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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0.22 [08:02]
올바른 정진은 무엇일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42]
 
정성민

1. 과연 올바른 정진은 무엇일까?

 

석가는 수행자들로 하여금 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올바른 정진을 하라고 말한다,

 

갈애를 없애기 위해서는 나태하지 말고, 바보가 되지 말고, 배우고, 새김을 확립하고,

가르침을 헤아려 단호히 정진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가라. (Stn.70)

질병을 만나고, 굶주림에 처해도 참아내고 추위와 무더위도 참아내야 하리라.

여러 가지로 집 없이 그러한 것들을 만나더라도 정진하며 굳세게 노력해야 한다. (Stn.966)

 

올바른 정진은 더럽고 악한 마음을 깨끗하고 선한 마음으로 바꾸려는 노력이다. 이는 마치 목욕탕에서 더러워진 우리의 몸을 물로 씻어내듯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점차 더러워지는 마음을 깨끗하게 씻는 것이다. 마음이 깨끗하고 선해질 때 비로소 명상수행을 통한 정신집중(마음의 통일)이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올바른 정진은 해탈에 이르기 위해 정말 필수적인 단계이고 매우 중요한 과정인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속박에서 평온으로 이끄는 정진이 내게는 짐을 싯는 황소입니다.

슬픔이 없는 곳으로 도달해서 가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Stn.79)

정진으로 괴로움을 뛰어넘고, 지혜로 완전히 청정해 집니다. (Stn.184)

 

여기서 속박은 나쁜 생각, 감정, 의지 등과 같이 악하고 더러운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평온은 이러한 오염된 생각들을 깨끗이 씻어서 그 모든 근심에서 자유로워진 상태를 말한다. 즉 해탈이나 열반에 도달한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2. 악하고 더러운 마음을 깨끗이 씻는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은 무엇일까?

 

석가는 올바른 정진을 위한 장애물을 다섯 가지로 말한다. 바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 성내는 분노, 해태와 혼침, 흥분과 회한, 매사의 의심이 그것이다.[1]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올바른 정진을 위한 첫번째 장애물이다. 이는 인간이 지닌 감각기관이 그 대상을 접촉할 때로부터 발생한다. 곧 색깔, 소리, 냄새, , 감촉이 바로 그 다섯가지 감각들이다. 석가는 말한다,

 

형상, 소리, 냄새, , 감촉, 사실들은 사람들이있다.’라고 말하는 한,

모두가 그들에게 갖고 싶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것이다. (Stn.759)

 

그리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는 부, 권력 그리고 명예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석가는 이렇게 말한다,

 

농토나 대지나 황금, 황소나 말, 노비나 하인, 부녀나 친척, 그 밖에 사람이 탐내는 다양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의 대상이 있습니다. (Stn.769)

 

성내는 분노는 올바른 정진을 위한 두 번째 장애물이다. 이는 자신과 남에 대한 증오, 화냄, 원한 등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석가는 말한다,

 

화를 내고 원한을 품으며, 악독하고 시기심이 많고

소견이 그릇되어 속이길 잘 한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 (Stn.116)

 

해태와 혼침은 올바른 정진을 위한 세 번째 장애물이다. 해태는 정신적으로 아둔한 것을 의미하고, 혼침은 마음이 무겁고 가라앉아 졸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석가는 말한다,

 

정신적으로 열반을 지향한다면 졸음과 해태와 혼침을 극복하고,

방일을 일삼아서도 안 되고, 결코 교만해서도 안 됩니다. (Stn.942)

 

흥분과 회한은 올바른 정진을 위한 네 번째 장애물이다. 흥분은 마음이 불안정하고 들뜬 상태를 말하고, 회한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바라지 않았던 결과에 대한 근심과 걱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석가는 과거에 대한 후회에 사로잡혀 있고 미래의 일어날 일에 대한 불안과 근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과거에 있었던 것을 완전히 말려버리고, 미래에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게 하십시오.

그리고 현재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평안하게 유행할 것입니다. (Stn.949)

 

의심은 올바른 정진을 위한 다섯 번째 장애물이다. 의심은 어리석음이나 신뢰가 부족해서 습관적으로 무엇인가를 결정하거나 해결하지 못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석가는 열반에 든 자는 그 모든 의심을 소멸한 완전한 자라고 말한다,

 

번뇌가 부서지고 의심이 소멸된 완전한 님, 위대한 성자에게 다른 음식과

음료수로 달리 봉사하십시오. 공덕을 바라는 자에게 복 밭이 될 것입니다. (Stn.82)

 

위의 다섯 가지의 장애물 중에 선정이나 삼매의 수행에 가장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감각적인 쾌락의 욕망과 성내는 분노라고 한다.[2] 석가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해탈을 이루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에서 실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버리기 어렵다.

욕망을 조건으로 존재의 환희에 묶인 자들, 그들은 미래와 또는 과거를 생각하면서,

현재나 과거의 감각적 욕망에 탐착하므로 스스로 해탈하기 어렵고 남에 의해 해탈을 얻기도 어렵다. (Stn.772C-773)

 

성내는 분노는 다른 사람에 대한 원한이나 증오심을 말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화냄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 번째 장애인 흥분과 회한과 다섯 번째 장애인 매사에 의심의 바탕은 바로 어리석음이다.[3] 석가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경계한다,

 

차라리 홀로 선을 지킬지라도 어리석은 이와는 함께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어리석은 이가 스스로 지혜롭다 이른다면 이는 어리석음 가운데 심한 것이니라.

어리석은 이가 천수를 다하도록 지혜 있는 이를 곁에서 모신다 해도

또한 참된 법을 알지 못하는데 마치 국자가 음식 맛을 짐작하는 것과 같으니라.

어리석은 이가 베푼 행위는 자신에게도 근심을 초래하게 된다네.

거리낌 없이 악업을 짓게 되는데 스스로 무거운 재앙을 이르게 하느니라.

(법구경, 061, 063-65)

 

어리석음으로 인한 이들 장애 요소들은 결국 해탈에 이르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처음 두 가지 장애 요소들(감각적 쾌락의 욕망과 성내는 분노)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빈약하여 덜 위협적이다.[4] 결과적으로 석가는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리고, 동요없이, 의혹을 넘어 화살을 뽑아버린 수행승은,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처럼,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린다. (Stn.17)    

 

3. 어떻게 하면 다섯 가지 장애물들을 극복하고 올바른 정진을 얻을 수 있을까?

 

석가는 올바른 정진을 위한 4가지의 노력을 말한다. 제어에 의한 노력, 버림에 의한 노력, 수행에 의한 노력, 수호에 의한 노력이 바로 올바른 정진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인 것이다. 이는 더러운 마음을 씻고 깨끗한 마음을 얻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들을 말한다.

 

첫째로 올바른 정진을 위하여 제어에 의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우리의 감각기관을 제어하고 자제하려는 시도이다. 석가는 말한다,

 

감관의 수호와 청정한 삶과 감관의 제어와 자제, 이것으로 고귀한 님이 됩니다.

이것이 으뜸가는 고귀한 님입니다. (Stn.655)

 

제어에 의한 노력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더럽고 악한 마음을 앞으로 생겨나지 않도록 미리 막는 것이다. 석가는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탐욕을 막기 위하여 먼저 우리의 시각기관을 통제하라고 권고한다. 즉 눈에 보이는 대로의 인상을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탐욕에 물들어 아름다워 보이는 인상을 회피하라.

부정한 것이라고 마음을 닦되, 마음을 하나로 집중시켜라.

인상을 여읜 경지를 닦아라. (Stn.341-42)

 

그렇다면 시각기관()을 제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상은 어떤 대상에 대하여 우리 마음속에 새겨지는 느낌이다. 즉 생김새나 겉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시각기관을 잘 통제하지 못하면 우리의 의식이 사물의 겉모양이나 눈에만 보이는 것들로 인하여 그 사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눈이 아름다운 여인이나 잘생긴 남성을 본다면 어떨까? 아마도 우리는 그 매력적인 남성이나 여성을 만나고 싶어할 것이다. 좀 더 욕망이 커지면 한번 악수하고 싶고 안아도 보고 싶을 것이다. 그 사람의 내면의 인격이나 아름다움은 알지도 못한 체 단지 그 사람의 외모만으로 우리 마음 속의 욕망이 부풀어 오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코를 통해서 악취가 나는 음식을 맡았을 경우는 어떨까? 아마도 우리의 의식이 그것을 싫어하여 멀리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나서 우리의 마음은 그 악취 나는 음식에 대하여 혐오하는 감정이 생길 것이다. 만일 그 누군가 악취가 나고 혐오스러운 그 음식을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식탁위에 둔다면 우리는 엄청나게 화를 낼 것이다. 하지만 그 악취가 나는 음식이 두리안이라는 과일이라면 어떨까? 비록 냄새는 이상하게 구리지만 실제로 맛은 꿀 바른 버터처럼 고소한데 말이다.

 

결과적으로 석가는 올바른 정진을 위해서 우리의 감각기관의 통제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감각기관의 제어를 통해 우리가 어떠한 감정이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도 이러한 감각기관을 통제할 필요성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예수는 눈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말하면서 만일 이 눈이 범죄를 하거든 차라리 눈을 빼어 버리라는 아주 극단적인 주장까지도 한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마태복음 6:22)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태복음 18:9)

 

이는 우리의 눈이 우리의 생각, 즉 바라보는 관점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이 우리의 의지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그 다음에 그 의지가 어떠한 행동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견물생심이라는 한자 숙어가 이러한 현상을 잘 설명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기에 감각기관 중에서도 특별히 시각의 중요성을 석가와 예수가 동일하게 강조하는 것이다.

 

둘째로 올바른 정진을 위하여 버림에 의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수행자가 현재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다섯 가지의 장애물을 극복하는 것이다. 버림에 의한 노력은 현재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더럽고 악한 마음을 몰아 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생겨난 악하고 더러운 마음이나 생각을 어떻게 몰아낼 수 있을까? 월폴라 라훌라에 의하면, 그 해답은 이미 생겨난 다섯 가지 장애물들에 대해서 각각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자비에 대한 명상을 통해서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해태와 혼침은 태양과 같은 빛나는 광명체를 명상하므로 몰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흥분과 회한은 관심 있는 대상에 주의를 기울여서 마음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지럽고 어수선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들숨과 날숨, 즉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흥분과 회한의 감정을 몰아낼 수도 있다. 매사의 의심은 자연의 법칙과 같은 만물의 원리에 대해 탐구를 하므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5]

 

이미 생겨난 악한 생각을 물리칠 또 다른 방법은 바로 도덕적인 양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즉 악하고 더러운 생각으로 하여금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느끼도록 해서 물리친다는 것이다.[6] 아니면 악하고 더러운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 관심의 방향을 바꾸어 버리면 역시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를 통해서 현재 내 마음 속에 있는 악하고 더러워진 생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될 때에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자유의지는 무엇이든 생각하고자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이든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의 마음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할 때 이러한 악하고 더러운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7] 이에 대해 석가는 말한다,

 

마음이 법의 근본이 되나니 마음을 따라 마음이 부리노라.

마음 속으로 악한 일을 생각하면, 곧 말과 행동으로 묻어나리니

죄와 고통이 절로 쫓으리라. 마치 수레바퀴 자국이 수레를 따르듯이… (법구경, 001)

 

셋째로 올바른 정진을 위하여 수행에 의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지금 내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악하고 더러운 마음을 제거하기 위하여 미래에 생겨날 깨끗하고 착한 마음을 미리 앞당겨 일으키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우리가 사물에 대하여 보다 객관적으로 관찰한다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선입견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객관적인 관찰이다. 만일 우리가 자연이나 우주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눈으로 관찰을 한다면 인생에 대한 올바른 깨달음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8] 즉 연기법과 무아론을 깨우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존재의 실상은 무()이고, 인생은 덧없고 무상하다는 깨달음이다. 이에 대해 백창우 선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곰곰이 철저히 분석하는 사유가 반야 지혜로 나아가는 원동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기법은 분석적 방법이라고 한다.

일상에서 경험하는 통찰도 곰곰이 사유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연기법을 건성건성 대충대충 넘기지 않고 깊게 사유하면 존재의 실상인

공성(空性)을 깨닫게 된다.[9]

 

결국 이러한 명상수행을 통해 인생무상을 깨닫게 되면 우리의 어리석고 더러운 생각들은 저절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넷째로 올바른 정진을 위하여 수호에 의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이미 일으킨 착하고 깨끗한 마음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수호에 의한 노력은 죽은 사람의 시체가 썩어져 가는 구체적인 과정을 명상하는 것이다. 인간 실존의 비참함을 임상적으로 명상하기에 가히 충격적인 명상수행이다. 결국 인간 실존의 비참함을 느낌으로서 현실을 초월하거나 해탈하려고 시도라는 것이다. 석가는 사람이 죽은 후에 목격할 수 있는 시체의 충격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또 죽어서 몸이 쓰러졌을 때에는 부어서 검푸르게 되고,

무덤에 버려져 친척도 그것을 돌보지 않는다.

개들이나 여우들, 늑대들, 벌레들이 파먹고,

까마귀나 독수리나 다른 생물이 있어 삼킨다. (Stn.200-01)

 

수행자가 이렇게 시체가 썩어져 가는 구체적인 모습을 명상할 때에 인간 실존의 처참함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이 지닌 탐욕과 집착, 그리고 그로 인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4. 올바른 정진은 왜 필요할까?

 

올바른 정진은 더럽고 악한 마음을 깨끗하고 선한 마음으로 바꾸려는 시도이며, 올바른 정진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올바른 정진을 통해 명상수행의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마음을 하나로 모아 정신을 통일하여 선정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인생의 궁극적인 지혜를 깨우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명지이다. 명지는 우리를 이 세상의 그 모든 욕망과 집착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우주의 원리요 인생의 진리인 것이다. 이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자연 과학의 법칙을 말한다. 더 나아가 이로부터 인생무상을 유추한다. 즉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무아론을 말한다. 석가는 누구든 이러한 인생무상의 원리를 깨우친다면 덧없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가르친다. 즉 감각적인 쾌락의 욕구와 집착을 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었던 욕망과 집착이 제거되면서 그로 인한 모든 정신적인 고통에서 자유를 얻게 된다. 석가는 이를 열반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올바른 정진은 열반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인 것이다. 수행자가 올바른 정진을 통해서 속박에서 평안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차안에서 피안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석가는 정진을 통해 도달하는 기쁨을 이렇게 말한다,

 

이와 같이 지내며 나는 최상의 느낌을 누리니,

내 마음에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기대가 없다.

보라, 존재의 청정함을! (Stn.435)

 

그들은 방일하지 않고 노력하며 내 가르침을 실행하면서,

그대는 그것을 싫어하지만, 가서 슬픔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리라. (Stn.445)

 

이러한 정진을 통한 평안과 기쁨은 석가가 제시하는 구원의 실체이다. 이는 더럽고 악한 마음을 물리치고 선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자신을 채울 때에 생겨나는 기쁨을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황홀경 체험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5. 올바른 정진을 기독교적으로 어떻게 이해할까?

 

기독교에서는 정진을 죄사함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는 말한다,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2a-4, 11)

 

사도행전은 기독교가 말하는 죄사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리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사도행전 2:38)

 

물론 기독교가 말하는 죄사함을 받는 방법은 불교와는 전혀 다르다. 아니 정반대이다.

기독교는 예수를 구세주로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는다고 믿는다. 예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는다고 믿는 것이다. 결국 죄사함은 초월적이고 외부적인 힘을 의지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죄를 스스로 씻지 못하고 어쩌면 수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적 구원을 타력적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반면 석가는 명상수행을 통해서 인생무상의 진리를 깨우쳐서 더럽고 악한 생각을 스스로 물리치자고 말한다. 어떤 감각적인 대상에 대한 탐욕과 집착을 우리 스스로의 의지로 몰아내자는 것이다. 즉 인간 스스로 자신 안의 죄악된 성향이나 더럽고 악한 생각을 물리치고 선하고 깨끗한 마음을 갖자는 것이다. 즉 자력적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고통스러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었던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우리가 해방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해탈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사업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바세계의 사바도 산스끄리뜨 사하의 음역어다. ‘사하참음’, ‘인내를 뜻한다. 사바세계를 의역한 말이 참을 인자를 사용한 인토. 따라서 사바세계는 참고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사바세계의 모든 중생은 괴로움 속에서 이를 참고 살아가야 하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사바세계,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이 퍼렇게 멍들어 있다. 간절히 원하나 이루어지지 않기에 멍들고,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기에 또 멍들고, 신세 한탄과 증오와 울분이 치밀 때마다 멍든다. 늙음과 병이 주는 설움에 멍이 그 깊이를 더해간다. 불교는 멍을 부여안고 계속 괴로움 속에 살자는 종교가 아니다. 하루 빨리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한 평안의 세계에 살자는 것이 불교다. 영원한 평안의 세계가 열반의 세계이며 불국토이다.[10]

 

6. 과연 인간이 자신의 악하고 더러운 마음 스스로 정화할 수 있을까?

 

결국 석가는 우리의 더러운 마음을 우리 스스로 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 과연 인간의 자유의지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울까? 과연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죄를 짓는 성향을 이겨낼 만큼 정신적인 의지가 강할까? 이에 대해 예수와 석가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진다. 석가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것이다. 특별히 자신 내면의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욕구를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의 자유의지는 유효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는 인간의 마음은 어두움 가운데 있어서 더럽고 악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에서 살인하고 싶은 충동, 남을 중상하고 거짓말하고 싶은 충동 그리고 음란한 생각 등이 나온다는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 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15:16-20)

 

결국 악하고 더러운 생각의 진원지가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는 인간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통해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타락한 세상으로 간주하고 세상은 곧 어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5) 인간의 어두워진 마음에 대해 사도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로마서 1:21)  

 

사도 바울은 이렇게 타락하여 어두워진 인간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한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한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로마서 1:28-31)

 

결국 인간의 마음은 타락하여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마음은 죄의 노예로서 죄를 이겨낼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구약성경은 말한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예레미야 4:22)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 마는.    (예레미야 17:9)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 14:3)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 (전도서 7:20)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로마서 3:10) 왜 그럴까? 그것은 마음 속의 전쟁에서 육신의 생각을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육신의 생각은 곧 죄를 말한다. 석가가 말하는 감각적인 쾌락의 욕구도 바로 죄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인간의 마음이 죄를 이기지 못하고 무기력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나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로마서 7:14b-15, 17-21, 23-24)  

 

결과적으로 기독교적 입장에서 석가가 말하는 올바른 정진은 불가능한 것이다. 인간이 인간의 마음을 스스로 깨끗이 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그렇다. 물론 부분적인 정진까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어떻게 올바른 정진을 할 수 있다고 가르칠까? 바로 죄사함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예수가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실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이렇게 기록했던 것이다,

 

아들을 낳으니리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태복음 1:21)

 

과연 예수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심이라. (로마서 7:1-4)

 

그러므로 기독교적 정진은 예수라는 구세주를 믿음으로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예수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올바른 정진을 유지할 수 있을까? 즉 마음과 생각의 선하고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 답은 생각의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바로 영의 생각으로 육신의 생각을 물리치는 것이다. 석가가 말하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영의 생각으로 물리치는 것이다. 이는 곧 성령의 능력으로 육신의 생각을 물리치고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설명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가운데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로마서 8:5-11)

 

이상으로 석가가 말하는 올바른 정진은 기독교가 말하는 죄사함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확인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정진은 초월적이고 신비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구세주를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씻을 받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실로 유신론적이고 유아론적인 종교의 구원론임이 틀림이 없다. 이에 반해 석가는 인간 스스로 자신의 죄를 다스릴 수 있다고 가르친다. 스스로 명상을 통해 육신의 정욕을 마음 속에서 물리치는 것이다. 실로 무신론적이고 무아론적인 종교의 구원론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111.

[2] Ibid.

[3] Ibid, 112.

[4] Ibid, 110-12.

[5]Ibid, 116.

[6] Ibid.

[7] Ibid, 116-17.

[8] Ibid, 117-18.

[9]연기맵이면누구나깨닫는다, 72.

[10]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불교수업,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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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9/01 [03:17]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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