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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9.11.15 [22:02]
“기독교가 3.1운동 적극 참여 이유는…"
한교총 회원교단 총무 사무총장들, 고신대 이상규 교수(교회사) 초청 특강
 
김현성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이승희, 박종철, 김성복 목사) 회원 교단 총무사무총장들은 25일 오전 7시 서울 강남구 쉐라톤팔레스호텔에서 고신대학교 이상규 명예교수(교회사)를 강사로 ‘3.1운동과 기독교를 주제로 세미나를 가졌다.

▲ 고신대 이상규 교수가 특강을 인도하고 있다.     © 뉴스파워

 

 

이번 세미나는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을 진행하는 가운데, 역사적 사실에 대한 팩트체크 차원에서 마련되었으며, 기념사업의 내실을 기하는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 교수는 강의에서 3.1운동에 기독교가 적극 참여한 요인으로 첫째, 폭압적인 식민통치에 대한 반발이었다. 둘째, 기독교계의 민족의식 혹은 민족운동 전통은 3.1운동에의 적극적인 참여의 동기였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신앙과 신교(信敎) 자유에 대한 탄압이 저항이 이유였고, 식민지배에 대한 거부운동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또한 비록 기독교의 지도적 인물 가운데 일부가 후일 훼절하고 친일의 길을 간 경우가 없지 않으나, 이점을 이유로 삼일운동에 기여한 한국교회의 역할마저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다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 한교총 총무 사무총장들은 고신대 이상규 교수 초청 세미나를 개최했다.     © 뉴스파워

 

 

다음은 이상규 교수의 발제 요약이다.

 

 

삼일운동이란 일제의 식민지배와 그 억압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거부운동으로서 19193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과 태화관, 그리고 전국의 9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함으로 시작되어 적극적으로 약 2개월, 광의적으로는 1년여 간에 걸쳐 국내와 만주, 연해주 등으로 확대된 민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을 의미한다. 2개월에 걸쳐 전국적으로 전개된 이때의 독립운동 기간 동안 전인구의 10%에 해당하는 200만이 넘는 한국인이 만세운동에 가담하였고, 전국 218(232)개 부, 군 가운데 212(229)개 부, 군에서 1,491(1,542) 건의 시위기 일어났다. 4월 말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반일 투쟁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지만 31일에서 5월말까지 학살된 자 7,509, 부상자 15,961명이었고, 피검된 자는 46,948명에 달했다. 삼일운동은 한국인들이 신분, 직업, 계급, 지역 그리고 종교를 초월하여 대동단결하여 일어난 사건으로서 한국인이 근대민족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고 한민족의 주체적인 독립 쟁취에 대한 자신감을 부여했으며, 이후 전개된 독립운동의 지속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궁극적으로 독립을 쟁취하자 삼일운동은 결국 독립을 이루지 못했으나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첫째, 그해 411일 상하이(上海)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됨으로서 국민주권정부 수립운동이 일어나고 거족적인 민족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형성되었다. 둘째, 삼일운동이 비폭력운동으로 시작되어 많은 피해를 입게 된 것을 교훈으로 삼아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셋째, 삼일운동에 참여했던 민중들의 정치의식이 고조되어 국내 민족운동 기반이 강해졌고, 국산품애용, 근검, 절재운동, 계몽운동 등으로 발전하였다. 넷째, 삼일운동이 민족 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세계의 피 압박 약소 만족의 독립과 해방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북경대학 중심의 5.4 운동, 인도 간디 중심의 샤타 그라하비폭력 무저항운동이 그것이다. 다섯째, 삼일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수단인 무단정치의 한계를 깨닫게 해 주어 비록 가식적 측면이 없지 않지만 문화정치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삼일운동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하던 분명한 사실은 삼일운동은 소수의 엘리트 구릅의 주도적인 준비와 대중적 호응으로 발전하여 한국독립운동의 신기원을 이룬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삼일운동사 연구에 있어서 아래의 문제에 대해서는 상반된 의견이 있어왔다. 첫째, 삼일운동 준비단계에서 러시아 혁명이나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우리나라 삼일운동에 실제적인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이다. 삼일운동 발발배경에 있어서 외인론(外因論)과 내인론(內因論), 그리고 양자를 균형 있게 이해하려는 시도가 있어왔다. 둘째, 삼일운동을 이끌어가 주체인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이 이 운동의 주체인가 아니면 이 운동을 실제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간 다수의 기독교계가 관여한 민중 세력인가? 이 운동의 외연에 있어서 주도적인 세력 혹은 조직은 무엇인가? 셋째, 삼일운동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운동이 근대 민족주의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보아 동학농민운동, 개화자강운동, 의병운동 등 세 갈래의 민족운동이 합쳐진 운동이라고 보는 견해와 개항 이후 추진되어 온 민족운동의 하한점으로 보고 이후의 민족운동을 사회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민족운동을 이해하는 입장이 있다.

일반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언과 러시아 혁명 등 정치적 변화와 더불어 특히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가 삼일운동의 이념적 동기를 부여했다는 점이 강조되어 왔으나 삼일운동의 동기와 시원은 도리어 일제하의 식민지적 상황이라는 내재적인 요인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한말 국권회복운동의 주류를 이루었던 애국계몽운동과 의병 운동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일제의 무단 정치 10년을 통한 민족의식의 성장과 자유와 독립을 향한 국민의식의 성숙이 가져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전 국민이 적극적인 호응을 한 것은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 정치와 수탈, 그리고 생존권마저 위협받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분출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는 천도교 세력과 함께 가장 중요한 종교집단으로 기여하였다. 특히 전국적인 조직망을 가진 기독교회는 선언문의 배포 및 재생산 과정에서 지역거점 혹은 연락망의 역할을 감당했다.

삼일운동의 전개과정은 흔히 2 혹은 3단계로 구분한다. 1단계는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191931일 태화관에서 독립을 선언하면서 만세운동을 점화한 단계를 의미한다. 이들은 선언식을 마친 후 곧 바로 경찰에 연행되었고 탑골공원에 모인 군중들은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을 갖는데 그쳤고 시위현장에서 대중을 지도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으나 만세운동을 촉발함으로서 주어진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2단계는 민족대표의 독립선언에 이어 3월 중순 거족적 민중운동으로 확산된 단계를 의미한다. 3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같은 시각 평남의 평양 진남포 안주, 평북의 정주 선천 의주 선천, 함남의 원산 등 주요도시에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들 지역은 기독교세가 상대적으로 강한 지역이었다. 만세시위는 서울을 비롯한 경기 충남 황해 평남 평북 함남에서는 일찍부터 시위가 일어났으나 그 외 지역은 3월 중순 이후 확산되었는데, 전국적인 파급은 민중의 자발적 운동이나 상경했던 지방인이나 학생들의 귀향을 통한 정보의 교류, 혹은 인근지방 만세운동의 영향이 없지 않았으나 기독교회 조직을 통한 전파가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3단계는 3월 하순부터 4월말까지 시위가 적극화되고 격화된 단계를 의미한다. 410일경에는 일본 본토로부터 증원부대가 파견되어 배치가 완료되었다. 시위가 5일마다 열리는 정기적인 장시(場市)가 시위운동 장소로 활용될 수 있었고, 한말 이래로 설립된 사립학교가 정보의 교환은 물론 학생의 조직화와 동원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전국 규모의 기독교조직은 이 시기에도 만세운동의 동력원이 되었다.

만세운동의 단계적 구분과 상관없이 교통이 편리한 대도시에서 시작하여 중소도시로, 면사무소 소재지로 그리고 소도시로 전파되었고, 이런 전파과정에서 기독교회 혹은 선교학교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국의 각 지역에서 기독교회나 선교학교는 만세운동의 거점이었다. 독립선언서의 배포와 만세운동의 전개과정에서도 기독교회가 중심이었다. 삼일운동의 피해상황에 대한 자료를 통해서도 기독교의 관여와 역할을 감지할 수 있다. 삼일운동 피해상황에 대한 몇 가지 통계가 있으나 신뢰성 때문에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의하면, 191931일부터 5월말까지 3개월 간 독립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2,023,098, 피검자 46,948, 사망자 7,509, 부상자 15,961, 가옥파괴 715, 교회당 파괴 47개소였다. 당시 기독교 인구는 20만에서 22만 정도로 전 인구의 1-1.5%로 간주되는데, 19194월말까지 투옥된 기독교인은 2,120명으로 불교 천도교 유교도의 총수 1,556명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이런 점은 기독교인들이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일운동 당시(1919.4) 국내에는 387명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그해 말에는 로마 가톨릭의 54명의 선교사를 포함하여 433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심정적 동조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는 중립적 입장을 취했다. 피선교지에서의 정치적 중립은 정교분리론에 익숙한 선교사들의 일반적 처신이었다. 이런 점은 1901년 장로교공의회에서 확인된 바 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중립의 경계를 넘게 만든 것은 그들이 목격한 만행이었다. 날조된 105인 사건 이후 선교사들은 만행 앞에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No neutrality for brutality)”고 인식했고, 제암리학살 사건에서 이런 인식은 심화된다. 도날드 클락은 삼일운동에 대한 선교사들의 태도 혹은 관여를, 가담자들에 대한 보호(sheltering), 부상자에 대한 치료(treating the wounded), 제암리학살사건에 대한 조사(investigating the Che'am-ni massacre), 영사관 및 본국 위정자들을 통한 항의(protests to Consuls and constituencies at home), 그리고 여론형성을 통한 항의(protests in the press) 5가지 유형으로 정리한 바 있는데, 가장 중요한 활동이 언론을 통한 일제의 만행에 대한 고발이었다.

만세운동에 대한 정보의 해외 유출은 크게 3가지 통로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AP통신혹은 재팬 어드버타이저’(The Japan Advertiser) 같은 언론기관을 통해서였다. 둘째는 서울주재 미국총영사나 영국 혹은 프랑스 영사관 등, 재한(在韓) 해외공관을 통해서였다. 세 번째 통로가 주한 선교사들을 통한 유출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사신이나 공식적인 보고서를 통해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만세운동에 대해 본국교회에 보고하였고, 안식년이나 기타 이유로 본국으로 돌아간 선교사들을 통해 식민지배 하에서의 조선에서의 정치적 상황은 구미 사회에 공표되었다. 이런 일련의 활동은 일본의 폭압적인 식민지배와 조선의 독립에 대한 국제적 여론형성에 기여하게 된 것이다.

삼일운동의 발발 배경은 1910년대의 국제정치질서의 변화, 곧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만세운동의 전국적 혹은 거국적 전개는 내부적 요인, 1910년 이래의 무단통치와 식민지배에 대한 거부, 민족의식의 형성 등 내부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민족대표 33인은 만세운동을 선도하고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제한적 역할을 감당했고, 운동의 전국적 전개에는 종교적으로 볼 때 기독교계와 천도교계가 지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특히 신앙이라는 연대로 맺어진 전국 규모의 교회조직과 통신망은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기독교계의 만세운동에 대한 관여 혹은 참여는 기독교회라는 교단적 합의나 결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인의 결단에 의한 참여였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 사이에 경계를 지키면서도 그리스도인의 민족적 혹은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려는 의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질문은, 삼일운동에 대한 기독교권의 적극적 참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리스도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킨 요인이 무엇일까? 적어도 3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폭압적인 식민통치에 대한 반발이었다. 둘째, 기독교계의 민족의식 혹은 민족운동 전통은 3.1운동에의 적극적인 참여의 동기였다. 셋째, 기독교 신앙과 신교(信敎) 자유에 대한 탄압이 저항이 이유였고, 식민지배에 대한 거부운동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기독교는 일제 통치기간 중 가장 강력한 종교였고 한국사회와 국가, 그리고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 당시 조선의 기독교회는 20만의 신도와 3백 개 이상의 학교, 3만이 넘는 학생, 1,900여개의 집회소, 외국인 선교사 270여명, 조선인 교직자 23백여 명을 거느린 무시할 수 없는 집단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많은 병원과 자선기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견고한 유대로 결합되어 있었고, 외국인 선교를 통해 세계 여론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처음부터 한국 기독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조선통치에 이용하든지 아니면 한국 기독교를 탄압하여 그 영향력을 약화시키든지 양자택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회유정책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일제는 한국기독교 탄압과 분열을 시도하여 각종 제재를 가했다. 종교 활동을 규제하려는 포교규칙(布敎規則, 1915)은 첫 법적 규제였다. 이후 기독교교육을 통제하기 위해 사립하교 규칙을 재정하거나(1911), 개정하고(1915), 안악사건이나 105인 사건을 통해 기독교를 탄압했다. 안창호가 기독교계 인사들 중심으로 조직한 신민회(新民會)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심리적 저항은 만세운동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독립운동을 통해 신앙의 자유, 신교의 자유를 누리며 자유와 공의 등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고자했던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이유가 어우러진 상호연쇄는 상당한 저항의 힘이었고 기독교계의 적극적 참여를 가져온 배경이 된다. 비록 기독교의 지도적 인물 가운데 일부가 후일 훼절하고 친일의 길을 간 경우가 없지 않으나, 이점을 이유로 삼일운동에 기여한 한국교회의 역할마저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다 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식민지배에 대한 기독교계의 저항, 삼일운동에 있어서의 기독교권의 참여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교파 혹은 교단 조직체로서의 기독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언제 어떤 경우에 국가권력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가? 서구기독교 전통에서의 저항권 사상을 한국의 교회는 언제부터 인식하게 되었을까? 이런 문제가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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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1/25 [14:16]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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