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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0.22 [09:07]
올바른 새김은 무엇일까? (1)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43]
 
정성민

1. 과연 올바른 새김은 무엇일까?

 

올바른 새김은 열반에 이르기 위한 여덟 가지의 단계 중에 일곱 번째이다. 올바른 새김은 명상수행을 할 때에 어떠한 사건이나 사물을 아무런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시각으로 사물을 관찰하는 것이다. 석가는 이러한 관찰을 새김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올바른 새김은 자연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관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새김은 정진을 하고 난 후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1] 다시 말해서 올바른 새김은 올바른 정진의 힘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야 올바른 시야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악하고 더러운 생각들을 물리쳐서 마음이 깨끗해지고서야 올바른 새김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사물이나 사건을 편견이나 선입견없이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마음이 깨끗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 순서상으로 악하고 더러운 마음을 제거하는 정진이 새김보다는 우선이라는 것이다. 즉 정진이 새김을 앞서고 새김은 정진을 뒤따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올바른 정진을 이루기 전에는 수행자의 감각기관이나 의식은 오염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수행자의 관점이나 생각이 개인적인 편견과 선입견으로 가득 차 있기에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진은 우리 생각 속의 잘못된 느낌이나 감정, 혹은 인상을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면 사물이나 사건을 인상이나 겉모습으로만 보지 않고 대상을 꿰뚫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관찰하는 올바른 새김이 가능해지는 것이다.[2] 이에 대해 <연기맵이면 누구나 깨닫는다>의 저자, 백창우 선생은 이렇게 설명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려면 기존의 선입견을 모두 비워야 한다.

알게 모르게 나의 의식에 자리한 관념들을 통해서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생각의 필터()을 통해서 대상을 바라본다.

생각의 필터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모든 수행은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게 하는 생각의 막을 벗어나기 위함이다.

…… 스스로의 선입견을 살펴보는 버릇을 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이 부분이 죽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만이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라고 믿는 유아기적 보호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이런 부분은 이상한 고집을 부리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정견이 쉽사리 자리 잡지 못하는 것도 이와 같은 연유이다. 그러나 일단 보기 시작하면 그 자체가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쉽게 극복된다.[3]

 

결과적으로 올바른 새김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통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새김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올바른 새김을 통해 석가의 인생관을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석가는 올바른 새김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한다,

 

무엇이 네 가지 새김의 토대인가? 수행승들이여, 여기 한 수행승이 있어 열심히 노력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신체에 대해 신체의 관찰한다. 열심히 노력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고 감수에 대해 감수를 관찰한다. 열심히 노력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며 마음에 대해 마음을 관찰한다. 열심히 노력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올바로 새겨 세상의 욕망과 근심을 버리며 사실에 대해 사실을 관찰한다.[4]

 

석가는 올바른 새김을 위하여서 자신의 감각기관을 제어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을 통제하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세상에는 다섯 가지 티끌이 있으니, 새김을 확립하고, 그 제어를 배워야 하니,

, 형상, 소리, 냄새, , 그리고 감촉에 대한 탐욕을 이겨내야 한다. (Stn.974)

 

결과적으로 올바른 새김은 사물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므로 깨닫게 되는 궁극적인 깨우침의 과정인 것이다. 곧 열반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감각기관을 제어하여 청정하게 살며,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실현하니, 이것이야 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 (Stn.267)

 

즐거운 것이든 괴로운 것이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이든

안으로나 밖으로나 어떠한 것이든 느껴진 것이다. ‘느껴진 모든 것은 괴롭다.’고 알고,

수행승은 부서지고 마는 허망한 사실에 접촉할 때마다 그 소멸을 보아 이처럼 그곳에서 사라져 모든 느낌을 부수고 바램 없이 완전히 열반에 든다. (Stn.738-39)

 

그렇다면 어떻게 올바른 새김을 이룰 수 있을까? 올바른 새김은 4가지 과정을 단계적으로 밟으면서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신체에 대한 관찰로 시작한다.

2)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관찰한다.

3) 마음 혹은 의식을 관찰한다.

4) 법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완성된다.


새김을 위한 관찰은 사물을 그 생성과 소멸이라는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서 사물의 내적인 속성과 외적인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다.[5]이번 담화에서는 올바른 새김의 첫번째 과정인 신체에 대한 관찰만을 살피고자 한다. 석가의 신체에 관한 관찰을 통해 그의 인생관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2. 그렇다면 신체에 대한 관찰은 무엇일까?

 

신체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관찰은 우리의 호흡을 통해서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즉 호흡 새김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명상의 기초이다. 그러므로 호흡 새김은 수행자를 궁극적인 깨달음(명지)으로 이끄는 출발점이다. 석가는 호흡을미세신이라 불렀다. 이는 호흡이 우리의 신체와는 구별되는 아주 미묘한 몸이라는 뜻이다.[6] 석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호흡에 관한 새김을 닦고 익히면, 네 가지 새김의 토대를 원만히 하고, 네 가지 새김의 토대를 닦고 익히면,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원만히 하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를 닦고 익히면, 명지에 의한 해탈을 원만하게 한다.[7]

 

그렇다면 호흡을 하는 과정이나 그로 인한 몸의 움직임을 어떻게 관찰할 수 있을까? 호흡에 관한 관찰을 하려면 우선 숲 속의 나무 밑이나 한적한 곳을 찾아야 한다.

 

수행승은 싫어하여 떠나서 나무 아래, 혹은 묘지나 산골짜기의 동굴 속에

아무도 없는 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Stn.958)

 

그리고 그곳에서 가부좌를 하고 몸을 곧게 세운다. 즉 왼쪽 발을 오른쪽 넓적다리 위에 놓고 오른쪽 발을 왼쪽 넓적다리 위에 놓고 앉아서 몸을 곧게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몰입을 해야 한다. 이러한 호흡을 통한 몰입은 4가지의 기본적인 단계를 갖는다. 그 구체적인 단계는 다음과 같다,[8]

 

1) 단순하게 숨을 들여 마시고 내뱉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으로서 들숨과 날숨의 길고 짧음을 관찰한다.

2) 새김이 점점 깊어지면서 들숨과 날숨의 시작과 끝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관찰한다.

3) 호흡하면서 온몸을 분명하게 지각한다.

4) 신체적인 기능이 고요해지면서 호흡이 극도로 미세하고 맑게 된다.

 

호흡의 통한 관찰을 통해 알게 되는 사실은 무엇일까? 그것은 호흡을 통한 몰입이 신체적인 것에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정신적인 것으로 옮겨가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수행자가 이러한 호흡을 통한 관찰을 실행할 때에 자신 몸의 정적이거나 동적인 활동 모두를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걷거나 서 있거나 앉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하는 신체의 전 과정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9] 결국 신체에 관한 관찰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몸은 수행자 자신의 생각과 따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즉 신체는 수행자의 마음과 생각대로 움직이거나 따라 주지 않는다. 이는몸은 우리의 마음과는 다른 별개의 존재라는 것이다.[10] 즉 우리의 신체는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과는 구별되어지는 또 다른 객관적인 실체라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걷거나 또는 서거나 혹은 앉거나 눕거나 몸을 구부리거나 혹은 편다. 이것이 몸의 동작이다. (Stn.193)

 

결국 수행자는 자신의 마음과는 따로 구별하여 자신의 몸을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몸의 실체를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이러한 명상수행은 피부로 덮여 있는 신체의 각 부분이나 장기에 대한 관찰, 그리고 무덤에 버려진 사체에 대한 관찰까지도 포함한다. 그렇다면 수행자가 신체에 관찰을 통해 무엇을 깨달을까? 그것은 우리의 신체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을 때 수행자는 자신이 지닌 욕망이나 욕구, 즉 육체적인 쾌락이나 성적인 충동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11] 석가는 신체를 관찰하고 분석하여 그것이 얼마나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몸은 뼈와 힘줄로 엮어 있고, 내피와 살로 덧붙여지고 피부로 덮여져 있어,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내장과 위, 간장의 덩어리, 방광, 심장, 폐장, 신장,

비장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콧물, 점액, , 지방, , 관절액, 담즙, 임파액으로 가득 차 있다. 또한 그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나온다.

눈에서는 눈꼽, 귀에서는 귀지가 나온다.

코에서는 콧물이 나오고, 입에서는 한꺼번에 담즙이나 가래를 토해내고,

몸에서는 땀과 때를 배설한다. 또 그 머리에는 빈 곳이 있고 뇌수로 차 있다.

그런데 어리석은 자는 무명에 이끌려서 그러한 몸을 아름다운 것으로 여긴다. (Stn.194-99)

 

인간의 이 몸뚱이는 부정하고 악취를 풍기며, 가꾸어지더라도, 온갖 오물이 가득 차, 여기저기 흘러나오고 있다. 이런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생각하건데 거만하거나 남을 업신여긴다면, 통찰이 없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Stn.205-06)

 

이러한 신체에 관한 분석적 관찰은 우리로 하여금 신체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신체에 대한 이러한 혐오감은 감각적인 쾌락의 조건을 뿌리까지 뽑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육체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견해는 우리로 하여금 감각적 쾌락에서 돌아서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신체의 관찰을 통해 내리게 되는 최종적인 결론은 우리의 신체는 더러운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인생은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로 하여금 육체의 매력에 집착하는 것을 막아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욕망에 사로잡혀서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정말로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특별히 죽은 시체에 대한 관찰은 인생의 무상함을 더욱 비참하게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또 죽어서 몸이 쓰러졌을 때에는 부어서 검푸르게 되고,

무덤에 버려져 친척도 그것을 돌보지 않는다.

개들이나 여우들, 늑대들, 벌레들이 파먹고, 까마귀나 독수리나

다른 생물이 있어 삼킨다. (Stn.200-01)

 

이러한 죽은 시체에 대한 관찰에 대하여 월폴라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또 다른 육체에 관한 분석적인 관찰로는 죽은 후에 몸이 해체되는 사체에 대한 관찰이 있다. 사체가 묘지에 유기되어 며칠이 경과한 뒤에 시체가 팽창하고 푸르게 멍든 어혈이 있고 고름이 가득한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리고 까마귀, 독수리, , 승냥이 등의 각종 생류가 잡아먹거나 뜯어먹고 남은 시체에 대한 관찰이 있으며 그 밖에 사체에 살과 피가 있는 근육이 붙은 해골이나 살은 없지만 피가 있는 근육이 붙은 해골이나 살과 피가 없는 근육이 붙은 해골이나 관절이 풀어져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손뼈, 발뼈, 정강이뼈, 넓적 다리뼈, 골반뼈, 척추뼈, 두개골과 사방팔방으로 흩어진 해골들을 관찰하는 수행법이 있다.[12]

 

결과적으로 호흡 새김은 인생은 참으로 덧없고 무상한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석가는 인생이 무상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참으로 사람의 목숨은 짧으니 백 살도 못되어 죽습니다.

아무리 더 산다 해도 결국은 늙어 죽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여겨 슬퍼하지만 소유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덧없는 것이라고 보고, 재가의 삶에 머물지 마십시오.

이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죽음으로 그것을 잃게 됩니다.

현명한 님은 이와 같이 알고내 것이라는데 경도되지 말아야 합니다. (Stn.804-806)

 

3. 과연 석가의 인생관은 무엇이 문제인가?

 

앞서 밝혔듯이, 석가는 육체의 매력이나 성적인 관계의 즐거움을 매우 부정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어쩌면 석가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자로 보일 수 있다. 그에게 있어 감각적 쾌락의 욕망, 곧 성적인 쾌락이나 충동은 억제되고 통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석가는성적 교섭에서 떠나 온갖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라.”고 말한다. (Stn.704) 석가에게 있어서 신체에 관한 관찰의 결론은 신체는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어 애착을 품을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신체는 더럽고 부정한 것이고, 이러한 신체를 탐하는 것은 헛된 것이라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탐욕에 물들어 아름다워 보이는 인상을 회피하라.

부정한 것이라고 마음을 닦되,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켜라. (Stn.341)

성적 교섭에 탐닉하는 자는 멧떼이야여, 가르침을 잃고, 잘못 실천합니다.

그의 안에 있는 탐닉은 천한 것입니다. (Stn.815)

 

딴하와 아라띠와 라가를 보고 성적 교섭에 대한 욕망이 결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오줌과 똥으로 가득 찬 존재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두 발조차 건드리길 원하지 않습니다. (Stn.835)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인간이 지닌 육체의 매력을 이렇게까지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아야 하는 가이다. 석가는 이러한 신체에 관한 관찰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분석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우리가 그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석가가 바라보는 인생관이 정말로 객관적일까? 물론 석가의 주장이 분석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발견하고 깨달은 인생무상의 진리는 과연 그가 생각한대로 합리적이고 객관적일까? 그가 말하는 인생관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았을 때, 석가의 인생관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는 않았을까? 혹시라도 석가의 인생관이 너무 염세적이거나 허무주의적인 것이 아닐까? 석가의 세계관에 대한 이러한 의문점들은 피할 수 없다고 본다.

 

4. 구약 성경이 말하는 인생관은 무엇일까?

 

물론 석가가 주장하는 것처럼 구약성경도 인생무상을 말한다. 특별히 전도서는 아예 인생무상을 노래한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전도서 1 2-3)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전도서 2 22-23)

 

인생무상에 관하여 전도서가 가장 비극적으로 표현한 곳은 전도서 4:2-3절이다.

전도서 기자는 말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

 

이러한 전도서 기자의 인생에 관한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는 석가의 인생관과도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전도서 기자는 인생무상만을 노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도서 기자에게 있어 인생무상은 삶의 결론에 해당한다. 그는 그 삶의 과정으로서 기쁘고 즐거워하는 희락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것보다 그의 마음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로다. (전도서 2 24)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전도서 3 12-13)

 

더 나아가 전도서 기자는 사람이 누리는 희락 중에서도 아내와 함께 즐기는 성적인 생활이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전도서 기자는 말한다,

 

네 헛된 평생의 모든 날 곧 하나님이 해 아래에서 네게 주신 모든 헛된 날에

네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 그것이 네가 평생에 해 아래에서 수고하고

얻은 네 몫이니라. (전도서 9 9)

 

심지어 아가서는 인간의 육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남녀 간의 성생활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시적으로 묘사하기까지 한다,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오는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네 목은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방패 천 개,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 내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오너라.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내 누이, 내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향기롭구나.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내 누이, 내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풀과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아가서 4 1-15)

 

결과적으로 성경은 육체의 아름다움과 부부간의 성생활이 지닌 즐거움을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육체의 매력이나 아름다움에 대하여 다윗은 이렇게 노래한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시편 139:14)

 

5. 예수가 말하는 인생관은 무엇일까?

 

석가에게 있어서 신체에 관한 관찰의 결론은 신체는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어 애착을 품을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신체는 더럽고 부정한 것이고, 이러한 신체를 탐하는 것은 헛된 것이고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과연 예수의 인생관은 이러한 석가의 인생관과 무엇이 다를까? 먼저 예수는 인간의 신체를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마음이 더럽지 육체는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석가는 인간의 마음은 더러울 수도 있고 더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육체는 언제나 더럽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물로 가득 찬 인간의 육체와 죽으면 썩어지는 비참한 시체를 명상하므로 더러운 마음을 깨끗한 마음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는 인간의 악한 마음은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더럽고 악한 마음을 씻거나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물로 가득 차 인간의 신체는 더러운 게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오물로 가득 인간의 신체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 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나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15:16-20)

 

그러므로 예수는 인간의 신체를 더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인간의 신체는 아주 귀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생명체들이 먹고 마시는 것들을 신경 쓰신다고 말한다. 예수는 말한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태복음 6:26-32)

  

결과적으로 예수는 인간의 신체를 더럽게 여기지 않을 뿐더러 아주 귀하게 여긴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를 따르는 수 많은 병자들을 일일이 고쳐 주셨던 것이다. 이에대해 마태복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않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마태복음 4:23-24)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 들더라. (마태복음 8:2-3, 14-15)

 

예수는 심지어 그의 제자들에게 이러한 병고치는 능력을 허락하셨다. 이에 대해 마태복음 10:1절은 기록한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는 귀신을 더럽다고 생각하고, 인간의 마음도 더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의 신체는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예수는 신체를 영혼을 담는 귀한 그릇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6. 신체에 관한 견해에 대하여 왜 예수와 석가는 이토록 다를까?

 

그것은 예수가 유신론에 유아론을 주장하는 분이고, 석가는 무신론에 무아론을 주장하는 분이기에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기에 그 모든 생명은 귀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신체와 더불어 모든 생명체의 신체도 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신체의 생노병사의 과정이나 생리현상도 아름다운 것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분비물, 즉 땀이나 콧물 그리고 똥까지도 더러운 것이 아니다. 단지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과 그러한 타락을 유도한 마귀만이 더럽고 악한 것이다.

 

반면에 석가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은 우연히 맞이한 세상이고, 그 모든 생명은 고통가운데 몸부림치기에 인생은 아름답지 못한 것이다. 인간의 성욕이 아름답지 못하고, 인간의 분비물도 아름답지 못하다. 더럽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의 마음은 이러한 더럽고 허무한 세상적인 것들로 인해 탐욕에 불타오른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신체나 세상적인 욕망의 대상들이 그렇게도 허무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가는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의 대상들은 더러운 것이고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러한 깨우침을 위해 올바른 새김을 해야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신체에 대한 관찰이다.

 

신체에 대한 관찰을 통해 무엇을 깨달을까? 바로 인간의 분비물이나 사후의 시체의 썩어져 가는 과정은 더럽고 혐오스럽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묵상하므로 성욕을 잠재우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이 죽어서 썩어져 가는 시체를 명상하며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현재 갈구하는 그 모든 세상적인 목마름과 욕망들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평안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예수는 인간의 문제와 고통은 신체적인 욕망이나 외부적인 환경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우리를 이를 인간의 타락내지는 인간의 죄라고 부른다.

결국 인간의 더럽고 악한 마음은 신체를 관찰하거나 인생무상을 깨닫거나 해서도 선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죄는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틀어진 것이기에 인간의 고통이나 저주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만이 풀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에 평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과 방향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는 말한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사야 55:6-8)

 

과연 누구의 인생관을 따를 것인가? 그 선택은 바로 우리 각자의 몫이다. 만일 당신이 무신론자이며 무아론자라면 석가의 인생관이 좋은 선택일 것이고, 만일 당신이 유신론자이고 또한 유아론자라면 예수의 인생관이 바로 당신의 것이다.

 

 

 



[1]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120.

[2] Ibid, 120-21.

[3]연기맵이면누구나깨닫는다, 31-33.

[4]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121.

[5] Ibid, 122.

[6] Ibid.

[7] Ibid, 123쪽에서간접인용.

[8] Ibid, 123.

[9] Ibid, 123-24.

[10] Ibid, 124.

[11] Ibid.

[12] Ibid,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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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9/05 [04:19]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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