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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2018.06.25 [05:03]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칠천인(2)
로마에서 풀어놓는 한평우 목사의 교회사 이야기-개혁자 쯔빙글리
 
한평우

 

취리히 공항 근처에 잡은 호텔에서 위대한 개혁자 츠빙글리가 사역한 교회와 그가 태어난 집을 찾아가는 길은 오로지 내비게이션을 의지해야 했다.

해당국가의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그래도 구라파에서 오랫동안 산 경험이 있기에 걱정은 하지 않았다. 비슷한 환경에서의 오랜 경험은 난관을 벗어나는 일에는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점은 이 길을 수차례나 지나갔고 여러 번 이곳을 방문하였으나 취리히가 그저 구라파의 여러 도시들 가운데 하나로만 여기게 되었다는 사실 이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있을 때, 성경의 지명에 대한 애착이 가는 것처럼, 어떤 대상에 대한 관심이 있을 때 그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는 법이다. 위대한 개혁자가 사역했던 현장임을 진즉 알았더라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감이 일어났다.

▲ 개혁자 쯔빙글리가 살았던 생가© 뉴스파워

 

 

그가 사역했던 교회는 아담했다. 마침 교회 부속실에서 커피타임을 하던 사람들 중에 남자 두 분이 우리가 교회를 보기 원한다고 하니 친절하게 안내 했다. 말끔하게 단장한 교회인데, 현재 출석 성도가 300명이라고 한다. 놀랍다. 구라파 대부분의 교회가 죽어가고 있는데 이처럼 살아있는 교회도 있으니 말이다. 아마도 오백 여 년 전에 복음의 참 씨를 뿌린 츠빙글리의 영향력이 지금껏 역사한다 싶다.

강단에 올라가 사진도 찍었다. 일찍이 츠빙글리가 설교자로 섰던 곳이. 또한 강단 옆에 아주 크고 아름다운 오르간이 있는데 안내하던 분이 연주를 하여 우리를 감동케 했다. 놀라운 음향이었다. 츠빙글리는 오르간도 가톨릭의 잔재로 여겨 칸으로 막았는데 세월과 함께 수용하게 되었나 보다.

 

안내하는 분의 연주가 끝나자 어느새 동행한 사모님이 오르간 의자에 앉아 귀에 익숙한 찬송을 연주했고 우리도 따라 불렀다. 사모님은 피아노 전공으로 지금은 오르간을 배우고 있는데 한 번도 연주를 해보지 못했다고 한다. 안내하던 분은 엄지를 세우고 아주 좋다고 칭찬한다.

 

츠빙글리가 사역한 교회를 살펴본 후에 그의 생가를 향해 떠났다. 츠빙글리가 사역한 교회만 보아도 감사할 일인데, 그가 태어난 곳을 방문한다니 이 무슨 축복인가 싶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시골길을 달렸다.

산간 지역이기 때문에 대대로 목축업으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츠빙글리가 살았던 15세기에도 비슷했을 것이다. 위치와 환경이 전혀 바뀌지 않았으니 말이다. 찾아가는 길 양쪽이 큰 산으로 펼쳐져있고, 좁은 계곡을 통과해야 했다. 이 길을 계속 가면 뮨헨에 이르게 된다고 길표는 말해주고 있다. 몇 시간을 달려 지루함을 느끼려는 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의 생가는 국도에서 50여 미터 들어간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변은 모두 현대식 건물로 탈바꿈하고 있었지만 그가 태어난 집은 옛날 그대로 나무로만 지어진 모습 그대로 우리를 맞이했다. 문에는 작은 안내문이 걸려 있는데 전화번호와 함께 미리 인터넷이나 전화로 예약하고 와야 내부를 볼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그래도 무시하고(한국인의 용감함?)기록된 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자신은 타 지역에 있기에 갈 수 없다고 하면서 다음에 올 때는 예약을 하라고 한다. 아쉬웠으나 이곳까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했다.

▲ 쯔빙글리가 사역했던 교회     © 뉴스파워

 

 

앞산은 10월인데도 흰 눈이 있다스키를 타는 사람들이 많이 오는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런 아름다운 목가적 마을에서 위대한 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가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귀족이요, 넉넉한 가정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가 탄생한 마을의 집을 보면 겨우 25-30여 평 되는 크지 않은 집이고, 마을이라야 드문 드믄 주택이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이다. 현재도 그러니 500여 년 전에야 얼마나 인적이 드문 깊은 시골 마을이었을까 싶다.

 

그는 148411, 태어났다. 아버지가 마을의 행정 장관이었고, 아저씨가 베젠의 참사회장으로 있었기에 그의 도움으로 바젤과 베른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바젤에서 인문주의자인 토마스 비텐바하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에게서 성서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 용서의 유일한 대가요, 면죄부의 무익함을 배웠다. 고로 그는 자연스레 인문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506년 가톨릭의 사제가 되었고 10년 동안 성직자의 길을 걸으며 성경 원어를 공부했다. 또한 이 때 인문 학자이자 성직자인 에라스무스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그런데 에라스무스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이라기보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마련하신 교육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글라루스 파견대의 군종 장교로 세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스위스의 용병 제도가 사람을 부패하게 함을 경험하게 되었다. 당시 스위스 자치주들은 많은 돈을 지불하는 곳으로 용병을 보냈다. 고로 용병은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고향에 돌아와서는 번 돈을 방탕 하는데 허비하곤 했다.

고로 츠빙글리는 팔을 걷어붙이고 용병의 부당함을 직설적으로 호소했다. 츠빙글리가 개혁에 나서게 된 것은 1519년 전염병으로 죽다 살아난 경험을 통해 사명을 느끼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1520년 사랑하는 동생과의 사별을 통해 한 층 더 바른 진리에 대한 갈망이 타오르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성찰에 충실하려고 했다. 그래서 가톨릭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했다. 성찬에서 평신도에게 잔을 마시지 못하게 하는 것과, 성직자의 결혼하지 않는 일, 그리고 연옥이나 교황 무오 설에 대하여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고 했다. 이런 일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갈등을 겪게 되자 공개토론을 제의했고 시 의회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허락했다.

 

가톨릭 측에서는 콘스탄츠 주교가 파송한 파베르 박사와 여러 명의 사제들이 참석했다. 그런데 회중의 한 사람이 교황의 특사에게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데 왜 결혼한 사제를 감옥에 보내야 하느냐고 하자 성경에 있다고 했다.

그러자 츠빙글리는 성경 어디에 또 몇 장 몇 절에 있는지 대답해달라고 질문하자 어물어물했고, 결국 토론회는 츠빙글리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이 결과, 취리히 시는 츠빙글리의 의견을 받아 들여 개혁을 시도했다. 시의회는 츠빙글리와 그의 설교를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취리히의 영향권 내에 있는 사제들에게도 츠빙글리의 가르침을 따르되 성경에 근거한 것만 설교하도록 명했다.

 

고로 이제껏 금기했던 가톨릭의 제도를 개혁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참으로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저들은 일제히 교회의 성상과 유물을 제거했고, 미사도 폐지했다. 주교의 사법권을 폐기했고, 설교는 청중이 들을 수 있는 독일어로 시행했다모든 성도가 성찬에서 떡과 잔에 참여하도록 했고, 성서만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성직자의 결혼을 허락했다. 수백 년 동안 내려오던 전통을 끊어버리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츠빙글리의 전면적 개혁은 많은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교리적인 면보다도 용병 반대, 숙박업 반대 등으로 인한 것이었다. 상인과 용병으로 인한 수입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개혁에 반대하던 자치주들은 가톨릭과 연대하여 전쟁을 일으켰고 미처 준비되지 못한 취리히는 카펠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 쯔빙글리 묘     © 뉴스파워




그리고 전쟁에 참여한 츠빙글리도 죽었는데 개혁을 반대한 무리들은 그의 시체를 조각내어 불태우고 그 재를 공중에 뿌렸다. 그는 개혁을 마무리 하지 못하고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숨을 거두며 이런 말을 남겼다.

 

그들은 몸을 죽일 수 있으나 영혼을 죽일 수는 없다.”

그의 몸은 개신교도들의 성자 유골로 수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분해되어 불에 태워졌다.

 

츠빙글리는 개혁 교회의 용감한 지도자이었다요한 칼빈 보다 25년이나 앞서 태어났다.

그는 어느 개혁자보다도 교회의 개혁을 시도한 사람이다. 츠빙글리는 취리히 시가 정치적으로 신본 정치로 이행하게 되기를 소원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신정정치가 성공적으로 진행된 때는 없었다. 14세기 피렌체의 사보나롤라는 메디치의 지도자가 도망간 빈자리를 차고 들어가 신정정치를 도모하려 했지만 그 기간은 일 년도 채울 수 없었고 저들의 서슬 퍼런 배신에 화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 뿐일까? 종종 이 땅에서 신정정치를 도모하려는 경우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고로 어떤 인생도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고, 그 나라는 우리가 장차 가야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을 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츠빙글리가 가톨릭을 따르는 동족과의 전쟁에 나섰다가 죽은 사건에 대해 루터는 하나님의 저주라고 평가절하 했다. 루터와 성찬의 떡에 대한 불화는 대단했다. 루터는 츠빙글리와 그의 지지자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했고, 츠빙글리는 루터는 로마의 대변자 요한 엑크 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루터보다 인문주의가 적인 관점이 있었지만 그도 하나님의 탁월한 지도자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의 동상은 한 손에 칼을 또 한손에 성서를 들고 있다.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려는 그의 간절함이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담대 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탁월한 자들을 일으키심을 우리는 츠빙글리를 통해 배우게 된다. 고로 다름이 있더라도 이해하고 용납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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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7/12/17 [08:04]  최종편집: ⓒ news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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