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
교계뉴스문화/교육국제/NGO/언론생활/건강파워인터뷰오피니언연재정치/경제/사회한 줄 뉴스
전체기사보기
편집  2018.08.17 [03:27]
지혜로운 아벨의 여인(삼하20:1∼22)
김윤희 박사의 구약의 조연들
 
김윤희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은 그의 생전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를 거부했다(삿 8:22∼23). 그러나 그의 첩의 아들인 아비멜렉은 잔인한 방법으로 스스로 왕이 되었다. 데베스라는 곳에서 모반이 일어나자 아비멜렉은 그 성을 점령한다. 백성들은 성중에 있는 망대 꼭대기로 피신하고, 그는 망대를 불사르려고 문 가까이로 다가간다. 그 순간에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골이 깨져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아비멜렉은 죽기 직전, 병기든 소년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하며 ‘여인의 손에 죽은 남자’라는 불명예를 피하려 했으나 그는 결국 그러한 오명을 달고 다니는 인물이 되었다. 이름 없는 이 데베스 여인의 용기와 기지로 망대 꼭대기로 피신했던 성읍 사람들 모두는 화형식을 당하는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삿 9:50∼56).

이렇듯 구약에서는 드문드문 극적인 순간에 나타나는 여성들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벨의 여인은 사사기의 맷돌짝의 여인과 같은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방법론에서는 서로 차이가 난다. 어떠한 배경 속에서 어떠한 순간에 나타나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본문을 살펴보며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을 만나 보자.

본문의 배경

본문의 사건은 다윗과 그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 사건(삼하 15∼19장)의 후속편이라 볼 수 있다. 압살롬 사건으로 한번의 폭풍우가 지나가고 다윗은 피신했던 곳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19장에 보면 왕위를 회복시키고 왕을 수행하는 데에 있어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 절반이 왕을 호행(扈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호행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이 왕 앞에 나와 유다 지파의 행위를 왕을 도적질한 행위라고 규탄한다. 전체 지파 연합으로 해야 할 일을 유다가 독점했다는 이유로 불만을 제시한다(삼하 19:40∼43). 이에 대하여 유다 지파는 자신들이 왕의 지친(至親)이므로 당연한 권리가 있음을 주장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부당한 이득을 취하지 않았다는 결백성도 주장한다(19:42).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숫자의 우세함을 내세워(“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 왕의 환도(還都)를 주도할 권리를 주장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느끼는 감정이 그들의 말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삼하 19:43). 그들의 알력의 결과를 성경은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고 기술하며 유다의 판정승을 들어 주었다.

이것은 이미 유다와 나머지 지파들간의 갈등과 분열의 조짐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예이며, 후에 벌어질 분열 왕국의 싹이 서서히 자라나고 있음을 암시하는 단적인 증거라 볼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유다 지파가 아닌 나머지 이스라엘 지파들의 불만을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또 하나의 반란 사건이 연이어 터지게 된다. 아벨의 여인은 이 반란 사건의 배경 속에서 등장한다. 20장 본문의 구조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바가 다윗에게 반란(20:1∼2)

저자는 세바를 소개하는 것으로 본문을 시작하는데 그에 대한 가치평가가 이미 내려져 있다. “마침 거기 난류(亂流)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마침’이라는 단어가 시사하듯 그의 존재를 ‘우연성’과 연결시킴으로 가볍게 다루고 있다. 그의 이름을 소개하기도 전에 그가 어떠한 종류의 인간인지에 관하여 판결이 이미 나와 있다. ‘난류’라고 표현된 이 단어는 다른 곳에서는 ‘악함’(삼상 1:16), ‘불량함’(삼상 25:17, 25), ‘비류’(삼상 10:27) 등으로 번역되어 있으며 ‘가치 없는 자’라는 뜻이다.

가치 없는 자 하나가 마침 거기에 있다가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아의 형식으로 이 자를 소개함으로 저자는 세바의 반란을 이미 지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의 반란에는 어떠한 정당성도 없다는 것이 처음 그를 소개할 때부터 결론으로 내려져 있다.

세바가 가지는 심각성은 그가 베냐민 사람이라는 데에 있다. 같은 베냐민 지파에 속하는 사울 왕가의 잔류들이 아직 남아 있고 그들의 권세와 영화를 찾으려는 그룹들이 존재하며 지금과 같이 이스라엘과 유다 지파 사이에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를 타고 반란을 일으킨다면 문제가 심각하게 번질 수가 있다. 또한 다윗 왕이 아직 요단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지도 않았고 망명에서 막 돌아온 왕이 반란 진압까지 한다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세바와 같은 자가 이러한 호기를 놓칠 리가 없다.

세바가 나팔을 불며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分誼)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할 업(業)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고 백성들을 선동한다. 그의 이러한 표어는 후에 르호보암 시절에 분열 왕국의 캐치프레이즈로 다시 사용됨으로 유명하게 되었다(왕상 12:16; 대하 10:16). ‘이새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왕인 다윗을 비하하려는 의도로 쓰였다. 결국 세바의 말은 설득력을 얻었고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아’ 다윗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반면에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수행했으며 다시 한번 다윗은 왕국의 위기를 맞이한다. 그의 가정의 분열 사건(압살롬)이 국가의 분열 사건으로 번진 것이다.

반란의 진압명령(20:3∼7)

다윗이 예루살렘 본 궁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세바의 반란 진압을 시작하는데 세 단계로 진행이 된다. 첫째는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하면서 열 명의 후궁이 궁을 지키도록 놓아 두었었다. 압살롬은 온 이스라엘 앞에서 후궁과 동침함으로 다윗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삼하 20:21∼22). 이에 대하여 다윗은 그들을 별실에 두고 죽는 날까지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것은 토라에 나오는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킬 뿐 아니라(레 18:15), 그의 밧세바와의 불륜의 관계(삼하 11:4)에서 온 모든 재화들에 대한 깊은 반성을 나타내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일단 잘못된 집안 문제를 바로잡고, 두 번째로 다윗은 아마사로 하여금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소집하라는 명을 내린다. 아마사는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킬 때에, 원래 다윗의 군대 장관이었던 요압을 대신하여, 군대 장관으로 임명된 자이다(삼하 17:25). 그러한 자를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군대 장관으로 등용할 의사를 밝힌다(삼하 19:13). 모반에 가담하였던 장수를 다시 등용한 것이다. 아마사를 기용함으로 압살롬의 반란에 참여했던 자들을 회유하려는 정치적인 계산과 함께 압살롬을 죽인 요압(다윗의 군대장관; 삼하 18:14∼15)에 대한 거부감도 작용한 것 같다.

문제는 아마사가 왕이 정한 기한을 넘기고 지체함으로 발생한다. 왜 아마사가 그랬는지 본문은 전혀 밝히고 있지 않다. 추측만이 무성할 뿐이다. 그가 여전히 다윗에게 반감이 남아 있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 삼 일이라는 기간이 무리한 요구였다고 보는 자도 있고, 심지어는 아마사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여 일부러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 다윗의 음모였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일단 그는 다윗의 명령을 제때에 수행하지 못한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아마사가 늦장을 부리자, 세 번째로 다윗은 아비새를 시켜 다윗의 신복들을 거느리고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내린다. 아비새는 요압과는 친형제 사이다(삼상 26:6; 삼하 2:18). 여기에서도 다윗은 그의 군대 장관이었던 요압을 제쳐 놓고 일을 진행시킨다. 어쨌든 이미 아마사에게 일을 시켜 놓고 다시 아비새에게도 지시를 내린 이유는 ‘세바가 압살롬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라는 다윗의 판단과 ‘그가 시간을 벌수록 견고한 성에 피해 들어가’ 진압을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었음을 본문은 밝히고 있다. 본문은 또한 아비새에게 명령은 떨어졌지만 실제로 군대의 실권은 여전히 요압에게 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요압을 좇는 자들’이란 표현을 쓰고 있다. 참고로 그렛 사람은 크레타 섬 사람들로 블레셋 땅에 정착하여 블레셋 민족의 일부로 사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블렛 사람은 블레셋 민족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은 일종의 외국인 용병들로서 다윗의 경호원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삼하 15:18).

요압의 아마사 살인(20:8∼13)

이 부분의 본문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는다’(10, 13절)는 반복된 표현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8∼10절까지는 요압이 아마사를 살인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고 11∼13절은 아마사의 시체를 처리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러 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이다. ‘반란 중에 또 다른 종류의 반란’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바의 반란은 이스라엘과 유다지파간의 국가적 차원의 반란이고, 압살롬의 사건은 부모 자식간, 가족 사이의 반란이라면, 요압과 아마사는 서로 사촌으로 친족 사이의 반란이라 볼 수 있다. 다윗이 우리아를 죽인 사건으로 시작된 다윗 가정의 재화는 이토록 파장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아비새가 다윗의 지시를 받고 세바를 쫓는데 거기에 원래 다윗의 군대 장관인 요압도 있었다. 도중에서 아마사를 만나게 되는데 요압은 평안의 인사를 하는 척 하며 잔인하게 아마사를 살인하고 만다. ‘오른손으로 수염을 잡고 입을 맞추는 것’은 당시의 관습적인 인사형태였다. 더군다나 요압이 ‘오른손’으로 인사치레를 하고 있었으므로(9절) 아마사가 왼손에 잡혀 있던 칼에는 경계심을 갖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허를 찔린 것이다. 요압의 잔인성과 살인의 노련함은 ‘창자가 땅에 흐른다’는 표현과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었다’는 표현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장면이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는 세 번에 걸쳐 사용된 ‘서다’(11절, ‘서서’; 12절, ‘섰는 것’, ‘멈추어 서는 것’)라는 단어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주검 앞에 죽음을 많이 목격한 군인들도 멈추어 설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냉혹함이 있었다. 시체를 덮고 큰 길에서 옮기자 비로소 군인들도 세바를 추격하기 위한 행군을 시작한다.

요압이 아마사를 죽인 것은 다윗이 압살롬의 군대 장관이었던 아마사를 자신의 자리에 등용하고자한 데 대한 반감이었고 개인적인 시기와 질투심이었다. 또한 아마사가 압살롬의 반란군을 이끌었다는 사실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다윗과 요압의 관계는 묘한 것이 되었다. 요압은 다윗의 충성된 신하이지만 압살롬도 죽이고 다윗이 계획한 군대 장관도 죽인 인물이다. 그러면서 또한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인물도 요압이다(22절).

반란의 진압 - 아벨의 여인의 활약(20:14∼22a)

이 부분의 본문도 둘로 나뉘어진다. 14∼15절은 ‘인정사정 보지 않는’ 요압의 정복 장면이고, 16∼22a절은 아벨의 여인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세바는 반란군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북쪽 끝까지 도망갔고 요압의 군대도 그를 바짝 추격했다. 결론적으로 보면 세바의 추종자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아벨 벧마아가는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그곳에 있는 성읍으로 세바는 은신해 들어갔고 요압의 군대들은 그 성벽을 부수고자 토성을 쌓고 접전을 치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에 등장하는 사람이 ‘아벨의 여인’이라고 불리우는 이름 없는 여인이다.

이 부분의 본문은 ‘지혜’로운 여인으로 시작하여(16절) 이 여인의 ‘지혜’에 대한 언급으로 마침으로(22절) 이 단어에 대한 강조와 함께 문장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그녀가 ‘지혜로운 여인’이란 공적인 명칭으로 그 성읍 사람들에게 불렸는지 아니면 이것이 저자의 평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녀의 지혜는 진행되는 상황 속에서 드러난다.

먼저, 그녀는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라고 외치며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 준비에 바쁜 군사들의 관심을 모으고 그들의 군대장관인 요압을 부른다. 그리고 그에게 다시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라고 하며 ‘들으라’는 단어를 세 번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지혜문학서의 하나인 잠언에서도 즐겨 쓰이는 단어로(예: 잠 1:6; 4;10; 8:34; 19:20; 23:29 등) 지혜로운 자가 되는 예비 자격이 바로 남의 말을 듣는 데서 시작됨을 일깨워 주고 있다. 또한 그녀는 ‘여종’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자신을 요압 앞에 낮추어 겸손히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의 말에 요압이 “내가 들으리라”라고 답하므로 분위기가 긍정적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일단 요압의 주목을 받은 여인은 그 다음에 아벨의 명성과 전통과 역사를 간단히 피력한다. 옛적부터 아벨이라는 성읍은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는 명성을 들을 만큼 지혜로 유명하며 많은 문제를 해결했던 역사와 전통을 지닌 성임을 상기시킨다. 이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아벨이 오래된 성이며 그만큼의 명성이 있는 역사적인 성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인은 “나”라는 단어와 “당신”이라는 단어를 대조시키며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인데 ‘당신’은 이스라엘 가운에 어미 같은 성을 어찌하여 멸하고자 하는가를 따지고 있다.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유일하게 드보라 선지자에게 쓰인 표현이다(삿 5:7). 이스라엘이 적의 침입 아래 신음할 때 드보라를 통하여 구원과 보호의 손길을 보내 주신 여호와의 이미지가 드보라의 ‘이스라엘의 어미’라는 표현 속에 녹아 있다. 이와 같이 아벨도 어려울 때마다 문제를 해결해주고 이스라엘의 단결에 공헌한 ‘이스라엘의 어미’와 같은 충성되고 평온한 성인데 이러한 성을 멸하려 하는 요압의 의도를 묻고 있는 것이다.

여인이 여기에서 자신이 ‘화평’한 자이며 또한 요압이 그러한 성을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말 속에는 신명기 20장 속에 나와 있는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전쟁의 원칙을 무시한 것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할 때에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평화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온 거민으로 네게 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신 20:10∼11).

다시 말하면 아벨은 평화를 원하는데 요압은 어찌하여 평화를 묻지도 않고 전쟁부터 하는지에 대한 질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아벨은 요압이 함부로 할 수 있는 일개의 성이 아니라 ‘여호와의 기업’임을 상기시킨다. 여호와의 기업을 함부로 삼키는 자는 결국 여호와께 대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벨의 정통성과 역사성에 더해 이토록 율법의 원리와 신학적인 교리로 접근하는 여인의 논리의 정연함과 설득력은 아무리 잔인하고 피 흘리는 것을 개의치 않는 요압이라도 신중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 증거가 요압의 말 속에 잘 드러난다.

요압이 여인에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20절)라고 대답한다. 그는 강한 부정문을 두 번씩 반복하며 자신의 의도가 그러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 본인은 성을 ‘멸하려’(샤하트: 히브리어) 함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흥미로운 점은 15절에서 본문은 이미 요압이 이 성을 ‘멸하려’(샤하트: “쳐서”로 번역되어 있음)했음을 밝혀 놓고 있는 상태이다. 이렇게 요압이 자신의 의도를 속이고 전면 부정을 할 만큼 여인의 언변의 내용은 강력한 효과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요압은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그가 온 목적은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찾으러 왔고, 그의 죄목은 그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기 때문임을 밝힌다. 그리고 그만 내어 주면 조용히 이 성에서 물러갈 것을 약속한다.

이에 대한 여인의 반응 또한 놀랍다. 그녀는 세바를 내어 주는 대신에 세바의 머리를 약속한다. 그리고 그녀의 지혜로 성읍 사람들을 설득하여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져 준다. 이것은 이때까지 한 여인의 말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저자는 여인의 입을 빌려 아벨의 판단이 역사와 전통을 통해 증명하듯 옳은 것이었으며 세바의 목을 벤 것도 올바른 판단이라는 결론을 내려 주고 있는 것이다. 즉, 다윗 왕권에 도전하는 세바의 반란은 단순한 국가적 반란 차원에서도 옳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 왕조에 대한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신학적으로도 옳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사무엘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저자의 의도는 결국 지혜로운 자들은 다윗의 왕권을 인정하는 자들이며 어리석은 자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은 성읍 전체의 생명을 보존했을 뿐 아니라 다윗 왕조에 대항하는 세바를 처형함으로 하나님이 다윗 왕조를 통하여 이루시려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삼하 7장)에도 일조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요압이 다윗에게 보고함(20:22b)

세바의 반란은 나팔을 불며 시작되었는데(1절) 반란의 종결도 요압이 부는 나팔로 끝이 난다(22절). 다윗은 군대 장관으로 아마사를 등용하고 그가 지체하자 아비새를 시켜 반란을 진압하게 함으로 요압을 회피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결국 반란 진압의 공은 요압에게로 돌아갔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지혜로운 자의 선택을 배우자. 다윗 스토리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다윗의 인간적인 실수에도 불구하고, 지혜로운 자들은 여전히 다윗 왕에 대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인정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들임을 보여 주는 데에 있다. 결국 어리석은 자들만이 다윗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다는 도식이 성립된다. 우리에게는 다윗의 혈통을 따라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얻은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진정 지혜로운 자라면 그분에게 흔들림 없는 충성을 다해 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둘째, 지혜로운 자의 방법론의 가치를 배우자. 본문은 ‘지혜’라는 단어를 두 번씩 사용하며 아벨의 여인이 선택한 방법론의 가치를 보여 주고 있다. 교묘하게도 세 부류의 사람들의 모습들 속에서 인간적인 방법의 한계를 보여 주고 있다. 다윗은 계속되는 반란에 시달리며 그의 의로움과 강인함의 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 아마사에게 책임을 맡겼다가 다시 아비새에게 진압을 명하는 모습 속에서 그의 판단력이 흐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바는 반란이라는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믿었고 지파간 갈등을 이용하여 나라의 분열을 조장한 자체가 이미 악한 행위임은 말할 것도 없다. 요압의 잔인함은 세바의 진압을 막았을지언정 너무나 많은 인명의 희생과 그로 인해 다윗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를 추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뻔했다.

결국 지혜로운 아벨의 여인의 방법론 속에는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과, 성읍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인류애와,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요압을 대면한 용기와, 다윗 왕에 대한 충성심(애국심),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가지고(신 20:10∼11) 적용하려는 신앙심이 조화되어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여인을 당시의 도성의 대표자나 왕권 초기의 지방 여성 지도자로 보면서 여성의 리더십과 지위 향상에 기여한 여성운동가로 보기를 원한다. 그녀의 리더십으로 보아 그녀의 지위가 그럴 수도 있지만 본문이 그것을 뚜렷이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본문이 모든 남성들이 실패를 드러내고 있을 때에 이 여인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올바른 궤도를 잡은 것을 보여 줌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하나님 나라에서는 남녀라는 편견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남녀의 이슈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성경은 ‘지혜’가 있느냐 없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지혜로운’ 여인이 선택한 원리와 방법론의 가치를 보아야 한다. 잠언에서도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잠 14:1)고 하며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 속에서 진행되는 여러 가지 정치적인 이슈와 갈등과 분열의 모습을 보며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이 여인이 보여준 원리와 방법론 속에서 지혜의 교훈을 배워야 되리라 생각된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나라를 세울 때이다.

셋째, 지혜로운 자의 의로움을 배우자. 의로운 자는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도 되지만 또 하나의 다른 국부는 불의한 것을 막는 것도 의로운 행위에 속한다. 본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세바의 불의함을 심판하시는 데에 지혜로운 여인을 사용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 1:5~6)라는 말씀은 다윗 당시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시대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하나님의 심판의 원리임을 새기며 삶을 살아가야 한다.

▲ 김윤희 박사·FWIA 대표     ©정희수

 
김윤희 박사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턴신학교 석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에서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FWIA(Faith&Work Institute Asia) 대표로 ‘일의 신학’을 위해 활발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
기사입력: 2018/07/27 [14:55]  최종편집: ⓒ newspower
 
관련기사목록
[구약의 조연들] 레위 지파의 조상, 레위 김윤희 2018/08/01/
[구약의 조연들] 슬기로운 연기자, 드고아의 여인 김윤희 2018/08/01/
[구약의 조연들] 그 아버지에 그 딸, 갈렙의 딸 악사 김윤희 2018/07/30/
[구약의 조연들] 지혜로운 아벨의 여인(삼하20:1∼22) 김윤희 2018/07/27/
[구약의 조연들] 죽음, 불순종한 자의 최후(왕상13:1~32) 김윤희 2018/07/26/
[구약의 조연들] 시스라의 어머니, 적장의 어미 김윤희 2018/07/24/
[구약의 조연들] 비곗 덩어리, 어떤 레위의 첩 김윤희 2018/07/19/
[구약의 조연들] 경쟁심 많은 여인, 라헬 김윤희 2018/07/18/
[구약의 조연들] 아비아달, 잘못된 '줄서기'로 실패한 자 김윤희 2018/07/14/
[구약의 조연들] 영광을 가로챈 여인, 야엘 김윤희 2018/07/13/
[구약의 조연들] 밧세바, 요부인가 지부(智婦)인가 김윤희 2007/02/21/
[구약의 조연들] 탐욕에 지고 만 자, 게하시 김윤희 2006/09/22/
뉴스
광고
최근 인기기사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후원 및 광고 만드는사람들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136-5) 본관 107호 TEL 02-391-4945~6| FAX 02-391-4947,
Copyright2003-2018뉴스파워. all right reserved. mail to newspower@newspower.co.kr 등록번호 서울 아 00122 등록일 2005.11.11 발행 및 편집인 김철영. 청소년보호책임자:김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