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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20.01.20 [09:01]
나사렛 예수가 보여준 기도의 삶(I)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

<역사적 예수 시리즈>

            

▲ 김영한 박사     ©뉴스파워

사복음서(마태, 마가,누가, 요한복음) 저자들은 역사적 예수가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는 기도를 통해서 성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교통 속에서 사셨다. 나사렛 예수는 참 인간(vere homo)이었기에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통 속에서 영적으로 새로워져야 했다. 예수는 새벽 미명에 기도했으며, 한적한 곳에서 기도했으며, 구하면 주신다는 믿음으로 기도했으며, 중대한 일을 앞두고 기도했다. 예수가 드린 기도 내용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진정한 기도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는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사셨고 영적 안식과 평강을 누렸다. 역사적 예수가 행하신 기도는 오늘날 우리가 행해야 할 기도의 본이다.

 

I. 매일 기도를 실천하신 인간 예수

1. 새벽 미명, 그리고 일과가 끝난 후 기도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 기도하셨다. 마가는 기록한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1:35). 예수는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에 일어나 기도하셨다. 그리고 하루 일과가 끝난 후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6:46). 예수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시고 기도로 마치셨다. 예수는 기도 속에서 성부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통 속에서 사셨다. 예수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기도의 전형을 보여주셨다.

 

2. 한적한 곳에서 기도

 

예수는 많은 사람들(병자들, 소외자들, 귀신들린 자들)이 그를 찾아 상담한 연유로 아주 바쁘셨다. 마가는 다음같이 기록한다: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1:36-37). 그리고 저녁시간에도 각색 병든 자들이 치유를 받으려 물려 들었다. 예수는 쉴 틈 없이 바쁘셨다: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1:32-33). 그러나 예수는 일에 파묻히시지 않고 안정과 휴식을 취하시고 하나님과의 은밀한 교제를 위하여 한적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서 기도하셨다.

 

예수가 이방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인 데가볼리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를 때 사람들이 소경과 더듬는 자와 눈 먼자를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를 간구했다. 예수는 그 사람들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위탁하셨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더라”(7:34-5). 예수는 사람들 보는 앞에서보다는 은밀히 치유하셨다. 이러한 예수의 치유사역은 오늘날 일부 부흥사나 치유사역자들의 자기 과시 치유사역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려준다.

 

예수는 그의 수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들 조차도 모르는 한적한 곳에 가서 기도하셨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다(9:28). 이 산에서 예수는 그 형체가 변형되는 놀라운 영광스러운 신비를 드러내신다. 변화산이라고 불리우는 이 산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변화된 예수께서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하는 신비스러운 광경을 체험하게 된다. 이때 제자들은 구름 가운데 말씀하시는 성부의 음성을 듣게 된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9:35). 이 음성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 위로 올라 오실 때의 음성과 같다. 성부 하나님의 음성이다. 이러한 영적 체험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신비로운 근원을 점차 알기에 이른다.

 

3. 기도의 은밀성과 내면성

 

예수는 각 개인이 기도하는 방식(6:5-8)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께 드리는 은밀성과 내면성이다. 유대사회에서는 아침, 정오, 저녁에 회당에서 규칙적으로 개인 기도가 드려졌다. 개인 기도는 회당 밖 여러 곳에서 드려졌다.( 마태복음 65-8절에 대한 해설, 해설관주 성경전서, 독일성서공회판, 14.). 예수는 특정 기도 장소를 반대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공식적인 예배 모임이나 공중 기도를 반대하시지 않으신다. 예수도 회당에 들어가서 경건생활을 하셨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4:16).

 

예수께서 반대하시는 것은 자신의 경건을 꾸며서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기도할 때는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으로서 사람들이 보도록 해서는 않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드리는 자들은 외식(外飾)하는 자들이며 가식(假飾)하는 자들이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그러한 외식을 한 자들이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구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6:5). 이들은 회당이나 큰 거리 어구에 서서 기도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이미 상을 받은 자들이다. 이들의 기도는 외식하는 기도로서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는 기도다.

 

기도에는 은밀성이 요구된다.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에게 아뢰야 한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6:6). 은밀하고 내면적인 기도는 하나님이 경청하시고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 예수는 기도할 때 이방인들처럼 많은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방인들은 한 말을 또하고 중복하면서 그들의 신을 설득하려고 한다.

 

열왕기상의 기록에 의하면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참 신 대결에서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 모습이 나타난다: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왕상 18:26). 이에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 선지자들을 조롱한다: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왕상 18:27). 이에 바알 선지자들은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면서 바알신에게 기도드린다: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왕상 18:28). 그러나 바알신은 응답하지 못한다. 바알신은 참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방식과 조용히 하나님과 내면적으로 명상적으로 인격적으로 대화하시는 예수의 기도는 대조된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6:7).

 

인격적인 하나님은 말로 설득당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6:7) 하나님은 말을 많이 해야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아시기 때문에 간결한 기도를 들어주신다. 인격적인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아신다. 그러므로 신자는 외식하는 자들이나 중언부언하는 이방인들을 본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6:8). 하나님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까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인격적인 하나님에게 신자들은 은밀성과 내면성과 신뢰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기도하는 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기도자의 마음의 겸허성 간절성과 진실성이다.

 

4. 라아너 학파가 말하는 초자연적 실존성에서 야기되는 끊임없는 기도의 맹목성

 

로마 천주교 라아너 학파(die Rahner Schule)초자연적 구속은혜”(übernatürliche Heilsgnade)를 주장한다. 이는 기독교 이전 인류들에게 항상 어디서든지현실적이고, 개별인간들에 있어서 사건이 되는 가능성으로서 제공되어 있다. 하나님은 은혜의 제공자로서 그의 자유로운 자기 전달을 항구적으로 불가피적으로 자유 속에 있는 피조적 인간의 선험적 주체성에 부여하신다. 이것이 초자연적 구속은혜”(übernatürliche Heilsgnade). 이것은 인류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인 구속과정에 속하는 것인 데 말씀, 의식과 종교적 사회성에만 제한되지 않고 어디서든지 수행된다.(Karl Rahner, Grundkurs des Glaubens. Einführung in den Begriff des Christentums, Freiburg, Basel u. Wien, 1976, 149.) 여기서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가장 깊이 그의 본질적 깊이 속에서 신의 은총을 향해 역동화되고, 목적 지향되어 있다. 인간은 신의 절대적인 자기 전달의 사건(Geschehen der absoluten Selbstmitteilung)이며, 절대적인 근접과 직접성으로 나아가는 신의 자유롭고, 순수하고, 용서하는 자기 전달의 사건이다. 여기서 라아나 학파는 보편구원사 신학을 기획하고 있다.

 

이러한 라아너의 보편구원사 신학에서는 창조 은총(gratia creatoris)과 구속 은총(gratia redemptoris)이 동일시됨으로써 구속일원론(Heilsmonismus)이 야기된다.(김영한, 현대신학과 개혁신학: 현대신학에 대한 비판적 조명과 개혁신학의 진로, 서울: 성광문화사, 1996, 69.). 여기서 계시는 존재론적 성격을 지니고 기도도 존재론적 성격을 가지게 된다. 계시는 인간의 존재의 깊이 속에서 일어나는 선험적 자기 전달이다. 이는 색갈 없는 밝음으로서 근본적으로 선천적으로 인간의 내적 의식을 밝히는 인간의 선험적 경험으로써 실현된다. 신의 선험적이고 초자연적 은총은 인간적인 현존재의 선험적 가능성으로부터 실현된다.

 

가톨릭 보수신학자 베네딕토 16세 라칭거(Joseph Ratzinger)도 이러한 의미에서 기도를 이해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느낌과 존재의 밑바탕에 조용히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일러 우리는 끊임없는 기도라고 부른다.” “기도의 참된 의미는 하나님과 고요히 내적으로 함께 있음이다이러한 라칭거의 기도 개념에는 인간이 자기 본성인 초자연적 실존성으로 하나님과 이미 그의 존재 깊이에서 소통하고 있으며, 끊임없는 자기 전달을 받고 있다는 라아너 학파의 보편구속사 신학의 입장에 정위되고 있다. 이러한 라아너 학파나 라칭거의 입장은 중세 스콜라적 신학으로서 인간 본성에 대한 긍정적 입장에 서서 어거스틴이나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인간 존재의 전적 부패성을 도외시하는 자연신학적 기도 개념이다. 이러한 기도는 성경적인 기도라고 볼 수 없다.

 

예수는 기도의 본질을 이방인이나 인류 일반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이 기도는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받아 하나님을 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즐겨 받으시는 기도의 태도를 가르쳐주고 있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 아들임을 알고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11:27) 예수가 가르치신 기도는 라아너 학파가 말하는 인간이 존재 깊이에서 신의 절대적 자기 전달을 제공받고 있는 초자연적 실존성으로서의 존재론적 기도가 아니다. 예수의 기도는 그리스도인이 인격적으로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청원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는 인격적 요구하며 드리는 소박하고 심령이 가난한 기도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위다. 이것이 예수가 가르치신 기도의 본질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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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2/12 [09:35]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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