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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4.20 [11:02]
“이승훈 있었기에 3.1독립선언 가능했다”
김명혁 목사•박종화 목사, “남강 이승훈 장로의 신앙과 3.1운동” 대담
 
김철영

  

오산학교의 설립자이자 3.1 독립선언 33인 중 한 분인 남강 이승훈 장로의 신앙과 삶을 조명하는 특별대담이 21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도곡동 강변교회에서 열렸다.

 

이날 대담에는 합동신학교 교장과 강변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한 김명혁 목사(한복협 명예회장)와 한신대 신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경동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한 박종화 목사(평통연대 이사장)이 남강 이승훈 장로의 신앙과 민족 사랑에 대해 나눴다.

▲ 김명혁 목사(좌)와 박종화 목사(우)     © 뉴스파워

  

박종화 목사는 이승훈 장로는 오산학교를 설립한 교육자이자 3.1 독립선언에 참여한 33인 중 한 분이라며 후진 교육, 인재 양성, 물산장려운동, 민족경제운동 등에 참여했다. 특히 해외로 망명하지 않고 끝까지 국내에 남아서 후진 양성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어 정치적 역량이 탁월한 분이었지만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방이후에도 정부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또한 남강은 생각과 사고가 넓은 분이라며 천도교, 불교 지도자들과 함께 3.1운동에 함께 했다.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는 왜 타 종교와 함께하느냐며 부정적인 분들도 있었지만 이승훈 장로와 (3.1운동을 막후에서 주도한)함태영 목사 설득하면서 앞장섰다.”이승훈 장로는 기독교 신앙의 넓이와 깊이를 가진 분으로 타종교 지도자들을 포용한 큰 그릇이었다.”고 밝혔다.

 

특히 당시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지도자들이 제목을 독립선언서로 할것인가, 아니면 독립 청원서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이 나뉘었다. ‘독립 청원서로 하자고 주장한 목사들은 일제의 침략을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고 회초리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독립선언서로 하자고 주장한 목사들은 누구에게 독립을 청원할 것인가라며 독립선언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이 논란을 이승훈 장로가 정리했다.”고 밝혔다.

 

박 목사는 이승훈 선생은 철저하게 예수 정신으로 비폭력적 독립운동을 따랐다. 예수 정신은 독립운동의 방법론만이 아닌 그의 행동의 양식이었다.”비폭력이 전술전략이 아니라 신앙의 실천이었고 원수 사랑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승훈 장로는 민족주의를 넘어선 평화주의자였다고 평가했다. 박 목사는 이 장로는 조선의 독립은 조선만이 아닌 일본과 중국까지 포함하는 주변국과의 평화를 가져오는 것으로 인식했다. 평화 안에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비폭력은 원수까지 녹여내는 사랑이라고 밝혔다.

  

박 목사는 비폭력 사랑과 평화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이승훈 장로 같은 폭넓은 지도자가 있었기에 (천도교와 불교 지도자들과 함께하는) 3.1독립선언이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정부는 기독교 이승훈, 천도교 손병희, 불교 한용운 등에게 대한민국장을 수여했다.) 

김명혁 목사는 이승훈 장로는 학교와 하나님과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라며 조만식 장로와 함께 오산학교를 일으켜 세운 분이었고, 주기철, 한경직 목사, 함석헌 선생 같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일으켜 키운 분이었다. 또한 3.1운동을 일으킨 애국운동의 주역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모험적인 성격을 지닌 행동의 사람이었다.”이승훈은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난 지 열 달도 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의 품에서 살게 되었는데 할머니도 그가 열 살 때 돌아가시고 곧 이어서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게 되어서 어려서부터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살았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나중에는 세 차례나 일본 경찰에 의해서 투옥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항상 몸의 고통을 지니고 살다가 죽었다.”그러나 이승훈은 가난과 고난과 불행의 삶 속에서도 그의 삶에 충실했다. 가난과 고난과 불행이 도리어 그에게 자극이 되었고 도전이 되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이승훈은 청장년 시절에는 평양에 가서 장사를 해서 큰 부자가 됐다. 엄청난 재산을 가진 대 사업가가 되었다.”“1907년 어느 날,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들었다. 도산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삼켜 먹으려고 하고 있으니 온 국민은 정신을 차리고 썩어빠진 구습을 벗어버리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그 연설을 듣고 14살 아래인 안창호 선생과 나라를 위해서 같이 행동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는 곧 머리를 깎고 술과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승훈이 신앙을 갖게 된 계기도 설명했다. 김 목사는“19199월 어느 날 산정현교회 한석진 목사의 십자가의 고난이란 제목으로 설교에 큰 감명을 받았다.“십자가에 나타난 희생과 사랑의 정신이 자기를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했다. 그날부터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한 달 후에 이 장로는 고향 정주에 오산교회를 세웠다.”그리고 예수를 믿은 지 3개월이 지난 191012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 총감부 구치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그가 새로 가지게 된 십자가 신앙으로 모든 고문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한 1913년에 부임한 조만식 선생과 함께 오산학교를 기독교 신앙과 민족 사랑의 요람으로 키워갔다.

▲ 김명혁 목사     ©뉴스파워

 

 

김 목사는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오산학교에서 공부한 한경직 목사가 이승훈 선생에 대한 회상을 소개했다.

 

다음은 한경직 목사의 증언이다.

그때 남강 선생이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주는 감화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큰 것이었어요. 자기 사재를 다 털어서 학교를 세우고자기 집은 남촌에 있는데도 매일 학교에 나오시고60이나 되셨을 겁니다.(사실 그 때 남강은 55세였다.) 우리가 4학년인가 되었을 때요. 어느날 저녁에 졸업반 학생들 네댓 명을 불렀어요. 가니깐 선생이 자리에 누웠어요. 우리가 가니깐 겨우 일어나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전에 끌려가서 일본 사람들에게 너무 매를 맞아서 언제나 일년이 되면 그 맞은 자리가 아프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그래요. 아프단 이야기를 하면서 매 맞은 그 푸릇푸릇한 자리를 보여요. 그때 3.1운동 일어나기 전인데 그 선생의 말씀 잊지 못하는 건 이런 말을 해요. ‘지금은 일본 사람들이 모든 세력을 다 가지고 모든 걸 다 주장하니깐 일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아. 그렇게 되니까 애국 지사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변한다라고 탄식하시면서 마지막 말씀은 다만 너희들은 분명히 알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나 이승훈은 조선 사람으로 살다가 조선 사람으로 죽는다’ (여기서 한경직 목사는 목이 메어 울먹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 후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노인이 그 이야기 하시려고 우리를 청했단 말이야, 특별히 그날 저녁에그러니깐 이제 그런 이야기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단 말이야요. 그때 오산학교는 기독교 학교라서 채플 시간이면 남강 선생이랑 고당 선생이 보아주셨단 말이야요. 그때 남강이 나이를 잡수셨어도 말씀하실 때는 거저 불을 뿜어요. 그 정신이 살았거든 그래서 우리 남강 선생은 내가 잊을 수가 없고.”

 

김 목사는 이승훈 선생은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한 신앙인이었다.”“1910년 이승훈 선생은 12월에 일경에 체포되어 2년 동안 갖은 고초와 고난을 당하다가 1912년에야 오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오산으로 돌아온 이승훈 선생은 정기정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더욱 더 충성스럽게 섬겼다.”고 밝혔다.

 

이어 그러나 또다시 105인 사건으로 형무소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다. 19152월 감옥에서 풀려 나왔다. 그가 52세가 되던 해였다.”그는 오산학교로 달려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학생들을 만나보고 그 길로 평양신학교로 달려갔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앙과 신학의 훈련을 받았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이승훈 선생은 1916년 오산으로 돌아와서 장로로 장립을 받아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생명을 바쳐 받들어 섬겼는데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4년 동안 그의 신앙이 가장 뜨겁게 불타올랐다고 한다.” 소개했다.

 

특히 이승훈 장로는 19193.1 운동 때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3년 동안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그의 믿음은 감옥 안에서 더욱 더 두터워지고 굳건해졌다. 구약을 20번이나 읽었는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시편, 이사야, 예레미아서를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그러면서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굳게 다짐하며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쳤다.”고 밝혔다.

 

3.1 독립선언과 관련해서는 이승훈 선생은 동분서주하면서 길선주 목사, 양전백 목사, 오화영 목사, 정춘수 목사, 김병조, 유여대, 이명룡, 함태영, 이갑성, 박도희 등을 설득해서 결국 기독교 지도자 16명이 33인 중에 포함되도록 했다.”고 밝혔다 

 

또한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순서에 대해서 33인 중 누구를 먼저 쓰느냐의 문제를 놓고 언성을 높이고 있을 때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러시오. 이것은 죽는 순서요. 죽는 순서로 손병희를 먼저 쓰시오라고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 선생의 이름이 제일 먼저 쓰여지게 되었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남강 이승훈 장로는 민족을 사랑했지만 예수를 믿은 후 민족주의자는 아니라며 일본이 잘못했기 때문에 독립운동에 앞장선 것이다. 그는 아시아 평화를 염원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 박종화 목사     ©뉴스파워

 

 발표 후에는 세계성시화운동본부 사무총장 김철영 목사(한국기독교공공정책협의회 사무총장, 뉴스파워 대표)의 진행으로 질의응답을 이어 갔다.

 

김철영 목사는 박종화 목사에게 만일 남강 이승훈 장로가 지금 살아계신다면 북한의 비핵화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의 흐름에 대해 어떤 조언을 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했다.

 

박 목사는 이승훈 장로에게 민족 독립은 지상 과제였다. 나라가 독립하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유인이 된다. 백성들이 억눌려 산다거나 착취당한다면 독립을 하나마나다.”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은 했지만 자유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차라리 식민지로 있는 게 낫다. 자유를 얻어야 한다. 갈라디아서 51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을 재해석한 것이라고 밝혔다.

 

박 목사는 이승훈 장로는 민족을 사랑하지만 민족주의는 아니다.”남북이 통일되면 남북만 잘 되는 것이 아니다. 복지와 자유, 행복하게 살려면 싫으나 좋으나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4개국과는 형제처럼 살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미안하지만 일본은 식민지 설움을 겪었고, 러시아와 미국은 우리나라를 해방시켰지만 점령했다. 중국은 사드를 거부했다.”그럼에도 우리는 남북통일을 하되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남과 북이 행복해야 한다. 그것이 평화라고 말했다.

 

특히 주변 국가들과 오순도순 잘 살아야 한다. 남북한과 통일을 원한다. 평화로운 통일을 원하고 이 평화는 동북아 전체의 평화가 전제된 평화라며 “100년이 지났지만 같은 이야기다. 이 평화와 통일을 무력으로 하고 싶지 않다. 전쟁도 안 되고 핵무기로는 더군다나 안 된다. 전쟁이 아닌 비폭력적 평화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목사는 평화 없는 통일도 불가능하지만 평화 없이는 통일도 안 된다.”평화 없는 통일이 되면 자유도 없다.”“100년 전과 같은 이야기를 지금도 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명혁 목사는 우리나라 독립이지만 아시아의 평화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승훈 장로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다.”그 분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 중 한 사람이 한경직 목사는 이승훈 장로처럼 모두를 품고 화해와 평화를 염원했다. 템플턴상 받을 때도 상금을 잠깐 갖고 있다가 다 주면서 북한 동포 돕는 데 쓰라고 했다. 우리 신앙의 선배님들의이 수준이 높았다.”고 평가했다.

 

김 목사는 지금 한국에 장로교가 300개나 있다. 다들 우리 교파만 옳다고 싸운다. 이런 것 없애고 이승훈 선생처럼 종교와 민족주의를 넘어서 다 끌어안는 모습을 배우면 얼마나 좋겠나.”라며 북한 동포들도 끌어안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철영 목사는 이승훈 장로가 설득해 3.1독립선언에 참여한 인사들 중 변절한 분도 있다. 법정에서 한일합방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내선융화가 잘 되지 않았던 것이 유감이라고 말한 이도 있었다. 무척 비통해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종화 목사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했으나 얼마나 압박이 심했겠나. 19193.1운동 전에는 소위 헌병 통치였다.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 탄압은 견뎌내기 쉬웠을 것이다.3.1운동 이후 오히려 일제의 문화 통치가 어려웠을 것이다. 창씨개명, 신사참배, 출판검열 등 정신을 빼앗아 가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박 목사는 또한 목사님들뿐 아니라 스님과 신부님들도 많이 변절했다. 생각해 보면 제 추측이지만 독립은 중요하지만 내선일체를 주장한 이유는 독립선언이 아니라 독립청원적 입장이 아니었을까.”라며 좋게 보면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섭리다. 우선 고난을 받고 일본을 보고 청원하는 그런 심정으로 독립은 원하나 그 방법이 서로 달랐다. ‘’(NO)가 아니라 봐주시오정도의 마음은 아니었을까.”라고 말했다.

 

박 목사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나서 압력에 못 견딘 것이 사고의 차이가 있었을지라도 과거에만 그런 게 있었던 게 아니다.”교황은 히틀러와도 손을 잡았었다. ‘하나님 주신 체제이니 복종하라.’고 해다. 히틀러 치하 천주교는 저항하지 않았다. 천주교는 3.1운동 때도 승복해야 할 체제이므로 나서지 마라.’고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죽였을 때 어느 신부가 그를 파문시켜 버렸다. 당시 천주교는 교황의 정책에 의해 일본 식민지를 인정하고 종교의 자유만 누리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은 그건 교황 이야기라며 일부 교인들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공적 승복과 개인적 승복은 차이가 있다. 이승훈은 3.1운동 33인 중 공적으로 가장 나중에 출옥한다. 제일 악질로 보였던 것이라고 말했다.

▲ 우측부터 박종화 목사, 김명혁 목사, 김철영 목사     ©뉴스파워

 

 

박 목사는 인간의 약함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지만 이승훈 선생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지조를 지켰다.”그도 물산장려운동을 했는데 역사학자들 중에는 그걸 개량주의로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밝혔다.

 

박 목사는 변절에 대해 안타까웠으리라 생각한다. 배반할 줄 알고 서명한 건 아닐 텐 데 인간이기에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라며 오욕의 역사이지만 이승훈 선생은 탓하지 않고 자신은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주기철 목사처럼, 개인 신앙의 고백이 아니라 민족적 신앙을 고백하고 민족주의자는 아니지만 하나님주의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민족을 떼 낼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철영 목사는 로마서 131절의‘“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씀에 대한 해석의 관점에 대한 것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했다.

 

김명혁 목사는 인간은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이승훈 선생이 마지막까지 고문당하면서도 나름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며 일본을 인정하기도 하면서 친일적으로 하는 이들을 보며 마음이 아팠겠지만 모든 권세를 다 인정할 수는 없다. 다 때려 부술 수도 없겠지만, 나쁜 권세도 하나님이 어떨 때는 이용하실 수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모든 권세를 정당하게 보라는 건 아닐 것이다. 바뀌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이 땅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다 사랑하셨으니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일본도, 무슬림도 품을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공산주의도 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제 고백을 하자면 공산주의도 무슬림도 순수한 사랑으로 다가가면 다 마음에 감동을 받고 움직이는 것을 많이 봤다.”모두를 사랑으로 평화롭게 끌어안을 수 있는 민족의 지도자가 6명만 대한민국에 있으면 이 나라가 이대로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철영 목사는 한국교회가 총회적으로 신사참배 가결까지 한 것을 보면 결국 지도자들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승훈, 조만식 장로 등 평신도 지도자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 같다. 요즘 사회 갈등의 진원지가 교회라는 따가운 시선이 있다.”며 지도자들에게 권면을 부탁했다.

 

박종화 목사는 자기 희생적 지도력을 강조했다. “3.1운동은 혼자 한 게 아니다. 기독교만 한 것도 아니다. 기독교인도 16명이 서명했다. 나홀로 지도력이 아니고 함께 지도력으로 했다.”한국교회는 지금 나홀로 권력, 패거리 권력, 우리끼리 권력 때문에 갈라지는 것이다. 함께의 힘, 함께 나눔이 있다면 갈라질 수 있었을까. 진정한 지도력은 합치는 것이지 갈라지는 게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어 남북 간 문제, 세계 문제도 기독교 지도자들이 자기중심으로 하면 갈라지지만 하나님 중심으로 하면 안 갈라지고 다양하게 할 수 있다.”예수님은 몸이고 우리는 지체다. 몸의 리더십이 아니고 지체의 리더십이 중요하다. 우리는 지체일 뿐인데 자기가 몸인 양 자기 중심으로 모이라고 하면 정통이 아니다. 지체는 다양하지만 다 몸에 붙어있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같은 사람이 하나도 없다. 중요한 것은 같지 않지만 화(), 평화, 조화할 수 있으면 한다. 이승훈 선생도 다 다르지만 화()할 줄 알았다. 그것이 민주적 지도력이고 기독교 신앙의 바탕. 화의 지도력, 그것이 평화의 지도력이라고 강조했다.

 

김명혁 목사는 예수님은 생명을 버리셨다.”희생하면 가난해지고 고난당하는데 이성봉 목사는 거지로 살았다. 사례를 집에 가져온 일이 없다. 손양원 목사도 거지처럼 살았다. 손동희 권사는 고아원에서 살았다.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광조 장로도 고아원에서 자랐다. 신앙의 선배들 중 부자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지도자들이 협력과 화해를 실천해야 한다.”교단이든 일부러라도 설교도 교환하고 해야 한다. 구원은 첫째이고 마지막은 화해와 평화와 통일이라며 모두를 끌어안는다면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우리나라도 새로워지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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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3/21 [18:02]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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