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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2.07 [10:24]
예배 갱신 설교: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
정준모 목사(콜로라도 말씀제일교회) 회복 치유 부흥 설교 전문
 
정준모

예배 갱신 설교: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예배

 

▲  아브라함의 모리아 제사는 예배 신학과 실천의 최고 모형이다.  © 뉴스 파워 정준모

 

 

성경본문:(22:15) 성경 전체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예배이다. 예배는 인간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성경은 인간의 범죄와 타락의 어두운 영적 일면을 창세기를 통해서 제시하고 있다. 이런 영적 육적 회복의 방안으로 하나님을 향한 제사와 그리스도를 통한 예배로 인하여 인간 구원의 밝은 회복의 길을 열어 놓았음도 알 수 있다. 특별히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예배를 드리게 됨을 말하고 있다. 또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예배를 계시록을 통하여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모든 사실을 바라볼 때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매우 기본적이고 마땅한 자세다. 또한 성삼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의 백성들에 내려 주시는 신령한 은혜를 받는 축복의 시간이다.

 

성경에서 최초로 제사를 드리는 장면은 창세기 4장에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그 예로 드러난 있다. 여기서 우리는 두사람이 똑같이 예배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예배는 받으시고 한 사람의 예배는 거절하셨던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 드려지는 예배가 아벨의 제사처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길 바란다. 아벨처럼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것이 함께 열납 되어지기를 바란다. 아벨처럼 우리의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의 불이 떨어지기를 소망한다. 아벨의 경우처럼 예배 순간의 우리 자세 뿐 아니라 예배 전과 예배 후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모습들이 되기를 바란다.

 

특별히 성경에서 예배라는 말이 동사로 제일 먼저 나오는 곳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 225절 말씀에 있는 경배하다' 는 말씀이다. '경배한다'는 말씀은 영어로  ‘Worship' 이다. 이 말은 '최상의 가치 있는 것을 최상의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일' 이라고 문 자적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만이 최상의 분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일이 예배의 본질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최상의 하나님이시기에 최상의 것을 돌려 드리는 것이 예배의 참된 정신이다.

 

구약 성경에 예배를 히브리어로 아베다' 라고 한다. 이는 종이나 노예를 칭하는 에베드' 에서 유래되어 졌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Service‘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배란 존경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엎드려 그 분을 섬긴다' 는 뜻이 담겨 있다.

 

신약 성경에 예배' 프로스쿠네오' 이다. 이 말은 에게 절하다. 입 맞추다. 엎드리다' 이다. 이것은 예배자가 자신의 몸을 굽혀 엎드리는 외적 자세뿐 아니라 겸손과 사랑과 존경을 드려야 하는 내적인 마음의 태도를 뜻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가장 높은 분에게 가장 고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모범적인 예배의 모습을 잘 그려 놓았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예배하는 자들의 옳지 못한 자세를 교정해야 하는 시점에서, 진정한 예배 의식의 부재라는 지적을 놓고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배워야 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예배드린 상황, 예배드린 모습과 자세를 살펴서 참다운 예배가 어떤 것인가 알아야 한다. 특히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예배가 어떠한가를 찾고자 노력하기 바란다.

 

1.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로 출발한다.

 

예배는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프로그램이 결코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영적 제사이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예배의 출발은 누구에 의해 이루어 진 것인가? 그리고 누구를 위해 이루어 진 것인가? 즉 예배에 있어서 그 주도자가 누구인가가 매우 중요하다. 이 관점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초점이다. 인간의 계획과 방법과 상상에 의한 예배는 이미 예배가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 계시에 근거를 두지않고 사람의 생각이나 유전이나 전통에 근거하는 예배 풍토에 젖어 있다. 세상의 풍조와 가치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되는 데도 말이다.

 

보수적 성향에서는 하나님의 계시 즉 말씀이 아닌 전통과 유전과 인간의 아집 등 인위적 요소가 예배에 많이 개입되어 있는 경우를 본다. 또 진보적 성향에서는 하나님의 계시 즉 말씀이 아닌 매스컴이나 사회문화 풍조가 예배에 자리잡고 있다는데 큰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문화는 일종의 옷이다. 옷의 모양과 짜임새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예배란 문화라는 범주를 뛰어 넘는 그 무엇이다. 하나님이 문화를 창조하는 분이시지 결코 하나님이 인간의 문화 구조와 틀 속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또한 문화 형태는 가변적이므로 우리의 예배의 틀이 혹 바뀔 수는 있을 지 몰라도 기본 예배의 정신은 언제든 변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한국 교회에는 예배와 관련되어 남아 있는 외형주의, 형식주의, 율법주의가 그대로 남아 있다. 먼저 강단 문제이다. 마치 강단을 아직도 구약의 제단시 하는 의식이 남아 있어 제물을 진설하는 듯한 자세를 가지는데 그런 정신은 철저히 버려야 한다. 또 강단에 대한 지성소 의식을 가진 나머지 더 거룩하기 때문에 신발을 벗고 올라오고 엎드려 기도하는 것은 속히 고쳐야 할 문제이다. 주님이 이런 '율법 복고주의' 를 제일 싫어하신다. 성전은 바로 우리의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의 거룩과 겸손과 정결이 전제되지 않고 외부적 꾸밈과 형식된 자세로 내부를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은 회칠한 무덤과 같은 현상이다.

 

또한 요즈음 젊은 층을 중심으로는 예배가 간증과 찬양 그 자체만을 중시한 나머지 예배의 본질은 뒷전으로 밀려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하나님께 하는 예배인지 예배를 빙자한 사람들의 축제인지 구분이 어려울 경우가 많다. 지난 날 모 고등학교 주최 성가 발표회를 참석할 기회가 있었는데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주님의 지극한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의 찬양보다 자기들끼리 희희낙락하면서 꽃다발을 주고받고 사진 촬영을 하는 등 야단법석이었던 장면이 계속해서 뇌리에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정 주님이 받으실 만한 찬양이며, 심령들이었나?

 

또 하나 서글픈 이야기가 있다.유명하다는 목사님 모시고 집회하는데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보다는 많은 헌금에 있다는 것이다. 유명한 강사를 세우면 헌금이 많아 집회 사용비, 강사 사례를 드리고 남는 액수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일년동안 자신들 조직의 유지비로 쓴다고 하는 서글픈 사실이 있다.

 

이것이 진정 올바른 예배의 목적일까? 결과주의가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헤아려 보아야 한다. 허다한 경우에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을 빙자로 사람들의 감정 해소, 사람들만의 축제, 그리고 사람들을 위한 목적 그 자체가 되어 버리는 웃지 못할 사실들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오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은 아브라함 자신의 생각에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반응이었다.

 

1, 2절에 하나님이 ... 그를 부르시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를 보면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예배 드린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예배를 드렸던 방법과 예배를 드리는 장소와 예배를 드리는 제물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말씀에 근거하여 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행할 때, 특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그분의 말씀에 의해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예배의 권위는 결코 인간의 전통, 인간의 지적 사유, 그리고 인간의 기호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분명한 계시에 근거해야 한다.

 

2. 예배는 믿음과 순종의 행동적 실천이 따라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게시에 대한 믿음의 확신과 즉각적 순종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의 반응은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이고 완전하였다. 조금도 주저하거나 당황하거나 이유를 대고 변명 거리를 찾지 않았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고 두 사환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아침 일찍 아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향하여 출발했다.

 

그 아들이 어떤 아들인가? 아들을 주신다고 갈데아 우르를 떠나게 하셨던 하나님, 25년 동안이나 간절히 기다려 우여곡절 끝에 얻은 아들, 하늘의 별 수와 같이 땅의 모래 수와 같이 자손을 번성케 해야 할 단 하나뿐인 아들을 지금 하나님이 요구 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참으로 비정한 아비가 되라고 명령하고 계신다.이 명령에 아브라함은 늦게 낳아 애지중지 길렀던 자식에 대한 애착보다, 자식을 주시기도 하시고 데려 가시기도 하시는 전능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 완전한 굴복이 더 앞서간다. 이 믿음을 달아보시는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예배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이다.

 

이 사실을 영감 받아 기록하였던 신약의 히브리서 기자는 이 장면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11:7)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그의 믿음의 위대함을 볼 수 있다. 또한 그 믿음이 하나의 관념이나 논리로 끝나지 않고 순종으로 행동에 옮겨짐을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기 위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참다운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 드려져야 하고 그 말씀에 우리가 정직하게 최선을 다하여 진심으로 엎드려야 됨을 알 수 있다. 예배 드리는 행위에 있어서도 말씀에 따라 출발되어져야 되지만 예배 시에 선포되어지는 말씀에 즉각 순종하는 것이 바른 예배의 정신이다.

 

예배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반응되어져야 한다. 또한 그 믿음은 바로 말씀에 대한 순종 없이는 생명력이 상실된다. 사무엘 15장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그 유명한 말씀이 있다. 우리들은 제사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색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제사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고 말씀에 대한 자기 반성과 말씀에 대한 순종이 없었다면 하나님이 열납치도 않으신다. 오히려 역겨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정작 법궤 앞에 서 있던 홉니와 비느하스였지만 그들은 패역하여 진정한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존재하지 않았던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다윗의 경우에는 비록 넘어지고 범죄 하였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의 예배와 그의 간구를 하나님이 기꺼이 받아 주셨던 것이다.

 

예배는 예배로, 삶은 삶대로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예배와 삶의 이원적 분리현상은 매우 어리석고 유치하며 심지어 위선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배 정신으로 삶을 살고 삶 속에서 예배 정신을 꽃 피우는 것이 진정한 예배의 핵심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식에 따라 일정한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그 예배는 우리의 모든 일상의 삶을 대표하는 예배의 의미를 가진다. 아울러 이 공식 예배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보배로운 시간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또한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그려진 예배의 정신이 우리의 삶 가운데서 구체적 순종으로 응답되어져야 진정한 예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3. 예배는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히 드리는 헌신이 따라야 한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을 하나님께 다시 환원해 드릴 수 있는 헌신이 동반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이며 또한 예배의 기본 자세이다. 예배는 하나님이 인생의 모든 것을 주도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셨다는 신앙 고백적 차원에서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 중 최대의 것은 바로 자신의 독자 이삭이었다. 아브라함에게 그 무엇보다 가장 받은 바 축복이 되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존재가 그 아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당신에게 재물로 드리라고 말씀하신다. 2절에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그를 번제로 드리라.' 고 말씀하셨다. 네 아들, 종의 자식도 아니고, 남의 자식도 아닌 바로 아브라함 자신의 아들을 더욱이 그 사랑하는 독자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요구하신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고 한다. 번제란 제물 드리는 방법으로서 그 제물을 죽여서 불에 태워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참으로 참혹함이여, 그 방법이여. 인간 아브라함의 녹는 심정을 무슨 말로 형용할 수 있으랴!

 

진정한 예배란 나의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내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다는 입술 고백 뿐 아니라 삶에서 보여지는 고백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나를 달아보실 수 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나의 가장 아끼고 끔찍이도 사랑하는 것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가를 물어 보실 것이다. 헌금도 남이 얼마나 드릴까 하는 관심보다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드려야 할지를 점검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헌금을 드림이 전부가 아니라 나 자신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나라는 존재가 빠진 물질로 하나님께 마치 동냥하는 식으로 예물 드리는 것은 이제 그만하라. 내가 교회 예산의 몇 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식의 계산은 이제 그만 해야 한다. 헌금은 하나님게 드릴 물질을 넉넉히 허락하신 하나님의 되찾으심이 아닌가? 이는 하나님께 보이는 나의 신앙 고백을 물질로 대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물질 속에 나의 정성과 사랑과 헌신이 담겨 있을 때만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은 내가 행한 분량 그 자체에 따라 평가하지 않으신다. 내가 얼마나 행할 수 있나 나의 능력에 따라 심판하신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가 얼마를 주었느냐에 따라 측정하지 않으시고 내가 얼마를 줄 수 있는가 하는 능력을 측정하시며 주고 난 다음 얼마나 남아 있는가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신다. 왜냐하면 아무도 자신을 다 줄 때까지는 다 주었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항상 우리는 내가 줄 수 있는 능력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준 것이 주고 남아 있는 것에 비교하여 그 가치가 어느 정도인가에 따라 나의 헌신이 평가되는 것이다.

 

특별히 교회와 공동체적인 헌신이 따를 때 우리 교회 공동체가 드리는 예배를 주님이 받아 주셨다. 예를 들어보자. 이번에 우리가 성서 비젼을 위하여 성도들의 옥합을 깨뜨렸다. 어떤 분은 결혼 지참금을 믿음으로 드렸다. 어떤 연세든 분은 자신의 폐물을 드렸다. 어떤 분은 자기의 오랜 노력의 적금을 드렸다. 작정으로 헌금하신 분들도 있다. 모두가 감동적인 헌신들이었기에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신 줄을 확신한다.

 

우리 교회가 이번 기회에 하나님께 공동체 감사로 적어도 10분의 2 내지 10분의 3 정도는 우리 공동체 밖의 또다른 부분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물론 교회 예산에 맞추어야 하고 성서에 주신 땅에 대한 계획도 세워야 한다. 그러나 우리 주님도 우리에게 예산에 없는 축복을 주셨으니 우리도 기꺼이 사회 구제 혹은 해외선교 그리고 개척교회 등을 위하여 사용한다면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개인적으로 이번 제직회에서는 수준높은 화제들이 검토되었으면 한다. 우리가 부족해도 우리 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곳에 희생할 수 있는 그런 헌물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것이 바로 우리 교회가 지금 바쳐 드릴 수 있는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이 될 줄로 믿는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또한 예배는 그 주님께 은혜를 감사하는 표현으로 우리 또한 크나큰 희생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하나님께 시간과 재물을 드림으로, 때로는 사회적 명성을 포기함으로, 때로는 기존 소속과 위치를 포기함으로 참다운 예배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고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나님 앞에서 헌신할 때 바로 예배가 되는 것이다.

 

4. 예배는 자신의 결단과 자기 성별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결국 하나님이 주신 것을 도로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라고 천명한 바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것 중 가장 귀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자기 자신이다. 자신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하나님께 굴복하는 자세, 자신이 주를 위해 더욱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 무엇보다도 고귀한 예배의 구현이다. 물론 물질도 우리의 마음의 표시요, 물질도 신앙 고백적으로 드려지는 헌신이다. 그러나 가장 고귀한 것은 바로 자기 결단과 자기 성별을 통한 예배이다.

 

5절에 보면 두 사환에게 아브라함이 말한다. 주의해서 읽어라.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라고 한 그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람의 말속에는 그 사람의 생각과 의지와 목적이 분명히 담겨 있는 법이다.

 

그는 사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스스로 억제하며 산 아래서 기다리게 했다. 왜 아브라함은 사환들을 제사드리는 장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기다리게 했을까? 우리 모두가 그 이유를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릴 경우,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고 이해 할 수도 없는 사환들이 아브라함의 행동에 제약을 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주인님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주인님 제 정신으로 하시는 일입니까? 하고 그들 나름대로 아브라함의 살인적인 행동을 막았을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번제가 사환들의 방해에 의해서 중단될 수 밖에 없었노라고 합리적이고 적절한 이유로 핑계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미리 차단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할 수 있는 모든 장애 요소를 믿음으로 미리 거절하는 단호함을 보였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연약을 미리 알고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를 하기 위하여 예배를 방해하는 모든 요소를 사전에 철저히 준비하는 결단과 자기 성별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아브라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 하나님께 예배할 때 온전한 예배를 위하여 헌신에 방해되는 요소를 얼마든지 사전에 미리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미련과 유혹과 이해 관계 때문에 사전에 단호히 '여기서 기다리라' 라고 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진실하고 참다운 예배자는 자신의 온전한 예배를 가로막는 두 사환과 결별할 때 비로소 산 정상에 올라가 예배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어느 날 나에게 이 교회의 담임 목사직을 버리고 시골 교회나 낙도에, 혹은 선교지에 가라고 명하시면 모든 것을 차단하고 흔쾌히 갈 수 있는 것이 나의 참된 예배가 될 것이다. 혹시 여러분이 교회를 위하여 후배를 위하여 그 무엇을 결단하기 위해 그것도 여러분이 애착하고 있는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여러분들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고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다 포기하는 결단을 하는 것도 참다운 예배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이처럼 우리가 이 땅에 속한 모든 것을 떠나 오직 하나님의 앞에 높이 올리워 갈 때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임재하는 예배를 위하여는 자기 결단과 자기 성별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배가 요구하는 정신이다.

 

5. 하나님이 임재하신 예배는 은혜와 축복을 허락받는다.

 

하나님께서 임재 하시고 기쁘게 열납하시는 예배는 하나님 스스로가 예배를 준비하신다. 아브라함이 믿음과 순종으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 처소에 나아갔을 때 이미 하나님께서 제물을 준비 해 놓으신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믿음 따라 마음을 다하여 주께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영원한 제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모습이 어떠하든 행동이 어떠하든 체휼 하시고 우리의 진정을 열납 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힘에 지나는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신다. 땅의 것을 드릴 때 하늘의 것까지도 보증하신다. 이들을 드렸더니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 받는다. 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가? 이 약속은 천지가 변하여도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 어음이다.

 

창세기 221616절에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까지 아끼지 아니 하였은 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하리니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 하였음이니라하나님은 당신에게 바친 아브라함의 외아들을 되돌려 주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아들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까지도 하나님께 바치고자 하는 마음을 원하셨다.

 

하나님은 아들을 사랑하느냐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그 마음을 저울질 해 보시기를 원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선물로 받은 그 아들보다 선물을 주신 하나님을 택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했나? 아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마음만 받으시고 예물을 스스로 준비하시고 예배를 받으시며 아들은 되돌려 주시며 오히려 당신의 아들까지 주시마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의 절정은 결국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그 영광은 결국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전심으로 그분께 믿음과 헌신과 사랑으로 경배를 드리는 자들에게 상상밖의 놀라운 축복으로 부어 주심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과 비교하여 너무 자신을 약하게 평가하지 말라. 인간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위대함을 보여 주기 위해 기록되어진 것이 아니다. 그 아브라함을 쓰신 하나님, 그 아브라함에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결론입니다. 이 시대는 참다운 경건과 참다운 예배 의식이 부재한 시대이다. 진정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열납 하셔서 응답으로 보장해 주시는 참 예배가 그리워지는 시대이다. 이 시대는 우리가 인생 된 것과, 하나님께 빚 진자 된 것과, 하나님의 기묘막측하신 은혜가, 그 용서가, 그 긍휼하심이 함께 어우러져 역사가 일어나는 예배를 원한다.

 

심령을 소생시키는 예배, 형식과 위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예배, 길이요 진리되신 그리스도를 온전히 그리스도로 모시고 그 구원의 도리 앞에 깊숙이 엎드리는 능력 있는 예배를 원한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역사하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예배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놀라운 믿음을 허락하심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믿으며 구하며 의지하는 참다운 예배를 통해 인간사의 최상의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자. 그리하면 하나님의 최상의 축복이 예배의 응답이 되어 우리에게 임하실 것이다.



정준모 목사 《선교학박사(D.Miss)와 철학박사(Ph. D)》현, 콜로라도 말씀제일교회(Bible First Church) 담임, 국제개혁신학대학교 박사원 교수, 국제 성경통독아카데미 및 뉴라이프 포커스 미션 대표, 콜로라도 타임즈 칼럼니스트, 뉴스파워 미주 총괄 본부장, 전 대구성명교회 22년 담임목회 및 4200평 비전센터 건축 입당, 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CTS 기독교 텔레비전 공동대표이사, GMS(세계선교이사회)총재,GSM(미국 선한목자선교회)전 국제부대표 및 현 고문, 전 교회갱신협의회 대구 경북 대표, 한국 만나(CELL)목회연구원 대표, 총신대학교 개방, 교육 재단이사, 백석대학교, 대신대학교 교수 역임, 대표 저서, ≪칼빈의 교리교육론》,《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 《장로교 정체성》,《기독교 교육과 교사 영성》 《생명의 해가 길리라》,《21세기 제자는 삶으로 아멘을 말하라》 등 30여 졸저가 있습니다. 자비량 집회 안내:농어촌, 미자립, 선교지 “상처입은 영혼 -치유 회복 부흥집회”를 인도합니다(기사 제보 및 집회 문의 연락처 jmjc815@hanmail.net, 719.248.4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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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27 [12:25]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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