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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0.20 [07:02]
인간이 종교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28]
 
정성민

이 시대는 더 이상 종교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다. 마치 무종교의 시대가 열린 듯하다. 종교에 대한 무관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열심인 사람들을 미친 사람인 것처럼 조롱하기까지 한다. 즉 정신적으로 나약한 사람이나 종교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 해남 공룡박물관에 활짝 핀 연꽃     ©뉴스파워



물론 이러한 종교에 대한 무관심은 비종교인들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 근본 원인은 종교를 가진 자들의 나쁜 행실 때문이기도 하다. 비종교인이 나쁜 짓을 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그냥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면 끝이다. 하지만 독실한 신앙인이 나쁜 행위나 범죄를 저지른다면 전혀 다른 사태가 벌어진다.

 

즉 그 독실한 신앙인의 나쁜 행위는 바로 그 사람이 믿는 종교의 진실인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공식이다. 나쁜 짓을 행한 그 독실한 신앙인이 가진 개인적인 성격이나 습관이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사람이 믿는 종교를 맹비난한다. 도대체 왜 그럴까? 그들이 믿는 종교 창시자들이나 경전들은 모두 선한 행위를 권장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아무래도 종교인들의 위선적인 모습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기에 비종교인들이 종교인들의 위선적인 모습에 실망하고 결국에는 종교를 등한 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종교인들의 위선을 비난하면서 종교의 진실성을 문제를 삼던 사람들이 어느 날 한 순간에 돌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종교인들이 갑작스럽게도 절체절명의 위기를 만나거나 아니면 자신 스스로의 위선적인 모습을 깨달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진다. 그래서 자신이 그동안 비난해왔던 그 종교에 한번쯤 기대보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특별히 암이나 다른 중대한 질병으로 임종을 맞이할 시간이 다가온다면 더더욱 종교에 기대려는 마음은 커진다. 아무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인간들이 지닌 종교에 대한 기대나 관심은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종교에 대한 관심을 포기할 수 없게 할까? 이제부터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i]

 

1. 인간이 종교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인간이 제한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죽음을 향하여 나아가는 유한한 존재다. 인간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 죽음으로 사라질 최종적인 위기를 두려워한다. 이에 대해 석가는 말한다,

 

세상에서 결국 죽어야만 하는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알 수 없고, 애처롭고 짧아 고통으로 엉켜 있습니다.

태어나 죽지 않고자 하나, 그 방도가 결코 없습니다.

늙으면 반드시 죽음이 닥치는 것입니다. 뭇 삶의 운명은 이러한 것입니다.

결국 익을 과일처럼, 떨어져야 하는 두려움에 처합니다.

이처럼 태어난 자들은 죽어야 하고 항상 죽음의 두려움에 떨어집니다. (Stn.574-76)

 

이러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실체, 즉 영혼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이어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폴 틸리히에 의하면, 인간이 유한한 이유는 네 가지이다. 바로 시간, 공간, 우연성, 실체라는 요인들이다. 이는 인간이 시간에 제한되어 산다는 것이고, 또한 공간에 제한되어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정하지 못하고 어떠한 시기와 우연에 따라 운명이 시시각각으로 좌우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라는 실체, 즉 나의 외모, 나의 몸, 나의 개성, 나의 모든 것은 서서히 변하면서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는 것이다. 결국 시간, 공간, 우연성 그리고 실체가 서로 이어져서 우리를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짧고도 불확실한 삶으로 인해 정신적인 충격을 받게 된다. 인간은 벗어날 수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절망의 늪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들의 유한함을 극복해줄 수 있는 궁극적 존재()에 대한 질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자신들 안에 영혼과 같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실체가 있는지를 궁금해한다. 즉 자신들이 죽어서도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사후세계가 존재하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사실 유한한 인간들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틸리히는 이를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결국 종교라고 하는 신비한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2. 우리가 종교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공허하기 때문이다.

 

신체적인 유한함과 더불어 인간이 처한 또 다른 고통은 바로 영적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영적인 중심을 상실할 때 삶의 무의미함을 느끼게 된다. 짐승들과 달리 인간은 영적인 것을 사모하며 영적인 갈증을 느끼는 존재이다. 영적인 만족을 누리기 위하여 그 무엇인가를 열정적으로 추구한다. 혜성처럼 나타나는 인기 가수나 배우들에 대한 열성 펜들의 관심이 뜨겁다. 전세계적으로 한류의 인기가 대단한다. 요즘 방탄소년단의 인기가 매우 뜨겁다. 또한 특정 사이비 종교를 따르는 신자들의 광신적인 믿음도 식을 줄 모른다. 지난 십 여년 간 신천지의 활동이 대단하였다. 왜 그럴까? 왜 사람들은 인기 스타의 노래에 흠뻑 빠져들고, 사이비 집단에 빠져 자신의 전재산과 가족도 버릴 수 있을까? 아마도 자신의 내면에 채울 수 없는 어떠한 영적인 갈증이나 욕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영적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한다지만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솔로몬 왕의 탄식은 실로 공감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말한다,

 

은 금과 왕들이 소유한 보배와 여러 지방의 보배를 나를 위하여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들과 인생들이 기뻐하는 처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들보다 더 창성하니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도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가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 그 후에 내가 본 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전도서 28-11)

 

그렇다. 그 어떠한 새로운 문화나 예술행위(미술, 음악, 그리고 연극이나 영화 등),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팝송이나 발라드 같은 노래도 우리의 허전한 마음을 만족시킬 만한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허전한 마음을 달래 줄 수 있는 새로운 시도를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러한 새로운 시도조차도 알고 보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은 사실이다. 요즘 따라 인기 가수나 배우들의 수명이 매우 짧아진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이에 대해 전도서 기자는 말한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게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이 기억됨이 없으니 장래 세대에도 그 후 세대들과 함께 기억됨이 없으리라. (전도서 1 8-11)

 

결국 지금까지 우리가 의미를 가지고 추구해온 그 모든 시도를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의 삶에 어떠한 궁극적인 의미를 줄 수 있는 것들을 향해 눈을 돌리게 된다. 바로 마약, , 섹스 등과 같은 이 세상의 그 모든 쾌락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영적인 갈증을 채우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석가의 입장에서는 영적인 갈증을 채우려는 시도 자체를 부정할 것이다. 하지만 육체의 쾌락을 벗어나 자신을 비우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라는 석가의 가르침조차도 어떤 면에서 본다면 인간 내면의 갈증을 채우려는 종교적인 시도일 수도 있다. 아마도 석가는 자신의 도덕성으로 종교를 대체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영적인 것들에게서 조차도 만족함을 얻지 못하게 될 때가 있다. 그 때는 어쩔 것인가? 영적인 무관심과 공허감은 더욱 커지게 되고, 결국에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영적인 만족을 찾지 못한 인간은 삶의 무의미함이라는 깊은 늪에 빠지게 된다. 결국 영적인 중심조차도 잃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를 영적인 공허감과 삶의 무의미함에서 벗어나게 해줄 궁극적인 존재를 찾아야 한다. 이에 대해 전도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1-2, 8-9)  

 

과연 우리가 궁극적인 존재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가 원하다고 해서 궁극적인 존재가 우리 앞에 나타나 줄까? 그리고 만약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줄 수 있는 궁극적인 존재를 찾는 것조차도 실패하게 될 때는 어쩔 것인가? 이 때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실행할 수도 있다. 자살은 인간이 처한 그 모든 유한성, 삶의 공허함, 영적인 갈증과 같은 실존적인 고통에서 우리를 신체적으로 자유롭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로 여겨진다.

 

3. 우리가 종교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죄의식 때문이다.

 

육체적인 유한성, 삶의 공허감과 무의미함과 더불어 인간이 처한 세 번째 고통은 바로 죄의식이다. 신체적으로 유한한 인간은 제한된 자유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의지나 선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시간과 장소 그리고 부모를 만났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 않다. 인도에서 행해지는 결혼제도를 통해 설명하자면 이렇다. 각자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신분계층이 다르게 태어난다. 결혼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간에 자신의 신분에 맞는 배우자를 선택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제한된 선택들 가운데 최선의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우리의 적성에 맞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집중하라고 권고한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인생이 짧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선택이거나 최선의 선택만이 우리의 미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자신이 내린 그 모든 선택과 결정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결정에 대해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신학자 틸리히에 의하면, 우리에게 도덕적인 정당성을 질문하는 자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결정한 선택에 대하여 우리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가 이를 판단하고 정죄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정말 이상하고도 모호한 실존적인 현상일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양심의 기능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이를 잘 설명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 7: 19-23)

 

이러한 현상은 불교의 108번뇌에서도 발견된다. 일체의 번뇌는 마음을 얽어 매는 까닭에 이를 일컬어 얽매임이라 한다. 번뇌라 칭함은 능히 마음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히기 때문에 번뇌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의 번뇌가 외부적인 손가락질과 질책에 의한 것도 있지만, 자기 자신의 건강한 자아가 자신의 병든 모습을 비췰 때에 이러한 번뇌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인간의 내면세계가 분열이 되어있음을 보여준다.

 

결국 사후의 심판을 받을 때에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인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죄악들을 내 안의 자아 혹은 영혼이 가장 혐오하고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를 우리가 죄의식이라 말한다. 바로 이러한 죄의식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하게 한다. 더 나아가 자살과 같은 도피행위도 이러한 죄의식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왜냐하면 사후의 심판을 믿는 자들에게 죄의식과 그로 인한 죄책감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말한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오죽하면 칸트가 선한 행위가 보상받고, 악한 행위가 심판을 받기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존재가 요청된다는 주장을 했겠는가! 바로 죄의식이 칸트로 하여금 사후심판의 가능성과 신 존재의 가능성을 부인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신과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 석가조차도 우리가 지은 선과 악에 대해 반드시 심판이 뒤따른다고 말한다. 물론 이는 신의 심판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에 따른 순리적인 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작은 악이라도 가벼이 말라. 이로써는 재앙이 없을 것이라 하여

물방울이 비록 미세하다 하더라도 점점 큰 그릇을 채워 가듯이

대개의 죄도 가득 채워지는 것이 작은 것을 좋아 쌓여서 이루어지느니라.

작은 선이라도 가벼이 말라. 이로써는 복이 될 수 없다 하여

물방울이 비록 미세하다 하더라도 점점 큰 그릇을 채워 가듯이

대개의 복도 가득 채워지는 것이 작은 먼지를 좇아 쌓여지느니라. (법구경 121-22)

 

요망한 일을 하고도 복을 받는다면 그 악의 인연이 익기 전이라네.

그 악의 인연이 익어서 이르게 되면 절로 죄의 과보를 사납게 받게 되느니라.

곧고 상서로운 일을 하고도 화를 받는다면 그 선의 인연이 익기 전이라네.

그 선의 인연이 익어서 이르게 되면 반드시 그 복을 받게 되느니라. (법구경 119-20)

 

4. 우리가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바로 불안과 절망 때문이다.

 

불안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의식하는 것이다. 불안은 자기 자신이 죽어야만 하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경험하게 된다. 불안은 삶이 지닌 공허감과 무의미함을 자신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도 생겨난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 내면의 분열, 즉 자기 안에 이상적인 자아(본질적인 자아)와 왜곡된 자아(현실적인 자아)가 분리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에도 불안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이러한 본질적 자아(하나님의 형상, 선하고 건강한 자아)과 실존적 자아(타락한 세상, 악하고 병든 자아)의 분리로 인하여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우리가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을 통해서도 이 불안한 마음을 제거하거나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불안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는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라고 말한다. 결국 이러한 죄의식과 불안은 우리를 절망의 나락으로 이끈다.

 

물론 석가는 이러한 기독교적 입장을 전적으로 거부할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 우리가 그 모든 번뇌의 고통에서 자유와 해방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결국 석가에게 있어서 죄의식이나 그로 인한 불안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 신이나 종교가 전혀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그 어떠한 내면의 불안이나 두려움도 우리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과거에 있었던 것을 완전히 말려버리고, 미래에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게 하십시오.

그리고 현재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평안하게 유행할 것입니다. (Stn.949)

 

이렇게 새김을 확립하고 방일하지 않는 수행승은 내 것이라는 집착했던 것을 버리고,

태어남과 늙음, 슬픔과 비탄을 버리고, 여기서 자각적으로 괴로움을 여읠 것입니다. (Stn.1056)

 

하지만 기독교는 마인드 컨트롤을 통해서 죄의식이나 그로 인한 불안한 감정을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적인 문제들(유한한 삶, 삶의 공허함과 무의미, 죄의식)을 해결해줄 수 있는 궁극적인 존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과연 누가 이 실존적인 고통과 그로 인한 불안과 절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줄 수 있는 가이다. 다시 말해 불안은 우리를 괴롭히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궁극적인 존재에 대한 관심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신앙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과 분리)

2) 그로 인한 영적 사망 (하나님의 형상을 잃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사라짐)

3) 그로 인한 실존적 고통들 (유한한 생명, 삶의 공허함, 죄의식)

4) 그로 인한 불안과 절망

5) 그로 인한 궁극적인 관심 (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신적인 존재)

6) 그로 인한 궁극적인 실재의 등장 (인류의 죄를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

  

하지만 헤겔과 같은 이상주의자들은 본질(하나님의 형상)과 실존(타락한 세상)의 분리된 상태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실존 자체도 그렇게 비극이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 스스로 이러한 모든 실존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인간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주체자이고 미래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바로 그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과학의 발전과 함께 등장한 17세기 현대 계몽주의 시대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고 부정하였다. 그들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진보적 세계관을 믿었는데, 이는 인간이 과학기술을 사용하여 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죄악성을 간과한 이러한 유토피아사상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과 함께 무너지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의 총성은 17세기 이후로 이어온 300년 간의 현대계몽주의 사상을 여지없이 붕괴해버렸다.

현대 계몽주의의 인본주의적 세계관은 어쩌면 석가의 가르침과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인간을 세상과 우주의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지닌 실존적인 문제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스스로 그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 자체를 살기 좋은 파라다이스로 만들고자 하는 현대 계몽주의의 진보적인 세계관, 즉 유토피아 사상은 석가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이다. 석가는 이 세상을 고통스러운 세상으로 규정했고, 고통의 원인을 인간의 내적인 욕망으로 보았다. 그래서 석가가 추구하는 바는 각 개인의 정신적인 평안이었다. 즉 석가는 과학기술을 통해 이 세상을 육신적으로 편안하고 편리하게 만드는 것을 결단코 원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석가는 육신적으로 안락한 세상을 싫어하여 배격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석가가 바라는 유토피아는 신분이나 계급의 차별이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것이고, 세상적인 쾌락이나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도덕적이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각자가 그 모든 소유물이나 감각적인 욕구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자유와 해방을 누리길 원했다. 그러니까 현대 계몽주의의 유토피아 사상과 석가가 바라던 이상적인 세상은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비록 신을 포기한 체 인간이 그 모든 역사의 주체가 된다는 인본주의 사상을 석가와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함께 공유하지만 말이다.   

 

5. 우리가 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종교가 불안한 마음을 달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더 없는 안식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매우 불완전한 존재다. 인간의 불안전함은 육체적인 측면, 정신적인 측면 그리고 영적인 측면 등 모든 면에 적용된다.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 제한되어 살다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의 주인공이다. 이러한 시기와 우연에 얽매여 사는 삶 속에서 날마다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주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보니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들이라고 음식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명철자들라고 재물을 얻는 것도 아니며 지식인들이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기회는 그들 모두에게 임함이니라.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를 알지 못하나니 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 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 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 거기에 걸리느니라. (전도서 9:11-12)

 

그러기에 인간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직면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어떤 절대적인 존재나 힘을 의지하고자 한다. 결국에 종교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말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서 12:1,7)

 

무엇보다도 인간은 마음의 공허함을 채우길 원한다. 삶의 무의미함으로 인한 마음의 공허함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머리가 희어지게 늙어가면서 점차로 마음의 안식을 더 추구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종교는 불안한 마음을 달래길 원하는 사람들에게 더 없는 안식처인 것이다. 이에 대해 다윗왕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 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편 16:11)

 

 

 

 



[i]인간이 종교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폴 틸리히의 조직신학 I, II, 존재에의 용기를 통한 틸리히의 실존철학을 근거로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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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29 [07:06]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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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민 교수] 힌두교,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정성민 201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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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민 교수] 신처럼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정성민 2018/06/08/
[정성민 교수] 과연 신은 악의 문제에 책임이 있을까? 정성민 2018/06/07/
[정성민 교수] 석가모니가 무신론 주장하는 근거는? 정성민 2018/06/04/
[정성민 교수] 석가모니는 왜 신의 존재에 관심 없었나? 정성민 201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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