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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0.20 [07:02]
과연 종교란 무엇일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27]
 
정성민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슬픈 운명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인간은 너무나 쉽게 유혹에 굴복하고 죄악을 밥 먹듯이 저지르는 타락한 존재다. 게다가 교만에 빠져 안하무인한 존재로 뻔뻔하게 살아간다. 그러다가 불연 듯 자책하며 괴로워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매우 불완전한 존재다.

인간의 불안전함은 정신적인 측면, 육체적인 측면, 그리고 영적인 측면 등 모든 면에 적용된다. 그러기에 인간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직면하면 그 어떤 절대적인 존재나 힘을 의지하고자 한다. 결국에 종교를 찾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는 것은 각 개인의 선택이다.

 

1. 종교란 무엇일까?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중요한 의문들을 갖게 된다.

 

도대체 내가 왜 태어났을까?”

정말 신은 존재할까?”

고통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일까?”

 

과연 누가 이런 수많은 질문들에 해답을 줄 수 있을까? 아마도 종교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철학적인 질문들이 우리로 하여금 종교로 눈을 돌리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니니안 스마트는 종교적 진리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두 가지로 분류한다. 하나는 긍정적인 반응이고 다른 하나는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반응이다. 긍정적인 반응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진 철학적이고 과학적인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종교를 통해서 얻기를 원한다. 스마트는 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종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우주는 왜 존재하는 걸까? 사물의 내적인 본질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렇게 과학이 다 해결해 줄 수 없는 물음들을 늘 제기한다. 이는 세속적인 삶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과연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이며, 고통의 진정한 본질은 무엇일까? 종교는 이런 물음들에 대해 깊이 있는 견해를 제시해 주는 영적 체험과 상징을 갖고 있다…. 자연의 색깔과 형태 자체는 부분적으로 인간의 의식이 낳은 산물이다. 자연은 인간을 만들고 인간은 자연을 만든다. 종교는 이렇게 의식이 우주 안에서 수행하는 신비스러운 중간적 역할에 대해 중요한 무언가를 말해준다.[i]

 

반면 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있다. 이들은 종교를 인간적인 산물로 바라본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마르크스다. 그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말한다. 이는 종교가 사회의 문제나 모순을 근본적으로 치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달래주기만 하는 거짓된 의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거짓된 의식으로서 종교는 빈익빈 부익부와 같은 사회적인 병리현상을 고치기보다는 오히려 더 복잡하게 만들어서 문제의 심각성을 혼동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 이와 더불어 프로이트는 종교가 정신 건강에 해롭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신에 대한 믿음은 보편적 강박 신경증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2] 즉 종교는 병적인 집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종교가 정신건강에 해로운 것일까? <완전한 진리>의 저자, 낸시 피어시는 이러한 사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녀는 종교는 우리의 정신적인 건강 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건강을 위한 보약이라고 역설한다. 그녀는 말한다,

 

또 하나의 감동적인 예는 작고한 데이비드 라슨의 업적인데, 그는 홀로 종교와 건강이란 주제로 의학계를 뒤집어 놓은 인물이다. 정신의학을 배우던 대학원 시절 그는 그 분야를 떠나라는 충고를 들었다. 기존의 입장은 천편일률적으로 종교적 믿음이 정신 질환과 연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라슨은 연구를 계속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실제 연구 결과들이 종교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을 뒷받침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정반대였던 것이다. 연구 대상자들 가운데 신앙심이 더 깊은 자들은 병든 집단이 아니라 건강한 집단에서 나타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라슨은 독자적으로 연구를 시작해 마침내 국립 보건연구소를 설립했고…. 현재는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우울증, 자살, 가정의 불안정, 마약 및 알코올 남용, 기타 사회적 병리 면에서 발병 비율이 더 낮다는 것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종교적 믿음이 더 나은 신체 건강과도 상관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암으로부터 고혈압과 심혈관 질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질병과 관련해 더 낮은 발병률을 보이고 있다. 병에 걸렸다가 회복되는 속도도 신앙 있는 사람이 더 빠르다. 사망률조차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의료 전문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3]

 

20세기 위대한 신학자, 틸리히는종교는 인간이 궁극적인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종교는 인간이 지닌 삶의 고통을 해결해줄 수 있는 궁극적인 존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결국 종교는 누가 우리를 구원해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기에 윌리암 제임스[ii]는 종교의 핵심을구원’(deliverance)’의 경험으로 보았다.[iii] 즉 종교는 인간이 가진 슬픔, 고통, 연민 그리고 죽음과 같은 삶의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 어떤 것이다.

 

특별히 종교는 다가올 죽음의 순간에 대한 두려움이나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아주 강력한 그 무엇이다. 토머스 하트먼과 마크 젤먼은 죽음에 관한 종교적인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희망을 줄 뿐만 아니라 그 희망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애 준다고 말한다.

 

종교는 사람들이 죽음을 직시할 수 있게 한다. 죽음은 삶의 끝에 온다. 죽음은 정원 가장자리에 세워진 벽과 같은데, 종교는 그 벽 너머를 바라보게 한다. 종교는 죽음 이후에, 즉 벽 너머에 있는 그 무엇에 대해 숙고하게 한다. 죽음이 결정적으로 우리 육신의 끝임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모든 종교는 죽음 이후에 무언가가 있다고 가르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죽음 이후에도 일어날 일들에 관한 이런 다양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희망을, 즉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희망을 안겨준다. 그리고 그 희망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 준다. 우리가 두려움을 겪지 않도록 희망을 주는 것은 종교의 중요한 역할로서,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고 죽음을 바로 볼 수 있게 한다.[iv]

 

종교학자 레이몬드 파니카에 의하면, “종교는 구원의 길이다.” 즉 종교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걸어가는 길이다. 그에 의하면, 종교는실존적 순례로서자기완성의 길이라는 것이다.[v] 철학자 크리스토퍼 베이치는 종교란 자기 영혼 깊숙한 곳을 탐구하게 해주고 우주의 내밀한 작용에 동참하도록 이끄는 영적 체계로서 작동한다.”라고 말한다.[4]

 

2. 종교의 주체자는 인간이고, 종교의 대상은 하나님이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종교는 신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시도이며 노력이라고 말한다. <종교철학>의 저자인 베른하르트 벨테 교수는 종교 활동의 주체는 바로 인간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종교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없고, 종교가 신이 인간에 준 선물이라고 가정할지라도 종교행위를 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종교의 내용이나 속성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에 대한 책임을 인간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벨테 교수의 주장이다.

 

종교는 그것이 아무리 자신의 기원으로부터 살아가고 그것이 어쩌면 신의 선물일지라도 인간적 사건과 인간의 생 및 현 존재의 형태로서 실행된다는 사실이 환기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인간의 전망 안에서 생긴다. 신앙하거나 기도하거나 예배를 위한 집회를 열거나 등의 행위를 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들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인간의 자아 및 존재이해는 종교의 경우에 전반적으로 생동적이다. 종교가 생동적으로 존재하는 거기에는 그것이 아무리 위로부터의 선물이며 이로써 자신의 기원으로부터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그것은 매번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존재하는 그것으로 이해하는 인간적 이해 안에서 언제나 살아간다....... 물론 인간이 종교를 스스로 생산해 낼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가 인간의 자아 및 존재이해의 매개 안에서 인간적 현존재의 한 형태로서 실행되는 한에 있어서 그는 그것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것이다.[vi]

 

그렇다. 인간이 신을 갈망하는 것이다. 인간이 종교의 주체이고, 하나님은 종교의 객관적인 대상이요, 신앙의 대상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신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존재이다. 인간의 나약함과 불안한 감정이 종교의 필요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잠언 27:1)

 

비록 신이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증명할 수 없지만 신의 존재를 믿는 자들에게는 종교가 삶의 모든 것이다.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1)

 

그리고 그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도 믿는다. 더 나아가 그 하나님이 사후세계의 심판자이심도 믿는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 12:14)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고 산다. 그 만큼 종교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전도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3:11)

 

석가나 니체와 같은 무신론자들에게 있어, 종교는 중독성이 있는 아편과도 같다. 그들에게 종교는 인간이 자신에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인 것이다. 아니면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적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믿는 자들에게 종교는 없어서는 안 될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

 

그러기에 성도는 자신이 믿는 신앙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24)

 

그렇다. 종교는 사람들이 목숨을 바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지닌 그 무엇이다. 이러한 사실은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의 순교를 통해서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러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 7:54-60)

 

3. 맹목적인 신앙과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

 

실로 종교의 힘은 엄청난 것이다. 사람들이 목숨을 바칠 정도로 귀하게 여기는 것이 틀림이 없다. 하지만 맹목적 종교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기도 하다. 바로 과격한 이슬람 무장 단체가 대표적인 예이다.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종교성을 표출하는 것이 건강한 종교이다. 그런데 맹목적인 신앙인들은 하나님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감정적인 충동에 의해 그들의 신앙심을 드러낸다. 그 만큼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세뇌를 당하여 이용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위선적인 종교 지도자들을 삯꾼 목자로 설명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11-15)

 

이렇게 사람들의 신앙심을 이용해 자신들의 야망을 이루려는 종교지도자들은 어느 종교에서도 발견된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유대교의 바리새인들이다. 예수는 이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아주 통렬히 비판한다. 특별히 마태복음 23장은 유대교의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의 문제점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마태복음 23:3-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마태복음 23:13,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마태복음 23:23-26)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마태복음 23:27-28, 30-31)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마태복음 23:33-34)

 

무신론자들에게 이러한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은 더 없는 충격이다. 이들에게는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것도 커다란 문제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제사장이나 종교 지도자의 신분을 이용해 온갖 특권을 누린다는 것이다. 속된 말로 신을 팔아 자신들의 잇속을 챙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인 타락의 최대 피해자는 역시 무고한 신앙인들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는 종교개혁자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종교기득권 세력에 대한 예수가 지닌 종교개혁자적 성향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희생일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일환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석가도 힌두교의 타락을 개혁하길 원했던 종교개혁자이다. 예수처럼 그도 제사장들인 브라만의 세속적인 타락을 그렇게도 통렬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예수처럼 말이다. 그는 제사장 브라만들의 타락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소들의 무리에 둘러싸이고 아름다운 미녀들이 뒤따르는

인간의 막대한 부를 누리고 싶은 열망에 바라문들은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수레 위의 정복자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말의 희생제, 인간의 희생제,

막대를 던지는 제사, 쏘마를 마시는 제사, 아무에게나 공양하는 제사,

이러한 제사를 지내고, 바라문들에게 제물을 주었습니다.

소들과 침구와 의복, 잘 치장한 여인들, 잘 만들어지고 아름답게 수놓아진 준마가 이끄는 수레, 여러 방으로 나뉘어 있고 잘 배치된, 화려한 주택을 여러 가지 식량을 가득 채워 바라문들에게 주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재물을 얻어 축적하는데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욕망에 깊이 빠져들자, 그들의 갈애는 더욱 더 늘어만 갔습니다.

 

결과적으로 모든 종교는 타락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종교의 순수성으로 항상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종교의 대상인 하나님을 인간들의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욕구 충족을 위해 이용되어지는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예배의 대상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 할 긍휼의 대상이다. 사람들의 종교성을 이용해 자신들의 이권을 챙기려는 위선적인 지도자들은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증거한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마태복음 23:33)

 

그러므로 진정한 종교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사랑과 긍휼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종교적인 행위의 최우선 순위이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인간을 향한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말한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태복음 5:23-24)

 

4. 십자가의 죽음은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룬다

 

결국 종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으로 승화가 될 때에 완성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계명의 비밀이다. 이러한 십계명의 비밀을 예수는 아주 명확하게 설명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더 나아가 이러한 종교적인 본질을 완성한 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에게 전해지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신과 인간이 만나고 화해하는 위대한 사건이다.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적인 것이 없이 그 모든 것이 신에게만 종속되는 신중심적 종교의 문제를 극복한다. 아마도 유대교나 힌두교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또한 이는 신을 부정하고 오직 인간만을 세상의 중심으로 삼는 그 모든 인본주의적 사상이나 철학의 문제를 극복한다. 불교나 공산주의 이론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신과 인간의 절묘한 조화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다.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은 그 모든 종교적인 이상과 목적을 성취한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심이라. (빌립보서 2:5-8)

 



[1]김종서, 종교사회학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 12-13.

[2]낸시피어시, 완전한진리 (서울: 복있는사람, 2006), 118.

[3] Ibid, 118-19.

[4]윤회의본질, 41.



[i]니니안 스마트, 종교와 세계관, 160.     

[ii]윌리암 제임스(1842-1910)는 미국의 사상가로서 하버드 의과대학에 들어가 1869년 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심리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여 미국 대학 최초로 1875년 심리학 강의를 시작하였고, 이후 하버드 대학에서 생리학과 철학 교수 등을 지냈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이 책은 영국 에든버러 대학으로부터 기포드 강연 초청을 받아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20개의 주제로 나눠 강연한 것이 결과물로 출판된 것으로 제임스에게 명성을 안겨다주었다. 

[iii]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46

[iv]세계종교 산책, 25-26. 

[v]레이몬드 파니카, 종교 간의 대화, 김승철 역 (파주: 서광사, 1992), 140.

[vi]베른하르트 벨테, 오창선 역, 종교철학 (칠곡: 분도출판사, 1998), 28-29.




▲ 정성민 교수     ©뉴스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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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27 [15:33]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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