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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8.16 [06:04]
아비아달, 잘못된 '줄서기'로 실패한 자
김윤희 박사의 구약의 조연들
 
김윤희

세상에서 우리는 흔히 ‘저 사람, 줄을 잘못 서서 잘렸어’라는 말을 듣는다. 물론 건전한 사회 속에서 생겨난 건설적 인 발언의 내용은 아니다. 자신의 직장이나 일터에서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지 무슨 ‘줄서기’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현상은 어디에서나 피할 수 없이 미묘하게 존재한다. 특히 정권이 바뀌는 정치판이나 회사의 구조조정 속에서 또한 리더십이 바뀌는 곳에서 이러한 줄서기의 논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존재하기 마련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이 속되게 표현하여 바로 그러한 줄서기를 잘못함으로 잘린(?) 경우이다. 이 인물은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 또한 그의 사건을 통하여 과연 줄서기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자.

▲ 담양 죽녹원 대나무숲     ©뉴스파워

배경이 되는 사건(사무엘상 22:6˜19)


사울 왕이 다윗을 만난 순간부터 두 사람의 불행이 시작된다. 다윗을 향한 사울의 시기심과 질투심은 마치 몸속에 들어간 치명적 바이러스처럼 서서히 사울의 영혼과 마음을 좀먹기 시작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몸에 퍼져가는 속도가 가속화되어 사울이 엔돌에 사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갈 즈음에는(삼상 28장) 이미 치료 불가능한 말기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사울의 추격이 격화될수록 사울 주위에 살기(殺氣)가 돌면서 그의 주변에 있는 충성된 사람들이 점점 그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또한 그러면 그럴수록 다윗에 대한 사울의 집착은 더욱 병적으로 보였다.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이해해 보자.

사무엘상 22장 6절은 ‘사울이 다윗의 나타났다 함을 들었다’로 시작한다. 사울의 촉각과 관심은 온통 다윗에게만 쏠려 있는 듯하다.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단창을 들고 있고 그의 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브아는 사울의 고향이며 왕정이 시작된 이래 최초의 수도로서 사울의 본거지다(삼상 10:26). ‘단창’이라는 단어가 눈에 뛴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몇 번 위력을 발휘했던 것도 단창이었다(삼상 18:11; 19:1). 그러기에 사울 왕이 그것을 들고 있을 때는 상당히 위협적이다.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사이코 왕이 들고 있는 단창 앞에 그의 신하들이 서 있다.


“베냐민 사람들아”(7절)라는 말 속에서 이스라엘에서 사울 왕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위에 남은 신하들은 자신의 지파인 베냐민 사람들뿐 이었다. 저자는 이것을 통하여 사울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사울에게서 떠났음을 은근히 보여 주고 있다.


사울의 스피치는 더욱 인상적이다. 사울은 “이새의 아들(다윗)이 너희에게 각기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고 질문한다. 다시 말하면 이제까지 그들을 보호하고 먹여 살린 것은 사울 왕 자신이며 그들도 그동안 그 밑에서 기득권의 특권을 누리고 살아왔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사울 왕이 어떠한 방법으로 그들의 충성심을 유지시켜 왔는지도 보여 준다. 재물과 권력 이라는 자석의 힘이다. 이것은 또한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다윗에게로 모였다’(삼상 22:2)는 구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울의 위협적인 스피치는 계속된다(8절). 우리는 여기서 사울이 느끼고 있는 정신적인 상태를 엿볼 수 있다. 사울은 다윗에 대한 오해뿐 아니라 다윗과 맹약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자신의 아들 요나단도 자신을 배반했고 또한 모반할 것이라는 가상적인 두려움과 배신감속에서 살고 있음을 보여 준다. ‘너희가 다,’ ‘하나도 없고’(2번 사용)라는 극단적이고 과장이 심한 언어 표현 속에서 사울의 불안한 심기를 엿볼 수 있다. 사울에게는 모두가 다 자신을 대적하고 있고, 모두가 다 적인 것이다. 사울은 가장 가까이 있고 자신에게 실제로 충성하고 있는 신하들조차 신뢰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런 왕의 발언에 신하들이 무엇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모두 당황하여 침묵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라는 자가 침묵을 깨고 ‘고발’을 함으로 충성심을 과시한다. 사울의 비위를 맞추어 자신의 입지를 부상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왜 하필 에돔 사람인가? 이것을 통해 저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황에서 사울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울의 기분을 맞추고 이해해 주는 자는 이스라엘과 관계가 없는 이방인 에돔 사람뿐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도엑의 고발은 “이새의 아들 다윗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었는데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식물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 이다.”라는 내용이다.


이것은 사무엘상 21장 1∼9절의 사건에 근거한 것이다. 그 사건이 있었을 때에 도엑도 현장에 있었다(21:7). 여기서 ‘놉’은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한 제사장들이 거주했던 작은 성읍이다. 21장 1∼9절의 기록에 따르면 다윗이 제사장인 아히멜렉에게 식물과 칼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제사장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물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다. 어찌 되었건 다윗의 모반에 가담한 자들이 고발되었다. 도엑은 바로 사울이 듣고 싶어했던 답을 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사울은 사람을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그 아비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른다.’ 사울의 의구심은 놉의 제사장들 전체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사울은 아히멜렉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로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뇨.” 라고 힐문한다. 사울은 도엑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며 그의 말에 100퍼센트 신뢰도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반역행위와 다름없는 것으로 정죄한다.


사울은 계속적으로 다윗을 ‘이새의 아들’(7, 13절)이라고 부르며 그의 이름 부르기를 회피한다. 그의 심리 상태를 잘 보여 주는 부분 이다. 도엑도 눈치 빠르게 사울의 패턴을 따른다(‘이새의 아들,’ 9절). 그리고 사울은 ‘공모’라는 단어 속에 자신의 베냐민 신하들을 집어넣더니(“너희가 다 공모하여” 8절) 이제는 제사장들도 포함시키고 있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두 집단들조차도 그에게는 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사울은 이런 식으로 서서히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영어에 ‘guilt by association’이란 표현이 있는데 ‘이새의 아들’과 스쳐 지나기만 해도 그것은 모반이요, 반역으로 해석되었다.


이러한 사울의 참소에 대하여 아히멜렉은 자신의 무죄함을 변론한다. 먼저 그는 다윗의 무죄함부터 지적한다. 다윗에 대해 네 가지 점을 들어 그를 변호한다. 다윗은 충실한 신하요, 사울의 사위요, 왕의 모신(왕을 보호하는 자)이요, 왕실에서 존귀한 자임을 지적한다. 아히멜렉은 도엑과 달리 눈치 없이 이제까지 사울이 피해왔던 ‘다윗 이란 이름을 거침없이 말한다. 다윗이 모반자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자가 어떻게 왕에게 대적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또한 자신은 제사장으로서 다윗을 위해 전에도 하나님께 물은 적이 있고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 그때는 아무 말 없다가 왜 이번 것은 문제 삼는지를 지적한다. 그러므로 다윗을 보나 자신을 보나 아무 잘못이 없으며 모반 일에 아무런 관여가 없고 결백함을 주장한다.


아히멜렉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도화선을 당기고 말았다. ‘다윗’의 이름을 언급했을 뿐 아니라 그를 옹호한 자체가 이 광기 어린 왕에게는 모반이요 반역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사울의 판결은 망설임 없이 단호하고 조금도 의심 없이 확신에 차 있다: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16절). 죄목은 그야말로 ‘괘씸죄’이다.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고 명령한다. 드디어 사울의 입에서 ‘다윗’이라는 단어가 거침없이 분노 속에서 쏟아져 나온다. 그 문제의 ‘다윗’과 연결된 자는 하나도 남김없이 다 처형하라는 명령이다.


그러나 사울의 주관적인 판결에 선뜻 동조하는 신하가 없다. 다윗도 죄가 없지만 제사장들은 더욱 무죄하다. 더군다나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장들이다.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17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신하들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사울이 일찍이 말한 대로 왕에게 대적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렇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사울 스스로가 그 주위의 사람들 모두를 몰아가고 있다. 왕의 명령이 수행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교활한 사울은 이런 상황에서 누가 자신의 말을 들어 줄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사울은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고 명한다. 아이러니의 극치다. 이스라엘왕의 명령에 순종하는 이스라엘 신하는 없고 이방인 에돔 사람 도엑만이 왕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사울은 이제 누구를 위한 왕인가? 실로 눈 뜨고 보지 못할 참상이 전개된다.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 오인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18∼19절)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 가나안 백성들을 멸절하라고 쓰였던 표현들이다. 이는 이스라엘 왕이 이방인을 시켜 자기 백성에게 자행하라고 한 명령이 아니다. 역사적 비극이요, 미친 왕이요, 자기 열등감에 사로잡힌 한 인간의 치졸한 복수극이다.

구사일생(사무엘상 22:20˜23)


 위의 상황과 배경 속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아비아달이다. 본문은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이름은 아비아달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보고 구사일생이라 한다. 제사장 아비아달은 간신히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간다. 가서 사건의 전모를 다윗에게 고한다. 다윗은 “그날에 에듬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내가 알았노라”고 당시 사건을 회상하며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라고 자신을 자책한다. 모든 잘못을 주위 사람에게 돌리는 사울과 또 다른 대조를 이른다. 다윗은 “두려워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라고 아비아달을 위로한다.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위험한 존재가 되어 가고 있고 ‘도망저’다윗은 피난처가 되어 가는 기이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아비아달의 사역의 역할


 이렇게 하여 제사장 아비아달은 다윗과 동행한다. 다윗은 쫓기는 신세이면서도 선지자 갓(삼상 22:5)과 제사장 아비아달의 인도함을 받는 ‘거룩한 도망자’(?)가 된다. 아비아달은 사무엘상하에 걸쳐서 여기저기 이름이 언급된다. 그의 역할은 다윗을 섬기고 듭는 것이었다. 요약적으로 그의 사역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비아달은 다윗에게 도망을 올 때 에봇을 가지고 왔었다. 에봇은 제사장의 의복으로 가슴과 등을 덮는 조끼 모양의 상의인데 그가 급히 피신하면서도 제사장의 역할을 함에 있어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할 때 필수적인 에봇을 챙겼다는 것은 직분에 대한 그의 대단한 책임감을 나타낸다. 에봇에는 흉패가 달려 있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는 우림과 둠밈이 들어 있었다(참고 : 출 28:4, 6, 28∼30). 그러기에 이 에봇은 다윗의 위험한 여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삼상 23:6, 9; 30:7). 그럴 때마다 아비아달의 도움이 있었다.

 
둘째, 아비아달이 다시 등장하는 곳은 다윗이 또 다른 피신을 할 때였다. 다윗이 이번에는 자신의 아들 압살롬의 반란에 의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는데 제사장 사독과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고 다윗을 쫓기 위해 온다. 아비아달도 함께 왔다. 그때에 다윗은 계획을 바꾸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시켜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시 예루살렘에 가져가게 한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압살롬의 동정을 살피고 정보를 얻어 그들의 아들들(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연락을 취하는 계획을 짠다(삼하 15:24, 27, 29, 35; 17:15∼23). 이 계획의 성공으로 다윗은 위기를 모면한다. 물론 이 계획 속에 포함된 인물들은 더 있지만 결국 이때에도 아비아달의 공로가 있었다. 또한 다윗이 압살롬이 죽은 후에 예루살렘으로 다시 귀환할 때에도 당시 제사장들이었던 아비아달과 사독에게 연락을 취한다(삼하 19:11). 이렇듯 다윗의 삶의 위기의 순간과 고비에 왕과 함께 동고동락한 자 중의 한 사람으로 아비아달이 나온다.


셋째, 아비아달은 사독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제사와 예배를 주관하는 자로서 다윗의 공식적인 내각의 명단에 나온다(삼하 20:25). 이것을 통하여 다윗이 왕이 되어 왕국을 견고히 하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합해 나가는 데에 아비아달도 제사장으로서 일조했음이 잘 나타난다. 그의 구사일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아비아달의 줄서기(왕상 1:7, 19, 25)

아비아달이 또 다시 등장하는 곳은 열왕기상 1˜2장이다. 열왕기상 1장의 시작은 다윗의 나이가 많아 그가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모습을 그리며 이제 왕위의 계승 시기가 다가왔음을 알리고 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죽고 난 이후 그 다음 순서인 아도니야가 다윗의 노쇠함을 보고 참지 못하고 왕위를 노린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고 하는 구절로 보아 그가 지혜롭지 못한 교만한 인물임을 감지할 수 있다. 그의 말 속에 강조되어 있는 단어는 ‘나’라는 단어이다. 그러기에 본문은 동사(“왕이 되리라”)인 반란 자체에 강조점을 두고 있기보다는 아도니야의 자기중심적인 의식구조를 반영하는 데에 더 주력하고 있다. 그의 말 속에는 자격 있는 자신이 왕위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지사라는 논리가 숨어 있고 이제 그것을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것이다.

아도니야가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인을 예비한 것’과 그의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는 부분은 여러모로 압살롬을 상기시킨다(비교 : 삼하 15:1; 14:25∼23). 또한 다윗이 그에게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 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는 구절은 압살롬에게 살해를 당한 다윗의 아들 암논을 상기시킨다(삼상 13:21). 이러한 비교들을 통하여 이미 아도니야의 왕권에 대한 도전은 또 다른 다윗 집안의 비극이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자기교만을 가지고 아버지의 엄격한 훈계와 징계를 받고 자라지 못한 버릇없는 아도니야는 생각만큼 시시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스스로 일을 도모하지 않고 유력한 인물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여 왕위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 반열에 낀 자가 바로 아비아달이다. 1장 7절에 보면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저희가 좇아 도우나”라고 기록되어 있다(비교: 1:19, 25; 2:22). 다윗 시대부더 충복이었던 군대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이 핵심이 되어 아도니야와 코드를 맞추고 있었다. 그 반대 진영도 만만치 않다. 솔로몬을 축으로 하여 다윗의 3인 중의 하나에 속하는 용맹한 브나야와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양 진영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또한 이 양 진영 사이에는 정치색 못지않은 이데올로기의 대립도 존재한 것 같다. 아도니야 진영에 속한 자들은 주로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기 이전에 등장 했던 자들이다. 아도니야 자신도 헤브론에서 태어났다(삼하 3:2˜5). 그러나 솔로몬 진영에 속한 자들은 솔로몬을 포함하여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부터 등장한 인물들이다(삼하 5:14; 8:17∼ 18; 20:23). 오랫동안 다윗을 보좌해 온 공신들이 헤브론 파를 중심으로 뭉쳤고 신진 세력들은 예루살렘 파를 중심으로 뭉쳤. 여기에서 다윗  대에 두 제사장이였던 아비아달과 사독 서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면이 흥미롭다(왕상 4:4; 대상 15:11).

아비아달은 이 사건이 있기 전에는 다윗을 보좌하며 그에게 충성스럽고 자신의 소임을 성실히 하는 제사장이었다. 그러나 다윗의 먁판에 아비아달은 다윗의 뜻을 알지 못하였고 더군다나 제사장으로서 여호와의 뜻도 알지 못하는 영적 분별력이 둔한 제사장으로 나오고 있다. 그는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계산으로 아도니야가 다윗의 뒤를 이을 합법적인, 순서상의 계승자에 승산을 두고 ‘아사모(?)’ (아도니야를 사랑하는 모임)의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것이다. 아도니야가 어떠한 인품의 인물인지도 분별 못하는 무분별한 제사장으로 전락한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다는(비교 : 왕상 1:17) 당시의 실세와 흐름에 따라 줄서기를 잘못한 제사장이 되어 버린다.

잘못된 선택의 결과(왕상 2:26˜27, 35)


왕위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솔로몬에게 주어진다. 당연히 정치적으로 패배한 반역 팀에 대한 숙청작업이 하나하나 진행된다. 솔로몬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는 죽음 대신에(“마땅히 죽을 자로되”) 귀향을 명한다. 그 이유는 그가 다윗 앞에서 궤를 멘 제사장이며 또한 다윗의 환난에 끝까지 동참했던 자였기 때문임을 밝힌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그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본문에 보면 두 가지의 중요한 결론이 나와 있다. 한 가지는 아비아달은 끝에 가서 줄을 잘못 서서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박탈당하는 자로 나온다. 두 번째는 이러한 아비아달의 삶에 일어난 결말이 궁극적으로 여호와의 말씀의 성취라는 점이다. 본문은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비아달 개인의 결정이 이미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하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이 아마 성경의 독자들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 것이다. 개인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섭리와의 만남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 이해의 한계를 보여 주는 ‘초월성’의 영역이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저자는 이것을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 집안에 한 예언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다는 말인가? 이 예언은 사무엘상 2장 30절에서 36절을 가리킨다. 대제사장이었던 아론에게 네 아들이 있었는데 나답과 아비후는 일찍이 죽고(참고: 레 10:1˜2), 엘르아살과 이다말 두 아들이 있었다. 사독은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의 후손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삼상 6:3∼6; 24:6). 그리고 아비아달은 이다말의 후손인 엘리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삼상 14:3; 22:9; 30:η . 결국 아비아달의 실추로 엘리의 후손인 아비아달이 제사장직을 물러남으로 사무엘상 2장에서의 엘리 제사장 집안에 대한 여호와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본문은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예언의 성취로 제사장 사독이 아비아달을 대신하여 대제사장의 역할을 맡게 된다(35절). 이것이 잘못된 선택을 한 아비아달의 운명 이었으며 또한 엘리 가문의 운명이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첫째, ‘줄서기’의 원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자. 아비아달의 실추는 결국 하나님의 뜻을 떠난 ‘줄서기’를 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누군가의 뜻을 따라야 하고 지지를 보내야 한다면 원리는 뚜렷하다. 누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가, 누가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냐, 또는 믿지 않는 자일지라도 누가 정의와 진리의 편에 서 있는가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 누구에게 지지를 보내야 나의 출세에 이익이 되겠는가, 힘의 흐름이 어디에 있는가, 실속 있는 처사인가, 유익을 주는가, 승자인가 하는 것은 세상사람 모두가 계산하는 방법이다. 그러한 기준을 따른다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구별은 의미가 없다. 그러나 아비아달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우리 모두는 영원히 타협될 수 없는 기준에 근거하여 삶의 향방을 정해야만 진정한 의미에서 승리할 수 있다.

둘째, 사울의 경우를 보며 생각해 보자. 사울은 세상적인 줄서기의 원리에서 보면 그 자신이 맨 꼭대기에 있는 경우이다. 그는 왕의 위치에 있는 자이다. 그러나 그는 다윗이 자신을 치고 올라와 권좌를 빼앗을까봐 두려움과 초조함에 떨고 있었다. 사울이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었다. 그것을 위해 그는 하나님 앞에 회개, 자복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그가 다윗을 죽이려 할수록 결국 사울은 다윗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뜻과 싸우고 있었다. 결과는 너무나 뻔한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가장 잘못된 줄서기는 ‘하나님의 뜻’에 대적하는 것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든, 어떠한 프로젝트에 대한 것이든, 일에 대한 것이든, 사역에 대한 것이든 간에 관계없이 잘못된 동기와 방법으로 상대를 대적할 때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뜻’ 에 반(反)하여 싸울 수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문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잘 살피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순위로 살피고 ‘하나님의 뜻’에 제일 먼저 기준을 두도록 기도해야 한다.

셋째, 에돔 사람 도엑의 경우를 보며 생각해 보자. 세 번째 줄서 기의 원칙은 절대로 남에게 피해가 가는 줄서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도엑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기에 그에게 기대치를 높게 잡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종류의 사람을 보며 평가해 볼 여지는 있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남을 해코지하는 부류 이다. 그가 전한 정보에는 어느 정도의 ‘사실’(fact)들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제사장이 다윗을 돕게 된 배경은 삭제함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결백한 제사장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그는 그것을 기회로 사울의 신임을 얻고자 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X파 일’로 벌집 쑤셔 놓은 듯한 분위기다. 슬픈 현실이지만 세상은 도엑 같은 인물로 넘쳐나고 있다. 그러면 기독교 사회는 어떠한가? 우리 각자는 어떠한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이든지 진실만을 말하고 사는가? 약간의 왜곡된 전달, 반쪽만의 사실보고, 정황을 뺀 정보 전달로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속한 여러 부류의 사회 속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는 않은가? 그것은 도엑과 같이 되는 지름길이다. 안타깝게도 도엑은 사울이 본인보다도 훨씬 더 병들어 있는 인물임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아비아달은 줄을 서 있었다.

 

▲ 김윤희 박사·FWIA 대표     ©정희수


김윤희·철학 박사(Ph.D),  FWIA 대표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턴신학교 석사, 미국 트리니티신학교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한국에서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는 한국FWIA(Faith&Work Institute Asia) 대표로 ‘일의 신학’을 위해 활발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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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14 [12:25]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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