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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5.24 [06:03]
말씀과 기도의 사람 박윤선 목사
박병식 목사(송파제일교회 원로)...특별대담 원고
 
박병식

                                            

 

박 윤선은 19343월에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부산에서 일본 고베로 가서 기선 지지부마루 호를 타고 미국으로 향하였다. 17일간의 항해 동안 그는 요한 계시록을 암송하였다. 지루한 시간이 아니라 단맛이 나는 여행이었다. 그는 말씀을 암송하지만 그 암송한 말씀이 그의 기도가 되었다. 그의 평생을 지속해 온 말씀 기도의 시간이었다. 샌프랜시스코에 도착할 때까지 요한 계시록 18장까지 암송하였다. 그 곳에서 필라델피아 까지 한 주간을 달리는 그레이하운드 버스 안에서 그는 계속 요한 계시록을 암송하면서 말씀 기도를 하였다.

▲ 박병식 목사     ©뉴스파워



당시 신학교에는 밴틸, 머레이, 알리스 등의 개혁주의 저명한 신학자들이 있었다. 신약학자인 밴틸 박사에게서 박 윤선은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주경 신학을 배웠다. 박 윤선이 수학하는 동안 그는 한 부선을 만났다. 두 사람은 같은 반에서 급우로 만나 이후 50년 이상 서로에게 귀한 신앙 동지가 되었다. 그는 박 윤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박 박사를 매우 특별한 친구로 생각하여 왔으며, 박 박사께서 신학적 문제들을 깊이 이해함에 있어서 깊은 통찰력과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 박 박사는 이미 영어, 헬라어, 히브리어에 능통했으며, 영어 강의를 능숙하게 이해하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매우 열심히 수학하면서 놀랍게도 그는 틈틈이 화란어를 자습하였다. 삼대 칼빈주의 신학자 중 카이퍼와 바빙크가 화란 사람이므로 그들의 신학 체계를 깊이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화란어를 익힌 후 그는 화란어 주석과 교리학을 많이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주석에는 카이퍼, 바빙크, 크로솨이데, 크레다너스, 스킬더, 리델보스 같은 화란 학자들의 이름이 다수 나온다. 박 윤선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이미 이들의 저서들을 화란어로 읽고 이해하고 있었다.

귀국후 박윤선은 평양신학교에서 시간 강사로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강의하였다. 1938년 장로회 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이에 반대한 주기철 한상동 주남선 황철도 이인재 등 70여명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평양신학교는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학교를 폐교하였다.

만주 봉천의 교포들이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박형룡과 박윤선을 초빙하였다. 박윤선은 1940년 봉천으로 가서 박형룡과 함께 봉천신학교를 설립하였다. 50명에서 70명까지 입학한 학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말씀을 전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봉천에 까지 미쳐 신학교를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해방 이후 박윤선은 한상동을 만나 부산으로 가서 고려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박윤선은 자신의 삶을 다 드리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고려신학교를 위해 헌신하였다. 후에 교회간의 소송건과 주일 성수건 등으로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박윤선은 1963년부터 1980년까지 총신대학교에서 신학 강의에 전념하였다. 그가 남긴 공헌은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시국의 어려움 속에서 겪는 학내 소요로 박윤선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다가 총신대를 떠나게 되었다.

학내 소요로 학교를 떠난 일부 교수들과 수백 명의 학생들의 간청으로 박윤선은 합동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후 그는 1988년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세상을 떠나가기까지 자신의 남은 삶을 다 바치는 헌신을 하였다.

박윤선은 신학자이면서 동시에 성경 주석가였다. 그의 성경 주석은 일생에 걸친 그의 사명이었다. 그는 총회 표준 성경 주석에 참여하여 1938년 고린도후서 주석을 발간하였다. 1943년에는 만주 안산에서 요한계시록 주석을 탈고하였다. 이 주석 사역은 그의 일생 동안 계속되었다. 그는 계시 의존 사색을 고수하면서 오직 성경에만 몰두하는 모습으로 성경을 주석하였다. 때로는 자신이 해답을 얻지 못하는 성경 구절 앞에서는 몇 시간씩 기도함으로그 해답을 찾기도 하였다. 마침내 1979년에 성경 66권 주석이 완성되어 출판되었다. 박윤선의 성경 주석이 한국 교회에 끼친 영향은 참으로 지대하였다.

박윤선은 목회자였다. 평양 숭전대에서 공부하는 4년 동안 박윤선은 모란봉 너머 가현교회에서 목회하였다.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하였고 성도들의 가정들을 찾아 심방하였다. 해방 전 만주에 있는 동안 우지황 교회와 배자상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해방 후에는 평북 철산에 있는 장평 교회에서 목회하였다. 진해에서 신학 강의를 하는 동안 진해 경화동 교회에서 설교 목사로 사역하였다. 서울에 올라온 후에는 동산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였다. 이후에는 상도동에서 한성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였고, 그 다음에는 장안 교회를 개척하여 후에 화평교회와 합동하였다. 그의 평생은 교회를 사랑하고 목회자로서 자신의 삶을 다하였다. 그는 큰 소리로 진지하게 열과 성을 쏟으며 평생 설교하였다. 박윤선은 달변가이거나 웅변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설교에는 언제나 능력이 있었고 힘이 있었다. 아무런 수식이 없는데도 감동을 주었다. 강하게 책망하여도 설교를 듣는 이들의 마음에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자신을 높이거나 자랑하는 말을 그의 설교에서는 언제나 들을 수가 없었다. 오직 말씀만을 말하고 예수님만을 사랑하는 설교를 하였다.

박윤선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평양 숭실 전문대 시절에는 방지일, 김진홍 등과 같이 조기 기도대를 조직하여 모란봉에 올라가 계속 기도하였다.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동안에도 그는 힘을 다해 기도하였다. 그의 간절함과 통곡하는 기도가 학교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으나 그는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는 평생 산에 올라가 밤을 새어 기도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19885월 강원도에서 교역자 수련회가 있었다. 수련회의 강사는 박윤선이었다. 이미 그의 간은 거의 녹아있는 처지였다. 그러나 그는 온 힘을 기우려 말씀을 전하였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는 그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기도하기를 쉬지 아니하였다. 병원에서 운명하기 직전까지 그는 기도하기를 소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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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5/16 [11:59]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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