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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03.27 [11:01]
[김준곤 설교] 죽음의 시점(時點)에 서서
다시 듣고 싶은 김준곤 목사 메시지
 
김준곤
디모데후서 1:10, 요한일서 5:11
▲ 김준곤 목사     ©뉴스 파워


친구의 아버지를 망우리 묘지에 묻고 오는 오후부터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는 밤입니다. 고인이 마지막 숨지는 순간까지 안타까이 주님을 부르며 슬픔에 젖은 젊은 아내와 어린 자녀들의 손목을 잡고 영원한 나라에서 다시 만나자고 떠났다 합니다.

무신(無神)과 허무를 자랑삼는 현대 지성의 죽음의 신조(信條)는 이 절실하고 엄숙한 인생의 현실 앞에 믿기에는 너무도 잔혹한 교리(敎理)입니다.  무덤이 인생의 마지막이라면 보람찬 인생, 불멸의 업적들, 모든 존재와 그들의 문화, 선과 악, 이 모두가 무(無)에서 무(無)로 돌아가는 무(無), 죽음의 바다에서 피어오르는 안개, 마지막 생명의 핵 하나까지 그리고  더 이상 죽을 생명이 없을 때까지 죽음의 북이 올리고만 있을 만유의 거대한 무덤, 삶의 도살장 외에 그 무엇일까.

우주는 영원히 어둠 속에 누워 죽음과 삶의 새김질을 계속하는 거대한 잔해, 우리는 차가 운 잔혹의 필연성 속에서 죽기 위해 사는 도살기계의 밥일 뿐 우리가 돌아갈 집도 부를 아버지도 없는, 있으나 마나한 의미 없이 내어 던져진 덧붙이기 모래알이란 말인가.


사실 우리는 하이데거의 말대로 살고 있다기보다 죽고 있습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시간부터 사형수의 시간은 순간순간 죽음의 손에 목을 졸리고 있는 죽음에로의 시간인 것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 죽음의 차례를 기다리는 초조한 사형수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조만간 죽음의 밥이 될 운명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죽음은 삶이 그러하듯이 신비로운 베일을 쓰고 있어서 아무도 그 정체를 모릅니다. 무(無)가 된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 겉으로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사실인 것입니다. 물질 에너지의 경우는 형태는 변해도 무(無)가 될 수 없으며, 문법의 한 ‘피리어드’는 한 문장의 종결을 뜻합니다.

또한 사람은 절대적 의미에서 없는 것을 있 하는 창조나 한번 있는 것을 없게 하는 무화(無化)의 능력이 부여되어 있지 않고, 인간 생명은 자기가 만든 것도 시작한 것도 아니며 그 끝마치는 시간, 삶의 길이, 모두 자기 의사로 처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삶에 있어서 그러하듯이 죽음에 있어서도 생물학계의 예외인 것입니다.

가랑잎이 떨어져 눕는 현상, 봄에 잎이 핀 것이 겨울에 시드는 그런 자연스런 현상과 인간의 죽음은 다릅니다. 인간의 죽음은 너무도 순치한 모순(릴케). 삶과 죽음과는 서로가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배타적인 개념입니다. 순수 삶은 털끝만치도 죽음을 모르고, 순수죽음의 개념에는 삶의 그림자도 허용 안 되는 백(白)과 혹(黑)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불러가고 어둠이란 빛이 아니듯이 죽음은 삶에겐 생소한 순수 모순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예견하는 삶이 죽음도 삶도 아닌 끝없는 밤에로의 불안 속에 망령의 꿈길을 헤매게 됩니다. 그렇게 보면 인간 역사가 모두 죽음의 집에서 된 이야기입니다. 자기 삶의 절대 주인이 되고자 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끊어 본댔자 죽음에의 대항이 아니라 죽음의 품에 자기를 던진 것입니다. 죽음을 긍정하기 위하여 죽음의 잔을 태연히 마시는 얌전한 체념도 있습니다.

이는 마치 강제로 끌려가 원수의 처(妻)가 되어 버린 여인이 전력을 다해 원수와 대결하다가 마침내 힘이 기진하여 그의 품에서 유순을 배우는 것처럼 삶은 죽음의 품에서 체념을 배우고 신비로운 마력에의 매력까지 느끼게 됩니다. 죽음에서 관심을 돌리게 하는 소위 명량한 정신 건강이 있습니다. 이는 목숨을 잠식하고 있는 치명적인 질병에 무관심함으로 치료의 기회를 놓치게 하는 위험성을 가진 지혜입니다.


죽음은, 삶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처럼 신(神)과의 산 관계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의사가 진단한 죽음과 참된 죽음의 뜻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는 삶에 있어서 하나님을 피할 수 없는 것같이 죽음에 있어서도 피하지 못합니다.

죽음의 참된 비극성과 저주와 아픈 표정을 계시한 곳은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삶이, 생명의 근원이요 빛이신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사랑의 친교라면 죽음은 그 친교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그것은 소멸이 아니라 추방이고, 거부이며, 형벌입니다. 사랑의 얼굴이 진노의 얼굴로, 긍정적 관계가 부정적 관계로 변한 관계입니다.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며 끊임없이 삶의 문을 노크하는 죽음의 음산한 위협을 받으면서 죽음의 생(生), 죽음의 노래, 죽음의 춤을 추며 죽음의 템포로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는 삶이 있는 반면에 사망의 권세가 미치지 못하는 생명이요 부활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과 생명에로의 삶이 있습니다. 죽음이 올 때 우리는 두렵고 슬프지만, 한편 그리운 주님과의 만남의 밀월 여행을 떠나는 시간이 됩니다.


구원은 죽음 자체와 그 죽음의 세력인 죄와 불안과 회의, 허무, 절망에서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승리를 노래했습니다.

죽음은 부름이요, 경고입니다. 생(生)의 순간마다 죽음의 확성기를 통해서 돌아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에게 허락된 단 한 번만의 대여(貸與)기간이 차면 길고 짧고 간에 좋고 나쁘고 간에 끝나는 시간에는 청산이 있을 뿐 수정이나 보충 삭제 등 일절의 기회를 상실합니다. 기간의 장단은 우리에게 의논이 없습니다. 그 시간에 한번은 사람이 적나의 어린이가 되어 하나님과 참된 자기와의 대면이 있습니다. 거기서 인간은 최대의 위기, 최대의 개방성, 그리고 최대의 결단성이 십자가의 강도처럼 요청됩니다. 영영 문이 닫히기 전에 너무 시간이 늦기 전에 ‘내게로 돌아오라’ 는 부름을 듣는 곳이 죽음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일과 하나님을 생각하는 일은 거의 동시적입니다. 순간마다 죽음의 시점에 서서 잠자는 삶을 불러일으켜 사망의 권세 아래 죽음의 삶을, 부활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 영원 생명의 약동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무덤 속에 나흘이나 썩은 나사로를 ‘일어나라’ 하시니 죽음이 물러가고 그가 살아났던 부활의 능력이, 생(生)의 전면에 걸쳐 살아 움직이는 삶이, 그리스도 안에 새 생명입니다.

*이 글은 김준곤 목사가 <CCC편지> 1964년 2월 17일호에 기고한 것입니다.

*<예수칼럼>으로 국내외의 수많은 사람을 변화시킨 유성 김준곤 목사의 진정한 영적 힘은 바로 그의 설교에 있다. 이미 엑스플로 '74, '80 세계복음화대성회 등을 주도하면서 민족 앞에 불을 토한 그의 메시지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84년의 인생을 살면서 그의 삶의 유일한 소망은 민족복음화, 영혼 구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십자가 사랑을 설교한 사람이다. 어떻게 해서 진정한 주님과 만남을 통해 변화되고 확신 있는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민족복음화의 환상이 잉태되었는지를 설교를 통해 알 수 있다. 그의 설교는 목회자와 평신도, 젊은 지성인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감동과 영감을 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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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2/25 [10:21]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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