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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2.14 [17:36]
올바른 집중은 무엇일까? (1)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45]
 
정성민

석가에 의하면,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서는 먼저 더러운 마음을 말끔히 씻어내야 한다. 바로 정진이다. 그리고 이러한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명상을 하는 대상(사건이나 사물)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바로 새김이다.그 다음으로 명상을 하는 대상과 자신이 하나가 되도록 몰입을 해야 한다. 바로 정신 통일을 이루는 집중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집중을 통해 정신통일을 이룰 때에 수행자는 해탈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한다.

 

1. 과연 올바른 집중이란 무엇일까?

 

이제부터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 즉 팔정도 가운데 마지막 단계인 올바른 집중을 다루고자 한다. 올바른 집중은 집착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는 수행자가 명상을 하는 대상과 하나가 될 정도로 그 대상에 생각을 몰입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올바른 집중은 정신집중 내지는 정신통일이라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불교사상의 이해>는 이렇게 설명한다,

 

정정(올바른 집중)은 바른 정신집중 또는 정신통일이다. 마음을 한 점에 집중하는 것을 말한다. ()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이기 때문에 때로는 2가지를 합해서 선정이라고 한다.[1] 

 

그렇다면 집착이란 무엇인가? 이는 중독에 가까운 개념이다. 즉 어떤 것에 마음이 항상 쏠려 있어 그것을 잊지 못하고 거기에 매달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담배나 술, 마약이나 성적인 쾌락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다. 집착에 대하여 석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동요하는 자들은 옛 것을 버리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만, 집착을 뛰어넘을 수 없다.

그들은 원숭이가 가지를 놓았다가 다시 붙들 듯 놓았다 가도 꽉 붙잡는다. (Stn.791)

 

그러므로 올바른 집중을 위해서는 오히려 무엇인가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집착은 내면에 잠재한 욕심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백창우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세간에서처럼 획득하려는 마음가짐으로는 깨닫기 어렵다.

깨닫기 위해선 깨달음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욕심으로 접근하면 안 된다. 오로지 순수한 마음가짐으로 다가가야 깨달음의 문은

쉽게 열린다.[2]

 

그렇다면 삼매는 무엇인가? 삼매는 올바른 집중을 통하여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를 말한다. 이는 흐트러지고 산란한 마음을 물리치고 내적으로 마음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매는 불교 수행의 이상적인 경지를 가리킨다. 삼매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관찰(새김)하므로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다. 이는 바람이 전혀 불지 않는 곳에서 타오르는 촛불의 불꽃처럼 흔들리지 않고 안정되고 차분한 마음상태로 비유될 수 있다.[3] 결과적으로 삼매는 올바른 집중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집중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되는가? 만일 마음이 이런 저런 생각으로 왔다 갔다 한다면 명상하는 대상의 초점이 흐려지게 된다. 결국 명상하는 대상이 왜곡되게 된다는 것이다. 석가는 이러한 집중되지 않는 마음을 바로잡기 위한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신적으로 열반을 지향한다면 졸음과 해태와 혼침을 극복하고

방일을 일삼아서도 안 되고 결코 교만해서도 안 됩니다. (Stn.942)

 

무엇을 먹을까?’, ‘어디서 먹을까?’, ‘잠을 실로 못 잤다’, ‘오늘 어디서 잘 것인가?’

집 없이 유행하는 학인은, 이러한 비탄을 야기하는 걱정을 제거해야 합니다. (Stn.970)

 

일체의 욕망은 단절해야 하고 의식의 근원을 끊어 내야 하네.

낮이나 밤이나 한결같이 지키면 반드시 선정에 들게 되느니라. (법구경, 250)

 

2. 그렇다면 집중된 마음은 어떤 것일까?

 

집중된 마음은 수행자가 명상하는 대상과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을 설명하자면, 처음에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마음의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수행자 자신이 그 대상에 흡수된다. 그리고서 마지막으로 수행자와 그 명상의 대상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된다.[4] 이때 수행자가 명상의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을 내면의 적멸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명상의 대상과 하나가 될 때 수행자의 정신이 통일되면서 그가 지닌 모든 번뇌나 망상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기 때문이다. 석가는 말한다,

 

이와 같이 나는 말한다.’라고 진술할 뿐, 마간디야여, 내게 사실에 대한 집착은 없습니다.

나는 관찰하면서 견해에 집착하지 않고, 성찰하면서 내면의 적멸을 본 것입니다. (Stn.837)

 

명상수행은 멈춤과 관찰이라는 두 가지 실천적인 작업을 필요로 한다. [5] 멈춤이란 호흡을 통해 정신과 신체의 활동을 중지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오염된 생각과 정신을 바로잡는 것이다. 관찰은 올바른 새김을 말한다. 그러므로 관찰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눈으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결국 올바른 집중은 멈춤과 관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런 면에서 석가는 혼자서 수행하는 명상의 중요성을 말한다,

 

홀로 앉아 명상을 닦고 수행자로서의 수행을 배우십시오.

홀로 있는 데서 기쁨을 찾으십시오. 홀로 있는 것이 해탈의 길이라 불립니다. (Stn.718)

성자의 삶을 사는 님은 탁발을 하고 나서, 나무 아래로 가까이 가서 자리를 잡고,

숲 속의 빈터에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슬기롭게 선정에 전념하고, 숲 속에서 즐기며,

스스로 만족 해하며, 나무 아래서 선정을 닦으십시오. (Stn.708-09)

 

적게 먹고 몸에서 탐욕을 내려놓은 체 그윽한 곳에서 수행하며 진리에 뜻을 두어 이로써 지혜가 있으면 이것이 능히 붓다의 가르침을 받드는 것이니라. (법구경, 185)

 

이러한 석가의 명상수행은 홀로 조용한 곳에서 연기법의 이치를 생각하는 것이다. 즉 의식이 완전히 몰입되어 정신이 통일된 상태에서 어떠한 대상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다. 백창우 선생은 이러한 석가의 명상수행법을 사과를 대상으로 삼아서 설명한다,

 

연기법은 개체가 생기고 사라지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사과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살펴보자.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생겨나긴 하지만, 사과나무만으로는 사과가 생겨날 수가 없다.

태양과 공기와 땅과 영양분과 농부와 사계절과 낮밤과 적절한 기온과 기압 등등이 함께 해야 한다. 그러한 것들은 지구가 있어야 하고, 지구는 태양계가 있어야 하고,

태양계는 은하계가 있어야 하고, 은하계는 우주가 있어야 한다.

결국 우주의 모든 것들이 함께 참여하여 만들어낸 것이 사과이다.

사과나무만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주의 수많은 것들이 원인과 조건으로 참여하여 생겨난 것이다.

사과 속에는 우주의 모든 것들이 들어 있다.

사과는 다른 것들과 모양으로 구분되지만 다른 것들과 내용으로는 구분할 수가 없게 된다. 사과가 아닌 것들이 모여서 사과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겨난 사과를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기존에 알고 있던 사과와는 전혀 다른 사과이다.

사과는 사과일 수밖에 없다는 실체로서의 관념이 허물어지고, 우주의 모든 것들이 모여서 지금 이 순간에 임시로 나타난 모습이 사과이다.

 

사과가 무엇일까?”라고 찾아보면, 우주의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로 환원된다.

우주의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서 사과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모양을 사과라고 할 뿐인데 이름을 붙이면서 이름에 해당하는 이미지가 머리에 새겨지고 이름에 해당하는 사과가 또 다시 관념이 형성되면서 사과가 정말로 실재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이렇게 생겨난 사과이기에 사과라고 할 것이 딱히 없다.

사과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로 형성된 것이니, 굳이 사과가 뭐냐고 찾아보면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이다. 그리고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도 역시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로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 거듭거듭 원인과 조건들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우주이다.

 

따라서 일체의 존재는 연기법칙으로 생겨나고 사라지는 현상적 존재이다. 실체가 없는 존재이기에 꿈 같은 존재라고 한다. 원인과 조건이 모이면 생겨나고 흩어지면 사라지는 존재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꿈 같은 존재현상을 빈 존재하고 하는데, 실체라고 할 것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무아적인 존재라고도 한다. 역시 실체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6]

 

결과적으로 올바른 집중은 명상수행의 대상과 수행자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과를 대상으로 명상을 할 때에 우리가 사과와 하나가 되는 경험은 결국 우리가 사과처럼 실체가 없는 무아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3. 그렇다면 명상수행의 목적은 무엇일까?

 

명상수행의 목적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지혜, 곧 궁극적인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열반을 깨닫는 것이다. 그럼 언제 열반을 깨달을 수 있을까? 그것은 사물이나 사건(명상의 대상)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이 바라볼 수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열반을 깨달을 수 있는 눈이 열릴까? 그것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장애요소를 먼저 제거해야 한다. 이는 탐욕, 분노, 악한 의도, 게으름, 근심, 불안, 의심과 같은 악하고 산란한 마음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깨끗하고 차분하며 안정된 마음상태를 가지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마음을 집중하여 사물이나 사건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수행자 자신이 객관적 삼자가 되어서 대상이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7] 어느 날, 수행자 한 사람이 석가에게 질문을 한다,

 

[질문자] 어떻게 관찰을 하고, 어떻게 계행을 지니면, 그를 적멸에 이른 님이라고 합니까?

위없는 님께 묻사오니 고따마시여,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Stn.848)

 

이에 석가는 이렇게 답한다,

 

몸이 부수어지기 전에 갈애를 떠나 과거의 시간에 집착하지 않고,

눈앞의 현재에도 기대하지 않아, 그는 선호하는 바가 없습니다. (Stn.849)

그는 미래를 원하지도 않고, 과거를 애달파 하지도 않고,

모든 접촉으로부터의 멀리 여읨을 관찰하여, 견해들에 이끌리지 않습니다. (Stn.851)

평정하여 항상 새김을 확립하고, 세상에서 동등하다거나 우월하다거나

또는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일체의 파도가 없습니다. (Stn.855)

세상에서 자기의 것이 없고, 자기 것이 없다고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모든 현상에 이끌리지 않으니 그야말로 고요한 님이라 불립니다. (Stn.861)

 

결과적으로 명상수행의 목적은 올바른 새김을 통해서 올바른 집중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올바른 집중을 통해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이 없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상태를 삼매라 말한다. 그러므로 삼매는 정신을 통일하여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즉 명상하는 대상과 수행자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수행자가 생각하는자신의 것’, ‘자신의 생각,’ ‘자신의 소유가 모두 사라지는 무아의 경지를 경험하는 것이다. 과연 자신의 소유나 생각이 사라지는 무아의 경지는 어떤 것일까? 한국의 학승, 김사업 스님은 이러한 무아의 경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흔히 사람은 정신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나의 몸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부모님의 두 정혈이 합쳐져서 현재의 이 몸이 잉태되었다. 부모님의 정혈은 내 것이 아니니 처음부터 이 몸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내 몸의 시작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태어난 뒤부터는 나 혼자 힘으로 몸을 유지해온 것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이것도 큰 착각이다.

오늘 저녁 밥상에 올라오는 김치 한 쪽은 온 우주의 합작품이다. 배추가 자라는 땅은 아득한 옛날 바다 아래의 암반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암반이 지금의 비옥한 토지가 된 것은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태양, , 바람, 낙엽 등에 의해서 였다. 배추 씨앗 하나가 만들어지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했으며, 배추가 김치로 익기까지 얼마나 많은 미생물이 참여했던가?

배추를 뽑아 다듬고 양념을 버무린 사람들의 노고, 그 김치를 보관하는 독을 만들 때 쏟아 부었던 그 누군가의 땀, 배추와 독을 운반한 자동차를 발명한 사람의 열정, 그 자동차를 제조한 사람의 기술과 힘 또한 그 사람들을 낳아서 기른 부모님들의 정성과 애환, 그 부모님의 부모님은 또 얼마나 정성을 다했던가?

이 모든 것이 내 입에 들어온 김치 한 쪽에 다 들어가 있다. 김치 한 쪽이 이러하거늘, 내가 이때까지 먹었던 음식과 입었던 옷과 살았던 집은 또 어떨까? 따라서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합작품이라 해야 맞다.[8]

 

그러니까 석가가 말하는 무아의 경지는 보통 신비주의적인 종교들이 말하는 황홀경의 체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석가가 말하는 무아의 경지는 수행자가 내 생각, 내 소유 등과 같은 자아 중심적인 생각을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삼매의 경지에 이르러 무아를 깨우친 자들은 그 모든 집착을 넘어서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가졌던 소유물에 대한 애착도 사라진다.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감각적 쾌락의 욕망도 한 순간에 사라진다. 결국 자아나 자기 소유의 개념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신을 실체가 없는 무아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고요한 님이라고 나는 말합니다.

그에게는 매듭이 존재하지 않고, 이미 모든 애착을 뛰어넘었습니다.

그에게는 자식도 가축도 논밭도 재산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미 얻은 것도,

아직 얻지 못한 것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Stn.857-58)  

 

이러한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기 위해 잘 쓰이는 열 가지 부정한 것들에 대한 명상이 있다. 초기 경전에는 이러한 명상의 대상이나 장소가 101가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신체에 대한 관찰, 즉 죽은 시체가 지닌 열 가지 특성[9]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1. 부풀어 오른 시체에 대한 지각

2. 푸르게 멍든 어혈을 지닌 시체에 대한 지각

3. 고름이 가득한 시체에 대한 지각

4. 부패해서 갈라진 시체에 대한 지각

5. 동물이 먹고 남은 시체에 대한 지각

6. 흩어진 시체에 대한 지각

7. 살해되어 사지가 흩어진 시체에 대한 지각

8. 피로 물든 시체에 대한 지각

9. 벌레들이 모여 우글거리는 시체에 대한 지각

10. 해골과 뼈로 구성된 시체에 대한 지각

 

호흡 새김을 수행하면서 시체의 열 가지 특성과 같은 신체에 대한 관찰을 하게 될 때에 어느 순간 수행자의 마음이 그 대상과 일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때에 수행자의 호흡이 잦아들며 점차 미세 해진다. 이윽고 고요하고 평안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 석가는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 호흡 새김에 대한 집중을 수행하고 익히면 고요해지고 승묘해지고 오염을 여의고 행복해져서 악하고 불건전한 법들이 생겨날 때마다 즉시 그것들을 사라지게 하여 소멸시킨다.[10]

 

4. 무엇이 올바른 명상의 자세일까?

 

결국 삼매 (올바른 집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올바른 명상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명상의 자세인가? 먼저 명상수행의 기초가 되는 예비삼매를 알아보자. 예비삼매는 명상수행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예비 현상이라고 부른다.[11] 그 과정은 아래와 같다.

 

1. 다리를 편하게 결가부좌하고 상체를 곧게 세운 뒤에 손을 포개고

  머리를 똑바로 치켜세운다.

2. 입을 다물고 눈은 반쯤 감고 숨을 고르게 한다.

3. 마음을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한다. 바로 호흡 새김을 하는 것이다.

4. 중간에 마음이 흐트러지면 알아채고 다시 집중하는 과정을 밟는다.

 

이러한 예비현상을 거치면서 삼매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때에 다섯 가지 마음의 장애들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 , 해태와 혼침, 매사의 의심, 분노, 흥분과 회한 그리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점차로 사라져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올바르고 순수한 집중을 통하여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삼매의 상태를 말한다. 삼매는 불교 수행의 이상적인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과연 수행자가 삼매의 상태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과연 삼매를 통한 궁극적인 깨달음이 우리를 그 모든 정신적인 고통에서 해탈하게 할 수 있을까? 다음 담화에서 이러한 삼매의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1]불교사상의이해, 95.

[2]연기맵이면누구나깨닫는다, 56.

[3]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136.

[4] Ibid.

[5] Ibid.

[6]연기맵이면누구나깨닫는다, 82-84.

[7]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187-88.

[8]인문학을좋아하는사람들을위한불교수업, 48-49.

[9]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137-38.

[10] Ibid, 139.

[11] Ibid,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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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9/08 [14:28]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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