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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2.16 [01:03]
도덕은 신앙과 어떤 관계일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22]
 
정성민

1. 도덕 법칙이란 무엇일까?


도덕은 착하고 정직하며 또한 친절하고 예의 바른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을 도덕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행위가 도덕적인 잣대로 볼 때에 적당한지 아니면 적당하지 않은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어떠한 행위가 이기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덕법칙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과연 신이 인간에게 선하게 살라는 도덕법칙을 만들어서 주었을까? 아니면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도덕법칙이 자연스럽게 등장했을까?

 

보편적으로 도덕은 인간의 양심과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양심은 하나님이 인간 내면에 부어준 선물일까? 아니면 자연진화적으로 생겨난 우연한 산물일까? 진화론자들은 도덕은 진화의 생산물이기에 도덕은 오직 인간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 가지 신기한 사실은 거의 대부분의 종교들이 도덕법칙을 강조하고 내세운다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도덕법칙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십계명일 것이다. 첫째에서 넷째 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한 계율이고, 다섯째부터 열 번째 계명이 바로 인간과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설정한 계율이다. 바로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설정한 계율이 도덕법칙인 것이다. 십계명이 말하는 도덕법칙은 다음과 같다.

 

1. 네 부모를 공경하라

2. 살인하지 말라

3. 간음하지 말라

4. 도둑질하지 말라

5.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6.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유교도 도덕을 매우 중시한다. 삼강오륜은 유교의 가장 기본이 되는 도덕지침이다. 특별히 오륜은 인간관계의 근본을 제시한다.

 

1. 부자유친: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

2. 군신유의: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

3. 부부유별: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4. 장유유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5. 붕우유신: 친구 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결국 유교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 인....신이 반영된 것이 바로 오륜이다. 특별히 어버이와 자식 사이의 친함은 단순한 친밀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가 말하는 도덕은 서로 간의 믿음과 사랑이 바탕이 되는 인간관계를 요구하는 것이다.  

 

석가의 도덕법칙은 그가 가르치는 팔정도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특별히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의 덕목을 통해서 도덕적인 계율은 잘 보여 진다. 올바른 언어는 거짓말이나 이간을 하지 않는 것이다. 올바른 행위는 생명을 죽이지 않는 것, 도둑질하지 않는 것 그리고 간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올바른 언어와 올바른 행위는 바로 올바른 사유로 말미암는 것이다. 올바른 사유는 욕망을 제거하고, 분노를 제거하고, 폭력을 제거하려는 사유이다. 그러므로 석가가 말하는 도덕은 모든 존재로 향하는 인간 자신의 비폭력적이고 무아적인 사랑에 기초한 것이다.

 

2. 도덕법칙은 신의 존재를 요구한다.

 

칸트는 인간의 도덕적 선행이 사후세계에 반드시 보상을 받아야한다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 신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하게 도덕적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신의 존재유무를 알 수는 없지만 선하게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서 신의 존재는 반드시 요청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스마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런데 이렇게 칸트가 도덕의 자율성을 주장하고, 그리하여종교 없는 도덕이 존립할 수 있다고 여기는 현대 서구 사상의 선구자가 되기는 했지만, 그는 실천적 견지에서는 도덕법칙이 신을 전제로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덕행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그에 상응하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더욱이 이 짧은 생을 살아가면서 절대적인 선과 도덕적인 완성을 달성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우리는 다만 거기에 가까이 갈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도덕 법칙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칸트는 실천적 차원에서 도덕 법칙의 요청이 우리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 삶을 살아야 하며 결국에 신이 우리가 마땅히 받았어야 할 온전한 행복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보면 신과 불멸은 도덕법칙에 의해 요청된 실천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비록 도덕이 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도덕 법칙으로부터 신을 추론해 낼 수 있는 것이다.[i]

 

니니안 스마트는 우리가 도덕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다는 이러한 칸트의 입장을 옹호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연 우리가 선하게 도덕적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나 당위성이 있는 가이다. 만약 도덕법칙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것이라면 도덕법칙은 당연히 절대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3. 도대체 이러한 절대적인 도덕법칙은 어디서 왔을까?

 

우리는 도덕법칙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 궁금할 수밖에 없다.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 하지도 않는 신을 만들어서 도덕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렇다면 도덕법칙은 사기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둘 중의 하나의 입장을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신이 존재하고 그 신이 우리에게 선하게 살라는 도덕법칙을 부여하였다는 입장이다. 우리는 그 도덕법칙에 따라 사후세계에서 심판을 받는다. 선을 쌓은 자와 악을 쌓은 자가 각각 자신의 행위에 따른 보상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은 존재하지 않고 도덕법칙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자연적으로 진화하여 탄생한 우연적인 존재인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어떠한 나쁜 행위에 대해서도 심판을 받을 이유가 없다. 또한 심판을 받을 사후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그 모든 도덕법칙의 의무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유신론적 도덕법칙은 예수의 가르침과 동일한 것이다. 바로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선하게 살라는 도덕법칙을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 모든 도덕법칙의 근거를 아가페적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는 십계명을 사랑의 개념으로 아주 쉽게 설명한다. 그는 말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묵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렇다. 예수는 도덕법칙을 사랑으로 표현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면 그 모든 도덕법칙들은 너무나 쉽게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 살인하지 않는 것, 간음하지 않는 것, 도둑질하지 않는 것 그리고 거짓말하지 않는 것은 만일 당신이 이웃을 사랑한다면 저절로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랑의 마음 내지는 양심은 어디서 왔을까? 성경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증거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한 14:7-8)

 

그렇다면 석가의 가르침은 어디에 속할까? 사실 석가의 가르침은 무신론적이다. 하지만 그는 도덕법칙은 부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도덕을 더욱 강력하게 강조한다. 다시 말해 석가는 신은 부정하지만 도덕법칙은 인정하는 아주 이상하고 묘한 논리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덕법칙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선한 삶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사후세계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석가는 신을 부정하면서도 도덕법칙을 내세운다. 그는 도덕법에 따라 사람들이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석가는 말한다,

 

행위가 선하지 못하면 물러나 뉘우치는 일을 보게 된다네.

눈물로 얼굴을 얼룩지게 하는데 과보는 오랜 습관에서 말미암은 것이니라.

행위가 덕이 있고 선하면 나아가 기쁨을 보게 된다네.

응하여 복을 받게 되는데 기쁘게 웃을 수 있는 것은 좋은 습관 때문이니라. (법구경, 067-68)

 

어쩌면 석가의 도덕법칙은 논리적으로 아주 모순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왜 도덕법칙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즉 도덕법칙이 존재해야 할 당위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석가가 우리가 지은 선악이 심판을 받을 사후세계나 그 사후세계를 가능케하는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도덕법칙을 지켜야할 이유가 사라진다.

 

4. 도덕법칙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만약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불교가 궁극적인 종교로 여겨질 수도 있다.

인간은 신이 없는 세상에서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인간이 자신의 운명과 그에 따르는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될 것이다. 어쩌면 절대자가 없는 세상에서 인간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야 한다는 깨달음은 가장 합리적인 깨달음이 될 것이다. 또한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는 탐욕을 제거하므로 마음의 번뇌와 고통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깨달음도 아주 적절한 구원론이 될 것이다.

 

하지만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석가의 가르침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도 석가의 가르침은 인간의 오만이요, 신에 대한 불경이 될 것이다.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카알 야스퍼스는 유한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심연에 다다르게 될 때 결국 신을 체험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비록 신의 존재는 증명될 수는 없지만 신으로부터 출발한 자들, 즉 신을 의식하는 자들은 신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ii] 신은 초월자로서 시간을 뚫고 들어와서 도덕법칙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은 초월자를 현실의 삶 속에서 인정하고 의식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삶은 초월자로부터 부여받은 선물인 것이다. 야스퍼스는 이렇게 말한다,

 

실존으로 존재할 때 나는 나 자신의 존재가 초월자로부터 선물로 부여된 것임을 안다. 나는 내 결단을 통해 나 자신 만에 의거하여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내 자신의 자기실현조차도 나의 자유를 통해 선물로 부여받은 것이다. 나는 나의 존재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즉 내가 원한다고 해서 나의 존재를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다 참다운 의미의 신앙은 초월자를 현실적으로 의식하는 실존의 행위이다.[iii]

 

그러므로 착하고 선하게 살라는 도덕법칙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도덕적인 기준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 양심이 타락하고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한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 17:9) 

 

예수도 인간이 지닌 양심의 타락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가복음 7:20-23)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결국 도덕법칙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부여한 절대적인 명령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 명령을 지키려고 노력하지만 결단코 그것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자신이 하나님이 주신 도덕법칙을 완벽하게 준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착각이거나 위선인 것이다. 결국 도덕법칙이 심판 날에 잣대가 될 것은 분명하다. 이에 대해 사도 요한은 이렇게 증거한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요한계시록 20:12)  

 

결과적으로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도덕법칙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부처도 아라한도 그리고 그 어떠한 성자라도 도덕법칙을 완전하게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 스스로 최면을 거는 것이든지 아니면 남을 속이는 위선자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이러한 도덕법칙을 이룰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요 구원의 길인 것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런 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도덕법칙)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도덕법칙)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로마서 3:23-28)

 

이런 면에서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도덕법칙을 완성하도록 만드시는 구세주인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



[i]종교와세계관, 178. 낸시피어스, 완전한진리 (서울: 복있는사람, 2006), 204. 참조.

[ii]카알야스퍼스, 철학적신앙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79), 40.

[iii] Ibid,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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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19 [01:27]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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