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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0.07.02 [23:05]
공주 근대 기독교 유산의 보고(寶庫) 공주기독교박물관
공주제일교회, 국비지원으로 구예배당에 3년 전 개관해 3만여 명 관람
 
김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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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시 공주시는 백제의 수도가 공주였을 때 공주를 지켰던 공산성이 있고, 백제시대 왕들의 무덤이 모여 있는 송산리고분군이 있다. 도시의 중앙으로 금강의 푸른 물결이 흐르는 공주(公主).

▲ 공주제일교회 공주기독교박물관. 한국교회에서 개교회로서 기독교박물관으로 인가를 받은 것은 처음이다.     ©뉴스파워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천년 역사의 고도(古都)1902, 칠흑 같은 밤을 쏜살같이 뚫고 내려오는 별똥별처럼 빛이 비추었다. 바로 복음의 빛이었다. 그 빛은 또한 공주 근대화의 등불 역할을 했다. 그 중심에는 공주제일교회(담임목사 윤애근)가 있었다.

 

공주제일교회는 1905년 공주 최초의 근대식 교육의 요람인 명선여학교가 시작된 곳이다. 또한 3.1독립만세운동의 주역 유관순 열사가 이 학교에서 2년 간 공부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던 곳이다.

 

또한 19241월 중앙영아관을 설립한 덴마크 출신의 감리회 소속 보딩(Moren Bording) 선교사가 대한민국 최초의 우유 급식소를 설치하고 19266월부터 아이들에게 유유를 공급한 곳도 이곳 공주다. 우리나라 최초로 아이들에게 우유를 제공한 곳은 현재 공주기독교종합사회복지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공주제일교회는 이처럼 자랑스런 역사를 공주시민들과 한국교회와 공유하기 위해 한국 기독교 최초로 구예배당을 등록문화재로 지정을 받아 지난 2018년 공주기독교박물관을 개관했다. 공주 근대화의 역사와 유물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개관 이후 3만여 명이 다녀갔을 정도로 주목을 받고 있다.

 

공주제일교회의 역사를 정리하고, 구 예배당을 등록문화재로 지정을 받고, 정부 지원으로 박물관을 개관하는 일에는 공무원 출신인 윤애근 담임목사(공주시성시화운동본부 본부장)의 역사 인식과 섬김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했다.

▲ 공주제일교회 윤애근 목사가 교회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뉴스파워

 

 공주제일교회의 역사는 공주 선교, 충청선교의 시작점이다.

 

1902년 가을, 미국 감리회가 공주 관찰부 앞(, 반죽동)에 초가(草家) 한 동을 구입해 배재학당 출신이 김동현 전도사를 파송함으로(파송자 스웨러 선교사) 공주제일교회가 시작되었다.

 

김 전도사는 경기도 시흥 무지내 사람으로 1901년 자기 마을 사람들을 전도하여 1901년 무지내교회를 설립한 헌신자로, 이 교회는 서울 한강 이남의 감리교 선교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선교사들은 김 전도사의 헌신적인 복음 전도 활동에 크게 감동하여 수원 선교의 시작점이 될 선교 부지를 매입할 수 있도록 했으나 그 일로 수원관리들에게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이듬해 석방되어 1902, 공주로 파송을 받아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그 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공주를 떠났다.

▲ 1902년 김동현 전도사에 이어 1903년 맥길 선교사가 하리동에 설립한 공주제일교회 모습     ©뉴스파워

  

이어 19037, 미국 감리회에서 초가 2동을 구입해 의료선교사인 맥길을 공주에 파송했다. 당시 공주제일교회에는 30여 명의 신자들이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스크랜튼이 창설한 서울 상동병원에서 의료선교를 했던 맥길은 공주에 내려와서 복음전도와 의료선교 사역을 겸했다. 이는 지역 주민들에게 교회의 존재와 역할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맥길 살던 초가는 교회 겸 병원과 약국을 겸했다.

 

맥길이 선교 본부에 보고한 보고서에 따르면 100여명의 등록교인에 70여 명이 예배에 출석했으며, 남자와 여자 교인수가 비슷해 앞으로 강한 교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썼다. 또한 교인들은 학교를 위해서 경비와 나무를 제공했다고 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주민들 중에서는 학교 선생님 한 분을 구해 달라면서 봉급으로 100엔을 지급하겠다고 했다.

▲ 공주제일교회 담임목사이자 공주기독교박물관 관장 윤애근 목사(좌, 공주성시화운동 본부장)와 공주성시화운동 사무국장 김일호 목사     ©뉴스파워

 

충청지역의 감리교 선교의 거점이 된 공주제일교회는 맥길 선교사를 도와 사역한 이용주 전도사의 역할이 컸다. 1905년이 되자 공주제일교회는 150여 명이 예배에 출석했다.

 

1905년 맥길은 안식년으로 본국으로 돌아갔지만, 1907350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특히 1907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났던 대각성운동의 불길을 충청지역으로 확산하는데 중심 역할을 했다.

 

맥길 선교사의 뒤를 이어 캐나다 출신의 샤프 선교사가 공주에 내려왔다. 1903년 한국에 첫발을 내딛은 샤프는 서울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사역하면서 1900년 한국에 와서 사역하고 있던 하몬드 사애리시(史愛理施)1905년 결혼을 하고 공주로 파송을 받았다. 충청도 지역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샤프는 발진티부스에 걸려 19063, 34세의 나이로 순직했다. 

 

▲ 공주 영명학교 영명동산에 설립된 샤프, 사애리시 선교사 부부와 유관순 기념 조형물     ©뉴스파워

 

주목할 만 일은 샤프의 아내 사애리시(Alice, J. Hammond) 선교사가 공주에 내려오자마자 공주 근대교육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명선여학교를 창설한 것이다. 남편과 함께 공주제일교회에 적을 두고 사역을 하면서 당시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었던 남녀차별사회에서 공주제일교회 전도부인 이조세핀의 도움을 받아 임영신(전 장관), 박초희 등 학생을 모집해 한글, 찬송,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편의 순직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08년 다시 방한하여 공주 명선여학교의 교장을 맡았다. 그리고 강경 만동여학교’, ‘논산 영화여학교등을 설립했다. 명선여학교 등은 한국 여성들의 근대식 교육과 신앙교육을 통해 교회와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는 여성교육의 요람이었다.

▲ 공주기독교박물관에서 문화재청이 후원하고 공주시가 주최하고 사회문화예술연구소 '오늘'이 주관한 '음악과 함께하는 시간여행'을 주제로 음악회를 열고 있다.     ©뉴스파워

  

공주에는 여학생을 위한 명선여학교와 남학생을 위한 학교가 세워졌는데 영명학교’(永明, Eternal Brightness). 190610, 공주제일교회에서 전도사역을 하던 윌리암스(禹利岩, Rev. Frank Earl Cranston Williams. 1883-1962)에 의해 창설되었다.

 

공주제일교회 역사를 정리한 윤애근 목사는 “1904년 샤프 선교사와 배재학당의 윤성렬이 남학교를 설립하려고 시도했었다. 영명남학교의 처음 이름은 중흥(中興)이었다.”샤프 선교사가 지은 양옥집을 사용하기로 하고 학생을 모집했는데 조병옥, 황인식, 변홍규 등 9명이었다.”고 했다. 천안 출신인 조병옥은 그 유명한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인물이다.

▲ 공주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소유한 모든 토지를 교회에 헌물로 드린 홍누두 성도. 헌납된 8,000여 평의 땅은 80여 년 간 유지해     ©뉴스파워

  

공주제일교회는 예배당 건축과 관련 협산자 예배당과 관련 아름다운 신앙 일화가 전해져오고 있다. 교회가 부흥하자 1908년 봄, 중학동 3번지에 첫 예배당 건축을 시작했다. 당시 교인들의 헌금으로는 예배당 건축비를 충당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미국에 가서 선교보고를 하면서 예배당 건축에 대한 기도와 후원을 요청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1908년 소낙비가 쏟아지고 있던 여름 어느 날, 검소하게 옷을 입고, 작은 우산을 옆에 낀 사람이 교회 목양실로 찾아왔다. 그리고 나의 가진 재산을 쓸데없는 곳에 쓰고 싶지 않고, 오직 하늘에 샇아두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면서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 안에는 자그마치 6천원이 들어 있었다. (지금 화폐가치로는 7억원 규모다.)  

그 사람은 이름을 밝히지 않고 돌아갔다. 예배당은 자 형식으로 하여 가운데에는 휘장을 치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자리를 나누어 예배를 드리도록 설계가 됐다. 예배당은 19095월 셋째주 주일에 봉헌식을 했고, 그 예배당 이름을 협산자(狹傘者) 예배당으로 이름을 지었다. “우산을 들고 있던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이 예배당은 충청지역의 각종 집회 장소로 활용됐다.

▲ 공주제일교회의 '협산자 예배당'은 1931년 완공됐으며,6.25 때 전소되어 1955년 다시 건축했다. 2011년 등록문화재 제472호로 지정을 받았다.    ©뉴스파워

  

공주제일교회는 19193.1독립만세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유관순이 이 교회 출신이었고, 한달 후인 41일 공주시장에서의 만세운동에는 공주제일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영명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이 앞장을 섰다. 교인 중에는 유관순의 오빠인 유준석을 비롯해 김수철, 윤봉균, 양재순, 강윤, 노명우 등이 적극 가담했다. 유관순이 사촌 올케인 공주제일교회 노마리아 장로(대한민국 초대 여성경찰서장 1호)는 병천까지 가서 유진오 박사와 유관순을 도우며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공주제일교회는 19204, 교회 안에 공주유치원을 창설했다. 이 공주 유치원은 전국에서 18번째로 창설되었다. 1935년 당시 통계를 보면 유치원 보모 2, 원아 56명이었고, 그때까지 졸업한 원아가 260명에 달했다. 영명학교 3회 졸업생 윤창석은 일본 유학 중 19192.8 독립선언에 주동적인 역할을 했다.

 

독립운동으로 공주지방 전체 교인 중에 많은 이들이 체포되고 옥에 갇혔다. 목회자를 잃었고, 경제적언 가난까지 겹치면서 큰 피해와 고난을 겪었다.

 

공주제일교회는 성도 수가 크게 늘면서 50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예배당 건축을 시작했다. 1930728일 공사를 시작해 2층 연와제 양식으로 19311130(주일)에 공사를 마무리했다. 총 건축비는 68백 원이었다.

▲ 공주기독교박물관이 제3회 특별사진전 '금강의 물결에서 생명의 빛을 보다'를 주제로 공주제일교회에서 사진전을 열고 있다.     ©뉴스파워

  

예배당 건축을 위해 양두현 장로(부인 지누두 권사)1928년 논 18282평과 밭 2681평을 봉헌했다. 양두현 장로의 아들은  양재순 장로(공주 양의사 1호로 공제의원 원장으로 70년 동안 진료)다. 양 장로의 넷째 아들 양덕호 장로는 성산 장기려 박사의 애제자로 장 박사가 시작한 부산 청십자사회복지회 대표이사로 25넌 봉사했다. 

양덕호 장로의 아들
 양한광(서울대 암센터장)은 워싱턴포스트지가 선정한 세계 50대 의사 중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됐다. 위암수술의 최고 권위자다.  교회 앞마당에는 19315월에 헌신을 기려 양두현, 지누두 권사 기념비석을 설치했다.
 

▲ 공주제일교회 예배당 한 켠에 세워진 고 양두현, 지누두 기념비     ©뉴스파워

 

1931년에는 황하명 선도가 세상을 뜨면서 논 10마지를 봉헌했다. 그런가 하면 홍누두(홍루디아) 성도는 밭 7665, 8216, 대지 678, 임야 3정반7흠을 봉헌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던 홍루디아 성도는 30여 석의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를 교회에 봉헌 것이다.

 

윤애근 목사는 홍루디아 성도가 바친 토지 중 8,800평은 2011, 공주제일교회 새 성전을 건축할 때에 20억원에 매각해 새성전 건축의 큰 기초가 되었다.”고 말했다. 교회는 홍누두 성도의 헌신을 기려 교회 마당에 기념비를 설치했다.

 

공주제일교회는 19506.25 전쟁 중 예배당이 파괴되었다. 전쟁 중에 공주를 점령한 인민군들이 공주제일교회 예배당을 보급창고로 사용했다. 미군 비행기의 폭격을 피하려는 전술이었다. 인민군은 예배당에 무기와 식량을 쌓아놓고, 교회 안에서 숙식을 하는 교회가 창고로 변했다. 이것을 안 연합군의 비행기가 예배당을 폭격했다. 무너진 예배당은 195562일 재건의 첫 삽을 떴다. 미군이 재건 작업에 도움을 주었다.

▲ 공주제일교회의 '협산자 예배당'은 1931년 완공됐으며,6.25 때 전소되어 1955년 다시 건축했다. 2011년 등록문화재 제472호로 지정을 받았고,     ©뉴스파워

 

 그러나 안타깝게도 재건한 예배당의 재료를 위해 1909년 건축한 협산자 예배당을 헐고 목재와 루핑 등을 사용했다. 예배당은 15개월 만에 건평 190평에 190, 290평의 예배당을 완공했다. 이 예배당은 1979년 새롭게 개축했다.

 

1979년에 개축한 예배당 강단과 2층 출입구 양 벽에 스텐이드 글라스를 제작해 설치했다. 설계는 공주사대 이남규 교수가 맡았다.

윤 목사는 당시 400만원이 들었는데 달그배르 방식에 의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유리 벽돌처럼 하나씩 하나씩 찍어내어 만든 공법으로 1970년대 제작한 것이지만 예술성과 종교 문화 역사적인 가치는 값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만큼 크다.”고 했다.

▲ 공주기독교박물관 입구에 1979년 설치한 이남규 작가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뉴스파워

  

윤애근 목사는 건축된 지 80년이 지난 예배당을 2011년 등록문화재 472호로 등록 인가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문화재 옆에 새 예배당을 건축했다.

 

윤 목사는 지난 2017년 국가 예산 20억 원을 지원 받아 문화재예배당을 공주기독교박물관으로 확대 개편 공사를 시작해 20185충남등록 39박물관으로 인가를 받았다.

 

윤 목사는 예배당 중 문화재이면서 동시에 박물관이 되는 첫 사례라며 명실공히 공주와 기독교 전체를 대표하는 건물로서 그 위상을 공고히 세워가고 있다.”고 말했다.

▲ "금강의 물결에서 생명의 빛을 보다"를 주제로 공주기독교박물관은 제3회 기증 유물 및 사진 특별전시회를 공주제일교회에서 열고 있다     ©뉴스파워

  

공주기독교박물관에는 올해 우리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던 사애리시 선교사가 당시 사용했던 병풍과 샤프 선교사가 사용한 오르간, 1930-40년대 금전출납부와 회계장부, 1920년대 후반부터 기록하기 시작한 직원 회의록, 교회를 이끈 이들 부조, 양재순 장로가 사용했던 의료도구, 고서적들을 비롯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공주 기독교 선교의 첫 시작점이 공주제일교회 역사를 보면 공주 근대 역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  

▲ 영명학교에 재학시 2년 간 공주제일교회를 다녔던 유관순 열사는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사애리시 선교사는 2020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받았다.    ©뉴스파워

 

공주기독교박물관과 공주제일교회는 지난달 23일부터 금강에 흐르는 생명의 빛이라는 주제로 기증 유물 및 사진 특별전시회를 열고 있다. 또한 공주의 한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작은 음악회가 기독교박물관 2층 전시실에서 진행되고 있다. 음악회에는 김정섭 공주시장이 참석했다.


공주제일교회가 만드는 공주기독교박물관은 근대기독교문화 보존을 위해 힘을 쏟고 있는 한국교회에 좋은 모델이 될 것이다
.

윤애근 목사는 공주시성시화운동본부 본부장을 맡고 있다.  공주기독교박물관 관람과 공주시성시화운동본부 사무국장 김일호 목사와 함께 공주제일교회 역사를 중심으로 설명과 안내를 해주었다.

▲ 공주 영명학교 영명동산에 설립된 샤프, 사애리시 선교사 부부와 유관순 기념 조형물     ©뉴스파워

 

▲ 공주 영명학교     ©뉴스파워

 

 

▲ 공주시 중학동 근대 기독교문화 거리     ©뉴스파워

  

▲ 공주 4.1만세운동 기념 조형물.영명학교로 올라가는 입구에 설치되어 있다.     ©뉴스파워
▲ 공주기독교박물관이 제3회 특별사진전 '금강의 물결에서 생명의 빛을 보다'를 주제로 공주제일교회에서 사진전을 열고 있다.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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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6/18 [13:56]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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