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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12.16 [01:03]
왜 아라한의 자살은 허용될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20]
 
정성민

1. 죽음은 진정한 열반의 시작점이다.

석가는 죽은 후에는 이상 정신적인 괴로움이나 고통은없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후에 있다고 믿는 천국이나 극락도 없다는 것이다. 그냥 육체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석가는 죽은 이후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세계가 있다. 거기에는 땅도 없고 물도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고, 공간이 무한한 경지도 없고, 의식이 무한한 경지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경지도 없고, 지각하지도 않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경지도 없고, 세상도 세상도 없고, 해도 달도 없다. 나는 바로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멈추는 것도 없고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기반도 없고 유전도 없고 대상도 없는 이것이야 말로 나는 괴로움의 종식이라 부른다.[1]

 

결과적으로 죽음 자체가 고통의 끝이요, 진정한 열반의 시작점이다. 다시 말해서 사후에는 번뇌의 원인이 되었던 탐욕이나 갈애가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사후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필요했던 평정심이나 행복감이 이상 필요치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석가의 수제자인 싸리뿟따와 그의 친구 우다이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난다,

 

[싸리뿟따]  벗이여, 열반은 즐거움이다. 열반은 즐거움이다.라고 말했다.

            때에 우다이가 물었다.

[우다이]  그러나 벗이여, 싸리뿟따여, 감수(감정이나 느낌)가 없다면 즐거움이 있을 있는가?

          (이에) 싸리뿟따는 대답했다.

[싸리뿟따]  감수 자체가 없는 것이 즐거움이다.[2]

 

결과적으로 열반은 생전에 미리 경험하는 열반과 사후에 경험하는 열반으로 나눠질 있다. 생전에 경험하는 열반을 유여의 열반이라고하고, 사후에 경험하는 열반을 무여의 열반이라고 부른다. 사후열반은 생전에 미리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들이 죽으면 누리게 되는 자유와 절대평안을 말한다. <불교사상의 이해>이러한 생전열반과 사후열반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열반은 현재의 생에서 성취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열반이 아니다. 열반에 도달한 사람은 괴로움의 원인인 욕망을 다스릴 있으므로 욕망때문에 발생되는 괴로움, 정신적인 괴로움에서는 벗어나지만 아직 육체가 남아있기 때문에 병이나 부상을 입었을 받게 되는 육체적인 괴로움은 피할 없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에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이 남아있는 열반유여의 열반이라한다. 여기에서 생존의 근원이란 육체를 말하는 것이다. 유여의 열반을 이룬 사람(아라한)죽으면 다시 육체를 받아 태어나지 않게 된다. 이것을 생존의 근원이 남아있지 않은 열반무여의 열반이라고 한다. 무여의 열반은 완전한 열반으로서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가 모두 소멸된 열반이다.[3]  

 

2. 생전 열반은 아직 완전하지 않은 미완성의 열반이다.

 

생전에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은 자신의 욕망과 집착을 극복하므로 정신적인 괴로움에서는 해방이 되었지만 아직은 육체가운데 살아간다. 결과적으로 육체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고통들은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석가는 아라한과 같은 생전열반을 성취한 자들의 자살을 용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생전열반을 성취한 아라한들은 이상 의도적인 악한 행위, 업을 쌓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윤호진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유여의열반(생전열반)성취한 사람은 이상 업을 짓지 않는다. 이전과 동일한 행동을 해도 욕망과 집착을 떠났기 때문에 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와같이 유여의열반을 성취한 이후에 짓는 업은 무기업으로 과보가 형성되지 않는다. <숫따니빠따>설명에 의하면, 묵은 업은 이미 다했고 새로운 업은 이제 생기지 않는다.아라한(성자)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사랑하는 것도 없고 미워하는 것도 없다슬픔도 인색함도 그를 더럽히지 않는다. 마치 연잎에 물이 묻지 않는 것처럼...... 유여의열반을 성취한 수행자, 아라한은 육체적 괴로움을 제외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 삶을 다음 죽으면 육체를 다시 가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음 생의 육체를 만들 업력이 완전히 고갈되었기 때문이다.[4]

 

생전에 이미 열반을 성취한 아라한들은 사후열반에 이르기까지 해야 일이 아무것도 없다. 비록 정신적인 고통은 없지만 생노병사의 육체적인 고통은 이겨내야 한다. 그러기에 생전열반을 성취한 아라한들이 사후열반에 도달할 방법은 단지 가지의 선택, 자연사와 자살밖에 없다. 윤호진 스님은 설명한다,

 

유여의열반(생전열반)육체때문에 생기는 괴로움이 남아있기 때문에 완전한 열반이 아니다. 육체가 남아있는 육체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괴로움은 모두 받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배고픔, 수면, 육체적인 부상, 등으로 생기는 괴로움이다. 이와 같은 괴로움은 무아, 무상설과 8정도 등의 실천으로 소멸시킬 없다. 음식, 의약 또는 치료로써 일시적으로 다스릴 있지만 완전한 해결은 결국 병과 늙음으로 육체가 소멸되어야만 한다. 붓다 역시 생전에 부상을 당하고 병에 걸려 고통을 겪었다. 그때마다 지와까라는 유명한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다...... 이것은 병으로 생긴 육체적 괴로움의 소멸은 의약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유여의열반(생전열반)성취한 사람에게 정신적인 괴로움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욕망과 집착을 근원적으로 극복함으로서 괴로움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버렸기 때문이다.....

유여의열반(생전열반) 상태에서 무여의열반(사후열반)도달하기 위해서 수행적인면에서 해야일은 아무 것도 없다. 배고픔과 때문에 생기는 괴로움은 음식을 먹고 잠을 자는 외에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소멸시킬 없다. 병들거나 부상을 당했을받는 괴로움도 약을 사용하거나 치료를 받아야 사라진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가지 괴로움인 , , , 사도 모두 육체와 관계된 것이다. 육체에서 생기는 괴로움은 육체가 존재하는 결코 피할없다. 결국 육체적인 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육체를 없애야 하는데 그것은 자연사와 자살로써 가능할 뿐이다.[5]

 

3. 석가가 아라한들의 자살을 허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열반을 성취한 수 많은 석가의 제자들이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는 가히 충격적인 사실이다. 왜냐하면 자살은 현실도피로 간주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시각에서 본다면, 자살은 살인행위에 해당된다. 하지만 초기불교의 시각에서 생전열반을 성취한 아라한들이 사후열반을 무작정 기다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라한들이 자연사할 때까지 육체적인 고통을 감내하며 기다린다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윤호진 스님은 석가의 제자들의 자살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밝힌다,

 

사실 초기경전에는 붓다의 제자들이 육체를 제거하기 위해 자살했다는 내용이 적지않게 나온다. 게다가 나는 죽음의 때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라고 샤리뿌뜨라조차도 자신의 육체를 고의로 제거했다. 자살했다. 붓다의 가장 제자들인 마우드걀야야나, 까사빠, 아난다도 모두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스스로 자신들의 육체를 제거했다.

<증일아함>의하면 샤리뿌뜨라는 있게 붓다의 반열반(죽음) 소식을 천상의 신들로부터 전해듣고 붓다에게 가서 저는 지금 세존께서 열반에 드시는 것을 차마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자신이 붓다보다 먼저 열반에 드신 것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는 붓다의 허락을 받고 고향인 날란다에 가서 반열반에 들었다. 마우드갈야야나 역시 붓다의 임박한 열반과 샤리뿌뜨라의 죽음 소식을 듣고 자신도 붓다의 허락을 받아 반열반(죽음)들었다. <근본유부비나야잡사>샤리뿌뜨라와 마우드갈야야나의 반열반(죽음)대한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곳에서는 장로의 반열반과 더불어 그들 제자 아라한들 8명과 7 7명이 동시에 반열반에 들었다는 내용도 전하고 있다.[6]

 

석가의 제자들, 아라한들의 자살에 관한 이러한 충격적인 사실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것인가? 이에대해 윤호진 스님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이와같은 경전의 내용이 반드시 역사적인 사실이라고는 없겠지만 초기불교에서는 유여의열반(생전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이 무여의열반(생후열반)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육체를 제거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은 아니었다는 것을 있게 해준다. 사실 논리상으로 유여의열반을 성취한 아라한이 무여의열반을 위해서 무익하기만 육체적인 괴로움을 감수하면서 자연사할 때까지 기다려야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아라한들의 자살을 권장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7]

 

4. 과연 아라한들의 자살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아라한들의 자살은 정당화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당신이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라면 당연히 자살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1) 신이 없다

2) 사후심판도 없다

3) 이 세상은 너무나 고통스럽다

4)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할 의미가 사라진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4가지 상황 속에서 자살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 되는 것이다. 물론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무신론자들에게 말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사후세계를 인정하는 유신론자라면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

자살은 어리석고 비겁한 선택이 되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한다.

1)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2) 사후 심판은 실제이다

3) 당신의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4) 당신은 하나님의 소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5) 이런 면에서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어떠한 고통도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다. 이 세상에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당신이 그 목적이나 소명을 포기하고 무책임한 선택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살을 선택한 당신을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 목숨의 주인은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아라한의 자살은 살인에 해당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자살은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저버리는 것이기에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요 불순종인 것이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 지요 (시편 139:13-17)

 

예수는 우리를 심판하실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1]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79쪽에서간접인용

[2]Ibid, 88에서간접인용.

[3]불교사상의이해, 93.

[4]무아, 윤회문제의연구, 179-80.

[5]Ibid, 181-82.

[6]Ibid, 184-85.

[7]Ibid, 1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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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7/14 [00:22]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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