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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0.22 [07:01]
[김준곤 설교] 한 부자청년의 신앙에서
다시 듣고 싶은 김준곤 목사 메시지
 
김준곤

마가복음 10:17~22

▲ 1984년 6월 5일부터 11일까지 열린 '84세계기도대성회에서 김준곤 목사가 설교하고 있다.     ©뉴스파워



이 청년은 사회 표준으로 보아 어느 시대에서나 모범적인 행복한 청년의 유형이었습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문벌도 높고, 돈도 많고, 그 지방에서는 가장 높은 벼슬에다 세도 있는 이 청년은 십계명을 자신 있게 지켰다고 주님 앞에 공언할 만큼(주님도 이를 시인하고 사랑하사 그릴 보심, 21절) 부자 청년치고는 기특하리만치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동년배인 청년 예수 앞에 달려와서 꿇어 앉아(막 10:17) 영생의 도를 물을 만큼 겸허하고 진지한 인간됨과 경건한 구약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러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22절)는 주님의 부르심에 그는 돈이 많은 고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막 10:22).

이 부자 청년의 뒷모습은 버려야 될 줄 알면서도 기어이 버리지 봇하고 그리스도를 등지고 영원을  상실한 자의 처량한 뒷모습의 대표객인 것입니다.

주를 따르려는 사람은 전체냐, 제로냐의 사량의 헌신의 기로에 섭니다. 마음의 우상은 사람마다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맞서는 그 무엇도 우상입니다. 대개는 나 자신이 내 어떤 소유보다 최후까지 대용품의 신(神)이고자 합니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배옵시다.

행복의 신(神) 신앙
  이 부자 청년의 인생은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부(富), 권(權), 건강, 미모의 처, 젊음, 품성미, 유덕함, 거기다 십계명을 다 지킨 당시 표준으로 보아 이상적인 종교 생활, 모두 신(神)의 축복이었습니다.

이런 현금적(現金的)인 직접 신(神)은 도처에 있습니다. 성황당의 신도, 무당의 신도 인간의 수보다 더 많은 신들이 모두 이런 신이었으며, 1천 6백만의 일본인 신자를 열광시키는 창가학회도 행복과 성공을 약속하는 종교입니다. 이런 신앙은 공리적인 것입니다. 전(前) 인격적 신앙이며 십자가 이전의 신앙이며 미열한 것입니다. 시련이 왔을 때는 무너지고 마는 모래 위의 집입니다.

피 묻은 상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일이 없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만날 때 폭풍도, 지진도, 천둥도, 불길도 지나간 다음 검은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세미한 음성 속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단테는 연옥을 거쳤습니다. 존 번연은 12년 감옥살이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으며, 도스토예프스키는〈시베리아의 유형과 죽음의 집〉의 추억에서, 요나는 고래 뱃속 죽음의 해저에서, 호세아 선지는 애정의 배신과 상실에서, 예레미야는 조국의 멸망과 쓰디쓴 예언과 처자를 가질 수도 없고 기적을 행하는 것도 허용 안 되는 고독한 비애 속에서, 욥은 고난의 극한애서, 인생의 깊은 심연에서 신음처럼 부르짖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에겐 그런 경험은 모두 닫혀진 영역이었습니다. 어느 비참한 인생 노트에서 읽은 구절이 생각납니다.

“춥고 눈 오는 밤에 배가 고파서 온 식구가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인생도 하나님도 논하지 말지어다.”

그렇습니다. 인생 수난의 상혼과 깊이가 없는 사람은 어딘가 천박합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상과 대웅전의 금불상을 비교해 봅니다. 부처의 평화로운 얼굴은 과연 도통한 얼굴입니다. 거기는 죄책도 고통도 번민도 죽음도 초월한 어느 피안 저 멀리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같은 이 무표정에는 이미 어느 물음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쳐다보면 스르르 졸음이라도 올 것 같은 무(無)로 통하는 얼굴입니다.

그와 반대로 주님의 가상(嘉像)은 피와 땀과 침이 범벅이 되고 인류의 모든 고통과 죄와 저주와 형벌과 죽음의 전부를 합한 것을 한 몸에 지니고 가장 어둡고 부정적인 곳에서 잃어버린 ‘엘리’를 부를 때 하늘은 어두워지고 땅이 떨고 그의 심장은 터져 원수들은 조롱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담당하였으며(사 53:4)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또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사 53:5), 그가 죽음은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 입니다(사 53:8)

우리는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작은 그리스도로서 누군가의 허물을 대신하고 누군가를 위하여 대신 고통을 받아 보는 그리스도의 상처를 지니는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 이 부자 청년의 인생에는 아픈 곳이 없습니다. 그의 자리는 어느 성벽 안 특수 계층 안전지대의 폐쇄 속에 사는 편협한 정적(靜的) 엘리트 속에 있습니다. 그의 인생의 선율 속에는 지성의 엘레지가 없습니다.

그는 회색의 선인이었습니다.
  그의 손은 희지도 검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생애는 안일하고 합니다. 덥지도 차지도 못합니다. 혹자도 적자도 아닌 ‘제로’ 인생,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습니다. 타협과 적응을 신조로 삼았습니다. 그는 도둑질도 안했고, 거짓말도 안하고, 간음도 안하고, 살인도 안하고 주일날 일도 안하고 술도 안마시고 나쁜 곳도 안 가고 나쁜 일도 안합니다. 모험도 안하고 고발도 안합니다. 결국 안하는 인생입니다 

그런가하면 희생하는 일이나 사랑하는 일이나, 알면서 속아주고 만이 주고 적게 받는 일, 천국에 흑자(黑字)내는 일은 도무지 없습니다. 받을 것도 줄 것도 없고, 나 벌어 나 먹고 힘써 공부해서 이공대를 나와 미국 가서 Ph-D 학위 받고 이대의 미인과 결혼하여 에어컨디션, 백인 아파트에, 신형 자동차… 두 사람 남녀가 밀폐된 동굴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어느 중성 지대의 중성 인생, 제로 지대의 ‘제로’ 인생들, ‘O점하의 새끼들’이 아니라, ‘제로’ 지대의 인테리요 교양인이요 문화인입니다. 그는 자신과 남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합니다.

여기 현대 도시의 지성인의 한 유형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런 역겨운 사람을 토해 버리겠다고(계 3:16)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극단의 악인을 생포할 수 있어도 이런 회색의 선인을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단테의 지옥에는 악마도 흥미 없어 하고, 하나님도 토하고 싶어 하는, 천국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옥도 못 되는 곳,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종족이 사는 지대가 있습니다. ‘한 발은 천국에 한 발은 세상에 오늘은 그리스도인 내일은 불교인’ 이런 신앙의 보헤미안과 창녀들이 크리스천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 속에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의 행복, 그의 덕, 그의 신앙은 누구에겐가 부담을 줍니다. 그의 단란하고 행복에 겨운 부잣집 문전에는 항상 문둥이 거지 나사로가 도사리고 있었어도 식탁의 부스러기를 던져 주는 것으로 양심이 평안할 수 있었습니다. 그 집 담장 밑의 품팔이 지게꾼들은 그 집 고기 굽는 냄새 때문에 굶주림과 고통의 설움을 더 짙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쌍것들, 즉 세리나 창녀 같은 사람들 덕택으로 그의 덕과 신앙이 돋보일 수 있었옵니다. 그는 바리새와는 다릅니다. 바리새는 양성화된 심판차이지만 그는 속으로 위압을 가합니다. 소외된 자를 끌어들이고 낮은 자를 끌어올리는 것이 크리스천이라면 이 인생과 신앙의 부자는 자기의 높이와 낮은 자의 거리를 정확하게 재고 그 거리를 끝까지 고수합니다.

어느 시골 교회에서 일어난 좋은 예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는 가난하지만 착하고 경건 되고 열심 있는 B라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파마도 화장도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항상 말이 적고 깊은 상처를 지닌 얼굴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현모양처였습니다.

목사님은 그녀의 과거에 어쩌다 잘못되어 한때 창녀 생활을 했었다는 고백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했던 과거를 씻고 참회와 재생의 몸부림 속에 복된 은총의 생활을 하는 이 부인에게 새로 집사 직을 맡기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네 사람의 그 지방 양가(良家)의 주부 집사님들이 찾아와서 사표를 냈습니다. 창녀였던 여자와 동열(同列)에서 일할 수 없다는 것 입니다. 그들의 무흠한 출신과 신역(信歷)은 선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덕은 연약한 한 마리 잃은 양의 과거의 상처에 한 개의 돌을 던짐으로써만 존립할 수 있는 기생충적 덕입니다. 무엇인가를 부정함으로 존재의 에네르기를 찾는 행복과 덕과 신앙의 특수계층은 회색 지대에서 살고 있어 눈에 띄지 않아 안전합니다.

  
그의 신앙은 인격적 차원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영생을 재산이나 지위나 학위나 훈장처럼 획득하는 무엇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진 소유 목록 중의 한 소유로서 소유권 등기를 할 수만 있다면, 그 재산의 얼마쯤 희사할 용의가 있고 도둑질도 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소유가 아니라 순수 소여(所與)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획득하거나 살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가치의 중심인 나 자신도 내 생애와 시간도 내 마음도, 이 심장과 눈도, 저 태양과 공기와 대지와 계절도,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처자와 더욱이 주님과 영생도 값없이 순수 은총으로 주신 것입니다.

영생은 사물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의 새로운 관계입니다. 그 안에 내 새로운 관계입니다. 그 안에 내 새 존재가 있고 영생이 있는 것이지(요일 5:1l ; 고후 5:17) 우리 소유로 법원 등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운명의 분기점에서 결단의 기회를 거부했습니다.

이 부자 청년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다 버리고 따라야 할 줄 알면서도 돈이 많은 고로 슬퍼하고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도처에서 크고 작은 이런 영원한 운명의 분기점에 서게 됩니다. 그리스도냐, 그 무엇이냐의 양자 태일의 위기, 아의(我意)와 신의(神意)가 맞서는 순간들, 모두 아담과 이브의 에덴의 원점에서 생명과냐, 선악과냐의 분수령에 섭니다.

나폴레옹의 승전의 비결은 최후의 5분간의 결단에 있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전쟁의 결정적인 작전의 순간에 반쯤 내려앉은 위험한 다리를 건너야 했습니다. 그는 다리 앞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몸소 다리 한복판으로 뛰어가 지휘봉을 높이 들고 진군 명령을 내렸습니다. 주력 부대가 도교(獲橋)를 끝내고 싸움은 승리였습니다. 최후의 5분간 아니 1분간의 결단이 승패를 결정합니다.

백두산 천지에 뜬 나뭇잎 하나가 사소한 각도차로 동해로 흐를 수도 있고 서해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소한 인생의 각도 차의 원점에서 항상 눈을 뽑고 손을 잘라 버리는 용단을 내려 이 나폴레옹의 1분간의 결단의 다리를 건너야 하겠습니다.

부자 청년은 이 1분간의 결단의 원점에서 영원히 그리스도를 등지고 떠나갔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여, 십자군들이여, 나사렛의 형제들이여, 다 버리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대열에 섭시다.


*이 글은 김준곤 목사가 <CCC편지> 1969년 2월 16일호에 기고한 것입니다.

*<예수칼럼>으로 국내외의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유성 김준곤 목사의 진정한 영적 힘은 바로 그의 설교에 있다. 이미 엑스플로 '74, '80 세계복음화대성회 등을 주도하면서 민족 앞에 불을 토한 그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84년의 인생을 살면서 그의 삶의 유일한 소망은 민족복음화, 영혼 구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십자가 사랑을 설교한 사람이다. 어떻게 해서 진정한 주님과 만남을 통해 변화되고 확신 있는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민족복음화의 환상이 잉태되었는지를 설교를 통해 알 수 있다. 그의 설교는 목회자와 평신도, 젊은 지성인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감동과 영감을 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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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05 [07:09]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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