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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0.22 [10:02]
올바른 행위는 무엇일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39]
 
정성민

 

▲ 정성민 교수     ©뉴스파워

1. 올바른 행위는 무엇일까?

 

올바른 행위는 열반에 이르기 위한 여덟 가지 방법(팔정도) 중에서 네번째 덕목이다. 올바른 행위는 우리의 몸을 사용하여 일어날 수 있는 더럽고 추악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올바른 사유와 올바른 언어를 실천하는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이타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이타적인 행위를 실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괴로움조차도 제거해 줄 수 있는 선한 행위인 것이다.

 

탐욕이나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은 불교가 가장 죄악시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올바른 사유나 올바른 언어에 기초하지 않은 이기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1]석가는 올바른 행위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가르쳤다. 첫째는 생명을 죽이지 말 것이고,

둘째는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지 말 것이고, 셋째는 사랑을 나눔에 잘못을 범하지 말 것이다. 여기서는 첫째와 둘째 항목을 다루고 세번째 항목인 결혼생활이나 이성적인 생활에 관하여는 다음 담화에서 다루고자 한다.

 

생명을 죽이지 않는 것은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은 우리로 하여금 남의 것을 탐하지 않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타인의 소유물들에대한 존중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올바른 행위는 자신만의 이익이나 욕망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의 행복조차도 존중하는 깨끗하고 올바른 도덕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다.   

 

2. 올바른 행위는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 것이다.

 

올바른 행위의 첫 번째 덕목인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 것은 인간 자신의 존엄성을 모든 생명체에 확대해서 적용하는 것이다. 석가는 이렇게 가르친다,

 

산 것을 죽이거나 죽이게 시켜서도 안 된다. 그리고 죽이는 것에 동의해도 안 된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폭력을 두려워하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 (Stn.394)

 

석가가 말하는 생명은 실제로 인간, 동물, 곤충 그리고 더 나아가 식물까지도 포함된다. 물론 식물은 정신이나 의식의 결여로 인하여 그 대상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 이러한 생명 존중의 가르침은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측면과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해서 그들의 행복을 도모한다는 적극적인 측면을 모두 포함한다. 석가는 말한다,

 

동물이건 식물이건 어떠한 뭇 삶에게도 폭력을 쓰지 않고, 또한 죽이거나 죽이도록 하지 않는 님, 그를 나는 고귀한 님이라고 부릅니다. (Stn.629)

 

앞서 말했듯이 석가의 이러한 불살생의 덕목은 자이나교에서도 발견된다. 자이나교에서는 불살생이 그들이 가장 우선시하는 규율이다. 석가가 생명에 대한 의도적인 살해를 피하라고 하는 이유는 의도적인 살해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인해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행위에는 의도가 수반된다. 중요한 것은 생명에 대한 의도적인 살해를 피하는 것이다. 살생에 수반되는 의도에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있을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탐욕과 성냄이 수반되는 것이 더욱 심각하여 성냄이 수반되는 살생은 아주 잔인한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어리석음이 수반되는 살생은 의도적인 것이 약하므로 보다 덜하다.[2]

 

자살은 다른 사람을 살해하려는 의도가 없으므로 실제적인 살생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살생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경전에서 탐욕을 없애고, 성냄을 없애고 깨달은 자들, 즉 아라한이나 부처의 자살은 허용된다고 기록한다. 놀랍게도 자이나교도 개인의 자살을 허용한다. 단지 그 대상이 노령이나 불치병으로 고통을 당하여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 정세근 교수는 말한다,

 

노령이나 불치병으로 고통을 마침내 피할 수 없을 때는 자살도 허용된다. 그것을 단식을 통한 자살로 살레카나라고 불린다. 살레카나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하나의 예식이다. 불교의 고승들이 죽을 때 곡기를 끊고 점잖게 앉아서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와 같다. 자살은 출가자만이 아니라 신도들에게도 허용된다. 남은 죽이지 않지만, 나는 죽일 수 있다는 박애와 희생의 극한에 이르는 윤리관이다.[3]

 

불교에는 살생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다. 동물을 살해하는 것보다 인간을 살해하는 것이 더 무거운 죄이고, 일반인을 살해하는 것보다 아라한을 살해한다든가 부모를 살해하는 것의 죄가 더 무겁다. 이에 대해 라훌라는이것은 생명의 정신적인 깊이와 자비심의 심도에 따라 도덕적 무게를 부여한 것이라고 설명한다.[4] 이러한 석가의 생명존중 사상은 자이나교에서는 비폭력주의로 나타난다. 자이나교의 비폭력주의는 단순한 물리적 폭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전적이고 절대적인 배려라는 것이다. 즉 그 어떠한 대상에 대하여서도 고통을 주는 어떤 행위도 해서는 안된다는 초 윤리적인 사랑인 것이다. 이는 석가의 무아적인 사랑과도 비교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자이나교의 비폭력주의에 대하여 정세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자이나교의 아힘사(비폭력주의)는 단순한 물리적 폭력에 대한 반대가 아니다. 고통을 주는 어떤 행위도 해서는 안 된다는 철두철미한 타자에 대한 배려이다. 죽이는 것도 아니되고, 아프게 하는 것도 아니된다. 그들의 이 원칙은 깊은 윤리적인 호혜주의이다. 내가 아프니, 너도 아프게 하지 않겠다는 것, 내가 죽기 싫은 것처럼 남도 죽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고행을 통해 남을 죽게 하고 아프게 하던 업보를 없애려 노력한다. 사는 것이 곧 남을 해치는 것이 아니냐고 묻겠지만, 자이나교들은 상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한다.[5]

 

사실 석가의 생명존중 사상은 구약성경 곳곳에서도 발견된다. 특별히 십계명 가운데 여섯 번째 계명이 바로살인하지 말라이다. (출애굽기 20:13) 하지만 이러한 유대교의 생명존중 사상은 인간에 대한 살인을 금하는 데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소나 양과 같은 동물들은 인간이 잡아서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의 율법에 따른 특별한 이유로 인해 돼지와 같이 되새김질을 못하거나 닭처럼 날지 못하는 새들은 먹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성도들은 돼지와 닭을 포함한 소, , 염소 등 거의 모든 짐승들을 잡아먹는다. 이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짐승을 잡아먹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자연의 질서이기에 윤리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창세기 9 1-3)

 

더 나아가 구약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짐승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한다는 것이다. 레위기가 바로 동물을 희생하여 바치는 제사법을 다루는 경전이다. 그리고 창세기에 보면 노아가 제단을 쌓고 짐승들을 불태워서 하나님께 바치는 장면이 나온다.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창세기 8 20-21)

 

구약 성경의 전체를 살펴보면, 생명을 존중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 있다. 사람들은 필요에 따라 짐승을 잡아먹을 수 있고, 또한 신에게 바칠 수 있는 제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단지 상황에 따라 짐승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뿐이었다.

 

너는 엿새 동안에 네 일을 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라.네 소와 나귀가 쉴 것이며 네 여종의 자식과 나그네가 숨을 돌리리라. (출애굽기 23:12)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23:29)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신명기 25:4)

 

비록 유대교와 기독교의 생명존중 사상이 동물을 아끼고 보호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호흡이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죽이지 말라는 석가의 입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인간, 동물, 곤충을 포함한 그 모든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석가의 가르침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측면이 있다. 어쩌면 석가는 이 세상을 타락하기 이전의 상태인 이상적인 세상, 즉 에덴동산으로 보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자들이 얼룩말을 잡아먹고, 하이에나가 야생돼지를 잡아먹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과연 사자나 하이에나에게도 다른 짐승들을 잡아먹지 말고 채식을 권할 수가 있을까? 이러한 석가와 기독교의 입장 차이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아니면 인정하지 않느냐의 차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그 모든 생명체들의 타락한 상태를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못하느냐와도 연관되어 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인간을 포함한 피조세계의 상태를 타락이전과 타락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세기 3 9-24)

 

성경은 타락이후의 세상을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이라고 말한다. 즉 인간들만 아니라 모든 짐승들조차도 잔인하고 사악하다는 것이다. 이는 타락한 세상 속에서 사람들이 살인하고, 도둑질하고, 거짓으로 남을 속이는 죄악들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것이다. 결국 성경은 이 세상은 석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상이 아니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아무튼, 살인하지 말라는 계율에서는 유대교나 기독교가 불교와 동일한 입장을 취한다. 하지만, 숨을 쉬는 그 모든 생명들을 죽이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는 계율은 서로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이런 면에서 석가의 생명존중 사상은 타락하여 잔인해진 약육강식의 세상을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즉 석가는 자연선택이나 적자생존이라는 다윈의 진화론적 입장조차도 넘어서는 지극히 이상적인 생명윤리를 가르친다.

 

3. 올바른 행위는 주어지지 않은 것을 빼앗지 않는 것이다.

 

올바른 행위의 두 번째 덕목은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주어지지 않는 것이란 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남이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빼앗지 말라는 것은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율은 남이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주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또 어디에 있든, 제자라면, 그것을 가져서는 안 된다.

빼앗거나 빼앗는 것에 동의 하지도 말아라. 주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서는 안 된다. (Stn.395)

 

월폴라 라훌라는 석가의 이러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이러한 남의 것을 빼앗지 말라는 붓다의 가르침은 세부적으로 다섯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도둑질로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강도질로 위협이나 폭력으로써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의 소유를 빼앗지 말라는 것이고, 셋째는 소매치기로 갑자기 다른 사람의 물건을 탈취하지 말라는 것이고, 넷째로 사기행위로 남의 소유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여 빼앗지 말라는 것이고, 다섯째로 속임수로 잘못된 저울이나 계량기를 써서 고객을 속여서 이득을 취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나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 곧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을 부당한 방법으로 취하는 것은 탐욕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그 업의 결과가 더욱 무거워진다.[6]

 

석가는 남의 것을 나의 것이라고 하는 사람,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 사람, 빚을 지고서도 그 빚을 일부러 갚지 않는 사람, 그리고 살인강도를 하는 사람을 천한 사람이라 부른다. 그는 말한다,

 

마을에 있거나 숲에 있거나 남의 것을 나의 것이라고 하고,

주지 않는 것을 빼앗는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

사실은 빚을 지었으나, 돌려 달라고 독촉을 받더라도

'갚을 빚은 없다.'고 발뺌한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

얼마 안되는 물건을 탐내어 길을 가고 있는 행인을 살해하고

그 물건을 약탈한다면, 그를 천한 사람으로 아십시오. (Stn.119-121)

 

결과적으로 여기서 붓다가 가르치고 싶은 것은 타인의 재산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이는 타인이 소유한 동산이나 부동산을 타인의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정직하게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의 분수에 맞게 자기 자신의 소유에 만족하며 살라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석가의 가르침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자면, 우리가 축적한 부를 남을 위해 베풀면서 살라는 뜻으로도 확대해서 적용을 할 수 있다.[7] 석가는 말한다,

 

엄청나게 많은 재물과 황금과 먹을 것이 있는데도

혼자서 맛있는 것을 즐긴다면,

그것이야말로 파멸의 문이다. (Stn.102)

 

주어지지 않은 것을 빼앗지 말라는 계율은 구약 성경에도 나타난다. 특별히 십계명의 여덟 번째 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출애굽기 20:15)가 바로 그것이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도둑질하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시는 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 해 돋은 후에는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둑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둑질한 것을 배상할 것이요. 도둑질한 것이 살아 그의 손에 있으면 소나 나귀나 양을 막론하고 갑절을 배상할지니라. (출애굽기 22:1-4)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는 구약의 계명은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리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마태복음 19:16-19) 

 

어쩌면 남의 것을 도둑질하면 안 된다는 생각은 모든 종교를 관통하는 계율이라고 볼 수 있다. 도둑질하지 않는 것은 남의 소유나 권한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소유에 만족하면서 정직하게 살라는 계율인 것이다. 출애굽기에 보면, 심지어 원수의 길 잃은 짐승조차도 만일 찾았으면 돌려주라고 권고한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그것을 버려 두지말고 그것을 도와 그 짐을 부릴지니라. (출애굽기 23 4-5)

 

이렇게 남의 소유를 상호 존중하는 계율은 더 나아가 가난한 자를 돌보는보시의 정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 ‘보시란 널리 베푼다는 뜻이다. 이런 면에서 석가의 가르침과 유대교와 기독교의 가르침이 일맥상통함을 볼 수 있다. 가난한 자를 보살피고 나그네를 존중하라는 계율은 출애굽기 22 21-22, 25-27절에 잘 나타나 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구약의 계율은 예수가 말한 한 가지 계명에 의해 집약된다.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12:31) 이는 또한 석가가 말하는 자애의 마음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자애로운 마음은 모든 존재에 상처를 주거나 폭력을 쓰기를 원치 않을 뿐만 아니라 남의 소유조차도 전혀 탐내지 않는 마음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한다면 남의 물건을 훔치는 나쁜 행위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고, 더 나아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는 올바른 행위를 자발적으로 행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올바른 행위가 중요할까? 도대체 올바른 행위가 열반에 이르는데 어떠한 역할을 할까? 그 답은 바로 올바른 행위가 올바른 정진을 위한 준비단계라는 것이다. 올바른 정진은 깊은 명상수행을 하기 전에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더러운 마음이나 사악한 마음내지는 산란한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먼저 우리의 행위를 바르게 하라는 것이다. 이는 올바른 행위를 행하는 것이 곧 마음의 정화를 이루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종교들이 살인이나 도둑질과 같은 나쁜 행위를 정죄한다는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종교들은 생명존중 사상을 가지고 있고, 남의 소유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 긍휼을 베푸는 이타적인 사랑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1]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104.

[2]Ibid, 105.

[3]윤회와반윤회, 165.

[4]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105-06.

[5]윤회와반윤회, 164-65.

[6]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106.

[7]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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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28 [08:11]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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