짐이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처럼 함께 모이지 못하는 이 상황을 교회가 교회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모이는 교회에서 흩어지는 교회로 패러다임이 전환되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church)라는 단어는 에클레시에서 온 것이 아니라 주께 속하였음을 의미하는 퀴리아코스(κυριακός)’에서 나왔다. 이 단어는 교회의 기초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16:18)”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라는 이름의 본래 뜻이 반석이다.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은 베드로 개인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기초가 신앙고백임을 본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시고, 내 인생의 주인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고백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은 왕이시고 나는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겠다고 고백한다.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겠다고 고백하는 공동체이다. 초대교회를 특징짓는 것은 소속감이 아니라 정체성이었다. 초대교회 성도에게 그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소속인가 아니면 안디옥 교회 소속인가 하는 것은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체성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믿음을 유지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았는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세기와 3세기에도 두 번에 걸친 전 세계적인 팬데믹(pendebmic) 있었다. 첫 번째 팬더믹은 AD 165년 겨울에 발생하여 15년간 로마 전역으로 확산되어 로마 인구의 1/4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안토니우스 역병이었다. 두 번째 팬데믹은 AD 251년에 시작되어 262년까지 계속된 키푸리아누스 역병이다. 두 번에 걸친 펜데믹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사회적 시스템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당시 지식인들과 종교적 지도자들은 재앙이 던진 시대적 질문 앞에 대답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교회는 펜데믹이 던진 시대적 질문에 대답할 뿐만 아니라, 감염된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봄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안타까운 것은 2세기와 3세기에 일어난 두 번의 펜데믹 기간에는 교회의 현존(presence)이 사람들에게 감동이 되었고, 사람들 역시 그러한 팬데믹 속에서 교회의 현존을 원했는데, 지금은 교회의 부재(absence)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교회는 혼돈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 혼돈의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초대교회가 걸어간 길을 되돌아보면서 오늘의 문제에 대한 혜안을 발견하여야 한다.

신약성경은 또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1:22, 5:23, 1:18)에 비유한다. 성경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에 비유한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유기적으로 연합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의 몸 안에 여러 지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연합된 지체들은 각각의 다양성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로 인하여 통일성을 갖는다. 통일성은 지역 공동체의 다수성과 다양성에 앞선다. 교회의 통일성은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제거하지 않는다. 교회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공동체이기에 교회가 없는 곳을 제외하고는 공동체를 떠난 성도는 있을 수 없다. 삶의 동선이 겹치지 않으면 몸이 아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언택트가 일상화되었지만, 교회는 성도들이 삶을 나눌 방법들을 찾아야 한다. 코로나 이전에 다 같이 모였다면 이제는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모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두 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나누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동안 모이는 중심의 신앙생활을 강조해왔다면 이제는 그것에 더해 작은 규모의 공동체로 나누어져 세상 속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일상 중심의 신앙을 강조해야 한다.

 

3. 언택트 시대의 신앙교육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코로나 19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 가운데 하나는 언택트(untact, 비대면 접촉)가 하나의 새로운 트랜드로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사람들은 사람과 사람이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사회가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코로나 19로 인해 재택근무, 온라인 수업이 더 활발해지고 중요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접촉하지 않고 커뮤니케이션한다는 것은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런데 코로나 19는 온라인 콘서트와 같이 직접 현장에 가지 않아도 작업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코로나 이후의 시대에는 언택트가 하나의 새로운 기준(new normal)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몇 달간 교회는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했던 초유의 경험을 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현장예배의 위축이다. 교회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온라인예배를 드렸다. 백신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현장예배와 온라인예배가 병행될 것이다.

교회는 비대면 방식의 언택트의 시대를 대비하여야 한다. 안타깝게도 교회교육은 갑자기 밀려오는 언택트의 파도를 타고 넘어갈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로 인해 우리의 다음 세대들은 예배와 신앙교육이 무너질 위기에 직면하였다. 대면 방식으로 어렵다면 온라인으로 해야 한다. 총회는 먼저 52주 통합공과를 영상으로 제작해 공급해줘야 한다. 규모가 작은 교회는 온라인예배를 드리는 것조차 힘겨워 주일학교 교육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온라인 교육을 감당할 만한 인적 그리고 물적 자원이 없다. 이 부분은 총회가 감당해줘야 한다. 다행히 총회 교육부에서 계절 학교에 필요한 영상자료를 만들어 보급한다고 한다. 교육부가 제공하는 영상자료 외에 노회나 시찰 혹은 같은 지역에 있는 교회들이 지역적 정서를 반영할 수 있는 아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자료를 함께 만들어야 한다. 디지로그라는 말이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이다. 언택트라는 교육환경 속에서 디지털과 아나로그의 감성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비대면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우리의 고민은 대면과 비대면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온라인 교육은 보조재이다. 온라인을 통해서 오프라인으로 이끌고, 오프라인은 다시 온라인으로 확장되는 선순환의 고리를 형성해야 한다. 주중에는 부모와 그리고 주일에는 교사들과 대변 비대면을 통한 신앙교육을 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주말에 주중에 받았던 교육을 함께 나누고 체험할 수 있는 확장 주일학교 개념을 적용해야 한다. 주일은 교회교육의 시작이자 완성이다. 오프라인 교육의 장이 교회라고 한다면 온라인 교육의 장은 가정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핵심은 부모이다. 과거에는 자녀교육이었지만 지금은 부모교육이다. 코로나로 인해 학교와 학원으로 바빴던 아이들이 집에서 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코로나가 가져온 이 변화를 아이들이 신앙 안에서 올바로 설 수 있는 교육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기독교적 인격과 성품을 형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장소는 가정이다. 가정은 교회에서 배운 것을 내면화시키고 습관화하는 곳이다. 기독교적 인격과 성품을 형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장소는 가정이다. 부모들에게는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양육할 책임이 있다(신명기 6:6,7). 개혁파 전통에서 가정을 신앙교육의 가장 근본적인 장으로 놓치지 않고 붙잡았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문제는 청소년기의 연령에 있는 아이들은 부모가 교사가 되는 것을 싫어한다는 데 있다. 부모가 교사가 아니라 아이들이 신앙 안에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가 되어야 한다. 신앙교육의 목적은 지식의 전달을 넘어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만드는 데 있다. 지식의 전달에 머무르지 말고 역량의 개발로 확장되어야 한다. 사고중심의 교육과 실현중심으로 교육이 함께 가야 한다. 사고 중심의 교육은 대면교육과 온라인으로 그리고 실천중심의 교육은 가정에서 부모와 함께 부모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최근에 기독교교육에서도 교사-학생의 교수형 패러다임 대신 신앙공동체-문화화 패러다임(Faith Community Enculturation Paradigm)’을 이야기하고 있다. 신앙공동체 문화화 패러다임이란 한 개인의 신앙은 신앙공동체 안에서 문화화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즉 교육의 주체가 교사 개인으로부터 공동체로 확장되는 것이다. 작은 규모의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교회에서 배운 것을 가정과 공동체에서 습관화시켜서 삶 속에서 실천하게 하여야 한다. 코로나가 가져온 언택트라는 환경이 아이들의 역량을 강화할 기회가 될 수 있다. 미스터 트롯, 팬텀 싱어즈와 같은 경연 프로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공통적인 특징은 누가 누가 잘하나를 선별하는 장기자랑이 아니다. 이 프로그램 이전에는 패자는 울고 승자는 웃었는데, 승자가 울고 패자가 승자를 위로한다. 승자독식(winner takes all)이 아니다. 탈락자들이 하는 말이 많이 성장했다이다. 경연이 아니라 역량 강화이다. 이러한 변화의 키워드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교회교육은 개인의 역량 강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세상은 개인적 성취에서 사회적 실현으로 그 강조가 바뀌고 있다. 사고 중심의 교육에 실현중심의 교육을 더 해야 한다. 미래세대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개발시켜야 한다. 지식에서 행동으로, 성취에서 실현으로 그 강조점이 변해야 한다.

언택트 시대의 교육 핵심은 시스템이 아니라 콘텐츠이다. 대학에서 온라인 교육을 하다 보니 처음에는 장비구축에 중요했는데 시간이 지나갈수록 콘텐츠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선 학교의 경우에 자신이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치다가 점점 학생들이 궁금해하는 것으로 전환이 되었다. 고구마와 관련한 유명 유튜버가 있다. 고구마 보관방법에 대한 영상을 올렸는데 조회 수가 200만이 넘는다. 휴대전화 하나로 촬영한다. 장비가 아니라 콘텐츠이다. 우리에게 그런 콘텐츠가 있는지 심각히 질문을 던져야 한다.

공간에 변화가 필요하다. 코로나 19로 인하여 사람들은 밀폐된 공간보다는 개방된 장소를 더 선호한다. 소모임 실의 벽을 허물고 넓은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전에는 도서실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컴퓨터를 들고 카페에서 공부하는 시대이다. 교회 공간을 아이들의 접근성을 확대하는 형태로 변형하여야 한다. 예배와 성경공부도 개인이나 가정보다는 작은 단위의 신앙공동체로 함께 모여야 한다. 혼자가 아니라 작은 규모의 또래 집단에서 지식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코로나 19가 한국 사회에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헬 조선!’을 외치던 젊은이들에게 자부심과 자긍심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이 그럴 수 있다. 예루살렘의 핍박이 오히려 복음이 흥왕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지금의 위기를 잘 극복하면 오히려 교회가 이 시대의 대안으로 우뚝 설 날이 올 것이다.

K 방역의 힘은 전문가의 조언을 정치가들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교육에 있어서도 그렇다. 전문가 집단이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토론하는 집단이 있어야 한다. 언택트 시대의 교육 핵심은 시스템이 아니라 콘텐츠이다. 양질의 콘텐츠를 위해 대학과 총회 그리고 교회가 함께 움직이는 교·학 연계 환류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번 포럼은 이러한 환류 체계 구축의 첫 출발이다. 신학의 목적은 교회를 섬기는 것이다. 총신대는 콘텐츠를 제공하고 총회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교회는 그것을 적용하는 체계가 이번 기회를 통해 공고해져야 한다.

 

4. 언택트, 4차 산업혁명을 앞당기다.

 

우리는 변화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변화를 표현하는 단어가 ‘4차 산업혁명이다. 인류는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돌입했다. 1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의 발전으로 시작되었다. 1차 산업혁명은 물과 증기의 힘을 이용하여 생산을 기계화하였다. 인류는 1차 산업혁명을 통해 인간의 노동을 기계로 대치할 수 있었다. 기계화는 생산량의 증가를 가져와서 영국의 철 생산량을 기준으로 보면 176030,000t이었던 것이 50년이 지난 1810년에 와서는 1,000,000t으로 증가하였다. 2번째 산업혁명은 전기에너지로부터 왔다. 전기에너지는 기계화를 통한 대량 생산을 가능하게 하였다. 3차 산업혁명은 컴퓨터와 인터넷의 결합으로 생산의 자동화를 가져왔다. 3차 산업혁명의 특징은 자동화와 인터넷을 통한 커뮤니케이션이다. 4차 산업혁명이란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Big Data), 클라우드(Cloud Service)와 같이 디지털 기기와 인간의 융합을 통해 인간과 기계의 잠재력을 극대화하는 산업 시스템을 말한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미래사회를 초연결(hyper-connected), 초지능(hyper-intelligent)인 사회라고 정의하였다. 지금 인류는 이제 막 시작된 4차 산업혁명을 경험하고 있다.

코로나 19는 그 변화의 속도를 가속화하고 있다. 비대면 교육에 대한 요구는 이전부터 있었지만 코로나 19는 단 몇 달 만에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스마트 워크라는 단어가 2009년에 처음 등장했는데, 지난 십여 년간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지 않았던 스마트 워크 시스템을 구축하게 하였다.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우리의 생활방식과 일하는 방식 그리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까지 완전히 뒤바꿔 놓을 기술혁명이 눈앞에 와있다.”라고 주장했는데 코로나 19로 인해 그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지금은 코로나 19가 당면과제이지만, 결국 교회가 맞닥트려야 할 과제는 4차 산업혁명이다. 눈앞에 일어난 현상만 바라보다 다가올 4차 산업혁명의 파고를 대비하지 못하면 지금보다 더 커다란 혼란에 빠질 것이다.

4차 산업혁명과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문제는 단지 경제나 산업구조를 넘어선 세계관의 문제라는 점이다. 산업의 변화는 단순한 산업구조의 변화를 넘어 사회질서의 변화와 개인의 삶의 구조와 양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1, 2차 산업혁명은 새로운 에너지 자원의 발견으로부터 왔다. 1차 산업혁명은 사회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토지를 기반으로 한 귀족과 지주세력에서 산업을 기반으로 한 부르주아로 부의 이동이 생겼으며, 근대적인 국가가 형성되었다. 2차 산업혁명의 결과로 산업조직은 구조화되었고 사회도 근대적 계층구조(Modern Hierarchy System)를 갖게 되었다. 3차 산업혁명은 1, 2차 산업혁명과 새로운 의사소통 시스템의 발견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컴퓨터의 등장으로 인류는 디지털 혁명이라는 3번째 혁명을 맞이한다.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변화는 상호연결과 수평이었다. 사회구조도 과거와 같이 수직적인 구조가 아닌 수평적인 구조로 변화되었다. 아직 4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라 그것이 가져올 변화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변화는 경제 구조나 사회구조를 넘어서 인간성의 문제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이다. 클라우스 슈밥은 “4차 산업혁명은 인간 본성의 정수인 창의성, 공감, 헌신을 보완하는 보완재의 역할을 하며, 우리의 인간성을 공동운명체라는 생각에 바탕을 둔 새로운 집단적 윤리의식으로 고양 시킬 수도 있다.”라고 주장을 한다. 4차 산업혁명이 단순한 제조와 서비스가 융합되는 경제 체제를 넘어 인간의 가치체계에 영향을 준다는 슈밥의 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가치체계가 물질세계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제는 물질세계가 가치체계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대담하게 선언해 버린 것이다. 인간성이 정신의 문제가 아니라 물질의 문제가 되어 버렸다.

이러한 시대적 도전 앞에서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 19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난 러다이트운동(Luddite Movement)과 같이 시대의 흐름에 대적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막아선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변화를 파악하고, 그 변화하는 세상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나가는 것이다. 지금부터 500년 전에 종교개혁가들은 중세가 그 한계에 도달했을 때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 새 시대를 열었다. 중세와 구별된 새로운 질서를 만들었던 종교개혁 정신을 이어받아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래를 성경에 기초한 개혁주의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토대로 만들어가야 한다.

삶은 세계관 싸움이다. 네이버 사전으로 자연을 검색하면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않고 세상에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라고 정의한다. 네이버 사전에서 말하는 자연에 대한 이해는 성경에서 말하는 자연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성경은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네이버 사전은 자연은 스스로 존재하거나 우주에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존재나 상태라고 함으로써 마치 자연이 하나님과 같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인본주의적 정보를 사람들에게 주입 시키고 있다. 이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정보들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인본주의적인 가치관을 사람들에게 주입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교회는 인본주의적 세계관에 맞서 대응담론(Counter Narrative)을 제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의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 시작하면 인본주의적 세계관위에 형성된 교과목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이다. 미국의 교육학자 존 던피(John Dunphy)는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새로운 신앙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임을 자각한 교사들, 즉 모든 인간 존재에게 인본주의적 종교를 전하는 것이 소임임을 바르게 자각화는 교사들 덕분에 공립학교 교실에서 인간의 미래에 대한 도전이 계속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교사들은 교회의 강단에서 열의를 다하는 설교자와 마찬가지로 유치원생을 가르치든 혹은 대학생을 가르치든 가르치는 대상과 수준에 관계없이 교실에서 인본주의적인 가치를 전하기 위해 변함없는 이타적인 헌신을 나타내야만 한다. 교실은 옛 것과 새 것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고, 악과 고통이 가득한 기독교를 물리치며, 기독교에서 실현하지 못한 이상적인 이웃사랑을 마침내 성취시켜줄 수 있는 것이 오직 인본주의뿐이라는 새로운 믿음을 전하는 전투장이 되어야 하며 분명 그렇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전투는 장기적으로 진행될 것이고 고통을 수반하겠지만 인본주의는 분명히 승리할 것이다. 인간 존재가 살아있는 한 인본주의의 승리는 확실하다.

 

심각한 도전이다.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거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하는 것으로 자녀에 대한 부모 교육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태도이다. 아이들의 영혼을 망가트리는 것이다. 위탁은 필요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헛된 철학과 세상의 속임수로부터 보호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는 일을 감당하여야 한다. 종교개혁의 핵심이 신앙과 삶의 장벽을 허문 것인데 오늘날 교회는 이 무너진 담을 다시 쌓아가고 있다. 종교개혁은 삶을 바꾼 것이다. 우리의 삶 전체를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게 한 것이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기치는 유럽 사회를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가게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이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 철학과 같은 영역에서 인본주의자들에게 그 지배적인 자리를 빼앗겨 버렸다.

교실은 중립적이지 않다. 우리의 아이들은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갈림길에 있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교회교육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종교개혁전통을 따라 가정과 교회와 학교가 하나로 연결된 교육생태계를 조성하고 다음 세대가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변화시킬 변혁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하여야 한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교회는 신앙교육의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적 세계관을 보급 제작 배포하여야 한다. 다음 세대가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될 문제들에 대해서 선제적으로 대응하여야 한다. 젊은 세대를 품는다는 것은 젊은이들의 질문을 듣고 그에 대한 대답을 성경을 기반으로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른세대가 느끼는 문제와 다음 세대가 느끼는 문제가 다르다. 다음 세대들의 고민을 듣고 그에 대한 성경적 대답을 들려주어야 한다. 종교개혁가들에게 신앙교육은 성경 지식의 전달을 넘어선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인본주의적 세계관의 토대 위에 만들어진 교과과정을 텍스트를 분석해서 그에 대한 대응 담론(Counter-narrative)을 들려주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하는 학자들이 공통으로 꼽는 미래사회에 필요한 덕목들을 정리하면 포용성(Inclusiveness), 넓은 시야(External Focus), 명확한 사고(Clear Thinking), 상상력과 용기(Imagination & Courage) 그리고 전문성(Expertise)이다. 세계경제포럼 미래고용보고서에 의하면 2020년의 교육목표로 “(1) 복잡한 문제를 푸는 능력 (2) 비판적 사고 (3) 창의력 (4) 사람관리 (5) 협업능력으로 꼽았다. 지난 2015년 우리나라 교육부에서도 이러한 세계적 흐름에 발을 맞추어 개정 교육과정 6대 핵심역량을 선정하였는데 그것은 자기주도, 창의적 사고, 의사소통, 공동체, 심미성, 지식정보처리능력이다. 이 가운데 자기주도, 의사소통, 공동체, 심미성, 창의성은 교회가 잘 할 수 있는 영역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역량으로서 사회적 책임과 공공성이 부각되고 있다. 공공성 혹은 공동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는 교회가 그동안 강조해왔던 것들이다. 공동체는 기독교의 중요한 가치이다. 모이제스 나임(Moisès Naim)권력의 종말 (The End of Power)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수 있는 시대가 도래되었다. 오늘 우리는 권력의 지각변동을 경험하고 있다. 파워 엘리트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향유할 수 있는 기회가 점 정 더 줄어들고 있다. 누구도 혼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여기기에 필요한 것이 협업능력이다. 미래사회에 필요한 덕목으로 공동체를 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미래, 인간은 서로 협력해야 한다. 협업능력에는 공감 능력과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려는 삶의 태도가 포함될 것이다. 이러한 협업능력은 성경에서 이미 강조하고 있는 것들이다. 인성에 대한 강조 역시 교회가 지금까지 잘 해왔던 영역이다. 시민성 혹은 공공성도 구약성경에서부터 지속해서 강조되었던 것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교회가 만들어내는 인재상이 세상이 필요한 인재상이 된다. 교회교육을 통하여 기대하는 인재상이 세상이 요구하는 인재상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에서 교육을 잘 받으면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됨과 동시에 건강한 사회구성원이 됨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들이 희미하게 알고 있었던 그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제시하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가 이 시대의 대안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이 말씀과 기도록 무장되어 십자가의 원리를 따르며 살아가며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청지기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 세상을 향한 동기를 부여하고 실력을 배양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기독교적 가치관을 심을 인재를 양성하여야 한다. 다음 세대들이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성경적 원리로 무장하여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역량을 개발시켜야 한다. 도덕적 우월성 역시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의 핵심가치가 되어야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한 교회교육은 학습자인 다음 세대에게 그리고 세상에 기독교가 이 시대의 대안임을 보여주는 데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공교육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대안 교육에 관심을 두고 많은 기독대안학교들을 설립하여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교육을 하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학생들의 대부분은 공교육기관에서 공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가신 것처럼 우리도 캠퍼스로 가야 한다. 캠퍼스로 가서 헌신된 기독 교사들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무장시켜 교사들로 하여금 인본주의와 맞서게 하여야 한다. 존 더피가 교실을 인본주의 확장의 토대로 삼았던 것처럼, 교사들이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 교실에서 신본주의를 확신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다음 세대들이 미래사회의 주역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교육 방법이 변해야 한다. 주입식이며 암기를 강조하는 교육을 넘어선 지식을 채워 나가는 교육이 아닌 내면화 하는 교육을 하여야 한다. 그 동안 교회 교육은 주입식 교육을 해왔다. 지식을 채워 나가는 교육이 아니라 질문을 하고 대답하는 성찰을 훈련하는 교육을 해야 한다. 질문과 대답은 내 생각을 키우는 말들이다. 질문이 있으면 대답을 찾게 되어있다. 생각의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교육은 암기와 주입의 표준화된 교육이었다. 지식전달의 주입식 교육이 아닌 학생들 스스로 답을 찾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은 우리가 준비한 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각자 스스로 생각해서 삶으로 풀어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정답을 찾는 훈련만 해왔다. 주어진 대답을 하는 데 편안함을 느꼈다.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대답하고 풀어가는 훈련을 받아 보지 못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자신의 논리를 개발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지금 공교육은 문제풀이 중심교육에서 문제 해결중심으로 그리고 개인적 성취에서 사회적 실현으로 이동하고 있다. 교회교육도 아이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신앙교육의 강조점이 개인의 성장을 넘어선 공동체의 성장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고 그 과정에서 개인이 성장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지금부터 500년 전에 (No)을 외치던 시대에 하나님이 답임을 외쳤던 개혁가들과 같이 복음이 답임을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이 말하는 담론을 잘 보고 그것을 성경적 세계관으로 채워주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그동안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아니라고만 했지 우리가 만들고 싶은 세상이,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 무엇인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교회는 지금부터 500년 전의 종교개혁가들과 같이 망해가는 세상에 대해 아니라고 할 뿐만 아니라 대안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질문을 바꾸면 대답이 보이는 법이다. 우리의 질문은 변화된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아닌 새로운 시대를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로 바뀌어야 한다.

다음 세대가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될 문제들에 대해서 선제적으로 대응하여야 한다. 다음 세대들에게 성경 지식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기독교적 인성 형성, 기독교적 자기 계발과 같은 것들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교회는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미래 사회를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이 개발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다음 세대들의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주어진 상황에 대한 정답이 주어지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우리가 새로운 답을 만들어 가야 할 시대가 왔다. 우리의 다음 세대가 답을 만들어갈 수 있는 역량을 개발시켜야 한다. 다음 세대가 그들이 살아갈 세상의 뉴 노멀(New Normal)’을 제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교회 교육을 통하여 기대하는 인재상이 세상이 요구하는 인재상임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에서 교육을 잘 받으면 건강한 그리스도인과 동시에 건강한 사회구성원이 됨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대안 교육을 넘어 공교육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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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7/14 [15:04]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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