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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9.19 [18:05]
과연 인간이란 무엇일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15]
 
정성민

석가는 고통을 크게 3가지로 분류한다. 그 첫째가 생로병사의 고통이고, 둘째가 만물이 영원히 지속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변화의 고통이다삶의 행복한 느낌, 행복한 조건 등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다. 이로 인해 고통, 아픔, 이별 등과 같은 불행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 고통은 형성의 고통이다. 이는 세가지 종류의 고통 가운데서 가장 철학적인 것이다. 인간은 다섯가지 존재의 요소들(신체, 감정, 생각, 의지, 인식)로 구성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신이나 영혼 그리고 사후세계와 같은 영원한 것에 대한 집착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고통이다.
석가가 말하는 이러한  3가지 종류의 고통은 다시  8가지 종류의 고통으로 세분화된다.  

  
1.
태어나는 고통

2. 늙는 고통

3. 병드는 고통

4. 죽는 고통  

5.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6.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7.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하는 고통

8. 실제로 실체가 없는 "", 자신, 자아(영혼)라고 하는 대상을 실체가 있다고 믿고 집착함에 따르는 고통

 

여기에서 우리는 석가가 생각하는 인간관을 알게 된다. 바로 오온(五蘊)이라는 개념이다. 오온은  다섯가지 존재의 요소들해석될 있다. 이것들은 물질(), 느낌(), 생각(), 의지(), 인식()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신체, 느낌, 생각, 의지 그리고 인식(판단)이라는 요소들로 구성된 존재라는 것이다.[1] 결과적으로 인간은 다섯 가지 존재의 요소들로 구성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에너지의 조합이라는 것이다.[2] 이는 인간은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과 같은 무형의 실체를 실제로는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석가의 인간관이 바로 열반에 이르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지식이라는 것이다. 석가의 인간관은 자연 과학적인 관찰과 분석에 따른 것이다이는 영적이고 신비주의적 속성을 지닌 다른 종교들의 특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석가의 유물론적이며 무신론적인 인간관은 비관적이고 염세적일 있다.  또한 허무주의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존재의 요소들(신체, 감정, 생각, 의지, 인식)관련된 석가모니의 염세적인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고귀한 님들(부처나 아라한들)은 존재의 다발(신체, 감정, 생각, 의지, 인식)소멸시키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본다. 세상의 사람들이 보는 것과 이것은 완전히 정반대가 된다. 다른 사람들이 즐거움이라 하는 것을, 고귀한 님들은 괴로움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이 괴로움이라 하는 것을 고귀한 님들은 즐거움이라고 안다.

알기 어려운 진리를 보라. 무지한 사람들은 여기서 헤매게 된다. (Stn.761-62)   

 

그러니까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들 신체, 느낌, 생각, 의지, 의식 등을 통제하는 것이다. 아니 아예 소멸시키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없애 버리는 것이 오히려 즐거운 일이라는 것이다. 가히 석가의 인생관이 염세적이고 금욕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없다. 그는 세상을 아주 더럽게 여긴다. 특별히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매우 더럽고 추악하게 여긴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는 수행자들로 하여금 아예 세상을 떠나라고 가르친다. 석가는 말한다,

 

인적없는 곳에서 거처하여라. 그리고 음식의 분량을 아는 사람이 되어라.

의복과 얻은 음식과 필수 의약과 침구와 깔개, 이런 것에 욕심을 부려서는 된다.

다시는 세속에 들어가지 말라.  계율의 항목을 지키고 다섯 감관(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수호하여, 그대의 몸에 대한 새김을 확립하라. 세상을 아주 싫어하여 떠나라. (Stn.338-40)

 

하지만 스리랑카의 학승, 라훌라는 이러한 석가의 가르침을 염세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석가의 가르침이 염세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반박한다,  

 

번째,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일반적으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고성제라고 번역된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불교적으로도 인생은 고통스럽고 괴로운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에 대한 해석과 번역은 모두 참뜻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거나 오도할 우려가 있다.

많은 사람들은 불교를 염세주의로 잘못 이해하는 이유는 이러한 제멋대로 풀이한 안이한 해석과 수박 겉핥기식의 해석때문이다. 불교는 비관주의도 낙관주의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불교는 합리적인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실적인 종교이다.

불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게 한다. 불교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이상향에 살도록 추스르거나 온갖 종류의 상상적인 공포나 죄악감에 놀라거나 괴로워하지 않도록 한다.[3]

 

사실 염세주의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세상은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을 더럽게 생각하여 떠나라고 외치는 석가의 가르침이 염세적인 것은 부정할 없다. 이는 석가 자신의 고백을 통해서도 있다.

 

나는 머리를 깎고 마음을 고요히 하고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더럽혀지지 않고,

가사를 걸치고, 없이 거닙니다.

바라문이여, 그대가 내게 성을 묻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Stn.456)

 

성자의 삶을 사는 님은 어디도 머무르지 않고, 결코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습니다.

연꽃 위의 물이 더럽혀지지 못하듯, 슬픔도 인색함도, 그를 더럽히지 못합니다.
(Stn.811)

 

이러한 석가의 염세적인 성향은 그의 제자 싸리뿟따의 가르침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수행승은 (세상을)싫어하여 떠나서 나무아래, 혹은 묘지나

산골짜기의 동굴 속에 아무도 없는 곳에 자리를 잡습니다. (Stn.958)

 

그러나 여기서 알아야것은 석가의 염세적인 가르침이 단순히 비관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절제하는 금욕적인 삶으로 이어져서 결국에는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수행자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집을 버리고 주처를 여윈 유행을 하며, 마을에서 친교를 갖지 않는

성자의 삶을 사는 님은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떠나 선호를 두지 않으며,...

성자의 삶을 사는 님은 적멸에 관해 말할 , 탐욕을 여의어,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도 세상에도 더럽혀지지 않습니다. (Stn.844-45)

 

그렇다. 석가의 가르침은 과학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세계관이다. 이러한 현실적이고 과학적인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어리석은 이상주의에 속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쓸데없는 죄책감, 즉 존재 하지도 않는 신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실체도 없는 영혼이라는 존재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전혀 존재할 가능성이 없는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나 집착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석가가 말하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인생관이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불교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인생을 둘러싼 세계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정확히 그리고 객관적으로 설명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유와 평화, 청정과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4]

 

그러므로 석가가 바라본 인생의 본질은 괴로움이라는 것이고, 이 괴로움은 일반적인 삶의 고통 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의미의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다. 즉 인생무상, 공허함, 무아, () 등의 철학적인 깨달음을 포함한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로 하여금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삶을 포기하고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석가는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생각을 품은 과학적인 철학자로 볼 수 있다. <숫타니파타>경전에서 방기싸는 석가의 이러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시야를신들 가운데 천 개의 눈을 가진자 그리고인간의 으뜸가는 눈을 소유한 자로 묘사한다,

 

광대한 지혜를 갖춘 님이시여, 저희의 의혹을 끊어주시고, 말씀해주십시오.

그가 완전한 열반에 들었는지를 알려주십시오. 신들 가운데 천 개의 눈을 가진 제석천처럼, 널리 보는 님이여, 저희에게 말씀해주소서.

이 세상에서 어떠한 속박도 미혹의 길도, 무지의 날개도, 의심의 주처도,

여래를 만나면 그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맙니다. 그는 인간의 으뜸가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Stn.346-47)  

 

결과적으로 석가는천 개의 눈그리고으뜸가는 눈을 가진 자라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으뜸가는 눈, 즉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영혼이나 자아와 같은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이나 생각조차도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유한한 물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종교들은 영혼이나 정신을 물질의 반대 개념으로 생각한다. 이는 영혼을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의 실체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석가가 생각하는 인간관은 기존 종교들과는 너무나 차이가 크다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석가는 마음이나 정신을 단지 시각이나 청각과 같은 감각기관의 하나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라는 다섯 가지의 육체적인 감각기관은 우리로 하여금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가능하게 한다. 그로 인해 우리 안에 느낌이나 감정이 생기게 된다. 석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형상, 소리, 냄새, , 감촉, 사실들은 사람들이있다.’라고 말하는 한,

모두가 그들에게 갖고 싶고 사랑스럽고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들은 신들을 포함한 이 세상에서 이것들이야 말로 즐거움이라 여긴다.

그래서 그것들이 사라질 때에는 그것을 괴로움이라고 생각한다. (Stn.759-60)

 

우리가 경험하는 어떠한 대상에 대한 느낌과 감정에 따라 우리의 생각 속의 어떠한 판단력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경험하는 대상에 대한 인식이나 개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보는 사람은 명색(정신, 신체적 과정)만을 보는 것인데,

보고 나서는 바로 그것들 만을 알게 될 것입니다. (Stn.909)

 

그러므로 마음이나 생각은 정신세계의 감각기관이다. 마음은 다섯 가지의 육체적인 감각기관을 의존해서 어떠한 인식이나 판단력을 얻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는 이해하거나 느껴질 수가 없는 세계가 바로 정신세계이다. 결국 마음은 정신세계의 감각기관이다. 그래서 정신세계의 대상들을 지각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월폴라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것은 다른 기관과 마찬가지로 조정되거나 개발될 수 있다. 붓다는 이 마음이나 정신을 포함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제어하고 수련하는 것을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러 번 말했다. 시각기관과 마음이 기능상 다른 점은 눈은 세상의 빛과 보이는 물질을 감지하는데 비해 마음은 관념과 생각의 세계와 정신적인 대상을 감지하는데 있다......

그러나 생각과 관념은 어떠 한가? 그것도 역시 세계의 일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느껴질 수 없으며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없다. 그것이 다른 기관에 의해서 수용될 때에 그것이 바로 마음이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의 감각은 체험된 세계와 독립되어 있지 않다. 만약에 사람이 장님으로 태어나면 빛깔에 대한 생각을 가질 수 없으며, 소리에 대한 분석이나 다른 감각기관에 의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생각 이외에는 할 수가 없다. 세상의 일부를 형성하는 관념이나 생각은 육체적인 경험에 의해서 산출되고 조건 지어지며 마음에 의해서 수용되어 마음은 사물이나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마음이나 정신은 시각기관이나 청각기관과 같은 감관으로 간주된다.[5]

 

결과적으로 석가에게 있어서 마음이나 정신도 감각기관의 하나이다. 그래서 인간이 지닌 감각기관은 모두 여섯 개이다. 바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그리고 마음이다. 석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여섯 감역에 의해서 세상이 생겨나고, 여섯 감역에 의해서 친밀하게 되고, 헤마바따여, 여섯 감역에 집착하여, 그 여섯 감역 때문에 고뇌하고 있습니다. (Stn.169) 

 

석가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육근(六根)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육근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석가는 말한다,

 

수행자는 자신이 청정한가를 살펴보아야 하니 모든 뿌리, 즉 육근을 다스리지 못하거나 마시고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면 산만하니 겁에 질려서 나약해지고 삿된 것의 하고자 하는 바가 되느니라.

자신의 부정을 관()하여 능히 모든 감각기관을 다스리고 음식에도 절도를 알아 항상 즐겁게 정진하면 삿된 것에 움직이지 않게 되리라. (법구경 007-08)

 

이렇게 마음과 육체를 하나로 보는 석가모니의 입장을 심신동일론 내지는 철학적 일원론이라 말할 수 있다. 이는 물질의 반대적인 대상으로의영혼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즉 우리가 영원하고 불변하다고 생각하고 믿는영혼내지는자아는 없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정신이나 의식은 구별되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 가지 존재의 요소들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은 신체에 속한 것이고 더 나아가 정신과 신체는 서로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는인생은 짧고 무상하고 변화한다.”고 말한 것이다. 존재의 다섯 가지 요소들이 끊임없이 변하기에 인생은 무상할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변하지 않는 물질이나 실체란 없다는 연기의 법칙은 인생의 괴로움을 보여주는 진리라고 보는 것이다. 라훌라는 말한다,

 

연기의 법은 세상에 하나가 사라지면 다음 것이 나타나는 조건을 만들어준다. 여기에 변하지 않는 실체란 없다. 여기 영원한 자아, 개체, ‘라고 부를 수 있는 진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의존되어 있는 정신적 물질적인 다발들이 정신-물리적인 기계처럼 작용할 때에라는 관념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관념이나 정신적인 형성에 불과하다. 곧 그것은 영원주의에 지나지 않는다.[6]

 

과연 인간은 영적인 존재일까?  아니면 단지 죽으면 끝나는 물질적인 존재에 불과한 것일까? 인간은 정말로 존재의 다섯 가지 요소들(신체, 감정, 생각, 의지, 인식)로만 구성되어 있을까? 이에 대해 기독교는 전혀 다른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먼저 인간은 영적인 존재라고 믿는다. 즉 영혼이라는 무형의 실체가 인간 안에 상주한다는 것이다. 창세기 기자는 인간은 태생부터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기록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세기 2:7)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이 영적인 존재임을 수도 없이 언급한다.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시편 16:10)

여호와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시편 25:1)

 

예수께서도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하는 간구를 한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누가복음 23:46)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한복음 19:30)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때에 자신의 영혼을 예수께 의탁하는 것을 보게 된다. 사도행전 기자는 이렇게 기록한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사도행전 7:59)

 

요한 3서에 보면 저 유명한 기도문이 나온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 31:2)

 

결론적으로 석가의 인간관은 무신론적이며 무아론적이다. 이는 자연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인간 이해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유신론적이며 유아론적이다. 이는 영적이고 신비한 세계를 인정하는 기독교 세계관이다. 불교와 기독교는 서로 정반대의 인간관을 가진 것이다.

 

아주 쉽게 말해, 인간은 죽으면 썩어져서 사라지는 고깃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바로 석가의 주장이다.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 안에는 영혼이 있기에 생전에는 하나님과 소통하고 사후에는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여기서 예수와 석가모니 중 누구의 견해가 옳은지를 증명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영혼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증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각자의 믿음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선택은 바로 이것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10:28)



[1]라훌라는 오온, 다섯가지 존재의 다발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물질(Material)다발이다.

이는 , , , 바람과 파생 물질을 말하는데, 파생 물질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물질적 감각 능력과 거기에 대응하는 외부적인 대상으로 이미지, 소리, 냄새, , 감촉을 포함한다. 2) 감수(Sense)다발이다. 감수의 다발은 느낌의 집합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감각기관이 외부의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서 경험되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포함한다. 3) 지각(Cognition)다발이다. 지각은 개념의 파악을 의미한다. 감수와 마찬가지로 지각도 외부세계와 여섯 감관의 접촉을 통해서 일어난다. 4) 의도(Will)다발이다. 형성의 다발은 인간이 가진 의도로 이해되어지며, 선악과 같은 의도적인 행위로 드러난다. 의도란 기본적으로 정신적 구성이며 정신적 형성이다. 이것은 마음을 선이나 또는 선악도 아닌 것으로 향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업이라는 것이 여기서 생겨난다. 감수와 지각은 의도적 형성이 아니기에 업보를 낳지 않는다. 5) 의식(Consciousness)다발이다. 의식이란 여섯가지 감각기관과 이에 대응하는 외부의 대상이나 현상의 반응이다. 의식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알아차림이다. 대상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과 팔정도, 54)

[2] Ibid, 52.

[3] Ibid, 45-47.

[4] Ibid, 47.

[5] Ibid, 53-54.

[6] Ibid, 6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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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6/25 [07:07]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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