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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0.20 [06:02]
종교심이 많은 여인, 미가의 어머니
김윤희 박사의 구약의 조연들
 
김윤희

사사기의 구조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구분하자면 서론(1:1~3:6)과 중심부(3:7~16:31)와 마지막 코다(종결부: 17:1~21:25)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중심부에서는 여섯 명의 대사사들의 스토리를 중심으로 모두 열두 명의 사사들 스토리가 소개된다. 12라는 완벽한 숫자의 상징성이 부각되면서 사사들로 대변되는 '이스라엘' 국가 전체 모습의 사이클이 끝나게 된다. 17장부터는 종결 부분으로 접어들면서 사사시대 암흑상의 극치를 보여 준다. 그 시대를 단적으로 대변해 주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어 종결부 처음과 끝에 나오는데,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 21:25)는 말씀이다. 그 중간에는 이것을 축약한 표현이 두 번 나온다(18:1; 19:1,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종결부에서는 이러한 표현들이 의미하는 바를 이스라엘 개인들의 삶과, 또한 지파 전체의 모습들을 통하여 보여 주려는 것이 그 의도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제일 먼저 소개되는 인물이 미가이며, 특히 17장 1절에서 5절에는 미가라는 한 개인의 가정 속에서 그의 어미와의 관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들여다보며 당시의 시대상을 우리에게 조명하여 보여 주고 있다.

 

에브라임 산지의 상징성

 

짧은 본문의 내용은 사실 간단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분석해 보면 엄청난 신학적인 주제가 포함되어 있다. 먼저 본문은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 하는 사람이 있더니.󰡓라고 시작하고 있다. 19장에 보면 '에브라임 산지'에 우거하는 어떤 레위 사람의 스토리가 소개되는데, 저자가 의도적으로 에브라임을 강조하고 있다. 에브라임이 의미하는 바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17장, 19장 모두 유다 베들레헴과 대비를 시키고 있기 때문에(17:7; 19:1) 후에 분열왕국 시대에 나타나는 남유다와 에브라임 지파로 대표되는 북이스라엘의 관계를 이미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에브라임이라 하면 지형적으로도 이스라엘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곳에 위치해 있는 중요한 곳이며, 성소가 있는 '실로'가 위치한 곳으로, 그곳의 영적 상태가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 상태를 측량해 볼 수 있는 좋은 지표 역할을 할 수 있다.

 

미가라는 이름은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호와와 같은 이는 누구도 없음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적인 요소가 있는 이름이다. 이러한 이름을 지어 준 부모의 신앙심을 엿볼 수 있다. 본문에서는 1절과 4절에서만 이 이름을 사용하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축약된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러한 차이를 두지 않고 전부 󰡐미가󰡑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거룩한 이름을 가진 자의 행위가 본문에서 드러나고 있다.

 

미가 스토리

 

미가는 자기 어미의 '은 일천 일백'을 훔쳤다. 저자는 '은 일천 일백'이라는 액수를 명시함으로 본문을 즉각적으로 삼손 스토리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 유명한 들릴라라는 여인이 블레셋 방백들 각각에게 받고 삼손을 팔아 넘긴 액수와 동일하다(16:5,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일천 일백을 네게 주리라'). 클라인(Klein)이라는 학자가 이것을 잘 분석하였는데, 이러한 연결성을 통하여 저자가 의도한 것은 두 사건의 비교를 통하여 미가와 그 어미 스토리의 부정적인 측면을 더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들릴라의 가치관과 미가의 가치관은 물질과 배반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하게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들릴라의 경우는 적어도 동족끼리 맺은 '사업상의 계약'이며, 특정한 행위에 대한 대가성 있는 지불이며, 자신의 동족에 대한 위협에 대한 보호 차원이며, 또한 개인적인 협박에 대한 방어적인 행동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미가의 경우는 어떤 설명도 이유도 주어지지 않은, 경제적인 필요도 아닌 '부모에게 훔친 돈'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가끔 비행 청소년들이 부모 몰래 돈을 훔쳐 사용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았어도 멀쩡히 처자식이 있는 성년이, 그것도 뚜렷한 경제적인 이슈도 없는 가운데서 어미의 돈을 훔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아비가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미가의 어미는 과부로 사려 된다. 비록 부유한 과부로 보여지기는 하나 과부의 물질을 훔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계약 위반 조건이며, 십계명의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와 '도적질하지 말지니라'(출 20:15)는 두 가지의 계명에 대한 위법이다. 미가의 행동은 언약백성의 도덕적 가치 부재와 언약의 말씀에 대한 심각한 무감각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니까 삼손을 팔아 넘긴 저속한 유혹녀이며, 이방 여인인 들릴라보다 어떤 면에서 미가는 더 악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그가 돈을 돌려주기로 한 것은 후회가 되거나 양심에 거리껴서가 아니라 자신의 어미의 '저주' 때문임을 본문은 설명하고 있다(2절). 미가는 하나님의 저주를 두려워할 정도의 감각은 가지고 있었다.

 

미가의 어미 등장

 

여기에서 미가의 어미가 등장하는데, 먼저 우리는 그녀가 잃어버린 은을 찾기 위해 그것을 훔쳐간 자를 향해 저주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저주󰡑라는 단어는 다른 곳에서는 󰡐맹세󰡑라는 뜻으로도 쓰였는데(창 24:41; 26:28; 신 29:12, 󰡒…하나님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향하여 하시는 맹세에 참예하여󰡓), 주로 언약의 문맥 속에서 조심스럽게 사용된 무게 있는 단어이다. 문제는 미가의 어미 경우에는 단순히 자신의 은을 되찾기 위한 개인적이고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언약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거창한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일시에 이 단어의 의미가 무색해져 버리고 퇴색해져 버린 느낌을 주고 있다. 또한 아들이 은을 돌려주자 미가의 어미는 미가에게 '복'을 빌어 준다. 일방적으로 저주하고, 일방적으로 복을 주고, 이 모두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미가의 어미의 가치관과 편리대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미가의 어미는 다시 일방적으로 도둑맞았던 은을 여호와께 돌려드린다. 거룩하지 못한 물질을 여호와께 돌리는 이슈는 둘째친다고 해도, 그 목적은 여호와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긴 자신의 아들 미가를 위한 것이며, 그 방법은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든다'는 것이다(3절).

 

여기에서 '신상'(pesel)이라는 단어는 십계명에 나온 단어로서(출 20:4) 그녀는 십계명의 첫 계명에 도전을 하고 있는 것이다(출 20:23; 신 5:7). 아이러니한 것은 그것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며 여호와께 '거룩히'드린다는 명목으로 일을 추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일방적인 '여호와에 대한 헌신'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헌신도의 진면목은 4절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잃어버렸다가 도로 찾은 은을 여호와께 드리겠다던 미가의 어미가 실제로 신상을 새기는 데에 사용한 액수는 은 이백에 불과했다. 나머지 구백은 어디로 사라진 것인가?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는 것(갈 6:7)을 그녀는 잊은 것일까?

 

신앙의 변질

 

미가의 어미는 아들에게 축복과 평안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우상을 안겨주었다. 4절 마지막 부분에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는 표현은 이 사건의 극적인 유머마저 느끼게 한다. 하나님이 금지한 우상이 ‘야훼 같은 이가 누가 있는가'라는 '사람의 집에 버젓이 여기 있다'라고 써 있는 것이다. 누가 복과 안전을 보장해 주는가? 미가와 그 어미의 답은 훔친 돈의 일부로 만든 우상이며,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일방적인 방식으로 여호와를 섬기고 있었던 것이다. 미가의 어미의 행위는 엄연히 신명기 13장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다. 6절부터 보면 '네 동복 형제나 제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를 꾀어 다른 신들…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용서 없이 그를 죽이되….'(신 13:6~9)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미가의 어미는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면 가차 없이 죽임을 당해야 하는 인물이다.

설상가상으로 5절에 보면 미가는 자신의 개인 신당에 신상 플러스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자신의 아들 하나를 제사장으로 삼았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에봇은 제사장들이 입는 겉옷이지만 여기에서는 기드온 사건과 연결함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8:27)는 말씀에 따르면 에봇 하나로도 이스라엘 전체를 우상숭배에 빠지도록 할 수 있는, 하나님 앞에 거룩한 물건이 애물단지로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드라빔은 창세기에서 라헬이 자신의 아비인 라반의 집에서 가지고 나온 일종의 가정의 수호신으로 섬기는 신상(창 31:19)이다. 또한 '신상󰡑'라고 번역된 우리말은 원어로 보면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위에서 언급된 페셀(Pesel)이라는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마세카(massekhah)라는 단어로, 후에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이 만든 '두 송아지 형상'이라는 표현 속에서(왕하 17:16) '형상'과 같은 단어로 북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끈 일등공신 중의 하나였다(참고: 레 19:4). 즉,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의 집결로 미가의 집은 하나님을 섬기는 집이 아닌 우상숭배의 본산지로 변해 가고 있었다.

 

영적인 파산 직전

 

거기에 더해 미가는 자신의 아들 중의 하나를 아예 제사장으로 삼아 신당 전문 담당가로 임명해 놓은 상태였다. 모세오경에 보면 여호와의 성소와 제사장직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있었다(신 12:11~18). 구약의 제사장직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편의대로 성직의 자리를 마구 남용하는 모습도 가관이다.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하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미가와 그의 어미의 스토리의 첫인상은 그런 대로 해피엔딩인 듯한 느낌을 주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대단히 잘못된 부분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사실 그들 모자가 잘한 일을 한 가지도 발견할 수가 없다. 모두가 영적인 파산 직전에 와 있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미가라는 이름이 나타내듯 형식적인 면에서만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지 실제적으로는 하나님과 가장 멀어져 있는 상태이며, 그들의 말씀에 대한 무지와 영적 공황 상태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미가의 어미는 여러 면에서 후에 등장하는 유다 왕 아사의 어미(왕상 15:13)를 방불케 하며,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내 이세벨(왕상 16:30~33)을 상기시킨다. 아들을 우상숭배로 이끈 여인의 전형이 미가의 어미이며,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된 종교심에서 발생된 것이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세속과의 혼합주의를 주의해야 한다. 종교 혼합주의(religious syncretism)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종교들간의 교리나 가르침이나 의식이나 행위들을 연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미가의 어미 경우가 전형적인 예이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거룩한 이름을 지어 주었으며, 저주를 할 때에도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했으며, 복을 비는 것도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였으며, 저주를 상쇄시키기 위하여 여호와께 물질을 드렸다.

 

미가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의 저주를 두려워하여 훔친 물질을 스스로 내어놓고 필경은 여호와를 더 잘 섬기기 위하여 개인 신당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며, 자신의 아들을 제사장으로 임명할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다. 두 모자가 모두 여호와에 대한 신앙심을 지니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지 않은 면이다. 당시의 가나안의 종교적인 모습을 그대로 수용하여 우상을 여호와와 함께 섬기려 했고, 또한 그것을 통해서 섬기려 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출애굽기 32장의 시내산 밑에서의 금송아지 사건도 전형적인 종교 혼합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출 32:4) 하고는 여호와의 절일을 선포한다(출 32:5). 이러한 형태의 모습에 여호와가 대노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틀어 보았을 때에 그들이 100퍼센트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만을 섬긴 것은 아니다. 언제나 위와 같은 식의 종교 혼합주의의 모습을 띠고 있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예: 왕하 17장).

 

현대에 와서 종교 혼합주의의 모습을 찾아보자면 기독교인으로서 점쟁이집을 찾아간다거나, 결혼할 때 사주팔자에 의존한다거나, 신문에 나오는 그 날의 운세를 보고 복권을 산다거나 하는, 심각한 정도에서부터 경미한 정도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은 다양하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행위는 잘못되었다는 판단과 평가가 쉽게 가능하지만, 문제는 '세속과의 혼합주의' 형태를 띠고 있을 때에는 그 구분이 쉽지 않으므로 경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속적인 인생관과 도덕 기준과 물질관과 인간에 대한 가치 평가와 성공관 등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대부분의 생활을 해 나가면서 주일에만, 그것도 교회에서만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어떤 것이 더 압도적이냐의 퍼센트의 차이는 있겠으나 문제는 우리 삶에 있어서 순도가 100퍼센트가 아닌 합금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인의 겉모습은 있으나 능력이 없고, 미가의 어미처럼 웃지못할 희극을 연출하며 영적인 방황을 하는 삶을 혹시 살고 있지는 않은지 각자 살펴보아야겠다.

 

둘째, 종교심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구분되어야 한다. 미가와 그 어미는 여러모로 보아 종교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종교심은 인간 중심이다. 인간의 이익과 안녕을 위하여 신을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이용하려는 것이다. 신앙은 반대로 하나님 중심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의 의지를 그의 뜻에 순종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궁극적으로 말씀이다. 말씀의 기준을 떠나서 열심을 낼 때 그것은 신앙이 아닌 종교적인 열성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되 자기 기준으로, 자기 방식대로, 자기가 정의(define)한 대로, 자기 의지대로, 자기 취향대로, 자기의 목적을 위하여 섬기는 것이다. 아니, 섬긴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도는 말씀이 없으면 이루어질 수가 없다.

 

사사기의 시대상이 이렇게 어둡게 된 이유도 말씀의 부재에 있음을 서론에서 밝히고 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삿 2:10)고 기록하고 있다. 후세대에게 말씀을 가르치지 않아 결국 그들은 여호와에 대해 알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가 영적 피폐와 무지함으로 이어졌고, 사사기의 시대상은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소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신명기에서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신 6:7)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또한 말씀을 깊이 아는 사람일지라도 그 말씀을 삶에 적용하지 않거나 순종하지 않으면 결국은 말씀의 열매는 맺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의 척도는 말씀을 얼마나 정확히 알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사느냐에 달려 있다.

 

셋째, 죄의 유혹에 조심하여야 한다. 당연한 논지이다. 그러나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본문을 읽다 보면 별 긴장감을 느끼지 않고 읽어 내려갈 수가 있다. 그 이유는 누구도 피해를 보거나 징계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가는 어미의 돈을 훔쳤지만 그것을 도로 내어놓았을 때에 어미의 훈계나 징벌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축복을 받았으며, 그것을 기념이라도 하듯 훔친 돈의 일부가 오히려 미가에게 상급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미가의 집을 지켜주는 개인적인 수호신으로 변질했다. 미가의 어미 경우에도 여호와의 이름을 몇 번 불러 돈도 찾고 본인이 발설한 저주도 마음대로 축복으로 전환시켰으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지만 전혀 손해를 본 것이 없다.

 

돈은 돈대로 챙기고 일부는 여호와께 '거룩히(?)' 바치고 아들에게 종교적인 생색도 낼 수 있었다.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잘 해결되어 만족스러운 여인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다. 결국 본문을 통해 보여 주는 시대상 속에는 반드시 겉으로 보이는 성공이 올바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 그들 모자의 행동은 지극히 '안티(anti-) 여호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이 끝나고 6절에 기록된 주석에 의하면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현재의 모습이 성공적으로 보일지라도 말씀의 현실은 엄연히 존재한다: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15)는 말씀이다. 미가의 어미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한다고 복이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청종할 때 복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현재의 시대상도 그때와 많이 다르지 않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들이, 또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잘만 살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도 한 번쯤이야 어쩌랴'는 생각으로 죄의 유혹에 졌을 때에 거기에 대한 파장은 무서운 것일 수도 있음을 자각하고 죄의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겠다. 인생의 성공에 대한 정의(definition)도 종교성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기준을 가지고 그것을 만들어 가지만,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기준을 두고 순종하며 살아가고 성공의 여부는 하나님께 맡기는 자들임을 명심하자.

 

▲ 김윤희 박사·FWIA 대표     ©정희수


김윤희·철학 박사(Ph.D),  FWIA 대표, ykimpark@hotmail.com


김윤희 박사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턴신학교 석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에서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FWIA(Faith&Work Institute Asia) 대표로 ‘일의 신학’을 위해 활발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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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20 [10:50]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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