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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0.18 [23:02]
죽음, 불순종한 자의 최후(왕상13:1~32)
김윤희 박사의 구약의 조연들
 
김윤희
  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다 보면 매년 공통적으로 학생들이 자주 질문하는 성경 본문들이 있다. 여기에 나오는 본문도 그 중의 하나이다. 진실된 선지자가 거짓에 속아 넘어가고, 거짓된 선지자가 예언을 한 것이 진실된 선지자의 운명이 되어 버리는 시나리오는 이제까지 구약에서의 다른 이야기의 패턴과는 상이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300년 이후에 나타날 왕의 구체적인 이름이 언급되는 예언과 함께 왕의 손이 말랐다가 다시 성하여지는 기적도 나타나고 사자가 등장하는 등 다채로운 사건들이 속도감 있게 전개되기 때문에 많은 구약 주석가들도 이 부분을 ‘신비하고 의문이 많은’ 본문임을 인정한다. 해결책은 본문을 조심스럽게 분석해 가면서 의문을 풀어 나가는 방법이 최상이다. 

본문의 배경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신복의 아들이었으며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자로서(왕상 11:26~40) 하나님의 선택으로 북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본문은 바로 이 여로보암 왕의 서술(왕상 11:26~14:20) 속에 속해서 나온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권력과 왕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정치적인 목적으로 종교를 이용하는데 그 방법과 동기가 다 악한 것이었으며 그의 행위가 후에 나타날 이스라엘 왕들의 악행을 가늠하는 척도로 쓰이게 된다(“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모든 길로 행하며”). 특히 그가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기게 하고 산당을 짓고 제사장 제도를 마음대로 무너뜨리며 하나님의 절기를 임의로 정하는 등 왕이 되자마자 하나님께 범죄하고 심판을 자초하는 일을 벌이게 된다(왕상 12:25~33). 특히 “저[여로보암]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날 곧 팔월 십오일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왕상 12:33)는 구절은 본문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배경을 제공해 준다.

본문의 구조
  13장 전체의 본문은 간단히 둘로 나누어진다. 이 글에서 다루어지게 될 ‘하나님의 사람’을 중심으로 제목을 붙여보면 다음과 같다. 각각 차례대로 살펴보자.

1.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13:1~10)
이 부분은 다시 다음과 같이 상세히 분석될 수 있다.

(1) 서론(13:1)
  서론에서는 어떤 두 사람이 우상숭배의 원산지인 벧엘이라는 장소에서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것은 ‘선지자’를 가리키는 말이다(참고: 삼상 9:6; 왕상 12:22; 17:24; 20:28; 왕하 1:9; 4:7 등). 이 사람이 유다에서 북 이스라엘에 위치해 있는 벧엘에 온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단어(‘온다’)로 이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단 곁에 서서 분향하고 있는 북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을 만나게 된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예배의 장소는 예루살렘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임의로 자신이 만든 장소에 자신이 만든 단에서 우상에게 예배하며 ‘서’있다. 정적인 단어(‘서 있다’)로 그를 소개함으로 두 사람의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

(2) 예언(13:2)
  예언의 내용은 두 가지 점이 두드러진다. 첫째는,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하며 예언이 여로보암을 향하지 않고 ‘단’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왕보다 단에게 초점을 맞추어 단을 주제로 하고 주어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어떻게 보면 예복을 차려 입고 단위에 서서 의식을 집행하고 있는 여로보암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이다. 두 번째는 예언의 내용이 다른 어떤 예언보다도 상세하다는 점이다.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 사르리라.”는 것이다. 사람의 뼈를 사른 단은 너무나 더럽혀져 더이상 단으로서의 종교적 가치는 상실하게 된다. 또한 단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들’이라는 복수(plural: 원어에는 복수임)의 개념 속에는 현재 그 단 위에서 제사하고 있는 여로보암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를 겨냥한 심판도 들어 있다.
이 예언은 실제적으로 300여 년이 지난 이후에 열왕기하 23장 16절에서 성취된다. 이것을 통하여 열왕기상·하의 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요시야를 ‘다윗의 집에 태어날 자’라고 지적함으로 앞으로 다윗의 자손이 할 역할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갖게 한다. 

(3) 예조(sign; 13:3)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이라는 표적으로 ‘단이 갈라지며 그 위에 있는 재가 쏟아지리라’는 예조를 말했다는 것을 저자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레위기의 규례에 따르면 단 위에서 태운 재는 진 바깥에 정한 정결한 곳으로 가져가도록 되어 있다(레 6:8~11 참고). 단위에 재가 땅에 쏟아져 버린다는 것은 바친 재물과 제사가 더럽혀졌음과 무효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4) 왕의 반응과 심판(13:4)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치는 소리를 듣고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라고 명한다. 단에 대한 저주는 여로보암이 내세운 종교에 대한 정면공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과 ‘왕’의 한판승부가 붙은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무슨 SF영화를 보는 듯한 장면이 연출된다. 왕의 손이 말라 거두지 못하게 된 것이다.

(5) 예조의 성취(13:5)
  그리고 그때 저자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고 예조의 성취를 알려 준다. 이것을 통하여 저자는 2절에서의 ‘요시야 왕과 단’에 대한 예언도 성취될 것에 대한 확신을 더해 준다.

(6) 왕의 반응과 원상회복(13:6)
  여로보암 왕은 자신의 손의 상태를 보고는 하나님의 사람의 능력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에게 회복을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할 것을 요청한다. 여로보암의 ‘네’ 하나님이라는 말 속에서 그는 이미 하나님과의 거리가 먼 인물임을 감지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은 왕의 요청대로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며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된다.

  여기에서도 세 가지 점을 관찰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왜 여로보암의 손을 고쳐 주셨는가라는 질문과 연결이 있다. 그것은 여로보암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 여호와가 어떠한 분이심을 그가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능력을 보여 주신 것이다. 두 번째는 이러한 회복의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른 모든 예언의 말씀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람’이 진실된 선지자임을 입증해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서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여로보암의 우상을 섬기는 것에 대한 회개와 여호와께 돌아옴이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반응은 달랐다.

(7) 초대와 예언(13:7~9)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을 집으로 초대한다. 여기에서 ‘집’이라는 단어는 왕의 궁전도 될 수 있지만 또한 ‘성전’도 될 수 있기 때문에 왕이 순수히 병을 고쳐준 것에 대한 호의로 자신의 궁전으로 가서 식사를 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만든 벧엘의 신당에서 신에게 바친 식사를 함께 하자는 것인지가 애매모호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로보암의 의도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사람’이 그것을 거절한다는 점이다. 왕은 몸을 쉬고 예물을 주겠다고 초대했는데 ‘하나님의 사람’은 예물부터 거절한다. 왕의 집 절반을 준다고 해도 왕과 함께 들어가지도 않겠고 몸을 쉬기는커녕 벧엘에서는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않겠다’고 강한 거부 의사를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예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지시임을 밝힌다. 여호와께서 “떡도 먹지 말며 물도 마시지 말고 왔던 길로 도로 가지도 말라”고 하셨다는 말을 하며 새로운 정보를 더한다. 이러한 모든 제스처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벧엘에 대한 ‘완전거부’를 나타낸다. 벧엘과는 일체의 연결을 끊겠다는 강한 절교의 메시지를 하나님의 사람은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함으로 상징적인 행동의 메시지를 전달하도록 지시를 받은 것이다.

(8) 결론(13:10)
  저자는 위에서 언급된 여호와의 금지 지시사항 중에서 먹고 마시는 이야기는 생략하고 ‘돌아가는 길’에 대한 언급으로 첫 번째 스토리의 결론을 맺고 있다. 그는 오던 길로 쫓아 돌아가지 아니했다. 그런데 ‘다른 길로 갔다’는 여운을 남김으로 이야기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면서 하나님의 사람의 벧엘에 있는 단에 대한 예언의 사건은 결론을 맺는다.

2.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13:11~32)

  더 기묘한 이야기의 시작은 지금부터이다. 이 부분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분석해 볼 수 있다(도표는 Walsh 참고). 아래의 구조를 보면 스토리 전개의 대략이 드러난다.
(1) 스토리의 첫 번째 부분의 전개 (13:11~24)
(2) 스토리의 두 번째 부분의 전개 (13:25~32)

(1) 스토리의 첫 번째 부분의 전개(13:11~24)
 
  ‘하나님의 사람’이 떠나가고 벧엘에 있는 또 다른 ‘선지자’가 등장한다. 두 사람이 다 선지자이지만 편의상 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고 또 다른 사람은 ‘선지자’라고 저자가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18절만 예외). 두 사람 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벧엘의 선지자는 ‘늙은’ 선지자로 소개된다. ‘늙었다’는 의미는 힘이 없다는 뜻도 있고, 지혜가 있다는 뜻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늙었다’의 의미는 그가 여로보암이 왕이 되기 전에도 벧엘의 선지자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즉, 벧엘이 우상숭배의 본산지가 되기 전에 그는 ‘선지자’로서 이미 활동을 하고 있던 자였다. 그렇다면 많은 질문들이 떠오른다. 그는 진실된 선지자였는가? 현재는 어떠한가? 벧엘의 영적 실상에 대해 그의 입장은 어떠한가? 여로보암의 지지자인가? 그는 우상숭배의 동조자인가? 비판자인가? 등등 의문을 떠오르게 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 뒤쫓아 간다. 자신과 같은 선지자가 유다 에서 왔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선지자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에 대한 불쾌감이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계시의 진실여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는지 저자는 전혀 우리에게 그의 동기를 밝히지 않고 그냥 그의 행동을 응시하도록 유도한다. 

  의문은 여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벧엘의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찾았는데 그는 대뜸 여로보암이 했다가 거절 당한 초대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청한다. ‘함께 집으로 가서 떡을 먹자’는 초대이다. 이것도 그렇게 한 그의 동기와 목적과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위와 비슷한 의문을 자아낸다. 같은 선지자 동지끼리 교제를 하기 원하는 것인지, ‘하나님의 사람’을 시험하고 있는 것인지, 여로보암의 실패를 자신이 성공시켜 보려는 것인지 의문투성이이다. 그러나 한 가지 뚜렷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초지일관된 거절의 답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늙은 선지자가 자신이 여호와께로 또 다른 계시를 받았음을 이야기한다. 읽는 독자들이 또 다른 의문의 웅덩이로 빠지기 전에 이번에는 성경 저자가 다행히도 “이는 그 사람을 속임이라”는 말로 늙은 선지자의 계시가 거짓임을 밝힌다(18절). 왜냐 하면 저자의 관심은 ‘하나님의 사람’의 반응에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제까지 그렇게 단호하던 ‘하나님의 사람’이 이번에는 쉽게 설득을 당한다. 벧엘의 선지자를 따라가 그 집에서 ‘떡을 먹으며 물을 마시고’ 만다. 자신의 계시의 말씀을 뒤엎은 것이다. 저자는 그들의 동기와 목적과 이유에는 관심이 없고 그들의 행동의 결과에 오히려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선지자’는 자신의 행동의 대가를 받는다. 그가 상 앞에 앉았을 때에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거짓을 말한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사람’의 운명을 진실로 예언하게 된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기고,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한 불순종 한 자’임을 밝힌다. 그 결과로 시체가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21~22절).

  여기에서도 우리는 많은 의문을 던지게 된다. ‘하나님의 사람’이 진실된 선지자였는데 너무하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 속은 사람이 형벌을 받는다는 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도 던지게 된다. 그러나 저자는 오히려 단순하게 ‘불순종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냉혹한 심판’이라는 주제를 우리의 모든 의문들을 뛰어넘어 제시해 주고 있다. 이것은 여로보암 왕의 사건과도 관계가 있고 어떻게 보면 열왕기상·하 전체의 주제와도 연결이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주제를 일관성 있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세 번에 걸쳐 ‘하나님의 사람’이 ‘떡을 먹고 물을 마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19, 22, 23절). 즉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확실히 불순종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가 길을 가는데 사자가 나와 저를 죽인다. 신기한 것은 나귀도 시체 곁에 섰고 사자도 시체나 나귀를 잡아 먹지 않고 시체 곁에 서 있는 기이한 장면을 연출한다. 이것이 우연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아이러니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음으로 불순종하다가 이렇게 되었는데 비록 짐승이지만 사자는 ‘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고 있는 모습의 대조이다. 이것을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벧엘의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21~22절)을 성취시키신다.

(2) 스토리의 두 번째 부분의 전개 (13:25~32)

  벧엘의 늙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사람’의 죽은 소식이 전해진다. 늙은 선지자는 이에 대하여 그의 죽음의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여호와의 말씀을 어긴 하나님의 사람이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를 사자에게 붙이시매 사자가 그를 찢어 죽였도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람’을 만난 이후로 늙은 선지자에게 많은 변화가 나타난다. 그는 처음에 ‘하나님의 사람’이 간 길을 물어 보았는데, 중간에는 그에 대한 예언을 하게 되고, 이제는 그의 죽음의 의미를 해석까지 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늙은 선지자가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찾아와 자기의 묘실에 두고 그를 ‘형제’라 부르며 애곡한다.

  왈시(Walsh)라는 학자가 지적한 대로 늙은 선지자는 스토리의 첫 번째 부분의 전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환대하는 것처럼 초청해서 그를 벧엘로 돌아오게 함으로 결국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두 번째 부분의 스토리의 전개 속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비록 시체로 돌아왔지만 늙은 선지자와의 진실된 교제(‘형제’라 부름으로)가 이루어진 묘한 관계를 보여 준다.

  ‘하나님이 사람’은 이렇게 하여 그 자신의 열조의 묘실에는 묻히지 못하였으나 늙은 선지자의 묘실에 묻히게 된다. 그리고 늙은 선지자는 자기의 아들들에게 유언의 지시를 한다. 자기가 죽으면 자기의 뼈를 ‘하나님의 사람’의 뼈 곁에 함께 묻어 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으로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고 또 사마리아 성읍들에 있는 모든 산당을 향하여 외쳐 말한 것이 반드시 이룰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저자는 핵심 주제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이 만든 단을 향하여 한 모든 예언의 말씀이 벧엘뿐만 아니라 전 사마리아에 확산되어 확실하게 성취될 것이라는 점이다. 이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기 위하여 저자는 여러 가지 사건을 기록했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뇌리에 분명하게 박힌 것은 그 메시지를 예언한 장본인일지라도 무슨 이유에서건 여호와의 말씀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에는 가차없이 심판이 따를 것이라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G'에 해당하는 것은 의도적으로 여지를 남겨 두었다. 그 말씀의 성취는 미래로 연결되며 열왕기하 23장 15절에서 20절까지에서 모든 성취가 이루어졌음을 시사하면서 스토리를 마치고 있다. 이 ‘하나님의 사람’은 비록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기는 했지만 죽어서 벧엘 선지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요시야가 묘실들의 해골들을 파내어 불사를 때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은 그대로 보전함으로 그의 명예를 지켜 주고 그가 한 일에 대해 보상을 한다(왕하 23:17~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름 없는 선지자(‘하나님의 사람’)의 죽음은 불순종한 자의 최후를 보여 주는 스토리로 우리의 뇌리에 기억되고 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영적 타락의 심각한 영향력을 보여 주고 있다. 여로보암이 벧엘에 세운 우상숭배의 영향력은 생각보다 파장이 훨씬 큰 것이었다. 늙은 선지자는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흉내내고 거짓을 말하고 동료 선지자를 속이는 일을 거침없이 자행했다. 궁극적으로 이 문제는 북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를 멸망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영적인 순수성이 점점 타협화되어 가고 도전을 받고 희박해져 가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를 인식하고 각자 그러한 영향력이 암암리에 우리의 신앙 속에 파고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여로보암도 모든 종교적인 흉내와 모양은 다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유지하기 위함이었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었다. 말세가 가까울수록 세상은 이러한 종교적인 모양새를 갖춘 거짓선생들(딤후 4장)로 만연하고, 교회들도 첫사랑을 잃어버리고(에베소 교회: 계 2장), 살았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교회(사데 교회: 계 3장)들로 전락될 수 있음을 이미 신약은 경고로 주고 있다. 나만이, 이러한 말세적인 영향력에서 예외가 될 것이라 자부하지 말고 항상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의 사람’의 결정적인 실수는 말씀의 불순종이었다. 성경을 보면 때로는 우리의 불순종의 동기와 이유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람’의 경우도 보면 억울한 면이 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을 받은 자로서 경솔히 행동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성경은 말씀에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사람’은 어찌 보면 자신이 전달한 메시지에 확신이 부족했다고도 평가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은 했지만 스스로가 거기에 대해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또한 본문에 보면 ‘길’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많이 나온다(9, 10 [2번], 12 [2번], 17, 24 [2번], 25, 26, 28). 물론 문자적인 의미의 ‘길’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본문의 ‘길’은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의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로 ‘순종’이냐 ‘불순종’이냐의 길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듯 본문에서는 여러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인 순종의 중요성’을 철저히 가르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즉, ‘하나님의 사람’의 운명이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말씀의 순종의 중요성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대가에 대해 얼마나 숙고하고 있는 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한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을 가르쳐 주고 있다. 본문에서 또 하나의 강조점은 ‘여호와의 말씀’(1, 2, 5, 9, 17, 18, 32)의 중요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시에 역행하는 계시를 주시지 않는다. 그리고 여호와의 말씀은 변개되지 않는다. 비록 그 말씀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말씀에 역행하는 행동을 하고 믿지 않는 행동을 할지라도 거기에 관계없이 하나님께로서 온 말씀이면 그것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우리의 믿음의 바탕은 말씀에 근거해야 한다. 성숙한 신앙의 자세는 말씀에 기록된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며 우리의 삶을 조심스럽게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 김윤희 교수     ©뉴스 파워


김윤희 교수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턴신학교 석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에서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FWIA(Faith&Work Institute Asia) 대표로 ‘일의 신학’을 위해 활발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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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26 [05:10]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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