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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0.22 [11:02]
올바른 기독교 신앙은 무엇일까? (1)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48]
 
정성민

지난 담화에서 석가가 생각하는 중도는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현실성이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연 진정으로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중도적인 길은 없을까? 구약성경에는 중도를 가르치는 내용이 상당히 많다. 신명기 기자는 말한다,

 

그런 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복이 너희에게 있을 것이며 너희가 차지한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리라. (신명기 5:32-33)

 

또한 잠언 30 7-9절에 보면 잠언기자가 중도의 삶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보게 된다.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이러한 중도의 깨달음이나 삶은 어쩌면 종교적인 이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만일 사람들이 중도의 삶을 살아간다면 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1. 과연 기독교가 말하는 중도는 무엇일까?

 

필자가 생각하는 답은 바로 전인적인 구원이. 전인적인 구원은 하나님, 세상, 인간을 하나의 유기적 관계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신과 인간, 신과 자연을 하나로 보는 범신론이나 자연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 전해준 미국의 19세기 복음전파는 청교도적인 신앙이었다. 당시의 청교도적인 신앙은 근본주의적 성향이 짙었다.

 

그렇다면 근본주의적 신앙은 무엇일까? 근본주의적 성향은 지나치게 이원론적인 생각,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과 세상, 세상과 교회, 하나님과 인간, 이성과 믿음, 선과 악, 영과 육, 자연계시와 특별계시, 세속사와 구원사, 예정과 자유의지 등의 서로 반대되는 양극적인 관계를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없는 대립적 관계로 보는 것이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그저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 아니면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죄악시하며 천국과 같은 피안의 세계를 동경하며 살아간다. 결국 세상은 살 만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곳이거나 너무 고통스러운 세상이기에 사람들은 세상을 포기하려는 경향을 지닌다. 어쩌면 세상을 전혀 바꿀 수 없는 곳으로 생각하며 세상과 담을 쌓거나 너무나 거리를 두어서 자발적으로 사회적 부적응으로 남길 원할 수도 있다. 사실 이러한 자발적인 사회 부적응의 모습은 석가의 가르침에도 발견된다. 석가는 말한다,

 

성자의 삶을 사는 님은 탁발을 하고 나서, 나무 아래로 가까이 가서 자리를 잡고

숲 속의 빈터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슬기롭게 선정에 전념하고, 숲 속에서 즐기며

스스로 만족해 하며, 나무 아래서 선정을 닦으십시오. (Stn.708-09)

 

그리스 철학의 대가, 플라톤은 지난 2천 년 동안 그의 영혼 불멸사상으로 인해 기독교 사상과 서양철학에 아주 막대한 영향을 남겼다. 그는 영혼을 인간의 본질로 보고 육은 영혼을 가두는 감옥으로 보았다. 이로 인해 플라톤은 이원론적 철학사상의 효시가 되었다. 반면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영혼을 육체와 따로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았다. 영혼의 가치를 플라톤처럼 중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물질을 인간과 우주의 본질로 보는 일원론적 사상의 효시가 되었다.

 

어떻게 우리는 이러한 양극단의 사고를 조화시킬 수 있을까? 이러한 양극단의 사고에 대하여 예수는 어떻게 생각을 할까? 이제부터 이러한 양 극단적인 사고를 어떻게 하면 조화를 이룰 수가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독교적 중도의 생각이 세상을 올바르게 바꿀 수 있는 동력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유신론적 종교다. 이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역사의 주관자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미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의 중도나 중간적인 길의 가능성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적 중도는 유신론적 신앙을 전제로 하여 발생하는 양극적인 현상들을 조화시키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2. 과연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의 조화는 가능할까?

 

자연계시는 우주의 신비하고 오묘한 질서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이원론적인 생각을 하는 근본주의자들은 이러한 자연계시의 역할을 부정해 왔다. 자연계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위대하심 등 하나님의 신비를 드러내 준다. 이것이 자연계시의 역할이다. 이러한 자연계시의 역할에 대하여 사도행전은 이렇게 말한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니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니 아니하도다. (사도행전 1724-27)

 

우리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가운데 살아가면서 그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볼 때에 하나님의 존재를 찾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자연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손길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한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신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편 13913-16)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계시가 지닌 한계가 있다. 무엇일까? 바로 자연계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말이다. 즉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계시가 필요한 것이다. 특별계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성품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특별계시의 절정이다. 우리는 특별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한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9-12, 14, 18)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17)

 

그렇다.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특별계시이다. 예수는 바로 특별계시의 절정이요 완성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바로 하나님의 나타나심 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특별계시는 자연계시의 완성이다. 특별계시가 없는 자연계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연계시가 없는 특별계시도 성립자체가 불가능하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찾아올 세상이 없다면 그 어찌 특별계시가 필요한 것일까? 자신의 피를 흘려 구원해 줄 인류가 없다면 그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할까? 바로 이것이 자연계시와 특별계시의 조화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시는 특별계시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자임을 드러낸다. 하나님을 인간역사를 통해 인류의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분임을 드러낸다. 바로 여기 까지가 자연계시이다.

 

하지만 자연계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낼 수 없다. 드러낸다고 한들 무서운 하나님, 강력한 힘을 가진 하나님, 섬세하고 오묘하신 하나님 까지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특별계시를 통해서 드러난다. 바로 그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해서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인류의 속죄양으로 보내셨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시가 없다면 특별계시는 의미가 없는 것이다. 만일 특별계시가 없다면 자연계시는 또한 무의미한다. 아무리 강하고 힘센 창조주가 있어 이 세상을 만들고 다스린다고 할지라도 그가 무서운 하나님이거나 혼자 잘난 하나님이거나 인간의 아픔을 전혀 개의치 않는 하나님이라면 이 세상은 저주받은 세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자연계시를 믿는다. 그리고 자연계시의 완성으로서 특별계시도 믿는다. 그러므로 자연계시와 특별계시는 하나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인 것이다.

 

2. 과연 일반역사와 구원의 역사는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보통 우리는 세속사(일반적인 인류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이스라엘 역사와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구원)는 별개의 것으로 취급한다. 마치 구원의 역사는

세속사와 상관없이 진행되는 하나님의 신비한 초자연적 역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구원사는 세속사안에서 잉태하여 세속사를 통하여 꽃이 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속사는 구원사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구원의 역사가 없는 인간의 역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동물의 역사로 전락하게 된다. 또한 세속사 없는 구원사는 그 실체가 없는

역사요, 아무런 구원의 근거도 내용도 없는 비역사인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족장을 불러서 구원사를 시작하셨다. 아브라함의 둘째 아들인 야곱과 그의 손자 12명을 통해 이스라엘과 인류를 위한 구원사를 전개하셨다. 그리고 블레셋과 앗수르 그리고 바벨론과 같은 세속정권을 통해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다.

즉 세속 정권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통로인 이스라엘 민족을 단련하고 준비시켰다. BC 586년에 유대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함락된 후에 다수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강제이주 되었다. 그 후로 지중해 연안에 수 많은 유대인들이 흩어지게 된다. 놀라운 것은 바로 이러한 유대인들의 흩어짐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준비단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다. 이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지중해 연안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전도하게 되면서 예수의 복음이 전 세계로 전해지는 역사가 벌어진 것이다.

 

BC 356-323년에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제압하고 새로운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문화가 확산되어 새로운 대제국(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의 언어와 문화가 통일되게 된다. 이러한 언어(헬라어)와 문화의 통일은 예수의 복음이 아주 용이하게 전해지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BC 270년경에 구약의 헬라어 번역인 70인 역이 나오면서 유대인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을 헬라어로 쉽게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알렉산더 왕을 통해서 언어의 통일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이다. 사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예수는 구약 예언의 성취와 완성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지중에 연안에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아주 쉽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BC 67년 폼페이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팔레스타인이 점령당하게 된다. 이때 로마제국은 영토와 식민지를 통솔하기 위해 길을 잘 닦게 된다. 바로 육로를 통해 왕래를 쉽게 하기 위해서다. 놀랍게도 육로를 통해 잘 닦여진 길은 바로 예수의 복음이 온 세계로 퍼져 나가 위한 도구가 된 것이다. 또한 세계를 지배한 로마의 언어, 즉 라틴어가 AD 3세기 이후로 서방세계의 공통어가 되었다. 이를 통해 중세와 종교개혁시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1000년 동안 라틴어가 사용된다. 하나님은 바로 이 라틴어를 통해 기독교의 복음전파와 서방교회의 통일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AD 380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회가 된다. 이후로 복음으로 인해 더 이상 핍박을 받지 않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지역으로 돌아다니며 복음 전파를 하지 않고 세상 속에 안주하게 된다. 이때 하나님은 동방의 훈족(말을 잘 타는 유목민족)을 움직여서 서유럽의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유발시킨다. 이러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은 결국 AD 476년에 로마제국이 멸망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전혀 예측할 수 없었고 또한 이해할 수 없는 로마제국의 멸망은 당시 야만족이었던 게르만족을 통해 서유럽을 복음화 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였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AD 476년의 로마제국의 멸망은 역사가들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에 속한다. 이는 바로 세속사를 통해 구원사를 계획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 후로 대략 700년 동안 게르만 민족을 통해 유럽 전영역이 복음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지금도 하나님은 세속 정권과 세속 역사를 통해 구원의 역사를 진행하신다. 그러므로 구원사는 세속사를 통해 성취되어진다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아무런 역사성이 없는 신화가 아니다.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유대교 제사장들의 음모로 인해 로마의 통치자가 직접 나서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역사적인 사건인 것이다. 이에 대해 마태복음은 이렇게 증거한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주니라….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가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마태복음 27:1-2, 11-18, 20-26)

 

유대 총독 빌라도의 이름은 라틴어로 폰티우스 필라투스이다. 그는 A.D. 26년에서 36년까지 로마 제국의 변경 행정구역의 하나인 유다 지방의 총독을 지낸 사람이다. 바로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무죄한 예수의 피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과 자신들의 자손에게 돌리라고 외쳤다(마태복음 27:24-25)는 것이다. 그 후로 세월이 지나 유다 지역에서 유대교 민족주의 세력인 열심당에 의해 유대독립전쟁이 발생한다. 유대독립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면서 로마의 디도 장군은 네로의 명령에 따라 A.D. 66년부터 유대항쟁 진압을 지휘했다. A.D. 709월에는 그의 아들 티투스가 2년에 걸친 전쟁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들은 마태복음 24장에 기록된 예수의 예언처럼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뿐 아니라 성전도 무너뜨린다. 비참한 전쟁으로 110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죽었다. A.D. 74년 봄에는 플라비우스 시르우가 혁명당원들이 항쟁한 마사다 요새까지 함락시킴으로써 유대항쟁 진압을 끝마칠 수 있었다. A.D. 132년에 제2차 유다 전쟁이 일어나고 135년에 다시 로마 제국에 의해 진압된다. 그리고 시리아의 속주가 되었다. 이후 유대인들은 중동 전역으로 흩어지며 1800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으로 지냈다.

 

특이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 제국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정치범 등 약 11백만 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다는 것이다. 바로 유태인 대학살사건이다. 사망자 중 유태인은 약 6백만여명이었는데 그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백만 명의 유태인 중 약 2/3에 해당한다고 한다. 유대인 어린이 약 백만 명이 죽었으며, 여자 약 2백만 명과 남자 약 3백만 명이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유대인과 기타 피해자들은 독일 전역과 독일 점령지의 약 4만여개의 시설에 집단 수용, 구금되어 죽게 되었다. 그리고서 현대 이스라엘은 19세기 시온주의 운동을 배경으로 1948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세워졌다. 1948년 텔 아비브에서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현대 이스라엘은 태동하게 된 것이다.

 

과연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그의 무고한 피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돌리라는 저주가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까? 예수가 죽은 후 40년이 지나서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예루살렘 성전도 완전히 붕괴되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심판일까? 아니면 역사의 우연일까? 당시 유대독립전쟁으로 110만명의 유대인들이 비참하게 죽었는데, 과연 이러한 비극적인 사건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더 나아가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고 난 후로 유대인은 나라 없이 흩어진 민족으로 거의 2000년을 지냈다. 과연 이러한 저주가 하나님의 심판일까? 아니면 우연일까? 마지막으로 과연 히틀러에 의한 유대인 대학살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의 무고한 피에 대하여 자신의 자손들에게 돌리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들의 죄값으로 유대인 대학살이 벌어진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명확한 답은 없다. 왜냐하면 예수의 무고한 피에 대한 죄값과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실제적인 고통 사이의 연관성은 하나님 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단지 구원사가 세속사를 통해서 성취된다는 믿음 속에서 우리가 다음과 같이 가정할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고하게도 예수를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게 하였고, 그러한 무고한 피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진실로 심판하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통한 하나님 심판이 구체적으로 무엇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첫째로 객관성의 문제이다. 아무리 기독교인이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하나님의 심판을 연관 짓더라도 그러한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믿음의 눈으로 추측할 뿐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단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믿는 자들에게 세속의 역사는 단 하나라도 우연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3. 이성과 믿음의 조화는 가능할까?

 

기독교인들은 이성을 배타시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계몽주의시대 이후로 칸트와 헤겔에 의해 인간의 이성이 신격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오해이다. 우리가 이성을 세 가지 나눠볼 수 있다고 본다. 하나는 본질적인 이성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이성이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이 가장 이성적인 분이시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성적인 것을 논리성, 합리성, 사실성에 바탕을 둔다면 하나님만큼 이성적인 분은 없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은 계산을 가장 잘 하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사실은 만나의 비밀을 통해 잘 드러난다.

 

만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메마른 광야에 머물 때에는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셨다.하지만 그들이 가나안에서 들어가면 하나님은 만나를 더 이상 공급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농사를 짓기에 더 이상 만나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 평일에는 그 날 하루 분량의 만나가 내린다. 하지만 안식일 전에는 안식일을 위해 이 틀 분량의 만나가 내린다. 평일에 만나를 두 배로 거두어 그 다음 날을 위해서 미리 많이 거두어들이면 그 만나는 썩게 하신다. 하지만 안식일에 만나가 내리지 않기에 전날에 내린 만나를 두 배로 거두어들이면 그 다음날에도 썩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출애굽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 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서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사람이 사는 땅(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출애굽기 1611-27, 35)

 

정말 하나님은 계산을 잘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일으키시는 기적과 행위가 얼마나 합리적이고 일관성이 있는지 모른다. 기적은 흔히 자연적인 법칙에 위배되는 사건이라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리거나 혼란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순간순간 필요한 곳에 초자연적인 기적을 일으키신다. 그 기적을 맛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다시 보여주려고 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 이유는 그 기적은 똑 같은 방식으로는 다시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적은 증인이 적고 단순 반복이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기적을 전혀 예측이 불가능한 새로운 방식으로 일으키는 분이시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은 신기하고도 참으로 이성적인 분이시다.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치밀하고도 합리적인 하나님을 믿으라고 권고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 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 6:25-34)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거부하는 이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타락한 이성이다. 우리는 이를 포로가 된 이성 혹은 눈먼 이성이라고 말한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진 것은 바로 영의 눈이 닫히고 육의 눈만 뜨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제 영이신 하나님을 자신들의 육의 눈으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니 타락한 이성으로 시도하는 인간의 그 모든 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부인하는 현대인의 과학과 철학이 헛바퀴가 도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합리성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빠뜨렸기 때문이다.

 

반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그들의 타락했던 이성이 다시 회복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본질적 이성이 타락하여 왜곡된 이성으로 전락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타락한 이성이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즉 창조시에 주어졌던 본질적 이성을 다시 찾았다는 것이다. 타락한 이성은 자연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은 유물론을 통해 하나님을 부인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들은 회복된 이성을 소유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세상의 모든 현상들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해하려고 한다. 창조과학회도 바로 그러한 시도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정말 아이러니 한 것은 자연과 우주를 다루는 과학자들이 한편에서는 진화론을, 다른 한편에서는 창조론이라는 두 종류의 양극적인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 해답은 바로 타락한 이성과 회복된 이성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회복된 이성은 우리의 믿음과 대립적이지 않다. 이성은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데 필요한 인식과정 중에 아주 중대한 역할을 한다. 우주의 질서를 보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바로 이성적인 작용이다. 이에 대해 철학자 크리스토퍼 베이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과학이 써 내려온 대서사시때문에 유물론적 관점을 차마 내려놓지 못한다.

물질세계의 비밀을 밝히고자 했던 과학자들의 시도는 더 없이 극적이고 성공적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우주 만물이 언젠가는 물리적으로 전부 설명되리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즉 물질세계가 만물의 토대라는 성급한결론에 이르고 만 것이다. 초기의 과학은 진실을 탐구하는 다른 접근법들과 공존했다. 과학은 물질세계를 탐구했고, 신학은 영적 세계를 탐구했다. 하지만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신뢰가 커질수록, 과학을 통해 얻게 될 것들에 대한 기대가 커질수록, 우리는 신학적 탐구보다는 과학적 탐구가 좀 더 유용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신학적 방법론은 과학적 방법론처럼 딱 부러지는 증거나 반증을 내세우지 못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과학기술은 사람들이 종교를 통해 얻고자 했으나 별로 성공하지 못했던 무수한 혜택을 선물해주지 않았는가? 따라서 그동안 별로 성과가 없었던 영역(영적 세계)에다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명확한 결과가 나오는 영역(물질세계)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정서가 널리 번졌다. 그러나 나름대로 설득력 있고 타당했던 이 편애는 점차 모든 것을 바꿔 놓기 시작했다. 과학이 이뤄내는 극적인 진보를 보면서, 우리는 과학의 주제가 신학의 주제보다 훨씬 더 현실적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는 물질세계에 속하지 않는 것들의 실체마저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결과가 명확한 물질세계를 선호하는 것과 물질세계만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태도인데도 말이다. 곧 후자의 관점만이 과학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오류가 빈번해졌고, 그런 오류를 부추기고 널리 퍼뜨린 장본인이 바로 과학자들이었다. 자연과학 분야는 물질세계의 탐구에만 집중한다. 자연과학은 지금껏 다른 학문들이 거두지 못했던 큰 성취를 이뤘다. 하지만 자연과학은 스스로 정한 한계 때문에 비물질적 세계의 실체와 원리에 대해서는 어떤 설명도 내놓지 못한다…. 과학만능주의는 나쁜 과학이다. 대개 수준 낮은 과학교사 또는 과학의 권위에 기대려는 사람들이 흔히 이런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오늘날 최고의 연구결과를 선보이는 진짜 과학자들은 과학만능주의와 거리가 멀다…. 진정한 과학자들은 비물질적 세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제시된 주장들을 꼼꼼히 살펴 그 증거들을 세련되게 정리해내고 싶어할 것이다.[1] 

 

또한 인류의 보편적인 죄악성을 바라보면서 우리 자신의 죄성과 그로 인한 구원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도 바로 이성의 역할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구원을 받는 과정을 바라보며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도 바로 이성의 기능이다. 그러니까 믿음의 신비, 즉 예수를 믿고서 회개하면서 느끼는 황홀한 하나님의 임재 경험조차도 우리의 이성이 관찰하고 분석하며 수용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구분해야 할 것은 타락한 이성이냐 아니면 회복된 이성이냐의 차이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이는 바로 예수와 석가의 차이이기도 하다.

 

단순히 이성은 신앙과 배치된다는 이원론적인 생각은 오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성을 오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성과 믿음은 함께 가는 것이고, 이성과 믿음이 조화를 이룰 때에 비로소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예수를 믿기 위해 우리는 여러 가지 이성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인류의 죄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관찰과 분석에 동의한 후에야 비로소 믿음의 선택이 주어진다. 그러니까 예수가 바로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음이전에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인류의 죄성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는 과정은 바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절차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정과 절차를 밟은 후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선택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적 구원은 이성과 믿음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에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계속해서 다음 담화에서도 기독교적 중도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과연 영과 육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과연 선과 악은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과연 하나님과 인간은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과연 예정과 자유의지는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을 통해 올바른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가를 밝히고자 한다.

 



[1]윤회의본질, 48-49,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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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9/14 [17:44]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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