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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2.17 [04:03]
과연 인간이 신이 될 수 있을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24]
 
정성민

석가는 제자들로 하여금 도덕법칙을 잘 수행하여 거룩한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 문제는 석가가 주장한 도덕법칙은 신이 인간에게 명령하거나 부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석가의 도덕법칙은 인간이 인간에게 스스로 부여한 것이다. 왜냐하면 도덕법칙을 부여한 자도 없고 그 도덕법칙대로 심판할 자도 없기 때문이다. 인간 스스로 도덕법칙을 주체적으로 세우고 사후에 심판과는 상관없이 그 도덕법칙을 실천한다는 것이다. 대승불교적으로 해석하자면, 어쩌면 석가 자신이 부처로서 중생들에게 도덕법칙을 부여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석가는 도덕법칙을 부여하는 신으로 등극 되는 것이다.

 

1. 과연 인간이 신이 될 수 있을까?

 

저명한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에 의하면, 인간이 신격화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즉 이는 불신앙이요, 불경죄에 해당된다. 예수는 자신이 스스로 신이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가 정말로 신의 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는 정신병자이든지 아니면 사이비종교의 교주일 것이다.

 

하지만 석가는 절대로 사이비 교주도 아니고 정신병자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자신이 인간임을 밝혔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들의 왜곡된 종교성이다. 아무리 석가가 자신을 인간이라고 밝힐지라도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석가를 신으로 숭배하길 원한다는 것이다. 존자 바바린이 존자 삥기야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광대한 지혜를 갖춘 고따마 님, 광대한 명지를 갖춘 고따마 님과

삥기야여, 그대는 잠시라도 그와 떨어져 살 수 있겠는가? (Stn.1138)

 

이에 존자 삥기야는 이렇게 답한다,

 

저 광대한 지혜를 갖춘 고따마 님, 광대한 명지를 갖춘 고따마 님과

바라문이여, 잠시라도 저는 떨어져 살 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 효과가 있고, 시간을 뛰어넘고, 갈애를 소멸하고 고뇌가 없는 가르침을

제게 말씀해 주셨으니, 그 님께 견줄 자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바라문이여, 나는 방일함이 없이 밤낮으로, 마음으로나 육안으로나 그를 봅니다.

그 님께 예배드리면서 밤을 보냅니다. 생각건대 그 님을 떠나 사는 것이 아닙니다. (Stn.1140-42)

 

초기불교 경전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석가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들은 석가를 신적인 존재로 받들기 원했다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석가가 아니더라도 그 누군가 신적인 존재를 원했던 것이다. 야스퍼스는 이러한 인간 신격화를 불합리한 신앙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인간 신격화는 그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유한한 인간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은 귀신을 섬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 신격화에 대한 야스퍼스의 입장을 한번 들어보자,

 

왜 인간은 인간을 신으로 숭배하는가? 인간에게는 자기가 되고는 싶지만 될 수는 없는 그런 상태를 성취한 완성된 인간을 보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다....... 즉 신에 대한 복종과 같은 것을 바칠 만한 권위를 필수적 조건으로 요구하면서 멀리 숨어 있는 신을 육체를 갖고 있는 존재로서 추구하고 있다. 흔히 인간 신격화는 신앙의 대치물 역할을 한다. 그것은 불합리한 신앙이지만 참된 신앙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인간 신격화는 근본적으로 귀신론의 일종이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귀신들을 소위 초월자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매달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구체적 인간에게 매달려서 그들을 신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신격화는 근본부터 오류인 것이다. 철학적 신앙은 모든 형태의 인간 신격화를 폭로하고 고발한다. 철학적 신앙은 한 순간도 인간의 유한성과 미완결성을 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i]

 

물론 야스퍼스의 인간 신격화에 대한 비판이 예수에게도 적용되어질 수 있다. 사실은 예수도 한 인간이었지만,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를 신으로 숭배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예수나 석가나 모두 한 인간에 불과한 존재들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주장한대로 만약 그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면 어쩔 것인가?

인간을 신격화 하는 것과 진짜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라고 본다. Peter Harvey는 석가와 예수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인간이 되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이고, 불교신자들은 석가모니를 신(다르마)이 된 인간으로 고백한다는 것이다.[ii]

 

결국 예수와 석가의 차이점은 예수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분이라는 것이고, 석가는 인간이 신이 된 분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차이일까?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결단코 비과학적인 사실이다. 그러기에 석가가 신이 되었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왜곡된 인간의 종교성이 반영된 결과일 뿐이다. 하지만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이해하거나 풀 수 없는 미스터리이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할 뿐 그것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믿음이 적용이 되는 것이다.

 

철학자 야스퍼스에 의하면 석가의 가르침은 비합리적인 불신앙이다. 이는 석가가 결단코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에게도 적용이 된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신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합리적인 사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의 구원관(해탈이나 열반)은 단지 인간의 바램이요, 꿈일 뿐이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석가의 가르침은 매우 비현실적인 도덕법칙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해탈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즉 감각적인 쾌락에서의 자유 그리고 세상적인 소유물로 인한 근심에서의 해방이 어느 정도 정신적인 차원에서 가능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절대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신적인 존재처럼 자유롭고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는 금욕적이고 거룩한 생활을 하는 최고의 경지에 오른다고 한들 연약한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죄인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다.

(전도서 7:20)

 

2. 과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일까?

 

이를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이 인간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이고 종교사학적인 논증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그리스 신화나 힌두교가 주장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신들, 즉 화신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도 대두된다. 도대체 예수와 다른 화신들은 무엇이 다를까?

 

만약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전제한다면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것이 더욱 가능성이 높다. 좀 더 합리적으로 말하자면, 어느 인간도 하나님이 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해탈하여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생각은 아예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신이 인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자연종교의 신들, 즉 폭풍의 신, 바람의 신, 태양신, 바다의 신들처럼 의인화된 신들은 오히려 미신적이라고 생각된다.

 

힌두교의 신들 중 가네샤는 인도 신화에 나오는 화신 가운데 하나다. 가네샤는 인간의 몸에 코끼리의 머리를 지닌 모습을 한 신으로 라마야나에 등장한다. 인도에서는 지혜와 재산을 관장하는 신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그는 주로 상업과 학문의 신으로 숭배되고 있다. 하지만 코끼리 머리를 지닌 화신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 가히 너무나 신화적이다. 

 

크리슈나(Krishna)는 힌두교 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영웅이다. 힌두교의 3대 신들(브라흐마, 비슈누, 시바)중의 비슈누[iii]의 여러 화신 중 하나이다. 힌두교에서 최고신이자 비슈누 신의 여덟 번째 화신으로 숭배된다. 다음은 크리슈나의 이야기다.

 

크리슈나는 아수데바와 데바키의 아들로 태어났다. 폭군 캄사의 탄압을 피해 유목 집안에서 길러졌다. 장성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캄사를 물리치고 새 땅으로 가서 왕국을 세웠다. 전쟁이 일어나면 지혜로운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후 왕실 내부의 분쟁이 일어나 크리슈나의 직계 가족들이 희생되었다. 실망한 크리슈나가 숲 속에 들어갔는데 사냥꾼이 사슴으로 오해함으로써 크리슈나는 그가 쏜 화살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iv]

 

우리는 힌두교의 3대 신, 비슈누의 화신인 크리슈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화신으로서 크리슈나의 삶이 좀 황당하다. 평화의 신, 비슈누의 화신으로서 지녀야 할 어떠한 의미나 목적이 결여되었다. 특별히 크리슈나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너무나 어이가 없다. 비록 비극적인 죽음이라도 어떠한 목적이 있다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크리슈나의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우연한 죽음이다. 적어도 화신이라면 그러한 목적 없는 우연한 죽음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정말로 예수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일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에게 있어서 예수가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라는 기독교의 신앙은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미신이나 사이비신앙으로 여겨질 것이다. 결국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의 영역이라 말할 수 있다. 즉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결국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신앙은 신의 존재를 긍정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선택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무신론과 유신론 중에서 유신론을 선택한 자들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가 바로 그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조차도 받아들인 자들이다.

 

왜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로 믿는 것일까? 그것은 그의 삶과 죽음이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 바로 인간의 필요와 정확히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의 가장 큰 필요일까? 무엇이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일까? 특이한 것은 인류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기독교와 불교가 유사하다는 것이다. 석가는 인류의 문제를 고통으로 보았고, 그 고통의 원인을 탐욕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탐욕의 근본적인 원인을 무지라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예수는 인류의 문제를 죄와 죽음이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죄와 죽음의 근원적인 원인을 하나님과의 분리, 즉 소외로 보았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서로 같은 현상을 바라보면서 그 원인을 다르게 해석할 뿐이지 인류의 문제를 각각 죄와 죽음, 그리고 탐욕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는 정말로 비슷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불교는 탐욕과 고통의 문제를 무신론적인 관점에서 해석하였다는 것이고, 기독교는 죄와 죽음의 문제를 유신론적 관점에서 해석하였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인류가 당면한 가장 큰 괴로움은 바로 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석가는 이 죄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 해결하자고 말하는 것이고, 예수는 자신이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삶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지은 인간의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길 원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 예수를 화목제물로 이 땅에 보내셨던 것이다. 이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죄의 담이 무너졌다. 그러므로 예수는 인간이 지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인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제물, 즉 속죄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예언을 하였다. 그것도 예수가 탄생하기 700년 전에 말이다. 이제 이사야 531-12절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12.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결국 예수의 죽음은 아무런 목적이 없는 우연한 죽음이 아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가 미리 예언하였고, 그러한 예언대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성취하였던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피의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즉 동물의 피를 흘려서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는 하나님께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구약시대에 제사에 관한 그 모든 규율을 설명한 레위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레위기 17:11)

 

결국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는 구약 예언의 성취요 완성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기 위하여 수많은 동물들의 피를 흘리는 제사를 드렸다. 하지만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속죄양으로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림으로써 이러한 동물제사의 마침이 되었던 것이다. 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구약 제사의 끝마침이 되었을까?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1.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2.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

이는 황소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6.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7.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8.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째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5.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증언하시되

 

16.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21.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결론적으로 기독교는 예수가 구약 예언의 성취요 완성이라고 믿는다. 예수가 바로 인류의 난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구세주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이 주어진다. 하나는 죄의 문제를 인간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석가의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죄를 용서받기 위해 예수 그 자신을 믿으라는 예수의 주장이다. 만일 당신이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무신론을 선택한다면 아무래도 석가의 가르침이 당신의 선택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을 선택한다면, 아무래도 당신은 당신의 죄를 용서하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바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다.

 

어쩌면 믿음의 선택은 도박적인 속성이 있다. 당신이 유신론과 무신론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도박일 수 있다. 무신론에 당신의 미래를 걸었다면 당신은 석가가 가르쳐준 탐욕과 집착을 제거하는 팔정도의 수행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쾌락주의적 삶을 살아가든지 삶을 중도에서 하차하든 지의 선택이 주어진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유신론에 당신의 미래를 걸었다면, 당신은 또다른 도박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인지를 긍정하든지 아니면 부정하든 지의 선택이다. 이는 당신이 죄에서 자유 할 수 있는 길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과연 예수가 가르쳐준 구원의 길이 옳을까? 아니면 석가가 가르쳐준 구원의 길이 옳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아무래도 각 개인의 선택에 달렸다고 본다. 왜냐하면 신이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에 대한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과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닌가도 역사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신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증명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증명된 신은 이미 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우리 인간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길이 전혀 없다. 또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할 방법도 없다. 이에 대하여 야스퍼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도처에서 우리는 세계의 불확실성, 폐쇄성, 세계상의 좌절, 세계 안에서의 계획, 인간의 기도와 실현의 실패, 인간 존재 자체의 한계와 미완결성 등에 부딪히고, 결국은 심연 앞에 당도할 때 무() 또는 신을 체험하게 된다. 이 같은 한계 상황에서 과학적 강제력을 가진 증명은 전혀 있을 수 없다. 증명된 신은 신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직 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자만이 신을 찾을 수 있다.[v]

 

야스퍼스가 말한 오직 신으로부터 출발한 자만이 신을 찾을 수 있다는 주장은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신을 찾을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결국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을 사모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한다,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8.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말씀이니라

 

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이사야 556-9)

 

 



[i] 철학적 신앙, 131.

[ii]An Introduction to Buddhism: Teaching, History and Practices, 28.



[iii]


비슈누는 커다란 금시조(金翅鳥)타고 다니며 악을 제거하고 정의의 회복을 유지하는 신으로서 힌두교의 3
 
신의 하나로  평화의 신이다.

[iv]위키백과사전

[v]

철학적
신앙,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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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22 [06:14]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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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민 교수] 윤회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정성민 2018/06/11/
[정성민 교수] 신처럼 완벽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정성민 2018/06/08/
[정성민 교수] 과연 신은 악의 문제에 책임이 있을까? 정성민 2018/06/07/
[정성민 교수] 석가모니가 무신론 주장하는 근거는? 정성민 2018/06/04/
[정성민 교수] 석가모니는 왜 신의 존재에 관심 없었나? 정성민 201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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