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
교계뉴스문화/교육국제/NGO/언론생활/건강파워인터뷰오피니언연재정치/경제/사회한 줄 뉴스
전체기사보기
편집  2018.08.16 [07:04]
예수와 석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25]
 
정성민

1. 자신의 질병을 스스로 고치는 사람들


아프면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야 한다. 그런데 의사가 아니지만 병이 생기면 자가진단을 하고 스스로 자신의 병을 치유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치료하는 방식에 자신감과 확신이 넘친다. 이들은 병원에 가기를 꺼린다. 무엇이 문제인지 진단조차도 받지 않으려 한다. 이런 경우는 소수의 사람들에 해당된다. 그러기에 일반인들이 그렇게 따라하기는 너무나 위험하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짓는 죄악과 그로 인한 죄책감은 때론 감당하기 힘들다.

하지만 죄가 너무 많아지고 깊어지면 그에 따르는 죄책감도 사라지게 된다. 어쩌면 무감각해진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 죄악을 자각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사업에 실패를 하든 지 아니면 중병에 걸려서 헤맬 때든지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죄의식이 파도처럼 밀려올 수 있다. 실로 우리가 짓는 죄와 그로 인한 죄책감은 무시무시한 마음의 질병이다. 그러기에 이제는 죄의식과 그로 인한 죄책감을 무시하면서 그대로 살아갈 수가 없게 된다. 하지만 임종 직전이라도 이러한 죄의식을 의식적으로 무시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지독한 악인이거나 심각한 위선자들일 것이다.

 

아무튼 자신의 질병의 원인을 스스로 알고 깨우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다. 반면에, 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가서 의사를 만나는 것은 의사와 현대의학에 대한 대단한 신뢰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석가도 예수도 자신들을 의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석가는 인생의 문제를 고통으로 진단했고, 고통의 원인으로 인간의 탐욕을 찾아냈고, 이러한 탐욕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팔정도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팔정도를 실천하므로 이러한 탐욕과 집착을 물리친 건강한 삶을 약속했는데, 그것이 바로 열반이다.[1]그러므로 열반은 내 자신이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이루어 내는 정신적인 자유와 해방인 것이다. 이러한 석가의 자력적인 구원에 대하여 <불교사상의 이해>이렇게 설명한다,

 

불교에서 인간의 병으로 진단하는 것이 바로 세상과 자기에 대해 스스로 가지고 있는 그릇된 생각과 그로 인한 각종의 그릇된 행태이다. 그러므로 치료방법은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내는있어서 전적으로 관건을 쥐고 있는 것은 자기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다. 물론 밖으로부터의 영향이 전혀 작용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결국 모두가 주변적인 것이고, 자신의 병을 치유할 이는 자기자신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2]

 

예수도 자신을 인류의 중한 질병을 고치려고 이 땅에 찾아온 의사라고 말한다. 마가복음 217절은 이렇게 기록한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는 인간의 문제를 죄의 문제로 진단하였고, 이 죄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틀어진 것이 원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속죄물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바로 예수 자신이 바로 그 속죄양으로 왔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속죄양으로 온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의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이다.

 

필자가 어렸을 때 경험한 잊지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나의 어머니는 항상 몸이 약하여 자가 치료를 하는 타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나 아파서 스스로 치료가 불가능했든지 병원에 제 발로 찾아가셨다. 의사 앞에 선 어머니는 자신의 어디가 어떻게 아프고 그리고 그 문제의 원인이 어떤 것인지를 주절주절 말씀을 하셨다. 환자의 자가 진단을 인내하면서 듣던 의사가 결국 청진기를 내려놓고 환자인 저의 어머니에게 전해주었다.

그럼 이거(청진기)로 직접 진단하세요!!”

그제서야 분위기를 파악한 저의 어머니는 죄송하다며 순순히 의사의 치료를 받았다.

 

2. 과연 예수와 석가, 어느 의사의 진단과 처방이 옳을까?

 

과연 인간의 죄악의 문제에 대한 석가의 자가치료가 정말로 효험이 있을까? 아니면 인간의 죄는 하나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제부터 인류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예수가 제시하는 구원의 길이 석가가 제시하는 구원의 길과 어떻게 다른 지를 성경을 통해서 밝혀보고자 한다.

 

예수가 인류의 최대의 고통, 곧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 오셨다는 것이 너무나 의미심장하다. 결국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결국 인류의 난제, 곧 죄의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비록 비극적인 십자가의 죽음이지만 우연한 것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죽음이기에 그 의미가 깊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와 석가의 다른 점을 말할 수 있다. 바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류를 위한 속죄양으로서 인류의 최대의 문제, 바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것이다. 바로 자기 자신이 죽으심으로써 말이다. 이는 인류와 하나님 사이의 화해자로서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를 구원자로 부르게 된다. 그러니까 예수는 거룩해지는 길, 곧 올바른 길을 가르친 도덕선생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인류를 위해 내어놓은 살신성인의 구세주라는 것이다.

 

하지만 석가는 인류에게 도덕적인 삶을 가르쳤고 마음수양을 통해 자기를 초월하고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기에 그는 지혜로운 현인이요, 도덕선생인 것이다. 자기를 희생하여 살신성인한 구세주는 아니라는 이야기다.[3]

특이한 것은 석가는 브라만들이 드리는 동물제사를 없애 버리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동물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신도 존재하지 않는데 그 신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존재 하지도 않는 사후세계를 보장받기 위하여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석가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어떠한 선인들과 평민들과 왕족들과 바라문들이 널리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더라도, 뿐나까여, 그들은 이 세상에서 늙어가는 것에 걸리어 존재를 갈구하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뿐나까여, 그들은 갈구하고, 찬탄하고, 탐착하여, 공물을 바칩니다. 이득을 토대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갈구하는 것입니다. 제사에 헌신하는 자들은 존재의 탐욕에 집착하여, 태어남과 늙음을 뛰어넘지 못했다고 나는 말합니다.” (Stn.1044, 1046)

 

그리고 하나의 존귀한 생명인 동물의 피를 흘리는 것조차도 비폭력의 원리에 따라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석가는 주장한다,

 

산 것을 죽이거나 죽이게 시켜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죽이는 것에 동의해도 안됩니다. 식물이건 동물이건 폭력을 두려워하는 모든 존재에 대해서 폭력을 거두어야 합니다. (Stn.394)

 

마지막으로 석가는 동물제사를 부추겨서 부자들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피를 빨아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브라만들의 행태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인간 가운데서 제사 지내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바쎗타여, 그는 제관 (제사장, 브라만)이지 고귀한 님(아라한)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Stn.618)

소들의 무리에 둘러싸이고 아름다운 미녀들이 뒤따르는 인간의 막대한 부를 누리고 싶은 열망에 바라문들(브라만들)은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다의 진언들을 편찬하고, 저 옥까까 왕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당신은 재산도 곡식도 풍성합니다. 제사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보가 많습니다. 제사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물이 많습니다.’

그래서 수레 위의 정복자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말의 희생제, 인간의 희생제, 막대를 던지는 제사, 쏘마를 마시는 제사, 아무에게나 공양하는 제사, 이러한 제사를 지내고 바라문들에게 재물을 주었습니다. 소들과 침구와 의복, 잘 치장한 여인들, 잘 만들어진 아름답게 수놓아진 준마가 이끄는 수레, 여러 방으로 나뉘어 있고 잘 배치된, 화려한 주택을 여러 가지 식량을 가득 채워 바라문들에게 재물로 주었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재물을 축적하는데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욕망에 깊이 빠져들자, 그들의 갈애는 더욱 더 늘어만 갔습니다. 그래서 베다의 진언을 편찬하여 다시 옥까까 왕을 찾아갔습니다.              

물과 토지와 황금과 재물과 곡식이 살아 있는 자들의 필수품인 것과 같이, 소도 사람들의 필수품입니다. 제사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물이 많습니다. 제사 지내십시오. 당신은 재보가 많습니다.’

그래서 수레 위의 정복자인 왕은 바라문들의 권유로 수백 수천 마리의 소를 재물로 잡게 되었습니다. 두 발이나 양 뿔, 어떤 것으로든지 해를 끼치지 않는 소들은 양처럼 유순하고, 항아리가 넘치도록 젖을 짤 수 있었는데, 왕은 뿔을 잡고 칼로 소를 죽게 했습니다…. (Stn.301-312)    

 

특이한 것은 비록 석가가 동물제사를 원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제사를 드리는 이유를 분명히 하라고 권고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제사를 드려야 할 분명한 이유는 그들 자신의 죄악을 버리고서 거룩한 마음을 갖기 위해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영원한 삶을 위해 제사를 드리지는 말라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마가여, 제사를 지내십시오. 제사를 지내면서, 어떤 경우라도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야 합니다. 제사는 제사 지내는 자의 토대입니다. 여기에 참여하여 자신의 죄악을 버립니다. 그리고 탐욕에서 떠나 죄악을 제거하고 한량없는 자애의 마음을 닦으니, 밤낮으로 항상 방일하지 않아서 모든 방향으로 그 한량없는 마음을 채웁니다. (Stn.506-07)

 

 3. 신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선택할 것인가?

 

석가와 그를 따르는 자들의 관계는 도덕선생과 제자의 관계이다. 석가는 도덕선생으로서 제자들에게 거룩한 삶을 가르쳤다. 하지만 석가는 그들의 보호자이거나 구원자가 아니다. 석가는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피난처이다. 다른 누가 피난처가 되겠는가?”라고 말했듯이 자신의 제자들에게 제자들 각자가 자신의 피난처가 되어서 신과 같은 초월적인 대상들에게 조차도 도움을 구하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결국 석가는 우리들 각자가 우리 자신을 의지하고 우리 자신을 계발해서 우리 스스로 해탈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정신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그 모든 고통과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 자력적인 종교로서의 불교의 진정한 모습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인간의 자유와 능력에 관하여 월폴라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이 길을 스스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붓다가 제자들에게 자유를 허락한 것은 이러한 개인적인 책임의 원리 때문이었다...... 붓다가 허락한 생각의 자유는 어떠한 종교의 역사 속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붓다에 의하면, 인간의 해탈은 진리에 대한 자신의 자각에 기인하는 것이지 헌신적인 선행에 대한 보수로서 드리워지는 영예로운 은총이나 외적인 힘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유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5]

 

하지만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이다. 그래서 목자인 예수는 자신의 양들을 먹일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위험으로부터 양들을 보호하고 구원한다. 예수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분별한다고 말한다. 예수는 말한다,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요한복음 10:1-5, 11, 14-16)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여 진 것은 단지 믿음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즉 죄로부터의 구원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하여 고행과 금욕을 길을 갈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선택할 것인가를 양자택일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두 가지 선택조차도 무의미하게 느끼는 자들은 쾌락주의를 따를 수도 있다. 아니면 자살로 생을 마감하여 그 모든 고통에서 도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

 

다시 말해서 만약 당신이 무질서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바라보고 신의 존재를 포기하였다면 당신은 쾌락주의를 선택하든 석가의 도덕과 금욕주의를 선택하든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또한 당신이 자신의 죄와 욕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 좋은 선택일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당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린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밝힌다,

 

너희가 성경(구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539)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63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하나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한복음 524)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물론 이 하나님은 보편적인 하나님이요, 구약의 하나님이시다. 즉 창조주 하나님이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은 이렇게 설명한다,

 

1.

태초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1-4, 9-12)

 

이제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민하는 당신 앞에는 단 두가지의 선택이 남아있다.

하나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하여 도덕적이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수행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리고는 세상의 온갖 근심과 걱정에서 정신적인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것이다.

 

확고한 마음으로 감각적 욕망이 없이, 고따마의 가르침에 잘 적응하는 참 사람은 불사에 뛰어들어 목표를 성취해서 희열을 얻어 적멸을 즐깁니다. (Stn. 228)

그에게는 과거는 소멸하고 새로 태어남은 없으니,

마음은 미래의 생존(사후세계, 영혼불멸)에 집착하지 않고,

번뇌의 종자를 파괴하고 그 성장을 원치 않으니,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 (Stn. 235)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의 보혈을 믿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보혈을 믿는 자가 경험하게 될 죄에서의 자유와 해방을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율법(도덕법칙)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81-4)

 

과연 당신은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하여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예수인가 아니면 석가인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인가?

 



[1]불교사상의이해, 89-90.

[2]Ibid, 32.

[3]Elizabeth Harris, Human Existence in Buddhism and Christianity: A Christian Perspective," Buddhism and Christianity in Dialogue; The Gerald Weisfeld Lecture 2004, 51.   

 

[4]인간붓다, 449.

[5]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22-24.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
기사입력: 2018/07/24 [09:50]  최종편집: ⓒ newspower
 
뉴스
광고
최근 인기기사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후원 및 광고 만드는사람들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136-5) 본관 107호 TEL 02-391-4945~6| FAX 02-391-4947,
Copyright2003-2018뉴스파워. all right reserved. mail to newspower@newspower.co.kr 등록번호 서울 아 00122 등록일 2005.11.11 발행 및 편집인 김철영. 청소년보호책임자:김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