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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0.07.11 [04:05]
올바른 예배 신앙을 회복합시다
정준모 목사 (콜f로라도 말씀제일교회, Ph.D & D. Miss)
 
정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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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라   ©  뉴스파워 정준모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라 (11:17-19)

 

 

서론) 예배는 신앙생활의 핵심이며, 성경의 본질 주제입니다. 성경 전체의 중요한 주제는 예배타락과 예배회복입니다. 예배는 인간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범죄와 타락의 어두운 영적 일면을 창세기를 통하여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제사와 예배를 통하여 인간 구원과 회복의 밝은 길을 보여 줍니다.

 

신약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한 예배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예배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 백성들의 매우 기본적이고 마땅한 자세입니다. 또한 예배는 성삼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내려주시는 신령한 은혜를 받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4장에서 최초의 제사로 아벨과 가인의 제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예배는 받으시고 한 사람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 성도는 세계 어느 성도들 보다 예배에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열정이 누구를 위한 열정이며, 무엇을 위한 열정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여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가 아벨처럼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것이 함께 열납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매 순간 드리는 예배가 아벨의 제사처럼 하나님의 임재의 불이 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아벨처럼 우리의 예배가 자세 뿐 아니라 예배 전과 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도 하나님 기뻐 받으시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예배의 의미는 최상의 것을 최고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특별히 성경에서 예배라는 말이 동사로 제일 먼저 나오는 곳이 바로 본문 225절 말씀에 있는 경배하다라는 말씀입니다.

 

경배한다는 말씀은 영어로 "Worship"이다. 이 말은 최상의 가치를 것을 최상의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일이라고 문자적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최상의 분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일이 예배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상의 하나님이시기에 최상의 것을 돌려 드리는 것이 예배의 참된 정신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예배는 히브리어로 아베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는 종이나 노예를 칭하는 에베드에서 유래된 말로써 영어로 표현하면 “Service”이다. 그러므로 예배란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엎드려 그 분을 섬긴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배는 헬라어로 프로스쿠네오라고 쓰고 있는데, 이는 “~에게 절하다 입맞추다 엎드리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배자가 자신의 몸을 굽혀 엎드리는 외적 자세뿐 아니라 겸손과 사랑과 존경을 드려야 하는 내적인 마음의 태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가장 높은 분에게 드리는 가장 고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최상의 존재에게 최상의 존경과 경외, 찬양과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모범적인 예배의 모습이 창22장에 잘 그려져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습과 자세로 예배를 드렸는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성령이 임재 하시는 예배가 어떠한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2. 예배의 참다운 출발은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시작되어져야 합니다.

 

예배는 사람에 의하여 고안된 사람을 위한 프로그램이 결코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제사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땅의 한 산에서 이삭을 바친 예배의 출발은 누구에 의한 것인가?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인가? 즉 예배에 있어서 그 주도자가 누구인가가 매우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 관점이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초점이 됩니다. 인간의 계획과 방법과 상상에 의한 예배를 드리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를 두지 않고 사람의 생각이나 유전이나 전통에 근거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풍조와 가치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됩니다.

 

보수적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계시 즉 말씀이 아닌 전통과 유전과 인간의 아집 등 인위적 요소가 예배에 많이 개입되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진보적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계시 즉 말씀이 아닌 매스컴이나 사회 문화 풍조가 예배에 동원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화는 일종의 옷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옷의 모양과 짜임새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는 문화라는 범주를 뛰어 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문화를 창조하시는 분이시지 결코 인간의 문화의 구조와 틀 속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화의 형태는 시대마다 바뀌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의 틀이 바뀔 수 있지만 기본적인 예배의 정신은 언제나 변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직도 한국 교회에 예배는 외형주의, 형식주의, 율법주의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강단에 대한 의식도 문제가 있다. 마치 강단을 아직도 구약의 제단이란 의식이 남아 있어 장식이 아닌 어떤 제물을 차리는 그런 정신은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또한 강단과 지성소를 동일시하는 의식을 가진 나머지 강단에 올라 갈때만 신발을 벗고 올라가고 엎드려 기도하는 것은 속히 고쳐야할 문제입니다.

 

주님은 이런 율법복고주의를 싫어하십니다. 성전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거룩과 겸손과 정결이 전제되지 않고 외부의 꾸임과 자세로 내부를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은 회칠한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또한 요즘 젊은 층에서는 간증과 찬양 그 자체만을 중시한 나머지 예배의 본질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인지 예배를 빙자한 사람들의 축제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문학발표회를 지켜보면서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그 행사의 주인이 누구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정작 찬양의 대상이 되신 주님은 뒤로한 채 자기들끼리 사진찍고 꽃다발 주고받고 축하를 받고 있었습니다.

 

유명세를 타는 목사를 강사로 초청하여 집회하는데 그 중요한 이유가 진정한 예배보다는 많은 헌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강사를 세우면 헌금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집회 사용비, 강사비 주고 남는 돈이 또한 많아서 자신들 조직과 단체 모임을 유지하는 사업에 쓴다고 합니다.

 

정말 바른 목적인가? 결과주의가 아닐까? 꿩 잡는 것이 매라는 식이 아닐까?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의 감정 해소, 사람들의 축제 그리고 사람들 위한 목적으로 무언가를 해서는 안됩니다.

 

본문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은 아브라함 자신의 생각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예배의 출발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입니다.

 

221,2절에 하나님이....그를 부르시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방법과 장소와 제물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행할 때, 특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그분의 말씀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배의 권위는 결코 인간의 전통, 인간의 고매한 사유 그리고 인간의 기호에 편승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분명한 계시에 근거해야 합니다.

 

예배는 인간의 감정이나 필요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출발합니다.

 

3. 예배자의 자세는 믿음의 확신과 즉각적인 순종이 반드시 따라야 합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의 반응은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이었습니다. 조금도 주저하거나 변명거리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고 두 사환을 준비시켰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아들을 데리고 목적지를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100세나 되어 얻은 아들 늦게 낳아 애지중지하면서 길렀던 자식에 대한 애정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더 앞섰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하였던 히브리서 기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1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의 믿음의 위대함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하나의 관념이나 논리로 끝나지 않고 순종으로 행동에 옮겨졌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신 예배가 되기 위해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참다운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드려져야하고 그 말씀에 최선을 다하여 진심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행위에 있어서도 말씀에 따라 출발되어져야 되는 것이지만 예배에 선포되어지는 말씀에 즉각 순종하는 것도 바른 예배 정신의 결실입니다.

 

1) 예배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또한 그 믿음은 바로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나져야 생명력이 있습니다. 삼상 15장에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그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사울이 제사라는 명분을 내세웠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색을 내었지만 정작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고 말씀에 대한 자기반성과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었습니다. 그런 제사는 하나님이 열납치도 않으시고 오히려 역겨워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법궤 옆에 서 있는 홉니와 비느하스였지만 그들에게는 마음의 법궤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다윗이 비록 넘어지고 범죄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상한 심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그의 예배와 그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아 주셨습니다.

 

예배는 예배고 삶은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와 삶의 이원적 분리 현상은 매우 어리석고 위선적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 정신으로 삶을 살고 삶 속에서 예배 정신을 꽃피우는 것이 예배의 핵심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일정한 형식으로 드리는 이 예배가 우리의 모든 삶을 대표하는 예배가 되어야 하기에 이 시간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드려진 예배의 정신이 우리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순종으로 응답되어져야 진정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이 예배가 이제 삶의 시작이 되어서 삶 가운데 그 의미와 뜻을 꽃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믿음으로 응답하며 순종할 때 이것이 진정한 예배가 됩니다.

 

2) 예배는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을 하나님께 다시 드리는 헌신이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이며 또한 예배의 기본 자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신앙 고백적 차원에서 주신 것을 다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 중 최대의 것은 그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이 받은 가장 큰 축복이었고 그 무엇보다 고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절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의 자식도 아니고 남의 자식도 아닌 바로 아브라함 자신의 자식을 그것도 아브라함이 그처럼 사랑하는 독자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아들을 심지어 번제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번제는 제물을 죽여서 불에 태워드리는 제사를 말합니다. 이 방법은 아브라함의 상황에서 너무나 끔찍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아무런 자기 희생없이 아무런 헌신없이 드려질 수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다시 드리는 결단이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는 것은 예배자로서 합당치 않습니다.

 

3) 예배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다는 삶으로 나타나는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헌금을 드림에 있어서도 남이 얼마나 드리는가에 대한 관심보다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물질의 드림이 전부가 아닙니다. 나 자신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나는 빠지고 물질로만 하나님을 동정하는 식으로 드리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내가 교회 예산에 얼마나 보탬이 되는 것처럼 바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건강, 직장, 수입으로 내가 드리는 것입니다. 드리지 않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드렸다고 해서 드린 것 가지고 행사하는 것은 이중 위선과 어리석은 과잉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신앙의 고백을 보이는 물질로 대신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물질 속에 나의 사랑과 정성이 담겨있을 때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행한 분량에 따라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얼마 행할 수 있나 나의 능력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가 얼마를 주었느냐에 따라 측정하지 않으시고 내가 얼마를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주고 난 다음 얼마나 남았는가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신을 다 줄 때까지는 다 주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는 내가 줄 수 있는 능력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준 것이 주고 남아 있는 것에 비교하여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나의 헌신이 결정이 됩니다.

 

특별히 교회와 공동체적인 헌신이 따를 때 우리 공동체가 드리는 예배를 주님이 받아 주십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이번에 우리가 성서 비전을 위하여 성도들의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어떤 분은 결혼 지참금을 믿음으로 바쳤고 어떤 노인은 자신의 패물을 드렸습니다. 또 어떤 분은 자신이 부은 적금을 드렸습니다. 감동적인 헌신들이 아주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자기는 헌신하지 않으면서도 불평하고 교회 예산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정작 있어야할 자기희생은 없으면서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교회 예산과 재정도 교회 자체에 쓰기 급급해서는 안됩니다. 개척교회 후원, 해외선교, 사회 구제, 장학금 지급 등등 대외적 사역에 많이 배당을 해야 될 것입니다.

 

개교회의 예산이 비록 넉넉하지 못해도 우리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곳에 기꺼이 드리는 그런 헌물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가 드릴 수 있는 아브라함의 이삭이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도 우리의 희생이 요구됩니다.

 

이것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희생입니다. 예배는 그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표현으로 우리의 희생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시간과 재물을 드림으로 때로는 사회적 명성을 포기하는 것이 참다운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이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시라면 기꺼이 하나님 앞에서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합당한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결국 하나님이 주신 것을 도로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것 중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지며 주를 위해 헌신하는 이것이 어떤 것보다 고귀한 예배 표현입니다. 물론 물질도 우리 마음의 표현이며 신앙 고백적으로 드려지는 헌물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장 고귀한 것은 바로 자기 결단과 자기 성별임을 알아야 합니다.

 

5절에서 두 사환에게 한 아브라함의 말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사람의 말속에는 그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목표와 방향이 분명히 담겨 있는 법입니다.

 

그는 사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스스로 억제하며 산 아래서 기다리게 했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사환을 제사 드리는 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기다리게 했을까요? 그 이유를 누구나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경우 일어날 수도 있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코자 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았던 사환들이 그들의 상식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을 보았을 때 그들이 아브라함의 행동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주인님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주인님 제 정신으로 하는 일입니까?” 하고 아브라함의 행동을 막았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래서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말씀드리기를 사환들이 막아서 제대로 번제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라고 합리적이고 적당한 이유와 충분한 변명거리를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순종하는 길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모든 장애 요소를 사전에 단호하게 차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연약을 알았고 자기의 부족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위하여 미리 방해되는 것을 사전에 철저히 제거하는 자기 결단과 자기 성별을 단행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연약과 부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고 미리 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예배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온전한 헌신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음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전에 단호히 여기서 기다리라는 자세로 모든 장애 요소를 단절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의 미련과 유혹과 이해관계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하고 참다운 예배는 자신의 온전한 예배를 막는 두 사환과 결별할 때 비로소 이루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아무런 방해 없이 산 정상에 올라가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느 날 나에게 시골 교회나 낙도에 혹은 선교지에 가라고 하시면 기꺼이 순종하여 가는 것이 예배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하여 후배를 위하여 그 무엇을 결단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에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가장 귀중하게 여기고 우리가 붙잡고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다 포기하고 결단하는 것도 또한 참다운 예배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땅에 속한 모든 것을 떠나 오직 하나님의 앞에 높이 올라갈 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를 위하여서는 반드시 자기 결단과 자기 성별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자기 결단과 자기 성별 그 자체가 바로 예배가 요구하는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예배자 자신을 드릴 때 이루어집니다. 자신을 배제한 제물의 헌납이나 봉사는 의미가 없습니다.

 

4. 참된 예배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친히 은혜와 축복을 준비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기쁘게 열납하시는 예배는 하나님 스스로께서 예배를 준비하시는 예배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믿음과 순종으로 예배의 처소에 나아갔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는 제물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을 따라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영원한 제물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어떤 모습과 어떤 행동에도 불구하고 긍휼과 자비를 베푸심으로 열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에 빚을 지고만 계시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땅의 것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것까지도 보증하십니다. 아들을 드렸더니 하나님의 아들을 약속 받았습니다.

 

2216-18절에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은 하나님께 바친 아들을 되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그 아들도 기꺼이 하나님께 바치고자 하는 마음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 아들을 더 사랑하는가 그 마음을 저울질 해 보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선물로 받은 아들보다 그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더 귀한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선물로 받은 아들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귀한 믿음입니다. 모든 것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오늘 우리 모두가 본 받아야 할 신앙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보다도 하나님이 주신 그 무엇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부를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주신 명예를 하나님 보다 더 귀하게 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 주신 귀한 아들을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꺼이 드렸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마음만 받으시고 예물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준비하셨습니다. 예배는 받으시고 아들은 돌려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주실 것까지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배의 절정은 결국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 영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헌신하며 사랑으로 경배 드리는 자들에게 상상 밖의 것, 최상의 것으로 복을 부어 주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비교하여 자신을 너무 초라하게 약하게 평가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아브라함의 위대함을 보여 주고자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부족한 아브라함까지도 쓰신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연약한 아브라함이지만 그 아브라함에게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성경은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2절에서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예배와 헌신을 보시고는 기뻐하셨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이 정말 사랑하고 있구나를 알게 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 학생이 정말 교수를 존경하고 좋아하고 있구나를 알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축복들은 무엇입니까?

 

1) 큰 복을 약속하셨습니다(22:17).

 

이것은 다름 아닌 믿음의 복입니다. 이 복은 신령한 복이며 우주적인 복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는 복입니다. 아담의 삶은 믿음의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흐른다 해도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 세대 사람들에게 증거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바로 아브라함과 같은 삶이란 것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2) 영적 후손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22:1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에 모래와 같게 하시는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족속과 방언과 나라들이 아브라함이 믿었던 신앙을 따라 신앙의 후손이 될 것에 대한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일개 부족의 족장으로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시작이요 족장의 대표라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국가와 종족을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3) 승리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22:17).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대적자들이 여러 곳에서 여러 모양으로 무차별 공격을 가하여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대적자들을 다 물리치시고 긍극적인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예배는 최상의 하나님께 우리가 가진 최고의 가치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자신까지도 기꺼이 드리려는 마음이 예배자에게 있어야 합니다. 예배는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자의 자세는 믿음과 순종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바른 예배를 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은혜와 복을 허락하십니다.

 

*토의사항*

 

1.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예로 들어 그들이 어떤 예배를 드렸는지 생각해 봅시다.

 

2. 예배의 의미를 요약해서 설명해 봅시다.

 

3.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예배자는 무엇까지 드려야 합니까?

 

4. 합당한 예배의 결과 어떠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까?

 

5. 나로 하여금 바른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요인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6. 섬기는 교회의 예배에서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개혁되고 갱신되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정준모 목사 《선교학박사(D.Miss)와 철학박사(Ph. D)》현, 콜로라도 말씀제일교회(Bible First Church) 담임, 국제개혁신학대학교 박사원 교수, 국제 성경통독아카데미 및 뉴라이프 포커스 미션 대표, 콜로라도 타임즈 칼럼니스트, 뉴스파워 미주 총괄 본부장, 전 대구성명교회 22년 담임목회 및 4200평 비전센터 건축 입당, 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CTS 기독교 텔레비전 공동대표이사, GMS(세계선교이사회)총재,GSM(미국 선한목자선교회)전 국제부대표 및 현 고문, 전 교회갱신협의회 대구 경북 대표, 한국 만나(CELL)목회연구원 대표, 총신대학교 개방, 교육 재단이사, 백석대학교, 대신대학교 교수 역임, 대표 저서, ≪칼빈의 교리교육론》,《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 《장로교 정체성》,《기독교 교육과 교사 영성》 《생명의 해가 길리라》,《21세기 제자는 삶으로 아멘을 말하라》 등 30여 졸저가 있습니다. 자비량 집회 안내:농어촌, 미자립, 선교지 “상처입은 영혼 -치유 회복 부흥집회”를 인도합니다(기사 제보 및 집회 문의 연락처 jmjc815@hanmail.net, 719.248.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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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2/13 [10:40]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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