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
교계뉴스문화/교육국제/NGO/언론생활/건강파워인터뷰오피니언연재정치/경제/사회한 줄 뉴스
전체기사보기
편집  2018.09.22 [09:01]
슬기로운 연기자, 드고아의 여인
김윤희 박사의 구약의 조연들
 
김윤희

슬기로운 연기자, 드고아의 여인(삼하 14:1~20


최근에 ‘화씨 911’(Fahrenheit 911)이라는 무어(moore) 감독의 영화가 화제가 되었다. 미국의 대통령 조지 부시(George W. Bush)를 공격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어떠한 정치 공세나 이론이나 논고를 뛰어넘어 여론에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같은 영상매체나 미디어, 문화예술 등을 통한 이미지 공세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즉효가 있다.

요사이 이슈가 되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도 이러한 문화예술의 방법으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을 신문기사에서 읽은 적이 있다. 고구려사를 문화예술로 부활시키고 복원시켜 현대적으로 재해석함으로 그들의 문화가 우리와 함께 있게 하고, 과거사가 아닌 현대의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학술적인 대응은 그만큼 시간이 걸리고 파급효과가 서서히 나타나는 반면에 이러한 문화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빠른 방법이라는 것은 쉽게 공감이 가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를 서두로 시작하는 이유는 구약에서도 문제해결을 위해 이와 비슷한 방법을쓴 책략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건의 배경


그는 바로 요압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다윗 왕의 조카이면서(대상 2:16,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 그의 추종자요, 신복이요, 군대 지휘관이었다. 이 사건의 배경은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에게는 다말이라는 아름다운 누이가 있었는데 그의 배다른 형이요, 다윗의 첫째 아들인 암논이 다말을 강간하고 수치를 주는 사건이 일어났다(삼]하 13장). 이것은 다윗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인 이후에(삼하 11장) 다윗 집안에 시작되는 재화(災禍)의 일부로서(삼하 12:10∼12) 기록되어 있다. 이 일에 앙심을 품은 압살롬이 기회를 도모하다가 드디어 암논을 살해한다(삼하 13:23˜39). 이런 식으로 다윗 왕 집안의 재화는 계속된다. 압살롬은 일을 저지르고는 자신의 어머니 마아가의 부친이 있는(삼하 3:3) 아람의 작은 나라 그술(삼하 15:8)로 도망가고 세월이 어느덧 3년 이 흐른다(삼하 13:38).

다윗의 심정(14:1)


그러는 사이에 ‘세월이 약’이라고 하듯이 본문은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삼하 13:39)고 다윗 왕의 심정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이러한 다윗 왕의 심기의 변화를 눈치 챈 사람이 또 한사람 더 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다윗 왕의 충복 요압이었다(삼하 14:1).

요압은 다윗의 딜레마를 잘 알고 있었다.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이지만 살인범이다. 그것도 형제를 살인한 인륜과 천륜을 동시에 저버린 용서할 수 없는 자다. 토라(모세오경의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를 실천하고(창 9:6; 출 21:12; 레 24:17; 민 35:21) 정의의 본을 보여야 하는 왕으로서 다윗은 압살롬을 용서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죽은 아들 암논에게도 못할 일인 것이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아들이 보고 싶은 아비의 심정 또한 다윗이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3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하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진퇴양난을 잘 알고 있는 요압이 묘수를 내는데 이때 등장하는 여인이 드고아의 여인이다.

요압의 묘책(14:2∼3)


드고아의 여인은 드고아란 지방에 살고 있는 여인으로 드고아는 아모스 선지자의 고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암 1:1). 그녀는 ‘슬기로운 여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지혜가 있다’는 뜻으로 특별한 재주가 있는 여인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어쨌든 요압이 생각해 낸 묘책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 여인의 재주가 필요했고, 요압은 이 여인을 시켜 한편의 드라마를 연출시킨다. 그녀는 연기를 하고 그것을 통해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의 문화예술을 통한 간접적이면서도 인간의 심정을 움직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요압은 감독, 연출, 각본, 진행, 무대설정에서부터 의상담당까지 다하고 드고아의 여인은 배우로서 연기를 한다. 본문은 요압이 사람을 “드고아에 보내어 거기서 슬기 있는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이르되 청컨대 너는 상제된 것처럼 상복(喪服)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같이 하고 왕께 들어가서 여차여차히 말하라고 할 말을 그 입에 넣어 주니라”(14:2∼3)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문에 진행되는 내용은 요압의 작품이고 드고아의 여인에 대해서는 그녀의 연기 실력과 그 속에서 보여 주는 재치와 언변 외에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드고아의 여인이 어떤 사람이었는가’가 이 글의 초점이 아니고, 그녀가 한 연기(演技)의 내용이 무엇이었고 그 결과 관객(다윗 왕 한 사람)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를 살피는 것이 그 목적이다. 다음은 요압이 감독하고 드고아의 여인이 주연한 드라마의 공연내용이다.

드고아 여인의 상황 설정(14:4˜7)


드고아의 여인은 상(喪)을 당한 사람으로 변장하고 상복을 입고 다윗 왕 앞에 엎드려 자신의 사정을 아뢴다(14:4). 그녀가 자신이 ‘참 과부’라고 말하고 다시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불필요하게 더함으로 그녀를 향한 동정심을 자아내고 있다(14:5). 그녀에게 아들 둘이 있는데 둘이 들에서 싸우다가 말려 줄 사람이 없으므로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쳐 죽이는 사태가 발생한다. 암논과 압살롬의 경우와 비슷하다. 친족들이 일어나 그녀를 핍박하며 형제를 죽인 아들을 내놓으라고 압박하는데, 문제는 그 아들을 죽이게 되면 그녀에게 남는 것은 아무도 없고, 남편의 이름과 씨가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지는 결과가 초래된다. 그녀는 그 점을 부각시켜 다윗에게 호소한다. 더군다나 친족들의 울분은 상속자까지도 끊어 버리겠다고 협박함으로(“사자”는 후사를 의미함; 14:7) 혹시 상속자를 제거함으로 재산을 노리는 것이 아닌지 그들의 동기도 의심스럽고, 그러한 면에서 그들의 도(道)가 지나침을 여인은 지적한다. 불쌍한 과부인 이 여인에게 남아 있는 자식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숯불로 비유되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다윗의 의분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내용이다. 가족의 후손을 지키는 것 또한 토라의 정신이기도 하다(예 : 신 25:5~10). 그녀의 스토리는 가인과 아벨 스토리(창 4:8∼10)와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가인과 아벨 스토리를 인용함으로 노릴 수 있는 효과는 다윗이 하나님과 같은 판단을 하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 가인을 보호하도록 약속하신 하나님처럼 다윗도 살인자이기는 하나 과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호하도록 결정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있다. 요압의 이러한 계획은 다윗의 토라에 대한 깊은 지식에 근거하고 있다. 요압은 다윗의 법적인 결정을 함에 있어 토라의 인도함을 따를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가인과 아벨 스토리와 비슷한 상황전개를 하고 있다.

다윗의 결정(14:8˜11)


 요압의 계산은 정확했다. 드고아 여인의 연기는 훌륭했다. 다윗 왕은 여인의 소원대로 살아 있는 아들을 보호해 줄 뜻을 나타낸다. 드고아 여인의 지혜는 다윗이 명을 내릴 때마다 조금씩 다윗 자신과 압샬롬의 사건을 인식하도록 도와주면서 그 사건과 비교해 보도록 유도하는 데에 있다. 대화의 모든 것을 요압이 다 지시했다기보다는 그녀와 애드립이 많았을 것이라는 것은 다윗의 반응을 보아가며 반응해야 하는 상황으로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요압은 드고아 여인의 ‘슬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다윗이 명을 내리려 하자(14:8) 드고아 여인은 살인자에게 자애를 베푸는 이러한 결정이 왕에게 누가 될 것을 염려하여 왕의 결정에 대한 죄는 자신과 자신의 아비의 집에게 돌아가고 왕에게는 허물이 없음을 확실히 함으로 왕을 위로한다(14:9). 다윗 왕은 이에 대하여 여인을 보호해 줄 것을 약속한다(14:10).

이제 드고아 여인의 요청이 절정에 달한다. 그녀는 “하나님 여호와를 생각하사 원수 갚는 자로 더 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하며 “내 아들을 죽일까 두려워하나이다”(14:1l)라고 한 번 더 확실하게 호소한다. 이 말은 놀랍게도 창세기에서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4)는 가인의 말과 유사하다. 이에 대해 다윗은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14:11)고 대답하는데 이 또한 가인에 대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標)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창 4:15)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유사하다. 다윗의 결정은 어려운 것이었다. 원수 갚는 자들이 살인한 자를 처벌하는 것도 토라에서 허용하는 것이지만(민 35:11~12, 19~21) 대를 이을 유일한 자식을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 또한 토라의 정신에 어긋난다.

 다윗은 판결을 내림에 있어 토라의 말씀 속에서 가인에게 내린 하나님의 결정을 선례로 삼았다.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저자가 의도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과 같은 심정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주는 데에 있다. 다윗이 비록 ‘우리아 사건’(‘우리아’ 참고)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으나 그는 이미 나단의 지적을 받아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용서받은 자이다(삼하 12:13). 그는 여전히 중심이 하나님을 향한 의로운 왕임이 잘 나타나 있다. 한 가지 더 관찰해 본다면 다윗이 언급한 ‘머리카락’ 은 흥미롭게도 후에 압살롬과 그의 유난한 머리털에 대한 언급과(14:26, “그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년말마다 깎았으며 그 머리털을 깎을 때에 달아 본즉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연관된다. 머리털에 얽힌 그의 죽음과의 묘한 관계를 저자는 다윗의 입을 통하여 암시하고 있다(18:9∼10).

다윗의 상황에 적용(14:12˜14)


 드고아 여인의 진정한 기치는 여기에서 드러난다. 그녀가 목적한 바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밝히고 다윗이 여인에게 내린 심판의 원리를 다윗 자신의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시점에 온 것이다. 여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 말씀 더 왕께 여쭈을 것’을 요청한다(14:2). 다윗 왕이 그녀에게 내린 심판의 원리를 다윗 왕의 경우에 적용해 본다면 왕은 자신의 심판에 저촉되는 행동을 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녀의 집안 문제는 작은 일이지만 여전히 아들과 상속자라는 이슈가 걸려 있기에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듯이, 하물며 다윗이 왕의 아들이요 상속자인 압샬롬을 추방상태로 놓아 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안녕에 위협을 가하는 일임을 지적한다. 여인은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 같은 도모를 하셨나이까”라고 하며 “왕께서 죄 있는 사람같이 되심은 그 내어 쫓긴 자를 집으로 돌아오게 아니하심이니이다”(14:13)고 감히 왕의 잘못을 지적한다. 왕의 여인에게 내린 결정으로 비추어 볼 때 왕의 경우는 이율배반적이라는 것이다.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여인은 두 가지의 논리를 편다. 첫째는, 인간이 죽는 것은 필연적인 운명이며 이미 죽은 자는 땅에 쏟아진 물처럼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지적한다. 암논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기도 하다. ‘필경 죽는다.’는 말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정녕죽으리라”(창 2:17) 와 같은 표현으로 죄를 지은 인간의 운명을 상기시키고 있다. 또한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라고 복수를 사용함으로 13절에서 지적한 ‘하나님의 백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드고아의 여인은 다윗이 아들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않으므로 그 죄 때문에 백성들이 죽게 될 것이라는 것도 은근히 시사하고 있다. 일종의 논리적인 협박이다. 둘째, 비록 하나님이 세우신 원리는 모든 인간이 죽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나님이 생명을 빼앗으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 그분은 오히려 방책을 베푸사 내어 쫓긴 자로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을 주장한다. 살아 남은 자에 대해서는 버린 자가 되지 않도록 방책을 간구해야 하는 것이 정당성을 보여 준다.

드고아 여인의 언변은 다윗의 고민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 죽은 아들 암논에 대한 분노와 슬픔으로 다윗은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죽은 아들에 대한 보수자의 역할에 대해 다윗 스스로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여인은 우리 모두가 죽는 것처럼 암논도 죽은 것이므로 그것을 인간의 운명과 현실로 용납해야 된다는 현실론을 펼치고 있다. 또한 다윗은 압샬롬을 추방상태로 놓아두는 것을 당연한 도리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한편으로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드는 것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 드고아의 여인은 살아 있는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그러하시듯 살리는 방향으로 방책을 세우는 것이 도리임을 지적한다. 복수보다는 용서와 화해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진정한 의도임을 피력함으로 다윗으로 하여금 압샬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신학적인 정당성을 부여해 주고 있다. 그녀의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는 설득이다.

다윗 왕에 대한 확신의 표현(14:15˜17)


 드고아의 여인은 말을 마친 후 문제의 방향을 다시 자신의 것으로 돌려 결론을 맺는다. 그러나 그녀의 말 속에는 항상 숨은 의도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모든 것을 진행하는 목적의식과 기치가 들어 있다. 그녀는 다윗 왕 앞에 ‘두려움’과 ‘희망’이라는 두 가지 감정을 가지고 나아왔음을 고백한다. ‘두려움을 가진 이유는 백성들이 그녀에게 두려움을 주었기 때문이다(14:15). 백성들은 살인한 아들을 내어 놓으라고 여인을 핍박하던 자들(14:7)을 일컫는다. 그들은 왕이 그녀의 아들을 구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왕께 여쭈면 혹시 종의 청하는 것을 시행하실 것이라”(14:15)는 ‘희망’을 가지고 나아왔다는 것을 다윗에게 고한다. 다윗 왕이 그녀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이며 마지막 희망임을 표현한다. 그녀는 “왕께서 들으시고 나와 내 아들을 함께 하나님의 산업에서 끊을 자의 손에서 종을 구원하시리라”(14:16)는 위로를 얻기 위해 또한 그러한 확신 하에 나아왔음을 고한다.


그녀는 장황한 설명을 마치며(12∼17절 까지 히브리어로 93단어가 사용됨) 다윗 왕이 하나님의 심정을 가진 왕임을 고백한다. 그녀는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심이니이다.”(14:17)라고 하며 다윗 왕이 그녀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올바른 결정을 할 것에 대한 확신을 표현한다. ‘선악 간에 분간’ 한다는 표현은 ‘지혜문학’에서 사용된 것으로 다윗의 지혜를 칭송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듯 다윗 왕도 지혜롭게 결정할 것이라는 그녀의 확신을 표현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원컨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과 같이 계시옵소서.”(14:17)라는 축복으로 말을 마친다. 이 부분은 구약에서 여인이 왕을 축복한 유일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다윗의 분별력 : 드라마의 끝(14:18˜20)


다윗은 여인이 위에서 고백한대로 분별력 있는 왕이었다. 그는 여인의 저의를 간파하기 시작했다. 다윗이 여인에게 “내가 네게 묻는 것을 숨기지 말리”(14:118) 고 명한다. 그리고는 “이 모든 일에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고 묻는다. 여인은 이에 대하여 “내 주 왕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옵나니 무릇 내 주 왕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옮길 자가 없으리이다 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하였고 저가 이 모든 말을 왕의 계집종의 입에 넣어 주었사오니 이는 왕의 종 요압이 이 일의 형편을 변하려 하여 이렇게 함이니이다”(14:19∼20)고 답한다. 그녀의 대답은 더 이상 우회적이 아니다. 간결하고 직선적으로 솔직하게 답한다. ‘좌로나 우로나 옮길 자가 없다’는 표현은 ‘왕의 말씀이 너무나 정확’하여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고백하고 이실직고 한다. 그 와중에서도 그녀는 끝까지 책임을 다한다. 최후의 한 마디까지도 낭비하지 않고 설득작전을 펴고 있다. 요압이 자신을 이렇게 지시한 이유는 일의 형편을 변화시키기 위해 했다는 것이다. 다윗과 압살롬의 관계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복수와 응징이 아닌 용서와 회복으로 가야함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요압이 의도한 것임을 밝힌다.

 그리고는 다윗 왕의 지혜에 대해 다시 한 번 “내 주 왕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와 같아서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시나이다”라고 강조한다(14:20) . 다윗이 올바른 결정을 할 것에 대한 또 한 번의 확신을 보여 주고 있다. 흥미롭게도 본문은 시작할 때 요압이 다윗의 심정을 ‘아는’ 것으로 시작하여(1절) 끝날 때는 다윗이 요압 뿐 아니라 모든 일을 ‘아는’(20절)자로 마친다. 다윗은 요압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아는 자이다. 또한 드고아의 여인이 ‘지헤“(‘슬기’ 와 같은 단어, 2절)가 있었다면 다윗은 그녀의 지혜를 훨씬 뛰어 넘어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가 있는 자이다. 이제 그녀의 역할은 끝났고 드라마도 막을 내렸다. 나머지는 다윗의 몫이다.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이 드라마는 커다란 효과를 가져왔다. 압살롬은 돌아왔다. 드고아의 여인은 과연 ‘슬기로운 멋진 연기자’였다. 그러나 다윗 집안의 재화는 계속된다. 불행하게도 이 장은 압살롬의 반역스토리의 서론을 장식하고 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우리의 신앙고백은 무엇인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은 1563년에 독일에서 출판된 개신교 교리문답서로 네덜란드와 독일의 개혁교단에서 늘 권위 있게 여겨왔다. 브르그만(Brueggemann)이라는 학자가 그중의 일부를 본문과의 연결속에서 인용한 부분을 보면, 교리문답이 삶과 죽음에서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에 대하여 교리 문답서는 예수님의 사역과 연결시켜 답을 하는데 그중의 일부를 보면 ‘예수님께서 나를 너무나 잘 지켜 주심으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없이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라는 부분이 나온다. 이것은 다윗이 여인의(가상적인) 아들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는 말과 같은 표현이다(14:1I). 다윗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아들인 압살롬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교리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벽히 지켜 주신다. 그것이 누가 복음에서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눅 21:l8는 약속의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이델베르그 교리의 신앙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해야겠다.


둘째, 우리의 가치판단의 기준은 무엇인가? 다윗이 결정을 내림에 있어 기준으로 삼은 것이 토라의 말씀과 율법의 정신(Spirit)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요압도 다윗이 토라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기준이 필요하다. 말씀을 총체적으로 알고 말씀의 정신을 잘 이해하고 있을 때 상황에 따라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는 지혜를 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즉, 다윗처럼 하나님의 심정을 품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가치판단의 기준이 말씀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더욱더 열심히 사모하고 묵상할 필요가 있다.

셋째, 진정한 사랑의 표현은 무엇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잠언에 보면 “면책(面責)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리”(잠 27:5)는 말씀이 있다. 암논이 다말을 근친 강간한 사건이 터졌을 때 ‘다윗 왕이 심히 노했다’(삼하 13:21)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암논을 질책했다는 기록이 없다. 결국 압살롬이 누이에 대한 보복을 스스로 해결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를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압살롬도 암논을 살인하고 도주함으로 3년이란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돌아오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과 기간 동안에는 압살롬을 질책한 기록은 없다. 그리고 그 이후에 2년의 세월이 더 지나간다(14:28, 33). 물론 그러한 5년 동안의 추방상태를 방치한 자체가 처벌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오히려 압샬롬에게 반항심을 키운 기간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는 부분이 압살롬의 반역이다. 지혜로운 다윗 왕이지만 이것이 자녀교육에 있어서 그의 약점이었다. 우리 모두는 잠언의 말씀을 되새기며 필요할 때 해야 할 말을 하고 질책을 아끼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표현임을 기억해야 한다.

▲ 김윤희 박사·FWIA 대표     ©정희수

 
김윤희 박사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턴신학교 석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에서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FWIA(Faith&Work Institute Asia) 대표로 ‘일의 신학’을 위해 활발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
기사입력: 2018/08/01 [10:41]  최종편집: ⓒ newspower
 
관련기사목록
[구약의 조연들] 레위 지파의 조상, 레위 김윤희 2018/08/01/
[구약의 조연들] 슬기로운 연기자, 드고아의 여인 김윤희 2018/08/01/
[구약의 조연들] 그 아버지에 그 딸, 갈렙의 딸 악사 김윤희 2018/07/30/
[구약의 조연들] 지혜로운 아벨의 여인(삼하20:1∼22) 김윤희 2018/07/27/
[구약의 조연들] 죽음, 불순종한 자의 최후(왕상13:1~32) 김윤희 2018/07/26/
[구약의 조연들] 시스라의 어머니, 적장의 어미 김윤희 2018/07/24/
[구약의 조연들] 비곗 덩어리, 어떤 레위의 첩 김윤희 2018/07/19/
[구약의 조연들] 경쟁심 많은 여인, 라헬 김윤희 2018/07/18/
[구약의 조연들] 아비아달, 잘못된 '줄서기'로 실패한 자 김윤희 2018/07/14/
[구약의 조연들] 영광을 가로챈 여인, 야엘 김윤희 2018/07/13/
[구약의 조연들] 밧세바, 요부인가 지부(智婦)인가 김윤희 2007/02/21/
[구약의 조연들] 탐욕에 지고 만 자, 게하시 김윤희 2006/09/22/
뉴스
광고
최근 인기기사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후원 및 광고 만드는사람들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136-5) 본관 107호 TEL 02-391-4945~6| FAX 02-391-4947,
Copyright2003-2018뉴스파워. all right reserved. mail to newspower@newspower.co.kr 등록번호 서울 아 00122 등록일 2005.11.11 발행 및 편집인 김철영. 청소년보호책임자:김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