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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1.19 [18:02]
한국교회사에서 본 김준곤 목사
이상규 (고신대 명예교수, 백석대학교 교수, 교회사)
 
이상규


이 글은 지난 9월 28일 CCC 본부 브라잇 채플에서 열린 고 김준곤 목사 10주기 추모 학술발표회 발표 원고이다. 각주와 참고문헌 등은 뉴스파워에 게재하면서 생략했다.-뉴스파워-

▲ 김준곤 목사 10주기 추모 학술포럼에서 이상규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뉴스파워



한국교회사에서 본 김준곤 목사

 

 

민족복음화를 꿈꾼 영적 지도자 김준곤 목사

김준곤(金俊坤, 1925-2009) 목사님이 살아온 삶의 여정, 그가 걸어간 민족복음화의 자취, 그가 남긴 물적 정신적 영적 유산들을 고려해 볼 때 그는 한국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말씀의 사역자’(a Minister of the Word of God)이자 진정한 의미의 복음전도자였다.

한국교회에는 길선주 이기풍 한석진 이성봉 목사와 같은 목회자 혹은 부흥운동가가 있었고, 이승훈 이승만 김구 조만식 같은 민족의 지도자들이 있었다면, 최봉석 박관준 주기철 손양원 같은 순교자들이 있었고, 박형용 김재준 박윤선 같은 신학자가 있었다. 배민수 김용기와 같은 농촌운동가도 있었는가 하면, 해방 이후 한국교회 발전에 기여한 한경직 김창인 한병기 옥한흠 그리고 조용목 같은 목회자들이 있었다. 특히 우리에게는 오늘 우리가 기리는 김준곤 목사와 같은 복음전도자가 있었다. 해방 직후 김치선 목사는 ‘300만 부흥전도회를 조직하고, 3천만 민족의 십일조인 300만 국민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며, “28천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고 권고 했는데, 이 운동은 해방 직후부터 1953년 종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상과 같은 한국교회의 유산을 계승하되, 민족복음화라는 원대한 이상을 가지고 한국대학생 선교회(CCC)를 창립하신 김준곤 목사님은 오직 예수’ ‘예수혁명이라는 거룩한 열정으로 일생을 헌신하되, 한경직 정진경 김명혁 목사 등과 함께 한국교회 복음주의운동을 전개하신 한국교회의 영적 지도자였다. 그는 세속주의와 형식주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반 기독교적 불신운동으로부터 한국교회를 지킨 영적 파수군이었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불신 풍조에 저항하며 영적 방파제를 쌓고 기도로 조국강산을 지키려했던 영적 지도자였다.

필자는 고등학생 때 노준구 선생(나사렛 형제들)을 통해 CCC에 대해 들은 바 있으나, 1971년 당시 부산 대청동 부산중앙교회 하층에서 모이던 CCC 순모임을 통해 김준곤 목사님을 알게 되었다. 특히 19746엑스폴로74’ 대회를 위한 부산 준비대회에서 그를 가까이에서 대하게 되었다. 당시 고려신학대학 4학년이었던 필자는 부산 광복동 용두산공원 아래의 동주여자상업학교 강단에서 모인 집회에 참석하여 그의 설교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고 그 분의 내면에 자리한 민족복음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날의 김준곤 목사님의 확신에 찬 설교가 45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어떤 여자 대학생이 십자가의 복음을 받고 전적으로 복음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헌신했을 때 불신자였던 그의 부모는 그리스도, 당신이 누구이기에 내 딸의 인생을 바꾸고 삶의 목표를 바꾸고, 세계관을 바꾸고, 당신의 노예가 되게 했습니까?”라고 절규했다던 예화가 잊혀 지지 않는다. 그날의 설교처럼 그 자신이 일생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혹은 복음전도자로 살았고 한국교회에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그에게는 오직 한 가지 열정이 있었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로 대표되는 민족 복음화의 열정이었고,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정치적 혹은 군사적 문제로 파악하지 않았고, 영적 문제로 인식했고, 한국사회가 직면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단순한 이념의 문제로 보지 않고 영적인 싸움, 곧 악마와 성령의 싸움으로 보아 오직 기도로 싸워야 할 것을 가르치신 영적 지도자였다.

 

2. 김준곤 목사의 삶과 신앙의 여정

김준곤 목사는 1925328일 전남 신안군 신안군 지도읍(新安郡 智島邑) 봉리(鳳里) 원동에서 김면주와 김통안 씨의 8남 중 넷째로 출생했다. 그곳에서 7살 무렵 문준경(文俊卿, 1891-1950) 전도사로부터 복음을 받고 신자가 되었는데, 그를 통해 최초의, 그리고 최대의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하였다. 무안농업실수학교(현 무안중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 목단강성 목능에 있는 만주척식회사에 근무하면서 신앙생활에 정진했다.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했던 그는 박형룡이 교장으로 있던 만주 봉천신학교에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그날 일본 관동군에 강제 징용되어 신학교 입학도 못하고 끌려갔으나 탈출하였고, 숨어 지내던 중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귀국한 그는 당시 남한에서의 유일한 장로교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에 19463월 입학했다. 이 때 한경직 목사로부터 교회사를 배우게 된다. 그러나 김재준 송창근 정대위 교수 등의 진보적 신학에 반대하여 동료 50명과 함께 조선신학교를 떠났다. 만주에 체류하던 박형룡 박사가 귀국하여 194810월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자 조선신학교를 떠난 박창환 정규오 한석지 등 3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고려신학교로 이적하여 한 학기 공부했다. 그후 박형룡 박사가 19485월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여 서울 남산에서 장로교신학교를 개교했을 때 김준곤은 고려신학교를 떠난 동료들과 더불어 이 학교로 옮겨와 수학하고 19489월 제1회로 졸업했다. 동료들이 후일 한국교회 형성에 기여했던 박영창 박창환 신복윤 엄두섭 정규오 차남진 등을 포함한 24이었다. 신학교육을 이수한 그는 1951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 후 조선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하고, 광주 숭일중,고등학교 교목(1953. 4-1955.10)과 교장(1955. 4- 1956.10)으로 봉직했고, 1956년 초에는 여수 애양원의 한센환자를 위한 한성신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가 19579월부터 1년 남짓 풀러신학교에서 수학했는데, 이 기간 중 록키산맥이 있는 포레스트 홈(Forest Home) 수양관에서 모인 미주 전역에서 모인 목회자들 앞에서 간증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CCC 창립자 빌 브라잇(Bill Bright) 박사를 만나게 되었다. 이런 섭리적 만남을 통해 빌 브라잇 박사의 정신을 접하고 그의 영향으로 195810월에는 한국대학생선교회(CCC)를 조직했다. 이것이 CCC의 첫 해외지부의 설립이었다.

이때부터는 그는 대학생 선교회를 이끌며 본인 스스로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등을 찾아다니면서 전도하기 시작했고, 대학 청년 전도를 위한 전도자로 일생을 살게 된다. 2003CCC 대표직에서 물러나기까지 45년 동안 30만 명 이상의 훈련된 그리스도인 제자를 양성했다. 한국대학생선교회 활동 외에도 19663월에는 국가조찬기도회를 조직하고, 1969년에는 전군신자화운동을 전개하는 등 민족복음화를 위해 매진하게 된다. 19727월 말에는 춘천성시화대회를 개최했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지역단위의 전도운동의 시작이었다. 1974813일부터 18일까지 서울 여의도 5.16 광장에서 엑스플로‘74 전도대회를 개최했는데, 그가 준비위원장이자 대회장이었고 강사였다. 이것은 그의 열정, 능력, 영적 지도력, 그리고 민족복음화에의 기여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성공적인 대 전도운동을 시작으로 1970-1990년대 대형 집회를 주도하며 한국에서의 복음전도운동을 이끌었다. 예컨대 ‘80복음화 대성회 대회장으로 전도집회를 주도했고, 19845월에는 세계기도성회(International Prayer Assembly), 19859월에는 엑스플로‘85 인공위성 세계대회가, 19946월의 세계기도성회가, 19955월의 ’95세계선교대회(GCOWE: Global Consultation On World Evangelization)가 개최되었다.

1990년 말부터는 북한과 통일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적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1997년 이후 2006년까지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로 활동했고, 19998월 이후에는 북한젖염소보내기 운동을 전개하였다. 19993월 이후에는 기독교 민족화합운동 대표회장으로 봉사했다. 200064일에는 한기총과 한국기독교회협의회(KNCC)가 공동주최한 평화통일을 위한 한국교회 특별연합 예배 준비위원장으로 봉사했다. 이런 일련의 일은 남북통일과 화해를 위한 활동이었다. 20022월에는 우리민족서로돕기 상임공동대표 자격으로 송월주, 강문규, 서경석 목사 등과 함께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런 여러 활동으로 전남대학교(1968), 세종대학교(1983.5), Southwest Baptist University(Missouri, USA, 1983.7), 명지대학교(2006. 2)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200212월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 했다. 그 외에도 한국교회를 위한 헌신의 삶을 마감하고, 200992984세의 나이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3. 한국교회사에서 본 김준곤 목사

식민지 하에서의 청소년기를 보내고 해방 전후 혼란한 정국에서 신학교육을 이수한 그는 한국회의 변화와 갈등, 이데올로기적 대립, 6.25 전쟁과 혁명, 산업화와 민주화의 거센 격량 속에서 일생을 살았고, 해방 이후 한국교회의 성장과 발전, 분열과 대립, 사회적 도전의 현장에서 자신이 걸아가야 할 소명과 사명에 응답하며 한 생애를 살았다. 한국교회의 역사에서 조망해 볼 때 그의 삶과 신앙, 그가 남긴 유산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한국의 청년대학생 전도와 한국교회 부흥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가 1958년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창립한 일은 한국에서의 청년대학생 복음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결과적으로 한국교회 성장에 기여하였다. 대학생선교회를 거쳐 간 연인원은 50만 정도로 파악되는데, 이는 한국의 군 병력과 맞먹는 숫자이다. 적어도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교회가 젊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청년대학생 전도의 결과였다. 김준곤 목사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에 피 뭍은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심어 주었고, EXPLO '74를 전후한 대학생 선교회의 활동은 우리나라 청년 대학생 전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당시 훈련에 참가한 청년대학생이 32만에 달했다. 우리나라의 60만 군대가 조국의 영토를 지키는 외적 방위 세력이었다면, 대학생선교회는 청년대학생들의 정신을 지키는 내적인 방위군이었다. 비록 199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변화를 겪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적 네오막시즘, 포스트모더니즘, 종교적 혼합주의로부터 한국교회를 지키고, 이런 정도의 건실한 사회 국민 도덕 의식을 견지하게 된 것은 대학생 선교회의 기여라고 생각한다.

대학생선교회를 통해 주님을 영접하고 교계와 학계에서, 성직자로 혹은 평신도 지도자로 쓰임 받은 이들이 한국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고, 결과적으로 한국교회 건실한 기독교 지도자들을 양성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김인중 옥한흠 이동원 하용조 홍정길 목사 등과 같은 목회자들, 정운찬, 이광자 같은 학자들, 박세환 장군 등은 대학생 선교회가 배출한 인물들이다. 이들의 헌신이 오늘의 한국교회 형성에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 민족 복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김준곤 목사의 신념체계, 행동양식을 결정한 중요한 삶의 지향점은 민족복음화였다.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주장은 그의 민족복음화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었다. 그는 이런 주장 아래 모이게 하소서, 배우게 하소서, 전하게 하소서라고 외치며 엑스폴로 74를 이끌었고, 그 정신은 민족복음화를 위한 것이었고, 그 결실은 한국교회의 수적인 성장이었다. 그는 한강의 기족을 일으킵시다. 서울을 성시로 만듭시다. 조국을 제2의 이스라엘로 만듭시다.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고 외쳤는데, 그가 말하는 예수 혁명, 성령 폭발은 민족복음화를 위한 캐치프레이즈였다. 이런 복음화에 대한 열정 때문에 당시 정치권력과 타협했다는 비판이 없지 않으나 김준곤 목사 자신의 일차적인 소명은 민족복음화였다. 엑스폴로74 대회에 이어 1977년의 민족복음화대회, 1980년의 세계복음화대회를 통해 그는 1907년 전후의 대부흥을 능가케 하는 1970년대 이후의 교회 성장을 이끌었다. 그가 발의한 국가조찬기도회, 전군신자화운동, 성시화 운동, 그리고 그가 주도한 대형집회는 민족복음화를 위한 줄기찬 시도였고 이런 노력이 1970년대 이후 한국교회 성장을 이끌었다. 그가 19622월 중순 전국간사수련회 때 공표한 기도문 민족복음화의 꿈은 민족 복음화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다.

 

어머니처럼 하나밖에 없는 내 조국

어디를 찔러도 내 몸 같이 아픈 조국

이 민족 마음마다 가정마다 교회마다 사회의 구석구석

금수강산 자연환경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이 땅에 태어나는 어린이마다

어머니의 신앙의 탯줄 기도의 젖줄 말씀의 핏줄에서 자라게 하시고

집집마다 이 집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는 민족

기업주들은 이 회사의 주인은 예수님이고

나는 관리인이라고 고백하는 민족.

 

두메마을 우물가의 여인들의 입에서도

공장의 직공들 바다의 선원들의 입에서도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시고

각급 학교 교실에서 성경이 필수 과목처럼 배워지고

국회나 각의가 모일 때에도 주의 뜻이 먼저 물어지게 하시고

국제시장에서 한국제 물건은 한국인의 신앙과 양심이

으레 보증수표처럼 믿어지는 민족.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으로 삼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삼으며

신구약 성경을 신앙과 행위의 표준으로 삼는 민족

예수의식과 민족의식이 하나 된 지상 최초의 민족

그리하여 수십만의 젊은이들이

예수의 꿈을 꾸고 인류 구원의 환상을 보며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한 손에는 사랑을 들고

지구촌 구석구석 누비는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옵소서!

 

셋째, 한국에서의 복음주의 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김준곤 목사는 복음주의자였다. 그가 신앙동지회 51’의 한 사람으로 조선신학교를 나와 고려신학교를 거쳐 박형룡의 장로교신학교에서 수학한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그리고 그의 일생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듯이 그는 철저한 복음주의자였다. 그가 박정희 전두한 등 군사정권 하에서 살았지만 정치적 변혁보다 복음에 의한 변혁을 우선시했고, 제도의 개선보다 심령의 변화를 우선시했다. 그는 기도운동, 전도운동을 전개하고 전도자를 양성했다. 그가 개발한 전도지 사영리 四靈理는 복음주의 신앙을 보여주는 표준전도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한국에서의 자유주의나 진보주의를 배격하고 한경직 정진경 목사 등과 더불어 복음주의 운동을 주도했고, 소위 민주민중운동, 진보주의운동의 와중에서도 한국교회를 건실한 복음주의교회로 세우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가 있었기에 그나마도 한국교회가 자유주의나 진보주의에 휩쓸리지 않고 복음주의적 가치를 고수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복음주의 협의회에 관여한 일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넷째, 반공, 반공주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그는 변혁의 시대, 4.19. 5.15. 그리고 10.26과 같은 민족적 위기와 변혁의 시기에 일관된 반공주의자로 처신했다. 그의 아버지가 6.25 동란중 공산주의자에 의해 지도섬(智島)의 삼한봉에서 죽임을 당했고, 그의 부인은 어린 딸을 남긴채 24세의 나이로 피살당했다. 자신도 부친과 그 자리에서 몰매를 맞고 사경에 이르렀으나 간신히 목숨을 건지는 등 가족의 비극을 통해 공산주의의 학정과 학살을 경험했다. 특히 625일부터 1017일까지 지도에서 좌익들에 의한 살육과 광란을 체험한 이후 공산주의 유물론은 기독교와 병립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는 일생동안 반공주의자로 살았다. 그는 남북을 가르는 38선을 영적 분계선으로 이해하여 유물론적인 무신론 공산주의와 유신론적인 기독교 신앙을 대칭적으로 이해했다. 공산주의 김일성 정권을 가장 악랄한 반신적(反神的) 집단으로 이해했다. 그가 박정희 정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점을 비판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는 반공주의야 말로 기독교 신앙수호를 위해 보다 중요한 가치로 인식했다. 이 점에 있어 한경직과 의견을 같이 했다. 김준곤 목사는 복음화운동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초라고 인식하고 복음 전파를 제일의 사명으로 간주했다. 사회현실의 개혁은 복음화운동을 통해 이룩될 수 있다고 보아 정치현실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해서도 부단히 경고하고, 한국사회에서 제기될 수 있는 좌파 이데올로기에 대해 경고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된 직후인 1976123일부터 1977112일까지 김준곤 목사는 전국 간사들을 소집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40일간의 금식기도회를 실시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의 운동에 대한 경고였다. 당시 그는 이렇게 설교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중국 지방을 순회하던 중 뉴스에서 사이공이 함락되었다는 보도를 듣고 그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6.25 전야 같은 비통한 심정으로 기도를 드리면서 무엇인가 몸으로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우선 돌아와서 간사들을 소집하고 그런 뜻을 전했더니 모든 감사들이 결의를 같이하고 나라와 주님을 위해서 순국과 순교를 각오까지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뜻에 정성껏 서명을 하고 제1차적으로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리면서 이것이 모든 가슴 속에 전달이 되어 기도운동이 모아져서 우리나라에 빛나는 복음국가를 건설하며 구국운동으로 극대화될 수 있기를 염원하는 뜻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구국기도회를 개최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구국기도회는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의 수호를 위한 간구였다. 보다 강력한 경고는 그가 소천 당하기 일년 전인 2008주의 길을 예비하라집회에서 행한 설교였다. 이때의 경고는 최근 여러 경로로 유통되고 있는데,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한국 교회는 무너진다.”는 내용이었다. 국보법이 폐지되면 광화문에 이순신 동상 대신 김일성 동상에 세워지고, 애국가 대신 김일성 찬가를 부르게 되고, 남한 좌익이 뭉쳐 좌익정권을 세워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도입하면 기독교회는 사라지게 된다는 경고였다. 자유통일이 아닌, 공산당이 인정되는 좌익정권에 의한 통일은 신앙의 자유를 유린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였다. 그는 세상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다고 했는데, 오늘의 한국 현실에 대한 예언자적 경고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는 공산주의와의 싸움을 단순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보지 않고 영적 싸움으로 인식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세계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양대 진영으로 갈라져 있었습니다. 모든 사건들과 모든 문제들이 그 갈등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데올로기의 개념이 희박해 져가고 있습니다. 세계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화해와 협력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는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그 이데올로기는 신학적인 것입니다. 신학적인 것은 곧 영적인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묵시록의 붉은 용으로 상징되는 악마와 성령의 싸움이 바로 이 싸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싸움의 워털루와 같은 결전장이 바로 한국이 될 것입니다. 휴전선은 영적 분계선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영적전쟁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민족복음화에 대한 이상과 함께 공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오직 복음밖에 없다는 확신으로 살았다. 그가 국가적 위기 때마다 금식하며 기도했던 이유는 국가적 위기는 물론이지만 공산주의는 단순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악한 영의 역사로 보아 영적 싸움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영적 혁명을 통해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정치적 혁명을 갈망하지 않고 영적 변혁, 예수복음을 통한 혁명을 주창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인류 최후의 단 한 가지 남아 있는 영의 혁명을 일으켜야 하겠습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일으켰고, 프랑스는 정치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구 소령은 공산혁명을 일으켰습니다. 미국은 시민혁명이 일어난 진원지입니다. 중국은 문화혁명을 한 바 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일으킬 인류 최후의 혁명은 영의 혁명입니다.”

 

이상에서 예시된 바처럼 김준곤 목사는 한경직 목사와 더불어 이 시대의 대표적인 기독교 반공주의자였고 우리나라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 형성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어떤 점에서 한국교회, 특히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가 남긴 가장 중요한 공헌 중 하나는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보루가 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건실한 통일운동의 모델을 제시했다. 통일을 위한 그의 노력은 민족지상주의에 기초한 우리민족끼리라는 식의 좌파적 통일운동이 아니었다. 그는 소위 내적적 접근이라는 방식의 친북적이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는 예수사랑에 근거한 통일운동을 지향했다. 그가 1990년대 말부터 시행한 통일식량은행, 대학생 통일 봉사단,젖염소 보내기 운동 등은 따지고 보면 이데올로기를 배제한 인도주의에 기초한 사랑이었고, 그것은 민족 화해의 시도이자 궁극적으로 민족복화운동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통일운동은 민족복음화 운동의 외연이었다. 그는 국토의 통일보다 사랑의 통일을 우선시했는데 그것은 굶주린 주민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이었다. 그것을 사랑의 통일운동으로 보았다. 그는 반공주의를 포기하지 않았으나 그 체제 하의 주린 백성의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젖염소 보내기 운동을 비롯한 통일노력은 따지고 보면 민족복음화를 위한 준비였다.

 

종합적으로 고찰할 때, 김준곤 목사는 복음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청년 대학생들을 복음화하고 이를 기초로 민족복음화라는 거룩한 비전으로 일생을 사신 한국교회의 영적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김준곤 목사에게는 한경직 목사에게서 드러나는 기독교건국론 혹은 이신설국(以信設國)이나 신앙입국(信仰立國)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한경직은 해방과 분단 상황에서 기독교 건국론을 제시했다면, 김준곤은 분단 이후의 상황, 곧 민족 통일을 예견하면서 민족복음화를 통한 기독교 건국론을 제시했다고 판단된다. (다수 각주는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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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01 [16:12]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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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곤 목사] [예수칼럼] 무명 전도자 베드로 김준곤 2019/11/01/
[김준곤 목사] [김준곤 목사의 잠언]나를 부르는 음성 김준곤 2019/11/01/
[김준곤 목사] [김준곤 목사의 잠언]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 김준곤 2019/11/01/
[김준곤 목사] [김준곤 목사의 잠언]민족 복음화의 꿈 김준곤 2019/11/01/
[김준곤 목사] [김준곤 목사 어록 전시 ]영원한 소년 김현성 2019/10/31/
[김준곤 목사] [김준곤 목사의 잠언] 참 자유는… 김준곤 2019/10/26/
[김준곤 목사] [김준곤 목사 어록전시회]사랑은 울릴 때까지… 김다은 2019/10/25/
[김준곤 목사] [임동규 작가의 김준곤 목사 어록전시회]십자가는… 김다은 2019/10/25/
[김준곤 목사] 유성(遊星) 김준곤 목사님의 설교: 역사적 분석과 그 화두(話頭) 김정우 2019/09/28/
[김준곤 목사] 김준곤 목사 어록 전시회 "내 생애에 일어난 최대사건은 그리스도 사건" 김현성 2019/10/23/
[김준곤 목사] [김준곤 설교]겸허한 인간자세(마11:29) 김준곤 2019/10/23/
[김준곤 목사] [예수칼럼] 서울 성시화 운동을 시작하며 김준곤 2019/10/19/
[김준곤 목사] [예수칼럼] 정치 스포츠 금메달 김준곤 2019/10/16/
[김준곤 목사] [김준곤 목사의 잠언]십자가 김준곤 2019/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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