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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2.16 [01:03]
도대체 무신론은 무엇이 문제일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21]
 
정성민

1. 무신론이란 무엇일까?

 

무신론은 세상이나 자연을 통제하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를 부정하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무신론은 유신론의 정반대 개념이다. 이는 초인간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전지전능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그 존재가 세상을 직접 통제하고 다스린다는 생각조차도 부정한다. 그래서 무신론은 아주 급진적인 사상인 것이다.

 

베른하르트 벨테는 무신론은 완전히 생소하고 당혹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인류의 전체 역사 안에서 지금 시대와 같은 폭과 차원으로 무신론이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무신론이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두루 퍼져서 마침내는 이 시대의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세력이 되었다는 것이다.[i] 벨테는 마르크스와 포이에르바하가 주장하는 무신론을 소극적 무신론이라고 말한다. 소극적 무신론은 세계를 과학적인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외견상으로나 원칙적으로 증명이 될 수 있는 존재만을 수용하는 것이다. 즉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 영적인 것들(, 천사, 귀신 등)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짓는 것이다. 과학적인 시각으로 볼 때, 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신에 대한 물음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소극적인 무신론에서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조차도 내세워지지 않는다. 그저 신이라는 존재가 의문이나 질문의 대상에서 탈락하는 것이다.[ii]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소극적 무신론의 원조가 바로 석가모니란 사실이다.

 

벨테는 이러한 소극적 무신론과 내면적 뿌리를 같이하는 유사한 무신론으로서 비판적 무신론을 제기한다. 그에 의하면, 사람들은 각자의 의식이나 인식하는 수준에 따라 신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데로 신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규정한다. 이는 마치 신이 어떠한 정의나 개념 안에서 규정되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신의 개념이나 정의는 우리가 경험하는 바로는 세계 내에서 발생하는 현실적인 문제들(불평등, 고통, 재난과 같은 악의 문제들)과는 조화를 이룰 수 없다. 마침내 우리는 이러한 모순에 의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으로 정의 내려진 신, 예를 들어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하나님을 부정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부정되어지는 것은 신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신의 개념이나 정의자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의되어진 신은 이미 신이 아니라는 신학적 진술이 여기에 적용되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초월적 신은 인간이 생각하는 개념이나 정의를 넘어선 신비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비판적 무신론은 외견상으로 알 수 있는 신 그리고 우리의 의식이나 이성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는 신에 대한 비판의 결과인 것이다.[iii] 어쩌면 현실 속에 만연하는 악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석가의 입장이 비판적 무신론에 속할 것이라 여겨진다.

 

벨테는 소극적 무신론과 비판적 무신론에 이어 적극적이고 투쟁적인 무신론을 소개한다. 이 적극적 무신론은 소극적 무신론처럼 신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의 대상에서 탈락시키거나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성적으로 그리고 논쟁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바로 니체가 그 대표적인 철학자다. 적극적인 무신론은 역사를 움직이는 것이 신이 아니라 인간의 힘과 지능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인간의 힘과 지능이 절대적이고 전능한 것으로 생각되어지고 요구되어진다. 그리고나서 신의 존재나 위엄은 저절로 사라지게 된다. 바로 역사를 좌지우지하려는 인간들의 권력에의 의지와 요구 앞에 신의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벨테는 이러한 적극적인 무신론을 가장 순수하고 가장 진실된 무신론의 형태라고 주장한다.[iv]

 

사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적극적인 무신론의 효시도 또한 석가라는 것이다. 인류역사의 주체나 각 개인적 운명의 주체를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천명한 사람이 바로 석가이기 때문이다. 법구경에 기록된 석가의 가르침은 이를 증명한다, 나는 나를 주인으로 하니 나 외에 따로 주인이 없네. 그러므로 마땅히 나를 다루어야 하나니 말을 다루는 장수처럼. (법구경,380) 신의 부재나 죽음을 선포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바로 그 신의 자리에 앉아서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는 태도가 바로 적극적인 무신론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소극적인 무신론, 비판적 무신론 그리고 적극적 무신론은 석가의 원시 무신론을 이어받아서 근대 이후에 새롭게 등장한 현대 무신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무신론자들의 도전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우리 신앙인들은 그 모든 무신론적 투쟁과 항의에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변호해야 할 것인가? 바로 신정론의 문제가 대두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벨테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이른바 신에 의해서 창조된 세계가 그토록 고통과 불의로 가득 차 있다면 신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세계의 악의 대한 책임으로부터 신을 면제해 주기 위하여 우리는 신을 없애야만 하는가?...... 고통에 짓눌려 신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된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도울 수 있는가? 그에게는 라이프니츠 이래로 그렇게 불리었듯이 변신론의 문제는 대단히 현실적이고 괴롭게 짓누르는 문제로 남는다.[v]

 

벨테는 세상 속의 악이나 고통의 문제가 신의 존재 자체를 사라져버리게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부정하는 것은 신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단지 신에 대한 그들의 관념이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세상 속의 부조리를 경험하며 고통 가운데 울부짖으면서 신을 상대로 투쟁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기에 신에 관한 관념이나 이미지를 놓고 그토록 고통스럽게 싸우면서 투쟁하는 무신론적인 사람들을 우리가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진정한 신은 우리 인간들이 정의 내린 개념이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신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위대하며 더 신비하다는 것이다. 벨테는 이러한 역설적이고 놀라운 사실이 바로 고통을 통해서 인간에게 알려진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여기에서 그 뜻을 헤아려보고자 하였던 신의 헤아릴 길 없는 신비에 대한 그 암시들은 고통의 사실에 의해 무력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강화된다. 이와 같이 일체의 파악함을 능가하는 신에 대한 신앙은 고통의 전망에서도 가능한 것으로 머문다....... 왜냐하면 신이 불가해한 존재이며, 정의에 대한 모든 표상들보다 또는 우리가 그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다른 모든 표상들보다 더 위대하고 더 신비스럽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신앙의 특성에 속하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한 투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고통의 한계를 늘 상 되풀이하여 밀어내어 인간적인 영역을 얻어낼 수 있고 또 얻어 내어야만 한다. 그러나 신에 대항하는 투쟁이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에게서 인간적인 것을 얻고자 신과 함께 벌이는 투쟁이다.[vi]

 

석가는 악의 문제와 고통의 문제를 직면하여 신의 존재를 부정하였고, 그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간 스스로 고통의 문제를 파악하고 그 원인을 제거하려는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펼쳤다. 가톨릭 신학자, 폴 니터는 이러한 석가의 입장에 동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개인적인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신정론의 문제인데, 만약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사랑이 풍성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시라면 우리가 겪어야 하는 고통들 중에서 정말 쓸데없는 것들은 막으시거나 없애버리셔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능하시기에 고통을 미리 막거나 제거하실 수 있고, 사랑이 많으시기에 자녀들의 고통을 간과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이다. 우리가 그리는 하나님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현실이기에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이미지에 문제가 있거나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지난 2004년도에 인도네시아, 인도 그리고 태국을 강타하여 수십만 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쓰나미를 들 수 있다. 과연 이러한 자연적인 대재앙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인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자연재앙도 하나님의 행위라고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이다.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자연재앙이 하나님의 높으시고 선하신 뜻에 따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거나 혹시 막을 수 있는데 막지 않으셨다면, 이는 정말이지 비도덕적인 것이다. 쓰나미라는 엄청난 자연재앙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고 정당화하기에는 너무나 비이성적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이러한 비도덕적인 것으로부터 면제시켜준다면, 무엇인가가 잘못된 것이다.[vii]

 

어쩌면 우리는 세상 속의 악의 현존으로 인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든지, 아니면 신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도덕적이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이미지를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세상의 부조리와 무질서 그리고 자연재앙 등을 경험하면서 사랑의 하나님을 부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오히려 비이성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증거보다도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모성애, 연어나 기러기의 회귀본능, 사랑의 감정, 양심 등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그 많은 자연의 신비와 질서들이 신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철학자 크리스토퍼 베이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백 년 동안, 과학자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물질우주의 장엄함과 다채로움을 밝혀왔다. 은하계의 생성과 소멸이 일어나는 거시세계로부터 입자가 잠재적 가능태로서 작용하는 미시세계에 이르기까지, 이 우주는 기막힌 정교함 뿐만 아니라 그 창조력과 아름다움으로써도 우리를 감동케 한다. 자연은 그 어떤 수준에서 보든 하나의 예술작품이다. 물질우주의 어느 곳으로 눈을 돌리더라도 우리는 그곳에서 질서와 지성으로 충만한 세계를 보게 된다.[viii]

 

그렇다. 비록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정의를 내린 그런 신은 없을지 몰라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해할 수 없는 초월적 신이 존재할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과연 우리가 삶의 고통을 이겨내면서까지 신의 침묵을 견디어 내야만 하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베르하르트 벨테는 다음과 같이 조언한다,

 

우리는 고통에는 그 의미가 간직되어 있다고 믿고 희망할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신의 침묵을 견디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을 신앙한다는 것은 어둠을 견디어 낼 수 있음을, 파악할 수 있는 일체의 것을 넘어서 참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 앞에 내어놓음을, 어떤 경우에라도 자신을 내어 맡김을 당연히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신은 그대로이다....... 확실히 고통은 언제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신이 고통 받는 사람의 의식에서 지워버릴 만큼 그렇게 크고 불가사의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신은 고통 안에서 훨씬 더 커지고 이렇게 되는 가운데 고통 받는 자의 궁극적 피난처요 희망으로 머물 수도 있다. 따라서 무신론은 언제나 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결코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무신론은 우리 시대에 일종의 역사적 운명과 역사적 불가피성이 된 것 같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다만 외견상 그러할 뿐이다....... 이제 무신론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러나 무신론의 시대가 도래하였다면, 모든 시대가 그러했듯이 그것 역시 다시 떠나갈 수 있다. 신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 그들을 위해서 신앙의 길은 언제나 남아 있는 것이다.[ix]

 

종교학자 니니안 스마트는 마르크스의 무신론적 종교론을 반박하였는데, 그 이유는 마르크스의 투사이론이 그 자신의 상상을 통해서 만든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마트는 유신론적 입장에서 종교를 바라보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무신론적 종교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다음은 마르크스 무신론적 종교론에 대한 스마트의 비판이다,

 

19세기의 또 다른 사상가들은 종교에 대한 심리적이고 사회학적인 새로운 이론들을 제시했다. 이 이론들은 신이 하나의 투사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 신은 스크린에 비춰진 그림과 같은 것으로서 우리에게는 실재적이고 저 너머에존재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의 감정이나 문화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종교를 봉건사회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관계를 낳은 부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지상의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욕망을 우주에 투사한다는 것이다. 하늘은 억압 받는 자들을 보살핀다. 그러나 지배 계급 역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고 노동자와 농민을 지배하기 위해 권위 있는 신적 존재를 이용한다....... 그러나 이 이론들은 그 자체로 비판을 받았다. 이 이론들은 신이 환상에 불과하며 물질적인 힘을 통해 인간의 발전단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하나의 세계관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은가? 마르크스주의는 그 자체가 물질적 낙원이라는 환상을 하늘에 있는 천국이 아닌 인간의 미래에다 투사하는 일종의 투사이론이 아닌가?...... 종교가 우리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견해 자체가 또 하나의 환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x]

 

그렇다. 어쩌면 종교를 인간의 창작물로 바라보는 마르크스의 무신론적 종교론은 그의 상상력에 근거한 하나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3. 죽음 앞에 무기력한 인간은 신을 갈구할 수밖에 없다.

 

고매하고 학식이 깊은 철학자도 철부지 어린 시절이 있다. 그들조차도 자기 자식을 조건없이 사랑했던 부모님의 깊은 마음을 어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우리의 머리카락이 흰 눈처럼 하얗게 변하고 나서야 철이 들게 된다.

 

그렇다면 부모님은 물론이고 부모님의 부모님,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전전대의 부모님들에 대해 내가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이와 마찬가지로 그 어떤 절대적인 존재가 우리 조상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속 시원히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전도서 39-11)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판단에 있어 내 방식대로 쉽게 속단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신을 대하는 인간의 기본자세이다. 전도서 기자는 말한다,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바람을 주장하여 바람을 움직이게 할 사람도 없고 죽는 날을 주장할 사람도 없으며 전쟁할 때를 모면할 사람도 없으니 악이 그의 주민들을 건져낼 수는 없느니라. (전도서 87-8)

 

이 모든 것을 내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 건지 미움을 받을 건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전도서 91)

 

한치 앞일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이 신의 존재를 보지 못했다고 그리고 증명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비록 신의 존재를 긍정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확실히 부정할 만한 명확한 근거 또한 없지 않은가? 그야말로 피조물인 인간에게 신의 존재는 미스터리일 뿐이다. 전도서 기자는 말한다,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 (전도서 817)

 

죽음 앞에 무기력한 인간은 신을 갈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의 존재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따라 눈앞에서 떨어지는 사과처럼 입증되는 수학공식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각자의 내면적 확신에 따라 있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고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서 기자는 이와 같이 단언한다,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리라. (전도서 115)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 1213-14)

 



[i]베른하르트벨테, 종교철학, 177.

[ii] Ibid, 182-82.

[iii] Ibid, 185-86.

[iv] Ibid, 187-88.

[v] Ibid, 190.

[vi] Ibid, 191.

[vii] Paul Knitter, Without Buddha I could not be a  Christian (Oxford: Oneworld Publications, 2009), 30.

[viii]윤회의본질, 34-35.

[ix]벨테, 192-93.  

[x]니니안스마트, 종교와세계관, 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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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16 [05:55]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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