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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2.17 [05:03]
집단 보쌈의 현장, 실로의 여인들
김윤희 박사의 구약의 조연들
 
김윤희

아주 오래된 헐리우드 영화 중에 ‘7인의 신부’라는 작품이 있다. 7명의 덜 문명화된 형제들이 신부감을 얻기 위해 아름다운 처녀 일곱을 커다란 자루 속에 넣어 마을에서 납치하는 내용이다. 듣기에 조금 험악하지만 아주 오래된 시절의 보수적인 이야기라서 비록 납치는 했지만 그것 외에 나쁜 내용은 없다. 눈으로 덮여 마을과의 길이 끊긴 통나무집에서 그들을 보호하며 결국 그 처녀들의 사랑을 얻어 신사적으로 결혼하는 해피엔딩 스토리다. 뮤지컬로서 로맨틱하면서도 코믹한 터치로 어린 나이에 보았어도 큰 거부감 없는 낭만적인 점도 많은 이야기였다.

이것은 서양 이야기지만 우리 나라에서도 이와 비슷한 ‘보쌈’이라는 풍습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과부 개가(改嫁) 금지로 인해 과부가 재혼할 수 있는 길이 실질적으로 막히자 독신남자가 과부집을 습격하여 과부를 홑이불이나 보자기 등에 싸서 업고 도망치는 풍습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그것을 ‘보쌈’이라고 명명했다. 그 당시 사회는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과부 약탈 행위를 은근히 묵인해 주었다. 주로 하층계급에서 많이 행해졌지만, 양반계급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것은 비록 당시의 사회가 유교적인 윤리관과 체면문화 속에 갇혀 있었기는 하나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해소시키기 위해 과부 구제를 위한 일종의 인도주의적 발상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납치를 하는 것도 당하는 것도 끔찍한 일이지만, 그래도 평생 수절을 강요당하는 것보다는 더 인간적일 수 있다는 데서 생겨난 기이한 풍습이었다.


성경의 ‘보쌈’사건

위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이유는 성경에도 바로 이러한 ‘보쌈’ 사건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사건처럼 로맨틱하지도 인도주의적인 차원도 아닌, 일종의 집단 납치-강간을 합리화한 기상천외한 범죄사건이었을 뿐이다. 이 사건은 다름 아닌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던’ 시대를 대변해 주는 사건 중의 하나로 사사 시대에 발생했다. 스토리의 전모를 살펴보자.

사사기의 후반부(17∼21장)는 그 시대의 평가를 마무리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개인의 삶에 있어서나 국가 전체의 총체적인 삶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타락해 가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들은 여호수아 시대로부터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여호와를 섬기며 그의 율법을 순종하며 사는 거룩한 백성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가나안인들의 삶과 종교에 급격히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가나안인들을 멸절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신 7:2)이 무색해진 지 오래였다(삿 3:5∼7). 그래도 사사기 초반부에서는 열심히 가나안 족속들을 대상으로 그들을 진멸하기 위해(비록 실패는 했지만) 전쟁을 치뤘다(삿 1장). 그러나 사사기 후반부에 와서는 적과의 전쟁이 아닌 내란으로 그 양상이 바뀐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연합하여 집결하는데, 그것은 가나안 백성들을 진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베냐민 지파와 전쟁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삿 20:9∼17).

원래는 19장에서 일어난 레위 첩의 강간 사건과 그녀의 죽음을 계기로(지난 회 ‘비계덩어리’ 참고) 기브아인을 징벌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집결했는데, 기브아인들이 속한 베냐민 지파가 이에 반기를 들고 전쟁을 선포하면서 이스라엘 대(對) 베냐민 지파의 대결로 일이 벌어진 것이다. 20장에 보면 전쟁의 과정이 나와 있다. 이 내전의 결과는 20장 46∼48절에서 잘 요약해 주고 있다: “이 날에 베냐민의 칼을 빼는 자의 엎드러진 것이 모두 이만 오천이니 다 용사더라 베냐민 육백 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서 넉 달을 지내었더라 이스라엘 사람이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서 온 성읍과 가축과 만나는 자를 다 칼날로 치고 닥치는 성읍마다 다 불살랐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베냐민 지파는 패하고 연합된 이스라엘 군대들은 대승을 거둔 셈이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열두 지파 중 한 지파가 완전히 멸종의 위기에 놓여버린 것이다. 그들이 전쟁을 할 동안에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단 말인가? 마치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던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목적지를 지나버린 것처럼, 기브아인을 징벌하기 위해 정신없이 전쟁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 지파가 거의 없어질 위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애당초 전쟁의 목적을 넘어서 명분 없는 전쟁을 한 셈이 되어 버렸으며, 곪은 상처를 간단히 치료하려다 팔 한 쪽을 거의 베어내 버린 결과가 된 것이다. 


부족한 여인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늦게 수습에 나섰다. 겨우 살아남은 베냐민 장정 6백 명에게 신부감을 마련해 주어 지파 유지를 하게 하자는 계획이었다. 일단 4백 명의 여인들은 조달되었다. 그 부분의 내용이 사사기 21장 1∼14절까지 기록되어 있다. 림몬 바위에 숨어 있는 베냐민 자손들에게 평화를 공포하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에 “이스라엘 사람이 야베스 길르앗을 쳐서 그 여인들 중에서 살려둔 여자를 그들에게 주었으나”(삿 21:14) 문제는 그 숫자로는 부족했다. 2백 명의 여인들이 더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맥하에서 15절부터 본문의 내용이 시작된다.

15절에서는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서 한 지파가 궐이 나게(made a gap) 하셨음이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이유는 한 여인의 강간-살해 사건의 복수와 정의 실천의 명목을 위하여 이만 오천 명의 용사들을 죽이고, 그것도 모자라 그들의 성읍으로 가서 가축과 만나는 자는 다 칼날로 죽이고, 성읍마다 불사르는 것을 서슴지 않은 자들이(삿 20:46∼48) 이것을 여호와의 책임으로 은근히 돌리고 있다는 데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하나님의 기본강령에도 몇 백 배 어긋나는 일이었다. 행동은 본인들이 마음대로 하고 책임은 여호와께 돌리는 편리주의 논리를 펴고 있다. 어쨌든 그들의 고민은 ‘베냐민의 여인들이 다 멸절되었음으로 이제 남은 자들에게 어떠한 방식으로 아내를 얻어주느냐’(21:16)는 것이었다.


딜레마와 아이디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그들이 미스바에서 행한 성급한 맹세 때문이었다(삿 21:1, 7). 그들은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맹서했었다. 이제 그 약속을 깬다면 저주를 자초할 것이고, 지키자니 베냐민 지파가 존폐의 위기에 있게 되는 딜레마에 봉착한 것이다.

이때 회중 장로들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 아이디어를 낸다. 사사기에서 장로들의 역할이 또 한 군데 두드러지게 나오는 곳이 2장 7절이다. 거기에서 장로들은 여호수아의 생존에 함께했던 자들로서,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에도 백성들이 여호와를 잘 섬기도록 이끌었던 지도자들이다. 이제 사사기의 마지막 장에서 다시 한 번 장로들이 등장하여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국가의 어른들로서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들의 아이디어는 사사기 초반부에 등장하는 장로들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경건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한 것과도 무관한 것이었다.

자신들이 쳐놓은 맹세라는 그물을 교묘하게 뚫고 나가는 일종의 편법을 쓴 것이다. 장로들의 술책은 “보라.”(19절)라는 단어로 잘 표현되어 있다. 우리말로 어감을 살려 표현하면 ‘좋은 방도가 하나 있기는 한데’라고 의역해 볼 수 있다. 19절에는 벧엘, 세겜, 실로라는 족장들 시대부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들이 언급된다(창 12:6∼7; 13:3; 28:19 등). 또한 벧엘과 실로는 모두 하나님의 언약궤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삿 18:31; 20:26∼28) 영적으로 의미 있는 거룩한 성읍들이라 볼 수 있다. 더군다나 그들은 이곳에 매년 여호와의 절기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낸다. 정확히 무슨 절기인지를 밝히지 않고, 또한 모이는 장소도 애매한 것으로 보아 이것이 모세오경에 기록된 정해진 절기라기보다는(출 23장; 신 16장) 가나안 족속들의 종교행사를 여호와의 절기로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실로의 여자들이 무도하러 나오는 것도 그렇고, 포도원에 숨는다는 것은 포도가 무르익었을 계절이며, 포도와 연결된 향연일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그것이 어떤 절기냐에 관계없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여호와의 절기’로 불리는 날에 순진한 실로의 여인들을 대상으로 거사를 치르게 하는 데 있다. 장로들이 생각해 낸 방법은 베냐민 지파를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과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다름 아닌 ‘보쌈’ 작전을 수단으로 동원한 것이다. ‘실로의 여자들이 무도하러 나올 때에 포도원에서 나와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그 아내로 붙들어 가지고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무엇이 정의인가?

사사기의 저자는 단어 선택을 통하여 이러한 행동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 간접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21절에 나오는 ‘붙들어 가지고’라는 동사는 시편 10편 9절에 두 번이나 반복하여 쓰인 단어이다. 시편에 보면 사자가 굴혈에 엎드려 먹이를 덮치려 하는 것같이 악인이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는다’는 문맥에서 쓰인 단어이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장로들이 베냐민 지파에게 명한 것은 다름 아닌 폭력이요, 납치요, 파괴요, 약탈이요, 추행이요, 강간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의 희생물이 된 대상은 여호와의 절기를 맞아 아무것도 모르고 춤을 추던 이스라엘의 처녀들이었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는가? 위에서 지적하였듯 사건의 발단은 집단 강간-살해를 당한 한 여인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시작되었다(19장). 그것이 수만 명의 피를 흘리는 희생으로 번졌고, 한 여인 때문에 수많은 베냐민 지파의 여인들과 아이들은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모자라 야베스 길르앗의 거민들과 부녀와 어린아이들과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들은 진멸을 당해야 했으며, 그곳의 4백 명의 젊은 처녀들은 침략자의 전리품으로 베냐민 지파에게 주어졌다. 그래도 해결이 되지 않자 이번에는 순진 무구한 2백 명의 처녀들을 약탈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 개인의 가정에서 일어난 한 여인의 집단 강간-살인 사건이 전(全)국가적 집단 강간-살인 사건으로 증폭해 버렸다. 한 명의 강간 사건이 최소한 6백 명의 강간 사건으로 곱해져 버린 것이다. 과연 무엇이 정의일까?


장로들의 합리화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항의하는 실로의 아비와 형제들에게 할 말까지 완벽히 준비해 두었다. 두 가지로 설득할 방도를 마련해 놓았다. 한 가지는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라는 식의 희생 강요이다: “청컨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는 것이다. 베냐민 지파라는 국가의 위기를 두고 딸 정도의 호의는 베풀어 줄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것은 선택권을 주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전혀 선택사항이 없는 고단수의 강요에 불과하다. 만약 동의하지 않는다면 ‘은혜’를 베풀지 않고 국가의 장래를 생각지 않는 자들로 일시에 전락하는 것 외에 무슨 다른 방도가 있겠는가? 두 번째는 그 아비나 형제들이 자의로 처녀들을 준 것이 아니므로 맹세의 저주에 대한 죄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아무 잘못한 것이 없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법의 정신(spirit of the law)은 무시하고 법의 문자(letter of the law)만 어기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는, 법망을 교묘히 피해 가는 자들이 하는 합리화에 불과하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법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한 맹세를 가지고 유권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21장에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사회’ 속에서는 하나님조차도 그들의 합리화에 고개만 절래절래 흔드실 수밖에 없으실 것이다.

이 부분에 있어서 저자는 별 감정을 싣지 않고, 있었던 사실만을 여러 동사들을 동원하여 기록하고 있다: “베냐민 자손은 그같이 (1)행하여 (2)춤추는 여자 중에서 자기들의 수효대로 아내로 붙들어 (3)가지고 (4)가서 (5)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6)성읍들을 중건하고 (7)거기 거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원어에는 7개의 동사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살려 번역한 것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도 마찬가지로 ‘그곳을 (1)떠나 각각 그 지파, 그 가족에게로 돌아가되 (2)각각 그곳에서 나와서 자기 기업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간 것이다. 이제까지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도덕적 상태와 영적 상태로 그들은 결론 부분에서(삿 17∼21장) 보여 준 삶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아마 납치-강간당한 여인들의 운명이나 아픔은 모두들의 기억에서 곧 사라졌을 것이다. 왜냐 하면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볼 필요도 없고, 그러한 근거도 없으므로 양심의 가책 없이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당한 실로의 여인들만이 흐르는 눈물을 감추며 살아야 했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여성들에게 주는 교훈. 사사기가 보여 주는 메시지 중의 하나는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떠나 세속화되었을 때에 어떤 모습이 되는가를 보여 주는 데 있다. 모든 사람들이 각기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산다는 것이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다. 각각 자유를 누리며,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의 가치 판단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사사기는 그러한 사회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취급되는가를 생생하게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그 속에서 제일 먼저 희생되는 부류가 노약자들과 여성들이다. 현재의 우리 사회도 보면 도덕성이 해이해지고,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회의 질서가 약해지면서 제일 먼저 두드러지는 현상은 범죄의 증가이고, 그것의 대상은 주로 노약자와 여성들이다. 이들은 유괴와 강도, 폭력의 손쉬운 대상이 되어 버린다.

기브아의 한 여성에게 일어난 사건은(19장) 이스라엘 여성 전체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사사기의 저자는 의도적으로 1장에서 악사라는 여인(22회 ‘악사’ 참고)을 출현시킴으로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던 시절의 한 여인의 행복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녀는 전쟁영웅이자 사사인 옷니엘을 남편으로 맞았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아비 갈렙에게 땅과 물을 요청했으며, 축복 속에 결혼식을 치렀다. 사사기의 마지막 부분은 결혼 대신에 납치와 강간이 행해졌으며, 훌륭한 남편 대신에 패배한 지파의 생존을 유지시키기 위한 명분으로 이용당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아내의 역할이 주어졌으며, 아비의 축복과 지참금은 고사하고 부모, 형제에게서 강제 분리되는 운명을 ‘실로의 여인들’은 맞이한 것이다. 말세가 다가올수록 여성들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사회와 세상이 점점 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상품화시키고 있고, 인신매매가 더 판을 칠 것이며, 물질 만능주의와 향락문화 속에서 보수적인 결혼의 가치는 점점 더 희석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회의적으로 보거나 절망하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이러한 말세의 징조를 보면서 말씀의 기준을 가지고 긴장하면서 세상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결혼 적령기에 있다면 어떠한 신랑감을 고를 것인지의 기준을 분명히하라. 자녀들을 키우는 부모들은 어떠한 기준으로 그들을 키울 것인지도 분명히하라. 사사기의 현실이 꼭 그 당시에만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이다.

둘째, 리더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사사기에서 보여 주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메시지 중의 하나는 리더십의 부재와 그들의 영적 실패이다. 리더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으며(삿 2:10), 또한 그러한 사회가 영적 리더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그들의 영성 또한 약해진 악순환을 그리고 있다. 바락, 기드온, 입다, 삼손 등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들조차 많은 문제점들과 약점들을 삶과 사역 속에서 드러내었다. 더군다나 본문의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벗어나 순전히 인간적인 잔꾀와 발상으로 전체 이스라엘을 잘못 인도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율법의 정신을 벗어나 문자만을 지키기를 고집하는(‘맹세’를 위하여) 바리새인의 모습과 상황 윤리적인 발상으로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상대적인 합리화의 모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더 기가 막힌 것은 누구도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을 막을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리더들과 백성들의 총체적인 영적 무감각이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커다란 교훈이 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영적 리더들도 이미 많은 지적들을 받고 있다. 세속집단이 교회의 리더십까지 간섭하고 있는 상황이다. 사사기가 우리의 거울이 되어야 한다. 남들이 다 한다고, 다른 영적 지도자들도 다 그런다고, 또한 사역을 한다는 것이 다 그런 것 아니냐고 정당화될 수 없다. 사사기는 당당하게 그러한 모순이 잘못된 것임을 보여 주고 있다. 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아닌 것은 아니고, 안 되는 것은 절대 안 되’는 것이다. 나만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셋째, 우리 모두에게 주는 교훈이다. 사사기의 결론은 마지막 구절에 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것이다(삿 21:25). 여기에서 ‘왕’이란 여러 의미가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왕이시고 유일한 사사이신 여호와를 가리킨다. 즉, 그들이 여호와를 떠났으므로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사사기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시고 더 이상 그들의 삶에 관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완벽히 부재하신 곳이 ‘지옥’이 아닌가? 우리 모두는 이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복음 전파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말세가 다가올수록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그 답은 ‘복음을 전하는 데 삶을 투자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단순히 목회자가 되라는 뜻이 아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삶의 목표를 지상명령 성취에 두고 살라는 것이다.

앤 그래함 여사는 유명한 목사님이신 빌리 그래함의 딸이다. 그 분도 아버지를 이어 복음전도자의 삶을 살고 있는데, 얼마 전 우리 나라를 방문해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한 기자가 ‘21세기의 여성들이 당면한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했다. 당시 통역을 맡고 있었던 필자는 기대를 가지고 세련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앤 그래함 여사의 답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녀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21세기 여성뿐아니라 전 세기를 통해서 여성들이 당면한 문제는 ‘죄’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여성들이 필요한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것이 그녀의 답이었다.

이것이 어찌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답인가! 이 만고의 진리는 세상 끝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시대를 초월하여 가지고 있는 문제는 ‘죄 문제’이며, 우리는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을 만나고, 그 분을 이미 만난 사람은 그 분을 전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사사 시대가 아닌 우리가 안심하고 호흡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 김윤희 박사·FWIA 대표     ©정희수


김윤희·철학 박사(Ph.D),  FWIA 대표, ykimpark@hotmail.com


김윤희 박사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턴신학교 석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에서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FWIA(Faith&Work Institute Asia) 대표로 ‘일의 신학’을 위해 활발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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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22 [16:08]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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