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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8.17 [03:27]
과연 건강한 종교는 어떤 것일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31]
 
정성민

신을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종교는 하나의 살아있는 그 무엇이다. 어떻게 자연이 신을 대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인간의 감정, 의식, 이성, 양심 등이 종교를 대체할 수 있을까? 문제는 종교적 경험 그 자체는 객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과의 경험을 갖고 있는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매우 주관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종교적인 경험을 과학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분석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각 민족마다 그리고 각 종교마다 신을 만나고 경험하는 방식이 너무나 제 각각이다.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혼란스럽기까지 한다. 신은 너무나 초월적이시고 우주적이시다. 그러기에 우리 각자의 종교적인 체험이 다양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 체험만을 가지고서 그것이 신의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신의 존재를 제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종교적 경험들 가운데서 자신의 체험만을 유일하거나 아니면 특별하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 대부분의 이단과 사이비 집단들은 자신들의 종교체험만을 진실하고 유일한 것으로 주장한다.

 

놀라운 것이 기독교와 불교와 같은 세계적인 종교조차도 그 초기에는 이단 사이비 집단으로 취급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집단이 더 커지고 오랜 역사를 갖게 되면서 정통적인 종교로서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세계적인 종교이든지 사이비 이단 집단이든지 간에 그들이 주장하는 종교적인 경험이 건강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가려낼 필요는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이 건강한 종교적 경험인지를 구분해 줄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 건강한 종교는 어떤 것일까?

 

하버드 대학교의 철학 교수였던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 책 속에서 그는 어떠한 종교의 진실성은 그 사람의 삶, 즉 열매를 통해서 증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임스는 말한다,

 

결국 그것은 우리의 경험주의적 기준에서 나와야 한다. 여러분은 뿌리가 아니라 열매로 인해 그것들을 알 것이다…. 우리들은 인간 미덕의 뿌리에 접근할 수 없다. 어떤 모습도 은총의 확실한 증명은 아니다. 우리 자신들에게조차 실천만이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이다.[i]

 

제임스는 신을 경험하고 회심한 사람들은 성자와 같은 삶을 산다고 말한다. 결국 유신론적 종교들의 특징은 회심하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급진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제임스는 이러한 성스러운 삶을 4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로 초월적이고 이상적인 힘에 이끌려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삶을 버리는 것이다. 둘째로 그 초월적인 존재의 요청에 따라 순종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셋째로 초월적인 존재를 경험한 후에는 정신적인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넷째로 마음의 분열, 미움 감정, 다른 사람과의 부조화에서 마음의 일치와 사랑의 감정, 그리고 주위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ii] 결과적으로 이타적이고 도덕적이며 거룩한 삶은 자신들의 종교가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 말할 수 있다. 이는 곧 종교의 진실성은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열매를 통해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의 판별기준을 세 가지로 제시한다. 물론 이러한 세 가지 기준은 초월적인 신이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말하는 것이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의 번역자인 김재영 교수는 그의 종교적 경험의 판별기준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요약한다,  

 

첫 번째는 경험자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위를 새로운 차원에서 돌아볼 수 있는 어떤 즉각적인 감정의 변화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외부적 삶의 조건은 전과 같이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그 경험자는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마음의 평화, 주위와의 조화, 그리고 넘쳐나는 감사와 기쁨 등과 같은 감정을 갖는다. 그 경험자에게는 모든 세상이 전과는 달리 매우 아름다워 보인다.

두 번째는 광신적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자기반성을 할 수 있는 철학적 합리성이 그 기준 속에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세 번째는 상식적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도덕적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iii]  

 

제임스가 말하는 첫 번째 종교적 경험의 기준은 감정적 측면을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 것은 이성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것은 의지적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일 이러한 세 가지의 기준, 즉 지, , 의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지나치게 감정으로 빠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 답은 너무 간단하다. 너무나 광신적으로 흘러서 결국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적 경험이 지나치게 이성적으로 빠져서 감정이 메마르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종교 의식이나 성경공부에만 너무 치우쳐서 종교적 경험을 통한 넘쳐나는 기쁨과 감사는 사라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일 신앙인의 자유의지가 약화되고 단지 감정과 지성만으로 치우치게 되면 어떨까? 아마도 책임의식이 없는 종교인으로 전락해 일반인들로부터 종교인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칭찬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해 좋은 열매를 거둘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건강한 종교적 경험은 이성, 감성 그리고 의지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지, , 의가 건강한 종교적 경험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재영 교수는 이러한 제임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 의가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개인적으로 불완전한 인격을 유지하게 된다. 지성과 의지가 무시되어버린 종교적 경험의 표현은 매우 부정적 특징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자신이 경험한 종교적 경험을 감정적으로만 생각하여 영적 흥분을 지성적이고 의지적으로 순화시키지 못하게 되면 그 사람의 삶은 매우 광신적 형태를 띄게 되어 자신의 경험과 다른 어떤 경험도 용납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매우 공격적이고 지배적인 삶의 모습을 드러내어 모든 인간관계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는다.[iv]

 

만일 석가가 윌리엄 제임스의 이러한 입장을 듣게 된다면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종교적 경험의 판별 기준을 그 열매를 통해서 보아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것이다. 왜냐하면 석가는 가문이나 출생보다도 각 사람의 행위가 그 사람을 진정으로 거룩하게 그리고 존귀케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석가는 말한다,

 

출생을 묻지 말고 행위를 물으십시오. 어떠한 땔감에서도 불이 생겨나듯,

비천한 가문일지라도 성자는 지혜롭고, 고귀하고, 부끄러움을 알고, 자제합니다. (Stn.462)

 

태생에 의해 고귀한 님이 되거나, 고귀한 님이 아닌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인해 고귀한 님이 되기도 하고, 고귀한 님이 아닌 자도 되는 것입니다. (Stn.650)

세상은 행위로 말미암아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로 인해서 존재합니다.

달리는 수레가 축에 연결되어 있듯이, 사람들은 행위에 매어 있습니다. (Stn.654)

 

놀라운 것은 예수조차도 도덕적 행위를 종교적 경험의 판별 기준으로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행위를 좋은 열매와 나쁜 열매로 구분한다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15-21)

 

석가는 윌리엄 제임스가 제시하는 종교적 경험의 세 가지 판별기준 가운데서 두 번째와 세 번째 기준에는 동의를 할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기준에는 동의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석가가 초월적인 신을 전제로 하여 신과의 경험을 가진다는 것에 동의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과의 만남을 가진 후에 벌어지는 신앙인의 즉각적인 감정의 변화를 인정할 리도 만무하기 때문이다. 석가는 초월적인 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즉각적인 감정의 변화를 매우 부정적으로 볼 것이 분명하다. 아마도 석가는 신과의 체험이 없이도 인간이 스스로 얼마든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한편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적인 상식으로 종교인의 거룩한 삶의 가치를 판단하자고 말한다.이는 성스러운 종교인의 삶을 인간적인 활동으로서 한번 바라보자는 것이다.[v] 즉 종교인의 삶이 그의 이웃들에게 얼마나 덕이 되는 지를 묻자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종교인의 삶이 얼마나 가치 있는 열매를 주위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종교적인 체험이 인간적이고 상식적인 측면에서 어느 정도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종교의 모든 것을 상식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여전히 종교는 신비성을 지닌 특별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과 상식을 너무 초월하거나 아니면 너무 무시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즉 지나치게 극단적인 신비주의나 광신주의로 흐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식이 통할 수 있는 인간적인 기준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vi] 이는 각 종교인의 삶이 그의 가족이나 그가 속한 공통체에 덕스러운가 아니면 해로운가를 먼저 살펴보라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신학과 교리를 통해서 그의 종교적 삶을 재조명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식이 교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시간 순서상으로 상식적인 기준을 먼저 적용해서 종교적인 경험을 판단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교리를 적용하면 종교적인 경험을 판단하는데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특별히 이단과 사이비 집단을 판별할 때에 이러한 상식과 인간적인 기준을 신학이나 교리보다 먼저 적용하면 더욱 객관적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김재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윌리엄 제임스는 어느 누구도 편견의 우상 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 편견을 최소화하여 상식이 통할 수 있는 기준을 지적 측면만을 강조하는 신학적인 기준보다 한 차원 위에 놓고 있다.[vii]

 

결과적으로 종교인의 삶이 건강 하려면 초월적이고 신비한 측면과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측면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윌리엄 제임스가 석가의 사상을 종교적 경험의 판별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제임스는 석가의 사상을 종교적인 측면보다는 철학적인 측면으로 기울어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석가는 종교의 신비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석가는 과학적으로 그리고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는 사실들 만을 받아들이는 합리주의자다. <숫타니파타>경전에 보면 존자 뿐나까가 석가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이 세상에서 선인들과 평민들과 왕족들과 바라문들은 무엇 때문에 널리 신들에게 제사를 지냅니까? 세존이시여, 당신께 묻사오니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Stn.1043)

 

이에 석가모니는 이렇게 답한다,

 

이 세상에서 어떠한 선인들과 평민들과 왕족들과 바라문들이 널리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더라도, 뿐나까여, 그들은 이 세상에서 늙어가는 것에 걸리어 존재를 갈구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Stn.1044)

뿐나까여, 그들은 갈구하고, 찬탄하고, 탐착하여, 공물을 바칩니다. 이득을 토대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갈구하는 것입니다. 제사에 헌신하는 자들은 존재의 탐욕에 집착하여 태어남과 늙음을 뛰어넘지 못했다고 나는 말합니다. (Stn.1046)

 

결국 석가에게 있어 사후세계의 영원한 생명을 바라면서 드리는 제사는 아무런 쓸데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영원한 생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과 영혼을 근거로 신비를 추구하는 그 모든 종교적인 것들은 현실성이 없는 비이성적인 것이다. 이를 통해 석가의 가르침은 종교적인 경험이기 보다는 도덕체계나 철학체계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어쩌면 불교는 종교적 경험의 판별기준으로는 판단할 필요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불교는 종교로 보기보다는 도덕이나 철학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건강한 종교는 현실도피적 삶을 추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적 경험이 지나치게 내세적 이어서는 안 된다는 석가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이다. 만일 현실세계를 간과하고 너무나 미래의 천국에만 집착한다면 이 땅에서의 종교적 실천을 통한 열매는 맺을 수 없을 것이다. 종교인들이 현세를 나그네의 삶으로 비유하고 내세를 영원한 본향으로 생각하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현재의 삶을 무시하거나 비관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종교인들이 사회에 부적응하도록 부추긴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재영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종교적 경험의 표현은 금욕적이고 청빈한 삶을 이루어 내야 한다는 극단적인 생각 때문에 많은 종교인들은 현실은 균형 있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매우 현실 도피적인 삶을 살아간다.[viii]

 

그렇다. 현실세계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의 삶을 살아가는 곳이 아니다. 이 땅은 신이 우리에게 허락하신목적을 이루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서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석가에게 있어서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를 위해 지금의 현실을 간과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이는 현실적인 삶에서 우리에게 닥친 고통을 우리 자신이 스스로 짊어지고 마주하라는 것이다. 즉 나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라는 것이 바로 석가의 가르침이다. 이는 미래의 천국 생활만을 바라보며 현실을 버린 삶의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석가는 영원한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내세 자체를 부정한다. 더 나아가 사후세계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의 삶에서도 소유하는 것에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친다.석가는 말한다,

 

의복과 얻은 음식과 필수의약과 침구와 깔개, 이런 것에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 다시는 세속에 돌아가지 말라. 계율의 항목을 지키고 다섯 감각기관을 수호하여, 그대의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라.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 (Stn.339-40)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데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라는 것이다. 즉 거룩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떠돌이가 되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석가의 가르침은 신이나 외부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과 고통을 스스로 짊어진다는 면에서는 전혀 현실 도피적이지 않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과 고통을 짊어지는 방법은 현실도피적이라는 말이다. 어쩌면 염세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도 자신의 제자들이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떠돌이가 되라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벌 옷도 입지말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마가복음 6:7-10)

 

결과적으로 세상의 소유와 세상적인 욕심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도 어쩌면 염세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는 물질에 대한 소유,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 더 나아가 육신적인 쾌락의 욕구를 내려놓으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의 가르침이 현실 도피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가올 심판과 천국의 상급을 위하여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이를 위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세상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예수의 가르침은 현실도피가 전혀아니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와 석가의 가르침은 무엇이 다를까? 예수와 석가의 가르침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는 영원한 생명을 보존할 사후세계를 위해서 거룩한 떠돌이가 되라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16: 24-27)  

 

반면 석가는 이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은 다 헛된 것이기에 그 모든 소유를 버리라는 것이다. 이는 결단코 사후세계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소유와 감각적인 욕망을 버리는 이유는 그것들로 인해 온갖 두통과 근심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정신적인 평안을 누리면서 살기원한다면 소유물과 함께 소유욕 그리고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려는 욕망을 버리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거룩한 떠돌이 생활이 요구되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믿음을 가지고 집을 떠났다면, 사랑스럽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대상들을 버리고, 괴로움을 종식시키는 사람이 되라.

선한 친구와 사귀어라. 인적 없는 외딴 곳, 고요한 곳에서 거처하여라.

그리고 음식의 분량을 아는 사람이 되어라. (Stn.337-38)

 

3. 건강한 종교는 좋은 열매를 맺는 거룩한 삶을 추구한다.

 

종교는 인간 삶의 본질적 요소다. 종교적 경험은 인간이 이성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넓고 깊다. 그래서 인간의 이해력을 가지고는 그것을 전부 이해할 수 없다. 바로 영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감정에는 신에 대한 두려움, 신에 대한 사랑, 영적인 황홀함과 경이로움, 그리고 종교적 기쁨 등이 있다. 종교적 사랑은 신에게 드리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랑의 감정이다. 어쩌면 종교적 감정이 인간경험 가운데 가장 귀중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종교를 시대착오적이고 단순하고 나약한 사람들이나 찾는 미신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 마치 현대 사회에서는 종교적 삶은 없어져야 할 괴물로 여겨지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종교무용론이 바로 석가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필자가 지금까지 밝혀온 바이다. 이러한 종교무용론에 대해서 니니안 스마트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인류학자들은 종교가 애니미즘(사물이나 자연물 안에 들어있는 생명력에 대한 믿음)에서 다신교(다양한 인격신들에 대한 믿음)를 거쳐 유일신교(하나의 신에 대한 믿음)로 발전해 왔으며, 아마도 결국에는 무신론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런 이론들 대부분은 오늘날 더 이상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이 이론들이 종종 서구 문화가 가장 발전된 단계에 있다는 전제를 반영하고 있고, 또 이런 전제가 과학적인 분석이 아니라 오만한 가치판단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ix]

 

무신론자들은 과학이 발달하면 종교는 사라질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현시대의 상황이 절망적이기에 더욱 그렇다. 핵무기의 위협, 환경파괴와 지구온난화, 인공지능으로 인한 대량 실업의 위기 등 우리는 절망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는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가 더욱 상실될 것 같은 위기를 느낀다. 혹자는 신이 죽었기에 인류의 미래가 이렇게 자멸로 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이런 암담한 인류의 미래를 신만이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이는마지막까지 신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아직도 종교는 우리 삶의 본질적 요소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신이 인간을 찾아와서 종교가 가능해졌든지 아니면 신의 존재와 상관없이 인간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스스로 신이나 종교를 만들어냈든지 말이다.[x] 결국 종교란 무엇일까? 이는 신이나 영혼의 존재의 여부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극과 극으로 나누어지는 정말로 복잡하고도 이상한 현상이다.

 

신의 존재를 믿는 자들에게는 종교란 신과 하나가 되는 신비한 현상이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에게는 나약한 인간들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우주나 자연으로 대체되어질 수 있다. 아니면 인간의 이성이나 감정 자체가 종교의 자리가 될 수가 있다. 하지만 만일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피조물인 인간은 신을 예배하고 신에게 순종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한복음 4:22-24)

 

하지만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종교라는 현상은 우매하고 나약한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아무 것도 없는데 그 무엇인가를 붙잡으려는 집착에 불과한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보라! 신들을 포함한 세상의 사람들은 내가 아닌 것을 나라고 생각하여 정신, 신체적인 것에 집착해 있다. 이것이야 말로 진리라고 생각한다. (Stn.756)


어떠한 것도 없고, 집착 없는 것, 이것이 다름 아닌 피난처입니다.                      그것을 열반이라고 나는 부릅니다. 그것이 노쇠와 죽음의 소멸인 것입니다. (Stn.1094)


모가라자여, 항상 새김을 확립하고 실체를 고집하는 편견을 버리고,                      세상을 공으로 관찰하십시오. 그러면 죽음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상을 관찰하는 님을 죽음의 왕은 보지 못합니다. (Stn.1119)

 

그러기에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석가의 인간 중심적인 합리성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구원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 그 모든 허구적인 종교적인 행위들을 배척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어떤 종교가 진정한 종교인가를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이 땅에 보낸 신의 뜻이 무엇인지도 알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서 좋은 열매를 맺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i]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77.

[ii]Ibid, 350-52.

[iii]김재영, 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이론,” in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49-50.

[iv] Ibid, 47.

[v]Ibid, 415.

[vi]Ibid.

[vii]Ibid, 51.

[viii] Ibid, 48.

[ix]종교와 세계관, 32.

[x]종교철학자이며 종교다원주의를 주창한 존 힉은 하나님의 현현(성육신)이나 계시를 부정하고, 종교나 신학을 인간의 창작물로 보았다. 결국 종교는 인간사회의 현상이나 모습들이 투영된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존 힉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점차적으로 신격화되면서, 그는 반은유적이고 반문자적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 결국 몇 세기 후에는 문자 그대로의 성자 하나님이신 삼위일체의 2위 하나님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교회가 새로운 상황들을 헤쳐 나가고, 특별히 4세기에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됨에 따라 이루어진 교회의 작품이었다. 따라서 신학을 인간의 창작물이라고 본다. 나는 히브리어로든, 헬라어로든, 영어로든 또는 어떤 다른 언어로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제들을 계시하신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신학의 진술이 언제나 그리고 반드시 문화적 가정들과 문제되는 신학자들의 편견들을 가진 개념을 사용하고, 그런 것을 반영하는 인간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기독교 교리 역사에서 두드러졌던 여러 가지 속죄 교리들 각각은 그러한 교리들이 생겨나게 된 사회상들을 반영해 온 것이다.” 존 힉, 데니스 옥콜름.티모디 필립스 편저, 이승구 옮김, 다원주의 논쟁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49. 이러한 힉의 주장에 대해 더글라스 게이베트와 게리 필립스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존 힉)의 견해는 종교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교적으로 실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다 부요한 전통적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죄가 인간의 영혼에 입힌 상처를 치유하시고 하나님 자신과 인간 사이의 조화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자비의 임무를 띠고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셨다. 힉의 신학은 정통신학이 도덕적 실패로 말미암아 야기된 인간의 인격적 창조주로부터의 소외라고 진단한 그 인간의 상태에 대하여 어떠한 실재적인 설명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화와 은유라는 용어로 성육신을 해석하는 힉의 다원주의적 해석, 이것은 또 하나의 의심스럽고, 얼마가지 못할, ‘역사적 예수의 재구성위에 세워졌으며, 힉의 해석은 결국 종교적으로 살아있는 대안으로서는 얼마 가지 못해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전망한다.” Ibid,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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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8/07 [18:56]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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