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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6.21 [11:03]
힌두교,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10]
 
정성민

석가는 영혼이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깨달음의 주체가 바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열반은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하는 존재가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바로 제행무상을 깨닫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제행무상이 인생 무상함과 무아론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만물이 변한다는 제행무상과 인간 안에는 영혼과 같은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무아론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곧바로 열반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만물은 변한다는 제행무상과 영혼이라는 실체는 없다는 제법무아를 깨닫는 것이 바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출발점이다. 그리고 또한 해탈의 종착점이다. 쉽게 말해, 만물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변하지 않는 실체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만물이 변하다는 사실과 변하지 않는 실체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깊이 공감하고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인생 무상함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가 지닌 쓸데없는 욕망을 버리게 되는 자유함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불교 사상의 이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3법인(제행무상인, 제법무아인, 열반적정인)은 각 법인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연결된 하나의 실천이론으로 볼 수 있다. 제행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하면 제법이 무아하다는 것도 알 수 있게 된다.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하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면 우리는 욕망과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모든 욕망과 번뇌를 떠날 때 우리는 열반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1]

 

석가는 말한다,

 

이렇듯 세상 사람은 죽음과 늙음에 삼켜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를 알아 슬퍼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님께 배워, 죽은 망자를 보고서는나는 그를 더 이상 보지 못한다.’라고 비탄해 하는 것을 그쳐야 합니다. (Stn. 581,590)

  

이는 사람이 죽어서 사라지는 것은 세상의 이치이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즉 인생은 무상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인생무상의 이유나 근거조차도 찾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보면 인생무상은 저절로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인생무상에 대하여 김사업 스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사랑하는 사람과도 언젠가는 영원한 이별을 해야 하고, 지금 누리고 있는 부와 명예와 건강도 때가 되면 매몰차게 떠난다. 내가 이 세상에 살 수 있는 날도 그리 길지 않다. 여기까지만 예를 들어도 가슴 한구석에 무상하다!’는 감정이 피어 오를 것이다.  

그렇다. 세상은 참으로 무상하다. 초기불교 경전에는 무상이라는 말이 수없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어떤 이론적인 설명도 없이 불쑥 나온다는 점이다. 초기 경전에서는 무상의 이유나 근거를 파고드는 일이 없다. 무상은 차분한 마음으로 자신과 주위를 둘러보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2]

 

석가는 인생무상이라는 세상의 이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 석가는 말한다,

 

울고 슬퍼하는 것으로서는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다만 더욱더 괴로움이 생겨나고 몸만 여윌 따름입니다.

자신을 해치면서 몸은 여위고 추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망자를 수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비탄해 한들 아무 이익이 없습니다.

사람이 슬픔을 버리지 않으면, 점점 더 고통에 빠져듭니다.

죽은 사람 때문에 울부짖는 자들은 슬픔에 정복당한 것입니다. (Stn.584-86)

 

몸이 늙으면 피부 빛이 쇠하고 병으로 말미암아 절로 무너진다네.

형상은 썩고 일그러지며 생명을 마치게 되는 것이 자연이니라. (법구경, 148)

세상은 모두가 무상한 것이라서 부처님은 내 것이라고 소유할 것이 없다 하시니라.

(법구경, 255)

 

그러므로 피할 수 없는 무상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로운 것이다. 무상한 세계를 무상한 그대로 인정하면 평안이 찾아오고, 무상한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석가의 가르침에 대하여 김사업 스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누구나가 가까운 사람을 죽음으로 떠나 보낸다는 사실을 맨눈으로 생생히 보고는 무상에서 초월하는 지혜를 얻는 것이다. 이 지혜를 불교에서는 반야라고 부른다. 이제 그 지혜의 내용에 대해 말할 차례다.

왜 무상한가?’에 대한 답을 굳이 찾는다면 모든 것은 연기하기 때문이다. 조건이 지속되는 한도 내에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무상할 수밖에 없다. 이 무상한 세계로부터 도피할 곳은 없는가? 없다. 있는 것은 무상한 세계뿐이다. 죽은 자가 없는 집은 한 곳도 없다는 사실이 잘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 생각해보라. 아무리 거부해도 있는 것은 생멸 변화하는 무상한 세계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다. 진리대로 산다는 것은 무상한 세계를 무상한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이렇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영원한 평안과 대자유는 없다.[3]

 

석가는 자아라는 관념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악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자아는나 자신’, ‘나의 것등과 같이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기적인 자아로 인해서탐욕’, ‘집착’, ‘증오’, ‘악한 의도’, ‘속임수’, ‘교만’, ‘더러움과 같은 해롭고도 오염된 생각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도 또한 인간의 자아 중심적인 사고를 비판하고 부정하였음을 보게 된다.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16:24)

 

여기서 예수가 말한자기와 부처가 말하는자아가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결국 예수와 석가는 인간의 이기적인 자아를 모든 악의 뿌리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석가의 입장에서 자아의 이기적인 속성은 하나의라기보다는 고쳐야 하는질병으로 본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자아의 이기적인 속성은 질병일 뿐만 아니라 죄의 근원이요 중심인 것이다. 자아에 대한 예수와 석가의 생각의 차이는 바로 신의 존재를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자아의 개념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석가는 자아를 무신론적 관점에서 하나의 정신적인 질병으로 파악한 것이고, 예수는 자아를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타락한 영혼으로 파악한 것이다. 스리랑카의 학승, 라훌라는 석가의 무신론적이고 무아론적인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인간 내부에 심리적으로 깊이 뿌리 박힌 두 가지의 관념, 곧 자기보호와 자기보존이라는 것이 있다. 자기보호를 위해서 인간은 신을 창조하고 어린 아이가 부모에 의존하듯이 그에게 자기의 보호와 안전과 안녕을 위탁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자기보존을 위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불멸의 영혼인 아트만이라는 사상을 만들어냈다. 무지와 나약함과 두려움과 욕망 속에서 인간은 자기를 위로할 그러한 두 가지를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인간은 두 가지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다.[4]

 

석가에 의하면, 신에 대한 믿음은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고 영혼에 대한 믿음도 하나의정신질환내지는환상이다. 그는 이러한 두 가지 잘못된 관념들, 즉 유신론과 유아론을 뿌리까지 흔들어서 뽑아 버리길 원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붓다의 가르침은 이러한 무지와 나약함과 두려움과 욕망 등을 조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제거하고 파괴하고 그 뿌리를 잘라서 인간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데 있다. 붓다에 의하면, 신이나 영혼이라는 우리의 관념은 환상이며 공허한 것이다. 이론적으로 고도로 발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복잡한 형이상학이거나 철학의 옷을 입고 인간의 불안한 마음을 미묘하게 표현한 정신적인 투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5]

 

석가는 유신론과 유아론과 같은 잘못된 생각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직시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를 너무나 소중하게 여기면서 가까이하는 것을 탄식하였던 것이다. 바로 힌두교가 유신론과 유아론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착취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음은 <숫타니파타> 경전에 나오는 석가와 방기싸의 대화이다,

 

명색(정신, 신체)에 대한 갈애를 이 세상에서 그는 끊어버렸다. 오랜 세월 잠재하던 악마적 흐름을 끊어버린 것이다. 태어남과 죽음을 완전히 건너뛰었다.” (Stn.355)

이에 방기싸는 다음과 같이 화답한다, “세존이시여, 존자 깝빠는 집착의 뿌리를 보았습니다. 참으로 존자 깝빠는 가장 건너기 어려운 죽음의 악마가 있는 영역을 벗어난 것입니다. (Stn.358)

 

우리는 석가가 신이 존재한다는 유신론 그리고 우리의 영혼이 실재한다는 유아론을 그 모든 집착의 뿌리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유신론과 유아론을 악마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석가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석가의 종교심리학적인 분석이 프로이드의 심리학적 무신론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프로이드에게 있어서 종교는 인간들이 자연의 위협과 죽음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심리적인 방어로서 생겨난 것이다. 즉 종교란 나약한 인간들이 자신들의 상상력을 통해 만들어낸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계를 환상으로 대하지 않고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가지고 대할 때 종교는 스스로 사라질 사회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석가를 현대 무신론적 심리학의 선구자로 볼 수도 있다.

 

사실 석가가 가르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이기적인 욕망을 제거하여 세상의 그 모든 근심과 걱정에서 자유롭게 되자는 것이다. 즉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자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기적인 욕망의 중심에 바로 신에 대한 관념 그리고 영혼에 대한 관념이 서있다는 것이다. 석가에 의하면, 신이나 영혼에 대한 우리의 관념이 해탈의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석가는 브라만교의 핵심사상인 유신론과 유아론을 정면으로 반박해야 할 운명에 처한 것이다.  즉 석가 나름대로의 종교개혁의 사명을 깨달은 것이다. 정세근 교수는 유아론을 반박하여 힌두교의 윤회설을 개혁하려는 석가의 입장을 이렇게 진술한다,

 

싯다르타는 무아설로 브라만교의 제사중심의 종교형태와 그들에게만 유리한 윤회설을 논박했다..... 싯다르타는 (생전의와 사후의사이의) 자기동일성이 있음을 부정함으로써 윤회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다. 내가 없음을 깨닫는다면 윤회도 없게 되는 것이다. 싯다르타에게 우리의 윤회는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것이었다. 업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도 업 자체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의 윤리적 누적에 의한 것이었다.[6]

 

더 나아가 정세근 교수는 윤회에 대한 석가의 종교 개혁적인 입장을 다음과 같이 짧게 확언한다, “석존은 윤회의 허구성을 영혼의 부재와 더불어 지적하면서 신분제의 질곡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7] 이런 면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이단임이 틀림없다.[8] 안타깝게도 모든 종교는 왕성해지면 타락하게 마련이다. 만약 석가가 먼 훗날 독일에서 환생했다면 면죄부를 팔며 돈으로 천국입장권을 파는 작태에 분노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대성당의 입구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내걸고 사제들과 치열한 교리적 논쟁을 했을지도 모른다.

 

석가는 브라만교의 강력한 반발을 의식하여 힌두교 개혁을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바로 이러한 망설임을 극복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펴기로 결심하게 된다. 바로 연못과 연꽃에 대한 명상을 통해서다. 다음은 이에 대한 라훌라의 해설이다,

 

그는 세계를 연못에 비유하였는데 연못에는 아직 물밑에 있는 연꽃도 있고, 수면 위에 거의 올라와 있는 연꽃도 있으며, 물위로 올라와서 수면에 닿지 않은 연꽃도 있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의 인간은 수행정도에 따라 수준차이가 있기에 소수의 사람이라도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석가모니는 자신의 깨달음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9]

 

결론적으로 석가는 힌두교의 유신론과 유아론을 반박하고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입장에서는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유신론을 주장하면서 신에게 제사를 강요하는 브라만들의 행태가 혐오스러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입장에서는 영혼이라는 실체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후세계를 확보하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거나 선한 업을 쌓으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물론 선한 업을 쌓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석가가 거룩한 생활을 강조하고 선한 업을 쌓으라는 이유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석가는 우리가 마음의 고통에서 자유를 얻기 위하여 욕망을 제거하라는 것이다. 곧 열반을 얻기 위하여 거룩한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좀 더 쉽게 말해서, 하루 하루의 삶을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나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라는 것이다. 사후세계에서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도 헛된 망상에 불과하기에 버리라고 권고한다. 결국 허무하고 무상한 인생을 겸허이 받아들이라는 것이 바로 석가의 가르침인 것이다. 

 

하지만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리고 만약 인간의 영혼이 실제로 존재하기에 사후세계가 있다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면 석가의 가르침은 가장 극단적이고 위험한 가르침이 될지도 모른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단지 물리적인 세계일 뿐이다. 그는 영적인 세계를 단호히 거부하는 무신론적 과학자인 것이다.시편 기자는 무신론자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말한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시편 14:1) 그리고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도서 12:1-2, 7-8)



[1]불교사상의 이해, 105.

[2]인문학을좋아하는사람들을위한불교수업, 28.

[3] Ibid, 30-31.

[4]붓다의가르침과팔정도, 160.

[5]Ibid.

[6]윤회와반윤회, 50-51.

[7]Ibid, 186.

[8]Ibid, 32.

[9]Ibid, 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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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8/06/11 [13:44]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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