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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0.22 [07:01]
"김준곤 목사님은 상흔의 설교자"
김준곤 목사 10주기 추모학술발표회...김명혁, 김정우, 심상법, 이상규, 박응규 교수 발표
 
김철영

  

한국CCC 설립자 고 김준곤 목사 10주기 추모 학술발표회가 지난 28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부암동 CCC 본부 브라잇채플에서 열렸다.

▲ 김준곤 목사 10주기 추모 학술포럼. 좌측부터 심상법 교수, 이상규 교수, 주도홍 교수, 김명혁 목사, 김정우 교수, 박응규 교수     ©뉴스파워

 

주도홍 교수(전 백석대 부총장)의 사회자로 진행된 이날 발표회는 김명혁 목사(전 합동신학교 교장,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역임), 김정우 교수(한국신학정보연구원 원장, 전 총신대 신대원 구약학 교수), 심상법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 신약학), 이상규 교수(고신대 교회사, 백석대 석좌교수), 박응규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대학원장, 교회사)가 발제자로 나서 김준곤 목사의 사역과 설교, 한국 교회사에서 그가 갖는 의미에 대해 심도 있게 조명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고맙고 그리운 김준곤 목사님의 소천 10 주기를 맞으면서라는 주제 발표를 한 김명혁 목사는 연령적으로는 부족한 사람의 12년 선배 되시지만 신앙과 삶과 사역의 측면에서는 120여 년 이상 선배 되시는 김준곤 목사님의 소천 10 주기를 맞아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배 목사님의 신앙과 삶과 사역을 되돌아보면서 다시금 사랑과 존경과 고마움과 감사와 그리움의 마음을 지니게 된다.”고 추모했다.

 

김 목사는 “1980년도 합동교단이 두 개 세 개로 갈라질 때 합동추진위원회를 만들어 합동을 추진하는 일을 했는데 어려운 그 때 김준곤 목사님께서 앞장을 서셨고 박윤선 목사님과 제가 함께 그 일을 추진했었다.”“1980812일부터 15일까지 여의도 광장 등에서 나는 찾았네라는 주제로 ‘80 세계복음화 대성회가 개최되었는데 김준곤 목사님께서 준비위원장을 맡아 탁월한 지도력으로 전도대회를 준비하고 진행했으며 10만 선교사 파송에 대한 놀라운 메시지를 전하셨다.“고 말했다.

 

▲ 김준곤 목사 10주기 추모 학술포럼에서 김명혁 목사가 발제하고 있다.     ©뉴스파워

이어 저는 그 때 전도대회에 참석하며 주 강사로 와서 메시지를 전한 독일 튜빙겐 대학교의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의 통역을 맡았다.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은 엑스폴로 74대회 때보다 더 놀라운 모임이다. 한 지도자의 역량이 얼마나 중요한가, 진실로 지도자의 역량이 없다면 이렇게 많은 사람의 영혼을 주님께 인도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고 회고했다.

 

또한 “1981년부터 지금까지 김준곤 목사님께서는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면서 저를 많이 격려해주시고 도와주셨다. 1981년부터 85년까지는 부회장으로, 1988년부터 89년까지는 회장으로, 1990년부터 현재까지는 자문위원으로 계시면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도해 주셨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198466일부터 9일까지 세계교회 기도성회가 영락교회와 뚝섬에서 개최되어 70여 개국에서 제임스 오르 박사 등 저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다수 참석했는데 그 때 김준곤 목사님께서 준비위원장을 맡아 기도성회를 준비하고 진행했다.”저는 진행의 실무를 맡은 일이 있었다. 목사님께서는 기도와 금식의 사람으로 조용한 가운데 국내외에 큰 영향력을 끼치셨다.”고 회고했다.

 

김 목사는 제가 합동신학교의 책임을 맡고 있을 때 김준곤 목사님을 학교의 이사님으로 모시고 신학교의 행정과 발전에 대해 지도와 격려를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을 전후하여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출신들이 다수 합동신학교에 와서 공부를 하고 목회 및 선교사역에 헌신하게 되었다.”북한 동포들의 어려운 식량난을 돕기 위해 대학생선교회를 중심으로 젖염소 보내기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셨다.”고 밝혔다.

▲ 김준곤 목사 10주기 추모 학술포럼에서 김정우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뉴스파워

 

 김준곤 목사님의 설교: 역사적 분석과 그 화두(話頭)”를 주제로 발표한 김정우 교수는 목사님의 설교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했던 설교자들의 그 어떤 설교에서도 느낄 수 없는 독특한 향기’(香氣)가 있다.“그 향기는 어디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그것은 아마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이었던 6.25 동란 중, 목사님이 직접 겪은 극한적 가족의 비극을 통해서 나온 것일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딸 신희를 먼저 주님께 보내는 고통을 겪고 용해한 정신 세계의 작품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목사님의 설교는 독창적이고 고유하다(originality).”우리에게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나 친숙하여 그 설교가 그 설교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교회의 역사에서 목사님의 설교 같은 설교는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고 평가했다.

 

이어 목사님의 설교는 루터나 칼빈의 설교처럼 신학적, 주해적이지 않고, 스펄전의 설교처럼 목회적이지 않으며, 역사상 이런 작품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독자적인 사색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언어의 세계를 만들어낸다.”그래서 목사님의 설교는 항상 생생하게 살아 있는 언어, 정선된 언어, 체화된 언어, 영혼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언어의 은하수를 만든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또한 목사님의 설교는 그림을 보듯이 선명하다(image). ”고 평가하는 한편 목사님의 설교는 시어(詩語)가 운()을 이루며 아름답다(poetic).”고 분석했다.

 

김 교수는 목사님의 설교는 전통적인 제목설교나 강해설교나 주해설교가 아니다.”무엇보다도 목사님은 문학적, 사상적, 철학적인 설교를 하시면서, 현대 정신과 소통하고 대화하며 주로 맞서 대결하면서 복음을 전하신다.”고 분석했다.

 

특히 목사님의 설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장르는 스토리텔링’(story telling)내러티브 설교’(narrative preaching)”라며 목사님의 스토리텔링의 내러티브 설교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탁월한 인물화’(characterization)이다. 목사님은 복음서의 중심 인물들인 베드로, 젊은 부자 청년, 막달라 마리아 등의 모습을 너무나 멋지게 그려내고 있다.”고 분석했다.

 

▲ 김준곤 목사 10주기 추모 학술포럼에서 심상법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뉴스파워

 

심상법 교수는 김준곤 목사의 영성과 설교 세계라는 주제로 한 발제에서 김준곤 목사님의 설교는 민족의 한과 비극과 상흔 속에 잉태된 설교라고 평가하고 그의 삶의 궤적과 같이 하면서 기도와 말씀 가운데 영글어져 갔다.”고 말했다.

 

또한 유성의 설교는 그의 영성과 신학의 반영이며 열매이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가 겪은 민족적-가족적-실존적 상흔이기도 하다.”이런 점에서 유성은 확실히 상흔의 설교자이었다. 유성의 설교의 내용과 뼈대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독서생활과 기도생활은 그의 설교가 만들어지는 가마솥과 같다.”고 분석했다.

 

특히 죽음(실존)의 제로점에서 만났던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의 복음이 유성의 신앙과 삶을 극적으로 인도하였고, 유성은 이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어떤 기회(?)도 마다하지 않았다. ”고 말했다.

 

심 교수는 무엇보다도 유성은 6.25의 민족적 비극과 참상을 고스란히 몸으로 겪으면서 반공의 이념과 함께 복음운동, 기도운동, 그리고 성령운동을 통한 민족복음화의 비전(37장과 욜 2장과 신 28장과 대하 7:14)속에 민족통일과 번영을 꿈꾼다(‘민족 복음화의 환상과 비전’).”그러므로 유성은 독재정권으로 억압당한 민중의 삶에 대한 의분이나 사회정의의 실현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의 복음을 통한 거룩한 민족혁명을 꿈꾼다.”고 밝혔다.

 

이어 유성은 한스러운 눈빛을 가진 한 시대의 눈물의 선지자였으며,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를 위해 외롭게 선 비목 같은 선구자였을 뿐 아니라 예수에 미치고,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에 미친 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심 교수는 확실히 유성의 설교는 사도들이 외친 십자가와 부활이 자신의 선포의 케리그마(Kerygma)였으며, 누구보다도 유성의 말씀과 기도의 생활은 그의 영성과 설교를 새롭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 생수며 저수지며 용광로며 모판을 형성하였고, 성령은 유성의 영성의 길과 설교세계를 인도하는 인도자일 뿐 아니라 뜨겁게 타오르게 하고 넘쳐흐르게 하는 불길이며 물길이었으며, 능력과 지혜를 주는 원천이었다.”고 평가했다.

 

심 교수는 무엇보다도 유성에게 백문일답인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영원한 첫사랑이며, 변치 않는 참 좋은 친구며, 그의 구주이셨다.”하나님은 그에게 가장 귀하고 좋은 것들(아내와 부친과 딸)을 그의 인생으로부터 앗아갔지만 그 대신 당신의 하나뿐인 독생자를 유성이 평생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연모하는 대상으로 주시고, 또한 그와 함께 영원한 소망을 주셨을 뿐 아니라 민족복음화와 세계선교의 꿈을 주셨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점은 그처럼 잔혹한 민족사와 가족사를 겪었지만 유성의 메시지는 복수보다는 용서와 관용, 미움보다는 사랑을 전하며 실천하려고 애쓰고 몸부림쳤다. 때론 교회를 향한 질타에도 언제나 사랑의 감정이 스며있었다.”언제보아도 유성의 한스러운 애잔한 눈빛은 그리움과 외로움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유성은 주님과의 순애보를 통하여 그것들을 승화시켜나갔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 더 나은 모습으로 바꾸어 갔다. 확실히 유성은 그의 인생의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진 사람’(고후 4:7)이었다.”고 평가했다.

▲ 김준곤 목사 10주기 추모 학술포럼에서 이상규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뉴스파워

 

한국교회사에서 본 김준곤 목사를 주제로 발표한 이상규 교수는 한국의 청년대학생 전도와 한국교회 부흥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그가 1958년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창립한 일은 한국에서의 청년대학생 복음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결과적으로 한국교회 성장에 기여하였다. 대학생선교회를 거쳐 간 연인원은 50만 정도로 파악되는데, 이는 한국의 군 병력과 맞먹는 숫자라고 밝혔다. 이어 적어도 1990년대 중반까지 한국교회가 젊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청년대학생 전도의 결과였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또한 김준곤 목사님은 민족 복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했다.”김준곤 목사의 신념체계, 행동양식을 결정한 중요한 삶의 지향점은 민족복음화였다.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주장은 그의 민족복음화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이런 주장 아래 모이게 하소서, 배우게 하소서, 전하게 하소서라고 외치며 엑스폴로 74를 이끌었고, 그 정신은 민족복음화를 위한 것이었고, 그 결실은 한국교회의 수적인 성장이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김준곤 목사님은 한국에서의 복음주의 운동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복음주의자였다. 그가 신앙동지회 51’의 한 사람으로 조선신학교를 나와 고려신학교를 거쳐 박형룡의 장로교신학교에서 수학한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그리고 그의 일생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듯이 그는 철저한 복음주의자였다.”고 말했다.

 

특히 그가 박정희 전두환 등 군사정권 하에서 살았지만 정치적 변혁보다 복음에 의한 변혁을 우선시했고, 제도의 개선보다 심령의 변화를 우선시했다.”그는 기도운동, 전도운동을 전개하고 전도자를 양성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는 한국에서의 자유주의나 진보주의를 배격하고 한경직 정진경 목사 등과 더불어 복음주의 운동을 주도했고, 소위 민주민중운동, 진보주의운동의 와중에서도 한국교회를 건실한 복음주의교회로 세우는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그가 있었기에 그나마도 한국교회가 자유주의나 진보주의에 휩쓸리지 않고 복음주의적 가치를 고수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또 김준곤 목사님은 반공, 반공주의 형성에 기여하였다.”그는 변혁의 시대, 4.19. 5.15. 그리고 10.26과 같은 민족적 위기와 변혁의 시기에 일관된 반공주의자로 처신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그가 박정희 정권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점을 비판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는 반공주의야 말로 기독교 신앙수호를 위해 보다 중요한 가치로 인식했다. 이 점에 있어 한경직과 의견을 같이 했다.”김준곤 목사님은 복음화운동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초라고 인식하고 복음 전파를 제일의 사명으로 간주했다. 사회현실의 개혁은 복음화운동을 통해 이룩될 수 있다고 보아 정치현실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김준곤 목사님은 민족복음화에 대한 이상과 함께 공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오직 복음밖에 없다는 확신으로 살았다.”그가 국가적 위기 때마다 금식하며 기도했던 이유는 국가적 위기는 물론이지만 공산주의는 단순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악한 영의 역사로 보아 영적 싸움의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김준곤 목사님은 건실한 통일운동의 모델을 제시했다.”통일을 위한 그의 노력은 민족지상주의에 기초한 우리민족끼리라는 식의 좌파적 통일운동이 아니었다. 그는 소위 내적적 접근이라는 방식의 친북적이지도 않았다. 도리어 그는 예수사랑에 근거한 통일운동을 지향했다.”고 밝혔다.

 

또한 김준곤 목사가 1990년대 말부터 시행한 통일식량은행, 대학생 통일 봉사단,젖염소 보내기 운동 등은 따지고 보면 이데올로기를 배제한 인도주의에 기초한 사랑이었고, 그것은 민족 화해의 시도이자 궁극적으로 민족복화운동이었다.”말하자면 그의 통일운동은 민족복음화 운동의 외연이었다. 그는 국토의 통일보다 사랑의 통일을 우선시했는데 그것은 굶주린 주민에 대한 인도적인 지원이었다. 그것을 사랑의 통일운동으로 보았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는 반공주의를 포기하지 않았으나 그 체제 하의 주린 백성의 현실적인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젖염소 보내기 운동을 비롯한 통일노력은 따지고 보면 민족복음화를 위한 준비였다.”고 평가했다.

▲ 김준곤 목사 10주기 추모 학술포럼에서 박응규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뉴스파워

 

박응규 교수는 “‘김준곤 목사의 민족복음화운동과 역사신학적 의미라는 주제 발표에서 시대상황에 적합한 대학생 선교운동을 통한 민족복음화운동을 견인했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설립한 이래, 시대별로 청년들의 문화와 의식의 특징들을 파악하면서 영적인 대안을 모색해 나갔다.”고 평가했다.

 

이어 김준곤 목사님은 1979년에 선포한 한 메시지를 통해서, 그는 1960년대는 방향성을 잃고 반항하고 증오하는 분노의 시대라고 할 수 있고, 1970년대는 소위 무()의 시대로, 무관심, 무기력, 무도덕, 무신론, 무행동, 무책임, 무이상과 같은 모든 것에 무가 붙은 시대였다고 진단했다.”그리고 다가오는 1980년대는 평준화된 시대, 모든 것이 중성화 되고 상대화된 시대의 물결이 더 심화될 것으로 내다보았다.”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그의 영향력은 수많은 대학생들에게 민족복음화에 대한 확고한 비전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일성에 대한 열정적 신앙을 품게 하였다.”그리고 한국 CCC의 중심된 구호가 된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구호를 그들의 마음에 새기며 국가적 구원관을 형성케 하였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그런 면에서, 김준곤 목사야말로 한국의 지성인에게, 특히 대학생들에게 지난 50년 동안 한국 캠퍼스와 복음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설교가요 기독교 사상가라는 점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고 평가했다.

 

박 교수는 또 보수적 복음주의 입각한 시대적 사명을 일깨운 한() 민족의 목사라고 평가하면서 그는 한국교회사에 중요한 분수령이었던 1950년대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에 맞서 정통 보수신앙을 사수한 인물 중의 한 분이라고 말했다.

 

특히 해방 후, 한국장로교회의 목회자 양성을 위한 유일한 신학교였던 조선신학교가 지향했던 자유주의 신학의 확산을 막기 위해 51인의 신앙동지회를 구성하여 박형룡 박사로 하여금 귀국하여 한국교회를 위한 신학적 행보를 시작하는 데에도 일조했다.”또한 미국 유학시절 복음주의 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빌리 그래함과 빌 브라잇 등의 복음주의 신학에 근거한 전도운동에 동참하여 초교파적 연합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도 보수적 신앙관을 유지하면서 한국의 CCC 설립과 사역 그리고 민족복음화운동을 전개해 나갔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마지막으로 김준곤 목사님의 민족복음화운동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문화명령(1:28)과 선교전도대사명(24:18-20)을 한국교회사 속에서 가장 잘 구현한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고 평가했다.

▲ 고 김준곤 목사 10주기 추모예배에서박성민 목사와 김윤희 박사     ©CCC 진지훈

 

▲ 고 김준곤 목사 10주기 추모예배에 참석한 CCC 학생들     ©CCC 진지훈

 

▲ 고 김준곤 목사 10주기 추모 학술발표회 후 기념촬영     ©CCC 진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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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10/02 [00:32]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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