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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9.19 [12:05]
과연 사후세계는 존재할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11]
 
정성민

영원히 지속될 인간의 영혼이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석가의 깨달음이다. 이는 인간을 과학적인 시각으로 관찰하고 철학적인 사고로 분석하여 얻은 통찰이다. 인간은 다섯 가지 요소들(신체, 감정, 생각, 의지, 인식)구성되어 있는 하나의 개체이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인간 내면영혼이라고 불리는 영적인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 안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비물질적 존재는 찾을 없다는 주장이다.  

 

결국 석가가 주장하는 무아론은 인간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존재의 요소들에 관한 이러한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서 내린 결론이다. 그리고 무아론은 연기법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철학적 결론이기도 하다. 이렇게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 또는 자아를 부정하는 것은 초기불교의 가장 특징이다. 이에 대해 윤호진 스님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무아설은 불교를 다른 종교와 구별짓게 하는 가장 특징적인 교리이다. 점에 대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의 주장은 일치한다. 앙드레 바로에 의하면 불교는 단지 인도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어느 끝없는 지복을 누릴 있는 영원한 요소 (영혼과 같은)어떤 요소가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단호하게 부정하는 유일한 종교이다. 왈뽈라 라훌라 역시 불교는 영혼, 자아 또는 아뜨만과 같은 존재를 부정하면서 인류 사상사에 홀로 우뚝 있다.라고 앙드레 바로와 같은 주장을 했다. 리스 데이비스는 무아설은 인도에서아니라 다른 곳에서 조차도 종교적인 신앙으로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나 근본적으로 정반대되는 것이고 독창적인 것이기 때문에,사람들은 그것을 불교의 특성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불교는 있는 그대로의 인간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불교가 부정하는 것은 영속적이고 불변하는 실체적 존재로서의 일뿐 일반적 말하는 , , 존재, 개인등으로 표현되는 인정한다.[1] 

 

물론 후대에 불교가 대중화가 되면서 이러한 석가의 가르침은 변질되기 시작한다석가의 무신론적이고 무아론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나려는 경향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그러나 최근에 불교의 정신과는 아주 모순되게, 부처의 가르침 속으로 자아의 관념을 끌어들이려는 몇몇 학자들의 헛된 시도가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없다. 이들 학자들은 부처의 가르침을 존중하고 찬양하고 숭앙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불교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들은 가장 명철하고 심오한 사상가라고 생각한 부처가 그들이 바라마지 않았던 아트만, '자아'존재를 부정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2]

 

1. 과연 사후세계는 존재할까? 

불교 신자들조차 석가의 무아론적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따를 수가 없었다. 신과 영혼의 존재를 완벽히 부정하기에는 무언가 두렵고 불안했던 것이다. 사실 석가가 아무리 무아론을 가르쳤다고 하더라도 일반인들이 영원불멸의 실체로서 영혼의 존재를 포기하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유신론과 유아론을 주장하는 것이 모든 종교들의 자연스러운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후기불교인 대승불교 조차도 점차 유신론적이며 유아론적 성향을 띠게 됨을 보게 된다.

 

그렇다. 사람들은 신의 존재를 갈구한다. 또한 영원불멸한 실체로서 영혼의 존재를 믿고 싶어한다. 궁극적으로 사후에 거할 극락이나 천국과 같은 구체적인 장소를 갈망한다. 이런 면에서 중생들이 실체적인 윤회론을 거부하기는 매우 힘든 것이다. 아니 사실상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고 본성인 것이다. 이에 대해 윤회론 예찬론자인 크리스토퍼 베이치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윤회론의 시각으로써 삶의 리듬을 발견하기 시작할 , 우리를 둘러 혼돈은 정교하고 아름다운 교향곡으로 모습을 바꾼다. 전에 심어진 삶의 주제가 오늘 싹을 틔우고 후에 마무리된다. 생에서 내려진 선택의 결과가 다음 생으로 인계된다과정에서 버려지는 것은 없다. 실로 모든 것에 의미가 있다.[3]

 

우리는 석가의 근본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난 후대불교의 변질된 모습을 역사적으로 

목격할 있다. 이에 대해 정세근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인도는 한 동안 불교국가 (이었다.) 현재에는 결코 불교국가가 아니다. 역사의 흐름에서 뿐만 아니라 사상의 줄기에서도 불교는 시냇물이나 잔가지와 같은 일종의 돌출현상으로 취급된다. 비록 불교가 인도의 역사에서 화려하게 주류를 차지한 적도 있지만, 그것은 과거이고 역사이고 기억일지금에도 유효한 것은 결코 아니다. 불교가 쇠퇴한 것은 너무도 일찍 벌어진 일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신라의 혜초나 당의 현장이 것도 7세기 후반의 힌두교화되는 불교였지, 우리가 상상하는 석존 중심의 불교가 아니었다. 석가는 그때부터 점차 힌두비슈누의 화신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4]

 

만약 석가의 가르침대로 정말 유아론이 거짓이고, 무아론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될까?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제기될 있다. 첫째로 영혼이나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보를 받을 것인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과연 자신이 의지적으로 지은 죄의 결과를 도대체 누가 받을 것인가 라는 새로운 의문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결국 사후세계가 존재하지 않거나 아니면 사후세계에 존재할 '"지금의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면 업보(죄값)의미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둘째로 사후세계를 보장할 신도 존재하지 않고 또한 사후세계에 존재할 영혼이나 천국이라는 실체적인 장소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이유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의무나 당위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셋째로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너무나 허무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허무한 세상에서 경험하는 삶의 고통들을 우리가 견뎌야 의미나 이유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2. 각자의 선과 악은 자연법칙에 따라 심판된다.

 

석가는 사후세계의 상벌조차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정의에 따라 심판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의지적인 선이나 악은 스스로의 법칙에 따라 다음 생에서 결과(업보)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업의 이론은 이른바 도덕률이나 상벌의 이론과 혼동되서는 된다. 도덕률이나 상벌의 개념은 심판대에 앉아서 법을 부여하는 자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최고의 존재, 신의 개념에서 나오는 것이다. 도덕률로서의 정의라는 개념은 애매모호하고 위험하고 신이 인간성에 관여하는 것보다 더욱 위험할 있다. 업의 이론은 원인과 결과, 작용과 반작용의 이론이다. 그것은 자연적인 법칙이지 도덕률이나 상벌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의도적인 행위는 결과나 효과를 낳는다. 좋은 행위는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행위는 나쁜 결과를 낳는다면, 그것은 당신의 행위를 심판대에 앉아서 심판하는 권력이나 심판자에게 부여되는 정의나 상벌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스스로의 법칙, 자신의 덕인 것이다. 이것은 이해하기가 결코 어려운 것은 아니다.[5]

 

가지 흥미로운 것은 석가는 거짓말하고 악행을 일삼는 자들이 지옥에 떨어진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거짓을 말하는 자는 지옥에 떨어진다. 또한 했으면서 했다고 하는 자도 마찬가지다. 똑같이 행동이 비열한 사람들이라 사후내세에 동일한 업보를 받는 자들이된다. (Stn.661)

 

입이 험하고 진실하지 못한 천한 자여, 것을 죽이고 사특하며 악행을 일삼는 자여, 비루하고 불행하고 비천한 자여, 세상에서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

그대는 지옥에 떨어진 자이다. (Stn. 664)

 

죄악을 짓는 자여, 그대는 불이익을 위해 먼지를 뿌리고 참 사람들을 비난한다.

온갖 나쁜 일을 하고 나서, 오랜세월 깊은 구렁텅이에 빠진다. (Stn.665)

 

결코 어떠한 행위도 없어지지 않는다. 때가 되면 임자가 그것을 받는다.

죄악을 짓는 어리석은 자는 내세에 자신 안에서 괴로움을 발견한다. (Stn.666)

 

더욱 놀라운 것은 지옥의 실상에 대한 석가의 가르침이 너무나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불붙는 화염, 깊은 구렁텅이, 불타오는 가마솥 등과 같은 너무나 생생하고 구체적인 표현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러한 지옥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들은 우리로 하여금 석가가 지옥을 하나의 실체로 믿었을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석가의 지옥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들은 다음과 같다, 

 

그는 쇠꼬챙이로 꿰이는 곳에서 날카로운 날이 달린 쇠창에 찔린다.

그곳에서 거기에 알맞은 불에 달군 쇳덩이같은 음식이 주어진다.

건네는 자들은 상냥하지 않고, 서둘러 그를 구해주지 않고, 안전한 곳으로 이끌지 않는다.

그는 숯불이 뿌려진 곳에 눕혀 불붙는 화염속에 끌려 들어간다.

그들은 그곳에서 그를 그물로 덮어서 쇠로 만든 망치로 내려친다.

그리고 어둠이 안개처럼 펼쳐져 있는 칠흑같은 암흑 속으로 그를 이끈다.

그리고 화염처럼 불타오르는 구리로 만들어진 가마솥에 들어간다.

오랜세월 화염처럼 불타오르는 가마솥에서 오르락 내리락 괴롭힘을 당한다.

또한 고름과 피로 섞인 가마솥이 있어, 죄악을 지은 자는 속에 괴롭힘을 당한다.

어느쪽으로 피신하든 거기에 닿아서 염증이 생긴다.

해충들이 사는 물이 있는 가마솥이 있어, 죄악을 지은 자는 안에서 괴롭힘을 당한다. 나오려 해도 언덕이 없다. 가마솥의 둘레가 모두 한결같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잎으로 이루어진 숲이 있어, 팔다리가 잘린 그곳에 끌려간다.

낚시바늘로 혀가 꿰어 찌르고 찔리면서 괴롭힘을 당한다. (Stn.667-73)   

 

어쩌면 석가의 지옥에 대한 이러한 구체적인 묘사가 성경의 내용과 유사하다고 수도 있다. 특히 어두운 구덩이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이라는 표현은 너무나 유사하여 우리를 당혹스럽게 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지옥에 대한 묘사들은 어떨까?

 

만일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태복음 18:9)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베드로후서 2:4)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요한계시록 20:10)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 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요한계시록 21:8)

 

과연 석가가 지옥을 하나의 실체로서 믿었을까? 아니면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대한 경고와 자극을 주기 위해서 지옥에 대한 묘사를 상징적으로 사용한 것일까?

만일 석가가 지옥을 하나의 실체로서 말했다면, 석가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인 무아론(실체로서 자아나 영혼은 없다)포기해야만 것이다. 그러므로 석가가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 상징적으로 지옥을 언급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적으로 볼 때, 사후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사후세계가 가능하기 위하여 세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첫째는 사후세계를 가능케 하는 하나님이 필요하고, 둘째로 사후세계에서 거주할 영혼이라는 실체가 필요하고, 셋째로 영혼이라는 실체가 머물 구체적인 장소가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세 가지 사실을 예수가 확증한다는 것이다. 먼저 예수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언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1-3)

 

둘째로 예수는 우리가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 3:5-8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셋째로 예수는 사후세계가 실체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에 대해 요한복음 141-3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결론적으로 기독교는 사후세계를 실체적으로 믿는 종교이다. 이는 바로 유신론과 유아론을 믿기 때문에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이에 반해 불교는 무신론과 무아론을 믿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사후세계는 존재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각 개인의 선택이다. 바로 믿음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유신론을 믿는가 아니면 무신론을 믿는 가의 선택이다. 그리고 유아론을 믿는가 아니면 무아론을 믿는 가의 선택이다. 물론 우리가 어떠한 선택을 하든지 간에 사후세계가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하진 않는다. 단지 사후세계의 존재 유무를 증명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비록 천국을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우리는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영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에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1:1-2)

그들이 이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1:16)



[1]무아, 윤회문제의연구, 125-26.

[2]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166.

[3]윤회의 본질, 34.

[4]윤회와 반윤회, 32.

[5]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7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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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6/14 [11:14]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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