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버전으로 보기 ▶
교계뉴스문화/교육국제/NGO/언론생활/건강파워인터뷰오피니언연재정치/경제/사회한 줄 뉴스
전체기사보기
편집  2018.08.17 [10:04]
누구나 아라한이 될 수 있다?!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19]
 
정성민

1. 과연 아라한은 누구일까?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서 모든 정신적인 고통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자를 바로 아라한이라 부른다. 아라한은 살아있는 사람중에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말한다. 결국 깨달음을 얻은 , 부처를 말한다. 하지만 불제자들이 부처인 석가와 구별을 짓기위해서 수행승들중에 깨달음을 얻은 자를 아라한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의 제자들이 최고의 경지(열반)도달하면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잡아함경> 26 645경에 보면 아라한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어느 부처님께서 사밧티성 제타숲 아나타핀디카동산에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섯가지의 기능(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여실히 관하는 사람은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이 육계를 떠나 해탈을 얻는다. 이것을 아라한이라 한다. 그는 모든 번뇌를 다하고, 일을 마쳤으며, 모든 무거운 짐을 내려놓아 스스로 편안함을 얻었고, 모든 존재의 결박을 끊고 바른 지혜로써 마음이 해탈하였다.

 

<법구경>에서도 아라한에 대한 묘사는 동일하다,

 

아라한은 비우고 한가함을 즐기는데 대중은 이런 것에 능하지 못하다네.

통쾌하도다! 어떠한 소망도 없이 아라한욕망이나 구하는 바가 없도다. (099)

 

결과적으로 누구나 죽기 전에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석가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면 누구나 아라한이 있다는 말이다. 이는 우리가 수행을 하고 삼매의 경지와 같은 어떠한 신비한 체험을 후에 겨우 도달할 있는 힌두교적 해탈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힌두교적 해탈은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길이다. 이에 반해 석가의 해탈은 생각보다 쉽고 단순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윤호진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기서 아라한은 번뇌를 끊고 열반을 성취한 사람이다. 초전법륜때와 직후에 많은 사람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자리에서 아라한이 되었다. 초기경전에 의하면 열반은 소수의 사람만이 도달할 있는 지극히 어려운 어떤 경지가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한 많은 제자들이 성취할 있었던 수행의 결과였다.[1]

2

2. 불교가 말하는 열반의 체험은 무엇일까?

 

석가는 모든 세상적인 근심과 불안, 번뇌의 고통으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워질 있다고 확언한다. 지금 내가 평안하고, 기쁘고, 행복한 마음을 세상에서 누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아라한이 된다면 괴롭고 슬픈 세상 속에서도 기쁘고 행복하게 있다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자란 송아지도 없고, 젖먹이 송아지도 없고, 새끼 어미소도 성년이 암소도 없고, 암소의 짝인 황소 또한 없으니, 하늘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뿌리소서. (Stn. 27)

 

세상에서 자기의 것이 없고, 자기 것이 없다고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모든 현상에 이끌리지 않으니 그야말로 고요한 님이라 불립니다. (Stn. 861)

 

이러한 현재적인 극락체험을 니르바나라고 부른다. 어원상으로 불길이 꺼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니르바나, 극락은 세상에서 열반을 성취한 자들이 즐기는 마음의 평안을 가리킨다. 석가는 땅의 삶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우리가 마음의 평안을 누릴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석가가 말하는 열반, 극락체험은 전혀 신비하지도 초월적이지도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석가가 말하는 열반은 지극히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체험이기 때문이다. 결국 열반은 석가가 가르치는 사성제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에 얻게 되는 마음의 평정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지각과 더불어 의식이 있는 육척단신의 몸 속에서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나는 시설한다.[2]

 

결국에 번뇌와 고통의 발생과 소멸은 우리의 신체인 안에서 발생되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번뇌와 고통이 발생하는 것과 소멸하는것은 외부적인 힘이나 요인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지를 벗어나 절대적인 진리를 깨닫는 것은 우리의 정신과 신체, 우리의 육척단신의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말은 가지 거룩한 진리가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인 우리 자신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것은 또한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을 낳는 외부적인 힘은 없다는 것을 뜻한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따라서 지혜가 계발되고 배양되면 지혜는 있는 그대로의 삶의 비의와 사물의 실제를 보게된다. 비의가 벗겨지고 진리가 보이게 되면 환상 속에서 열병처럼 윤회를 연출하던 모든 힘은 사라지고 이상 업은 형성되지 못한다. 이상 환상이나 윤회에 대한 갈망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질병의 원인을 발견해서 환자에게 보일 때에 치유되는 정신질환과 같다.[3]

 

3. 석가가 말하는 열반의 체험은 자연 과학적인 진리를 깨달은 결과이다.

 

석가가 말하는 열반체험은 전혀 신비하거나 초월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을 통해서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고통(생노병사)우리가 피할 없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가 말하는 열반은 너무나 이해하기 쉬운 자연과학적인 깨달음이다. 단지 신비하고 초월적인 지식이나 체험을 포기해야만 하는 고통이 따를 뿐이다. 이에 대해 한국의 학승, 윤호진 스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아함경>여러 곳에서 있는 설명은 열반이 언어로 설명할 없는 경지도 아니고 신비적인 것도 아니다. 보통의 언어와 이해력으로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있다. <잡아함> <무사라경>의하면 비록 열반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열반에 대해 수는 있다.[4]

 

<맛지마니까야>경전에서는 석가가 자신의 제자 뿟꾸싸티에게 열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은 여섯 가지 요소, , , , 바람, 공간과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들을 분석해보면 , , 자아라는 것은 발견할 없다. 사람은 어떻게 의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어떻게 기쁘고 불쾌하고, 기쁘지도 불쾌하지도 않는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지 있다. 이러한 느낌을 알아채더라도 그의 마음이 초연하게 되면, 그는 자기의 내부에서 평정심을 발견한다. 그러면 그는 어떤 최고의 정신적인 상태의 성취로 향할 있어, 순수한 평정심을 오랫동안 지속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5]

 

거듭 말하지만 석가가 말하는 이러한 열반의 체험은 사후세계의 체험이 절대로 아니다. 그러기에 누군가가 죽었을 때에 열반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옳지 않은 것이다왜냐하면 우리가 죽은 후에는 우리가 지닌 모든 번뇌와 고통에서 자연스럽게 그리고 저절로 해방되기 때문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죽음이 바로 열반이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석가가 사후세계를 전혀 믿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4. 죽으면 모두 해탈의 경지에 이른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석가가 말하는 열반은 사후에 우리가 거하게 장소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죽음과 동시에 우리가 그렇게 열망하던 열반이나 해탈, 근심과 고통으로부터의 절대적인 자유는 자동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석가에게 있어서 사후세계는 전혀 걱정거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사람들은 붓다가 죽은 후에는 열반이나 완전한 열반에 든다.라는 부적합한 표현을 하는데, 이것이 열반에 관한 많은 상상적인 관념을 불러 일으키게 했다. 붓다가 열반에 들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에 사람들은 열반이 어떤 존재가 있는 상태나 영역, 또는 장소로 여기게 되거나 열반을 이미 알려져 있는 존재라는 단어와 연관시켜 생각하게 된다. 열반에 들었다일반적인 표현은 원전과 일치하지 않는다죽은 후에 열반에 들었다.말은 없다. 빠리니붓따라는 말은 열반을 깨달은 붓다나 아라한의 죽음을 의미할 때에 사용하지만 열반에 들어감의미하지 않는다. 빠리니붓따는 단순히 완전히 소멸함충분히 꺼짐아주 없어짐뜻한다. 왜냐하면 붓다나 아라한은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기 때문이다.[6]

 

이런 면에서 석가의 가르침은 다른 종교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있다. 이유는 거의 모든 종교들이 내세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진리나 최고의 선은 죽은 후에야 비로소 이루어질 있다것이다. 이에 반하여 석가가 가르치는 열반은 이생에서, 지금시간, 바로 여기서내가 경험하고 도달할 있는 최고의 경지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죽음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석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헤마까여, 세상에서 보거나, 듣거나, 감지하거나, 인식한 사랑스런 대상에 대한 욕망과 탐욕을 여의면,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열반의 토대입니다. 이것을 알아, 새김을 확립하여, 현세에서 완전히 소멸하여 항상 적멸에 들면, 그들이 세상에서 집착을 뛰어 넘은 것입니다. (Stn.1086-87)

모든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또 데이야여, 갈애가 없어 온갖 의혹을 뛰어 넘은 님이 있다면, 그에게는 따로 해탈이 없습니다. (Stn.1089)

 

결국 이런 면에서 석가는 모든 번뇌와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최상의 지혜, 최상의 거룩한 진리를 세상에서 깨우칠 것을 제자들에게 권고한다는 사실이다. 석가는 말한다,  

 

세상에서 욕망과 탐욕을 떠난 지혜로운 수행승만이 불사와 적멸, 죽음을 뛰어 넘는 열반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Stn.204)

성자의 삶을 사는 님은 진실을 떠나지 않고, 거룩한 님은 단단한 위에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참으로 고요한 님이라 불립니다. 그는 현명한 자로서 지혜에 통달하고, 가르침을 알아, 집착이 없으니, 세상에서 바르게 행동하고, 세상에서 아무 것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Stn.946-47)

 

5. 기독교는 살아서는 마음의 천국을 누릴 뿐만 아니라 죽어서는 영원한 천국에서 살 것을 믿는다.

 

기독교는 성도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현재적인 천국을 믿는다.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할 수 있는 하늘의 평안과 기쁨을 말이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에 그의 백성들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언제나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

(시편 100:3-5)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들의 하나님의 돌보심과 위로를 날마다 경험하며 산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과 환난 중에도 마음의 평안함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현재적 천국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왕은 이렇게 고백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

 

이러한 현재적 천국에 관한 다윗의 고백은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표현된다. 요한복음 151-11절 말씀이다. 바로 이 땅에 살아가면서 성도와 하나님이 가져야 할 관계를 묘사한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농부와 포도나무 가지의 관계로 묘사한다는 것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 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니라.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을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 15:1-9, 11)

 

예수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렇게 약속한다. 바로 세상에서 누릴 마음의 평안, 즉 현재적 천국을 말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기독교는 현재적 천국과 더불어 사후세계를 실체적으로 믿는다. 구약 성경은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확신 속에서 사후에 벌어질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다는 것이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전도서 12:1-2, 7, 14)

 

또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과 더불어 사후심판의 주관자임을 자처한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태복음 19:28)

 

이러한 예수의 주장을 사도 요한은 다음과 같이 확언한다는 것이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예수 그리스도)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요한계시록 20:11-12)

 

6. 아라한이 될 것인가? 아니면 성도가 될 것인가?

 

아라한은 석가가 가르쳐준 대로 모든 집착과 욕심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에 대한 욕망이나 집착을 버리고서 마음의 평안을 누린다. 그들은 사후세계나 심판을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세상은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죽음과 함께 바로 모든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고통으로부터 해방을 누린다는 믿는다.

 

성도는 예수가 가르쳐준 대로 우리 자신의 그 모든 죄악을 예수의 피로 씻음을 받고서 거룩하게 된 사람들이다. 하루하루의 삶을 예수가 약속한 마음의 평안을 공급받으면서 살아간다. 또한 다가올 사후심판을 위하여 하루하루를 빛과 소금이 되는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 주신 소명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기에 자칫 빠지기 쉬운 무책임하거나 게으른 삶이 정당화될 수 없다. 날마다 부지런하게 주님이 주신 소명을 이루는 목적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한복음 15:5-6)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태복음 5:13)

 

 과연 당신은 석가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아라한이 될 것인가? 아니면 예수를 믿는 성도가 될 것인가?

 

 



[1]무아, 윤회문제의연구, 175-76.

[2]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87쪽에서간접인용함.

[3]Ibid.

[4]무아, 윤회문제의연구, 174.

[5]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80-81.

[6]Ibid, 84-85.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밴드 구글+
기사입력: 2018/07/13 [01:48]  최종편집: ⓒ newspower
 
뉴스
광고
최근 인기기사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개인정보취급방침회사소개후원 및 광고 만드는사람들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서울 종로구 김상옥로 17(연지동 대호빌딩136-5) 본관 107호 TEL 02-391-4945~6| FAX 02-391-4947,
Copyright2003-2018뉴스파워. all right reserved. mail to newspower@newspower.co.kr 등록번호 서울 아 00122 등록일 2005.11.11 발행 및 편집인 김철영. 청소년보호책임자:김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